블로그에 박스오피스 기사를 올릴 때마다 나는 약간씩 힘이 빠진다. 나름 가치 있는 자료라 생각하고 수집해 올려 놓는데, 들인 공력에 비하면 피드백이 크지 않다는 느낌이 들면 에라 그만둘까, 라는 유혹에 빠지기 일쑤다. 일반 관객들이야 전산망에 가입된 상영관만을 대상으로 한 영화진흥위원회 박스오피스와 이곳에 올리는 실 관객수와의 차이점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쳐도 영화인들에게까지 큰 가치가 없는 자료라면 굳이 들이 미는 것도 웃기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쩍 고개를 든다. 여하튼 '그래도' 기록으로서의 의미는 있다 생각한다.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고, 내 직업은 글장사꾼이 아닌, '기록하는 놈(記子)'이니까.

각설하고, 별로 할 말이 없는 박스오피스다. 지난주처럼 '매우 쉬운'  음악 영화 <어거스트 러쉬>가 1등했고, <헤어스프레이>가 3위로 첫 등장한 것 빼고는 순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식객>은 300만을, <세븐데이즈>는 200만을 각각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극장가 경기는 여전히 횡하다. 전주 대비 12% 가까이 관객수가 줄었다.


 
주말 박스오피스(2007.12.7~9)

순위       작품명            스크린수(서울/전국)          서울 주말             전국 누계
===========================================================================
1위     어거스트 러쉬             69/234                     124,000                 905,000
2위      세븐데이즈                60/270                      80,100               1,824,900
3위     헤어 스프레이             47/188                      60,000                  173,900
4위        색, 계                     52/193                      52,000               1,624,000
5위        식객                       51/247                      35,000               2,963,000
6위      우리동네                   50/234                      25,100                 350,500
7위      데스 센텐스               23/109                      15,600                   59,100
8위      열한번째 엄마            44/239                      15,400                 316,300
9위      마이클 클레이튼         29/126                      12,100                 128,300
10위      히트맨                     32/146                       7,800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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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 시사 후기

영화 이야기 2007. 12. 10. 18:26 Posted by cinemAgora
가문의 영광을 위한 보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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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면 가장 하고 싫었던 놀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보물 찾기다. 선생님이 여기 저기 (보물도 아닌!) 쪽지를 숨겨 두고 아이들을 풀어 놓는 그 놀이에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찾을 보물이란 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다, 마약 탐지견마냥 이곳저곳 숲 속을 뒤지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우리를 풀어 놓은 동안만이라도 편안한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선생님들의 속셈을 일찍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주로 서양인들의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는 보물 찾기 모험극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머리가 좀 익으면서 그 보물 찾기란 게 현지 셀파들은 수도 없이 오르락 내리락 했을 산 꼭대기에 국기 하나 꽂아 놓고 '내가 정복했다'고 선언하는 우스꽝스러운 제국주의적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추가됐다. 인디언이 수만년 평화롭게 살고 있던 땅에 당도해서는 '발견'이라는 표현을 썼던 그들 아닌가.

땅과 황금에 대한 욕심은 절대왕정 이래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확장을 견인한 아주 중요한 모티브였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왕실이나 해적이나 보물이라면 눈이 뻘갰다.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역사에 기록돼 있는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을 사금 채취에 동원하고, 말을 안듣는 원주민은 팔 다리를 잘라 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보물 찾기 모험극이 그들의 흥미를 돋우는 단골 손님이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참, 영화 한 편 소개하면서 거창하게도 쓴다고?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오락 영화 보면서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이거 병이다. 어쭙 잖은 먹물 병. 여전히 누군가는 이런 논지에 공감할 것이라는 믿음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합병증으로 과대망상까지 걸렸다.

암튼, 오늘 언론 시사회를 통해 본 <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 역시 보물 찾기 모험극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적어도 나한테는 한 수 물리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미리 밝히려고 이리도 잡설이 길었다. 한마디로, 필자는 <툼 레이더>나 <내셔널 트레져> 따위의 보물 찾기 액션 어드벤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역사가 이제 갓 200년 된 나라에서 언감생심 '내셔널' 트레져라니!  신미양요 때 빼앗아간 문화재나 돌려줘! 이 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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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야기나 들어보자. 요즘 탈모 치료를 세게 받고 있는지 대머리 진행률이 눈에 띄게 더뎌진 니콜라스 케이지 아저씨, 즉 벤의 가문에서 얘기는 출발한다. 그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남북전쟁의 결과를 되돌리려는 남부 연맹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그들이 가져온 암호문을 태워 버리려 하다가 비명 횡사했다는 게 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자랑스러운 과거였다. 그렇게 철썩같이 알고 있었는데, 어느날 뜬금 없이 나타난 작자(에드 해리스)가 이상한 쪽지 하나 들고 와서는, 대뜸 아니라고 우기는거다. 벤의 조상은 오히려 링컨 암살 사건의 공범이었다는 것. 꼭지가 돈 벤은 실추 위기에 놓인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암호문 해독에 나서고, 그것이 결국 숨겨진 황금의 땅으로 찾아가는 열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벤은 이 보물 찾기를 위해 파리에서 태연히 실정법을 어기는 것을 넘어 대영 박물관까지 침입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또 다른 암호를 알기 위해 대영 박물관에서 훔쳐낸 보물, 나쁜 놈들이 쫓아온다고 지는 사진 한방 찍고 냅다 강물에 버린다. 지네 나라 내셔널 트레져 아니라는거지. 또 한번 '이런 썩을'이다. 벤이 보물의 위치를 추적하는 과정은 아주 속성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지루함에 뒤척거린 탓에 정신 바짝 차리지 않고 본 나로선 자세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해서 그렇게 된거다. 게다가 벤의 일행은 007 아구창을 날릴 정도로 치밀한데, 세상은 허술하기 그지 없어서 그들이 못들어갈 성역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소동극의 계기는 앞서 말했듯 딱 하나,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니 <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이란 제목은 이렇게 바꾸는 게 좋을 뻔 했다. <내셔널 트레져: 가문의 영광>. 애국시민이었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벤과 그의 일행은 '내셔널 트레져' 찾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오, 혈통의 위대함이여!
 
기왕 먹물병 걸린 영화평 꾹 참고 읽어 내려오셨는데 조금만 더 참아주라. <내셔널 트레져>는 오락 영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부분의 오락 영화는 그 시대의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롤러코스터적 가상 체험을 통해 거꾸로 역사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컴플렉스를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방식이란 게, 결국 그들 조상들이 하던 보물 찾기 모험담을 답습하는 가운데, 내셔널 트레져를 만든 게 아니라 '획득하신'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존경심을 재차 드높이는 것이라면 차라리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극장문을 나서며 딱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당신들의 건국의 아버지 나름 훌륭하셨다. 그런데 젠장, 우리의 내셔널 트레져는 언제 돌려 줄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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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말하는 동거 Vs. 결혼

애경's 3M+1W 2007. 12. 9. 23:4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다음 블로거 뉴스 홈을 보다보니 <2007 블로거기자상 네티즌 투표>라는 걸 하더군요.
세 마초 아저씨들의 '거침없는 하이킥' 덕에, 이 곳 3M흥업도 서른 개 후보 중 하나로 위풍당당 등극해 있더군요. 주인장들이 하면 민망할터이니 선거운동은 깍두기인 제가. ㅋㅋ
자자, 선거철을 맞아 3M흥업의 팬(?) 분들도 귀중한 한 표 행사해 주시길 부탁드림다!
(http://bloggernews.media.daum.net/event/2007award/poll.html)


해당 페이지에 제 데뷔포스트였던 '서른 즈음 동거.....'가 있길래 다시 한번 읽게 됐습니다. 댓글들까지 꼼꼼히 말이죠. 당시 그 글은 여자인 제 입장만 적어놓았던 글이라,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 포스트에 대한 남자 입장을 '그'의 동의 하에 옮겨봅니다. 참고로 다음 글은, '착한 남자'가 쓴 동거vs.결혼에 대한 소견입니다. '나쁜 남자'의 생각은 아래와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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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남녀, 기묘한 한 지붕 아래 두 가족

동거가 결혼보다 좋은 이유는 그래도 아직 결혼만은 하지 않았다는 안도감(?)… 다시 말해 ‘싱글’의 크래딧을 유지한 채 ‘총각’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든 깨끗하게 ‘남남’이 될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동거를 시작한지 2년이란 시간이 흐르자, 나는 점점 결혼에 대한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째서 나는 느닷없이 결혼을 원하게 됐던 걸까. 생각해보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동거가 ‘손해 보는 장사’ 처럼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부부처럼 함께 생활하고, 부부처럼 당당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부부처럼 익숙하게 살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은 늘 죄인의 심정처럼 찝찝하기만 했다. 아무리 억지로 허락은 받아냈지만, 남의 집 귀한 딸을 결혼도 하지 않고 몇 년씩 데리고 산다는 것이 우선 마음에 걸렸다. 한번도 들은 적 없지만, 그녀의 집안 어른들께서 ‘나쁜 놈~ 못난 놈~ 염치도 없는 놈’이라고 등 뒤에서 손가락질이라도 퍼붓는 것 같았고, 명절이나 생신 때 그녀의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나야 하는 때면 나는 더 예민해져 안절부절 해야만 했다.

호부호형 하지 못했다는 빌미로 집을 떠난 홍길동의 심정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시절이었다. ‘장인어른’을 장인어른이라 부르지 못하고, ‘장모님’을 장모님으로 부르지 못하는 처지는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을 뿐이었다. 당신들의 딸과 부부처럼 지내건만 한 번도 ‘이서방’ 하고 살갑게 불러주지 않는 어른들이나 ‘이모부’가 될 사람인데도(실제로 이모와 살고 있음에도) 굳이 ‘삼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족보로 칭하는 조카들도 야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아저씨’라고 불리질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았어야 했나? 아무튼, 갖출 것 다 갖추고, 할 것 다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위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한을 푸는 길은 오직 결혼뿐이었다.

법적인 부부가 되질 않았기 때문에, 신혼부부에게만 해당되는 주택융자금 대출이라든가, 소득공제 혜택, 항공권 마일리지 합산과 같은 여러 가지 권리로부터 외면 당해야만 했던 현실도 나를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으로 밀어 넣는 원인을 제공했다. 신혼여행을 가고 싶다는 열망도 한 몫 했다. 결혼식은 두려웠지만, 남들 다 가는 신혼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건 정말 손해 중에서도 너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와 내가 농담 반 진담 반 진지하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게 된 계기가 바로 신혼여행이었던 것 같다. 결혼식만 치른다면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장기간 휴가 보내주지, 우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 치며 축하해주지, 부조금과 용돈 쥐어주며 휴가비 지원해주지, 여행지에서 신혼부부라고 대접 받지… 결혼을 하지 않는 게, 그래서 신혼여행도 챙겨먹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게 너무나 미련한 짓처럼 느껴졌다.

결혼은 남자를 보다 성숙하게 만든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더 성숙해지고, 성장할 필요는 없지만 결혼으로 한 뼘 커진 남자의 삶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삶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분명 가치가 있다. 결혼이 가져다 주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평생 짊어져야 할 숙제처럼 무거운 짐이 되겠지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평생의 동반자,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내 편이 되어줄 가족이 생긴다는 것. 그건 그 어떤 복권에 당첨되는 것 보다 뿌듯한 일이다. 그러므로 멋진 남자들, 이 땅의 멋진 아버지들은 가장의 역할을 ‘아름다운 책무’라 말하며 기꺼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아주 멋있게. “괜찮은 남자들은 죄다 유부남이야, 다들 결혼해 버렸다니까…” 엊그제 회사 앞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미녀들의 대화를 살짝 엿들었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100% 공감한다.

* 이 글에 대응하는 여자의 의견이 궁금하시면
여기를 클릭!

* 이 밖에도 동거의 구체적인 장점과 단점, 커밍아웃의 문제, 적과의 동침이 될 수도 있는 한 이불 속 생활 등에 대한 보다 생생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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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은 몇 권의 소설

별별 이야기 2007. 12. 9. 10:55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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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로버트 해리스
랜덤 하우스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만큼 서사와 묘사 모두 영화적이다. 그대로 영화로 옮겨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2008년 개봉을 목표로 블록버스터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듯한 인상이다. 고대 로마 시대 번영의 상징이었던 도시 폼페이를 무대로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이틀 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파멸의 순간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로마의 건강성을 대표하는 건실하고 정의로운 수도 기사 아틸리우스와, 번영과 탐욕의 상징인 노예출신의 거부 암플리아투스의 행보가 충돌하고 엇갈린다. 로만 폴란스키가 메가폰을 잡는다는 영화에선 올랜도 블룸이 아틸리우스를 연기한다는데, 나는 오히려 암플리아투스를 누가 맡을까, 훨씬 더 궁금하다. 히스토리 팩션계의 대가로 소개된 지은이 로버트 해리스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영국인이다. 이 책 <폼페이>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 전 국내에 소개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이니그마>는 판매량이 신통치 않았다니, 내 보기엔 제목 탓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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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문학동네
사투리의 말맛을 가장 잘 살려내는 성석제의 문체에선 해학이 돋보인다, 고 믿고 있었으나 이 책에선 오히려 비인간적인 삶의 조건 속에 던져진 사람들이 상처 받고 상처를 내고 있는 상황에 대한 고통 어린 연민이 읽힌다. 그러니 '참말로 좋은 날'은 참말로 역설적인 제목인 셈이다. 가슴 한켠이 주저 앉은 듯한 씁쓸함을 달래며 읽은 소설집이다. 특히 마지막 단편,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는 더욱 그러했다. 삶의 벼랑 끝으로 몰린 한 사내의 처절한 파멸기는 21세기판 '운수 좋은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무기력하지만 인터넷에서 그가 신이다'라는 문장에서는 악플 심리학의 단초를 읽을 수 있었다. 이 무기력이 분노로,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저주로 악순환되는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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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이케이도 준
미디어2.0

"이 책은 은행원들이 꼭 읽어 봐야 한다"고 은행원 선배에게 권했더니 그가 그런다. "너 모르는구나, 우리나라에서 책 가장 안 읽는 직업군이 은행원이란 걸." 흠...그런데 생각해보니 은행원들이 대거 이 책을 읽으면 사표가 줄을 잇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니시키 씨처럼 행방불명되는 은행원이 속출하려나. 실적이 개인의 개성을 대체해 버린 은행원들의 세계를 미스터리 소설의 틀로 묶어낸 이 책은, 장르적 쾌감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통찰을 동시에 선사해 주는 수작이다. 원제는 '샤일록의 아이들.' 작가 스스로가 은행원 출신이라는 점은, 인물과 사건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직업적 경험을 고스란히 작품에 녹여내는 일본의 장르 소설을 보고 있으면, 거꾸로 너무 일찍 전업의 길로 들어선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느껴지는 어떤 '막연함'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고, 삶의 주변에서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빨고 있는, '키덜트'들의 두려운 막연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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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계절

요코야마 히데오
랜덤하우스

사회부 기자 시절, 매일 경찰서를 들락거렸어도 나는 사건이나 사고에 온통 신경을 썼지, 그것을 다루는 경찰 조직의 생리나 경찰관들의 애환에 대해선 별반 관심이 없었다. 역시 한때 사회부 사건 기자를 했던 이 책의 지은이 요코야마 히데오는 아마도 기자 시절부터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찰력이 남달랐던 인물이었음에 틀림 없다. 게다가 수사반장 이상으로 굉장히 호기심이 많았던 기자였을 것 같다. 경찰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사건 수사가 아닌 경찰 조직 내의 정치적 알력과 욕망의 충돌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게다가 그것을 아주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추리극의 그릇에 맛깔나게 담아냈다. 욕망의 충돌을 그려내는 데 미스터리 스릴러만큼 딱 들어맞는 장르도 없다는 판단이었겠지만, 그가 쓴 다른 미스터리 소설, <종신 검시관>이나 <동기> <클라이머즈 하이> 등을 보면 역시 장르의 달인이라는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모두 사회부 기자 시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책들이다. 난 사회부 있을 때 뭐했나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민감한 촉수와 창의력을 동시에 가진 이들은 아마도 타고 난 것이리라 위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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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쌈박질 연애 시대?

영화 이야기 2007. 12. 7. 11:3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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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싸움이야 칼로 물배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이혼 커플은 칼로 물만 배지 않는다. 진짜 서로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더 이상 부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의 피트와 졸리처럼, 그들 역시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수 상민(설경구)과 공예 미술가 진아(김태희)는 방금 이혼했다. 요즘 젊디 젊은 돌싱(돌아온 싱글)들이 넘쳐 나는 세상이니 나름 현실성 있는 설정이다.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 상민은 결벽증이 심하고, 진아는 자존심이 무한수열이다.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그 정도 성격 차이 하나 극복 못하고 틈만 나면 티격태격이다. 헤어지고서도 싸울 건더기를 찾아내고 싸우고 또 싸운다. 급기야 목숨을 담보로 한 자동차 추격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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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짐작하신대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다. 홍보 마케터는 그 앞에 '하드보일드'라는 말을 추가했지만, 나는 그 말 대신 '오버 액션'이라는 말을 쓰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오버 액션 로맨틱 코미디. 나쁜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다.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끌어 올리기 위해 배우들의 연기와 설정 모두 오버 액션으로 점철되고 있다는 게 큰 오점은 아니니까. 처음엔 살짝 적응이 안되더라도, 영화를 30분 정도 보고 있으면, 관객에 따라선 악쓰고 때리고 쫓고 도망치는, 사도 마조히즘적 이혼 부부의 사활을 건 결투를 나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TV 드라마 <연애 시대>로 주가를 올린 바 있는 한지승 감독은 이혼 커플의  티격태격 로맨스를 영화라는 매체적 특성에 걸맞게 조금 더 극단적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처럼 보인다. 설정 자체의 독창성엔, 그러므로 높은 점수를 줄 수 없겠다. 게다가 아무리 영화라지만, 이별과 다툼, 그리고 화해로 이어지는 과정의 비약이 일반적인 허용치 이상이다(물론 등장인물들이 아직 어른이 안된 애들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럴거면 차라리 액션 누아르를 넘어 SF로 가버리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 설정이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에 비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것이 끝내 발목을 잡는다. 그러니 영화는 관객의 넓은 아량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여보시게들, 이건 영화야. 게다가 김태희의 저 사랑스러운 악쓰기가 키포인트라고! 김태희의 저런 표정, CF에서도 못본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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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나를 이해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내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는 고결하며 착하디 착한 메시지에 도달하기 위해 그 난리 부르스 액션 누아르를 통과해야 한다는 건 결과적으로 김 새는 일이다. 그 똑똑한 친구들이 왜 그 무식한 짓거리를 한 뒤에야 그 지당한 이치를 깨닫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설경구와 김태희가 치고 박고 싸우는 볼거리(그렇다. 이건 볼거리다. 한지승 감독도 둘의 싸움을 은근한 관음증적 시선으로 바라볼 관객을 위해 팬서비스를 잊지 않았다)를 위해 비약이나 과장 쯤은 용서할 수밖에. 어차피 오버 액션 코미디다. 좀 있으면 세상이 오버 액션하는 크리스마스 아닌가.

2007/12/05 - [씨네파파라치] 신작 찔러보기 - 낚일까? 말까?

<싸움>은 상민과 진아가 벌여온 수 많은 다툼과 화해의 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어느 넓은 쇼핑몰 광장에서 '그러게 왜 헤어지자고 한거야!' "내가 언제 그랬어!' 악을 쓰던 둘은 결국 "우리 헤어질거면 같이 죽자"며 눈물의 포옹을 한다. 그러자 길 가던 사람들이 둘을 둘러싼다. 박수가 쏟아지고 누군가는 그들을 디카로 찍는다(왜 찍을까? 당신도 길거리에서 싸우다 화해하는 커플 보면 디카로 찍으시나?).

예컨대 이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미국 로맨틱 코미디에서 흔히 써먹는(그것도 예전에 쓰고 요즘엔 거의 폐기처분한) 전형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감독은 두 사람의 캐릭터 묘사를 위해 배경을 대충 처리해 버리는데, 오히려 이 지점에서 배경의 반전을 두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두 사람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재치 어린 관점을 관객에게 슬쩍 제시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감독이라면 나이대가 다른 두 쌍의 행인이 쓰윽 지나가면서 이런 말을 던지게 했을 것이다. 중년 커플, "꼴값떨고 있네, 요즘 것들은 연애도 참 지랄나게 해." 젊은 여성 두명, "어머, 쟤들 지대로 재수다~" 그리고 오프닝 타이틀이 뜬다. 이제부터 우리는 앞선 두 행인의 냉소적 관점을 슬쩍 차용한 상태에서 '꼴값 떠는 지대로 재수 커플의 지랄 액션 어드벤처'를 '쟤들 왜 저럴까?'라는 부담감 없이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 연애란 원래 저렇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찧고 까부는 일이지."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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