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 시사 후기

영화 이야기 2007. 12. 10. 18:26 Posted by cinemAgora
가문의 영광을 위한 보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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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면 가장 하고 싫었던 놀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보물 찾기다. 선생님이 여기 저기 (보물도 아닌!) 쪽지를 숨겨 두고 아이들을 풀어 놓는 그 놀이에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찾을 보물이란 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다, 마약 탐지견마냥 이곳저곳 숲 속을 뒤지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우리를 풀어 놓은 동안만이라도 편안한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선생님들의 속셈을 일찍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주로 서양인들의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는 보물 찾기 모험극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머리가 좀 익으면서 그 보물 찾기란 게 현지 셀파들은 수도 없이 오르락 내리락 했을 산 꼭대기에 국기 하나 꽂아 놓고 '내가 정복했다'고 선언하는 우스꽝스러운 제국주의적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추가됐다. 인디언이 수만년 평화롭게 살고 있던 땅에 당도해서는 '발견'이라는 표현을 썼던 그들 아닌가.

땅과 황금에 대한 욕심은 절대왕정 이래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확장을 견인한 아주 중요한 모티브였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왕실이나 해적이나 보물이라면 눈이 뻘갰다.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역사에 기록돼 있는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을 사금 채취에 동원하고, 말을 안듣는 원주민은 팔 다리를 잘라 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보물 찾기 모험극이 그들의 흥미를 돋우는 단골 손님이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참, 영화 한 편 소개하면서 거창하게도 쓴다고?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오락 영화 보면서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이거 병이다. 어쭙 잖은 먹물 병. 여전히 누군가는 이런 논지에 공감할 것이라는 믿음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합병증으로 과대망상까지 걸렸다.

암튼, 오늘 언론 시사회를 통해 본 <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 역시 보물 찾기 모험극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적어도 나한테는 한 수 물리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미리 밝히려고 이리도 잡설이 길었다. 한마디로, 필자는 <툼 레이더>나 <내셔널 트레져> 따위의 보물 찾기 액션 어드벤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역사가 이제 갓 200년 된 나라에서 언감생심 '내셔널' 트레져라니!  신미양요 때 빼앗아간 문화재나 돌려줘! 이 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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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야기나 들어보자. 요즘 탈모 치료를 세게 받고 있는지 대머리 진행률이 눈에 띄게 더뎌진 니콜라스 케이지 아저씨, 즉 벤의 가문에서 얘기는 출발한다. 그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남북전쟁의 결과를 되돌리려는 남부 연맹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그들이 가져온 암호문을 태워 버리려 하다가 비명 횡사했다는 게 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자랑스러운 과거였다. 그렇게 철썩같이 알고 있었는데, 어느날 뜬금 없이 나타난 작자(에드 해리스)가 이상한 쪽지 하나 들고 와서는, 대뜸 아니라고 우기는거다. 벤의 조상은 오히려 링컨 암살 사건의 공범이었다는 것. 꼭지가 돈 벤은 실추 위기에 놓인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암호문 해독에 나서고, 그것이 결국 숨겨진 황금의 땅으로 찾아가는 열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벤은 이 보물 찾기를 위해 파리에서 태연히 실정법을 어기는 것을 넘어 대영 박물관까지 침입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또 다른 암호를 알기 위해 대영 박물관에서 훔쳐낸 보물, 나쁜 놈들이 쫓아온다고 지는 사진 한방 찍고 냅다 강물에 버린다. 지네 나라 내셔널 트레져 아니라는거지. 또 한번 '이런 썩을'이다. 벤이 보물의 위치를 추적하는 과정은 아주 속성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지루함에 뒤척거린 탓에 정신 바짝 차리지 않고 본 나로선 자세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해서 그렇게 된거다. 게다가 벤의 일행은 007 아구창을 날릴 정도로 치밀한데, 세상은 허술하기 그지 없어서 그들이 못들어갈 성역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소동극의 계기는 앞서 말했듯 딱 하나,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니 <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이란 제목은 이렇게 바꾸는 게 좋을 뻔 했다. <내셔널 트레져: 가문의 영광>. 애국시민이었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벤과 그의 일행은 '내셔널 트레져' 찾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오, 혈통의 위대함이여!
 
기왕 먹물병 걸린 영화평 꾹 참고 읽어 내려오셨는데 조금만 더 참아주라. <내셔널 트레져>는 오락 영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부분의 오락 영화는 그 시대의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롤러코스터적 가상 체험을 통해 거꾸로 역사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컴플렉스를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방식이란 게, 결국 그들 조상들이 하던 보물 찾기 모험담을 답습하는 가운데, 내셔널 트레져를 만든 게 아니라 '획득하신'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존경심을 재차 드높이는 것이라면 차라리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극장문을 나서며 딱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당신들의 건국의 아버지 나름 훌륭하셨다. 그런데 젠장, 우리의 내셔널 트레져는 언제 돌려 줄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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