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영화계에 보내는 통분

영화 이야기 2007. 12. 23. 23:28 Posted by cinemAgora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유신 시절엔 반공 영화 쿼터란 게 있었다. 반공 영화를 한 편 만들면 그에 상응해 외화 수입을 허용해주는, 일종의 '기브 앤 테이크' 정책이었다. 당시엔 방화(한국영화를 일컬어 당시엔 나라 '방(邦)'자를 써 방화라고 불렀다.)를 제작하는 것보다는 외화(주로 미국이나 프랑스 영화)를 수입해 배급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였던 시절이었으니, 이런 사정을 간파한 정권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반공'을 영화 자본가들에게 미끼로 던진 셈이었다. 대종상에도 반공 영화상이라는 부문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이 글에서 영화인이라는 통칭 대신 영화자본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선전 도구가 아닌 예술로서의 영화를 지키기 위해 피와 땀을 바친 스탭들, 영화 노동자들이 도매금으로 치부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는 저항했지만 적지 않은 체제 순응적 영화 자본가들이 이 미끼를 넙죽 받아 먹었다. 그들은 그 대가로, 민주화 열풍이 불어 닥친 90년대 이후 운동권 출신 '먹물'들이 대거 충무로로 진출한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구악의 범주에 휩쓸려 밀려났다. 신구 갈등을 통과한 뒤 찬밥 신세가 된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후배들이 선배들을 업수이 여긴다며 "싸가지 없는 씨벌넘들"과 같은 육두문자를 쏟아내며 마지막 저항을 했으나 시나브로 잊혀졌다. 한국영화계의 원로가 존경받지 못하는 현상은, 많은 부분 이런 역사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박정희 때의 순응적 영화 자본가들과 지금의 영화 자본가들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를 따져볼 차례다. 노무현 정권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가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뒷통수를 맞은 뒤, 알량한 산업마저 벼랑 끝에 몰리자 어쩔줄 몰라 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농민들의 반 FTA 투쟁 때만 해도 팔짱 끼고 있다가 쿼터 축소의 위기 상황에 다다르니 개런티 수억 원 짜리 배우를 내세워 뒤늦게 농민들의 어깨를 다잡으며 우리는 형제라고 김 빠진 맥주 보다 싱거운 노래를 부르게 했다.

한국영화를 지켜야 한다고 목놓아 울었던 그 영화 투사들의 퍼포먼스는, 스크린쿼터의 본질인 다양성 확보의 대의는 새카맣게 까먹고 감정적인 애국애족에만 호소하다 보니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지고 말았다. 시장을 지키자는 말은 더 큰 시장을 확보하자는 울림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 하는지조차 모르는 장나라가 영화 한 편 찍었다고 영화인입네,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코미디였다. 그 코미디를 연출한 게 지금 충무로를 장악한, 이른바 진보적 영화자본가들의 행태다.

쇼비지니스의 세계에 있으면 생각이 늘 그렇게 표피적으로만 흐르는건가? 유추컨대, 세대를 불문하고 한국의 영화 자본가들은 압도적인 힘에 경향적으로 순응적이며, 시류의 변화에 적응력이 떨어지고, 가장 치명적으로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어쩔 도리 없다며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처럼, 견고한 개런티 상한선 하나 합의해 내지 못하면서 스타들의 거품 몸값만 성토하고 있는 것처럼, 극장 부율(수익배분율)이나 이통사 할인 문제 역시 극장측에 질질 끌려가며 해결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극장을 향해 서슬퍼렇고도 치명적으로 날려야 할 '영화 관람료 인상'의 카드를 애꿎은 관객들 앞에 던져 놓았다가 비난을 자초하는 것처럼, 그들은 언제나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혹은 눈앞의 손실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만큼은 가공할만한 멍청함을 과시해 왔다.

박정희 때의 영화 자본가들이 권력에 투항했다면, 지금의 영화 자본가는 시장 권력에 순순히 투항하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래서 뒤로는 정권에 세게 뒷통수 맞고 앞으로는 민감하게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 관객들에게 돌 맞고, 옆으로는 영악한 대자본에게도 외면 받는 사면초가의 상황을 만든 셈이다. 가여워라, 충무로여!

시나리오 작가 조합의 파업에 배우들이 동참하고, 그 여파로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네 마네 하는 할리우드를 보라. 아무리 허섭스레기같은 영화로 세계인들을 혹세무민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자기들끼리는 <마이클 클레이튼>과 <아메리칸 갱스터>로 최고 작품을 겨룬다.

할리우드에 대항해 한국영화의 자존을 사수해 왔다고 자부해온 그들은, 이제사 누굴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도 헛갈려 하는 그들은, 저기선 문화 논리 여기선 시장 논리를 입맛대로 들이대온 영화자본가들은 도대체 어떤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겨루며 어떤 힘있고도 영리한 전술로 한국영화의 건강한 미래를 사수하고 있냔 말이다.
 산업을 키운들 한국영화의 존립이 그다지도 중요한 거냐고 묻는 관객들에게 대관절 어떻게 대답할거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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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개봉영화 4편 단평

영화 이야기 2007. 12. 22. 17:34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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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

장난감 나라의 사람 이야기다. 당신이 이미 네버랜드를 떠나온 어른이라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의심 많은 회계사처럼 생각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아이들의 환상 나라에 거부감 없이 진입하기란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고리엄 할아버지의 안내에 따라 의심을 걷어내면, 어느덧 초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들려주는 좌절과 희망, 그리고 이별에 대한 꽤 성숙한 삶의 성찰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동화 나라에도 철학은 있는 것이다.

내게 자녀가 있다면, 올해 크리스마스엔 무조건 이 영화를 보여줄 것이다. 유치하거나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동화 속에 푹 빠지게 만드는 자크 헬름 감독의 진정성 넘치는 연출만큼이나 더스틴 호프먼과 나탈리 포트만의 신구 연기 앙상블도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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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다 미쳐>

<기다리다 미쳐>가 '사랑은 위대한 것'이라는 뻔할 뻔자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멜로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현실감이다. 한창 연애감정에 달뜰만한 20대 초중반 남녀들이 '군대'라는 현실적 장벽에 부딛히거나 힘겹게 넘어서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일편단심 민들레는 참으로 일찍 지고, 누군가의 짝사랑은 강제로 보지 못하는 시간이 있기에 꽃을 피운다. 대한민국 청춘 남녀들에게 드리운 이 무겁디 무거운, 짧지 않은 생이별의 시간을 멜로 장르 안에 무리 없이 녹여 놓고 있되, 감독의 시선은 쓸데 없이 무겁지도 않고 하염 없이 가볍지도 않다. 요즘 유행하는 떼거리 멜로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간과하고 넘어가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올밴' 우승민의 영화 데뷔도 일단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의 비중이 좀더 컸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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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

<남극일기>의 실패를 딛고 돌아왔건만 감독 임필성의 선택은 여전히 <남극일기>의 동화판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열려 있되 갇혀 있는 상황에서 잠재된 잔혹성을 드러내는 <남극일기>의 탐험대처럼, <헨젤과 그레텔>의 주인공 역시 언제든 떠날 수 있으되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히고 만다. <남극일기>의 탐험대가 그곳에서 인간의 참혹한 본성을 스스로 확인했다면, <헨젤과 그레텔>의 숲에선 폭력적인 세계에 의해 폭력마저 동화가 된 풍경이 펼쳐진다.

'공포물이 아니라 잔혹 동화'라고 설명하는 임필성 감독의 의도대로, 아이들이 숲속에 유배된 동화 속의 설정을 뒤집어 놓고 권력 관계를 역치시키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많이 무섭지는 않고 차라리 처연한 정서를 남긴다. 다만, 후반의 절정부까지 가는 여정이 슴슴하다는 게 흠이다. 임 감독의 영화 두 편을 종합해 보면 그가 어떤 얘기를 하려는지 알겠으나, 왠지 살짝 지루하다는 것이다. 강력한 흡인력으로 관객들을 꼼짝 못하게 할 정도의 영화적 테크닉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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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 포에버>

마리아 칼라스 서거 30주년이라는 시의성과 최근의 음악 영화 붐에 편승해 5년이나 지각 개봉하는 영화다. 불멸의 오페라 여신 칼라스의 단순한 전기 영화라기보다 전성기를 지난 뒤의 말년의 칼라스가 겪는 좌절과 도전, 그리고 관조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예전과 같은 청아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칼라스가 영화 내내 립싱크로 영화를 찍는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페라 장면을 통해 귀는 즐겁겠지, 하는 기대감을 살짝 배반한다. 그런데 영화 자체가 어차피 배우에 의한 립싱크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어서 오히려 신선해 보인다.

음악 영화 특유의 시청각적 쾌감보다는, 한 위대한 예술가가 영광과 쇠락의 과정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꽤 묵직한 울림을 준다. 칼라스 역을 맡은 프랑스 중견배우 화니 아르당의 연기력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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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M 흥업의 크리스마스 지정곡, 조니 미첼 <River>

음악 이야기 2007. 12. 20. 01:3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JONI MITCHELL / River
                                        (Jacosmile's music collection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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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혹은 조금 낯선 영화 대사 하나,

(모퉁이의 한 상점 안, 젊은 여성이 장식을 하고 있다.)

"It's coming on Christmas, and they're cutting down trees."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으니 나무를 베고 있구나."

"I wish I had a river that I could skate away on."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강이 있다면 좋을텐데."

Such a sad song, and not really about Christmas at all,
but I was thinking about it as I was decorating my Christmas tree.
이런 슬픈 노래, 전혀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노래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다가 그 노래가 생각났어요.


영화 <You've got mail>에 나오는 대사이다. '98년도에 개봉했으니 내용도 가물가물한 영화지만 노랫말이 소재로 등장한 이 장면만은 몇 년 동안을 머리 속에서 돌아다녔었다. 한 동안은 이 노랫말의 음악을 찾아보려는 노력도 했었다. 하지만 워낙 게으른 성격이다 보니 금세 포기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서 블로그의 음악 담당으로서 자그마한 책임감이 생겼다. 흔하디 흔한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닌, 블로그 방문객들을 위한 멋진 곡이 없을까하는...
그래서 모처럼 지난 날의 favorite 앨범들을 펼쳐놓고  본격적인 선곡 작업에 들어간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메멘토를 능가하는 까마귀 기억력은 선곡의 이데올로기를 쉽게도 잊어버리게 만들었고, 극히 개인적인 음악 듣기의 즐거움에 푹 빠져버린 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푸른 색으로 프린트된 한 장의 앨범에서 이상한 데자뷔를 경험하게 된다. '어느 장면에선가 이 노래를 배경 음악으로 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하는. 그리곤 잠시 후, 가난한 영어실력을 총동원해 귀기울인 가사에서 '유레카'를 외치게 되는데...

It's coming on Christmas,
They're cutting down trees.
They're putting up reindeer
And singing songs of joy and peace,
Oh, I wish I had a river I could skate away on.


이어폰 속에서 조니 미첼이 노래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으니 나무를 베고 있구나,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강이 있다면 좋을텐데..."

1971년에 발표된 그녀의 앨범 [Blue]의 수록곡 <River>였다. 절대로 과잉의 감정선을 넘지 않는 조니 미첼의 담담한 목소리가 크리스마스의 풍경과 바람을 조금은 우울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이 물어 온다. "크리스마스엔 뭐하세요?"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냥... 집에 있을 겁니다. "
많은 사람들은 비웃고, 몇 몇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집에 있으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별다른 계획이 없다. 아니 만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넘쳐나는 거리에 보잘 것 없는 내 몸뚱아리 하나까지 더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결심의 누군가가 있어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로 기꺼이 동참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3M흥업'의 크리스마스 송으로 이 곡을 선곡한다.

한강이 얼지 않아 스케이트를 탈 수 없는 불쌍한 우리를 위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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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의 현실참여적인 포크록의 대극으로서 음악 본래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여성 아티스트이다. 포크록에서 출발했지만, 소울, 재즈 등 다양한 장르와의 이종교배를 시도해 탁월한 완성도를 선보였다.
미대 출신으로 자신의 음반 재킷에 직접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으며,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선 그녀가 그린 그림이 소개되기도 했었다.
 


P.S.
1. 뒤 늦게 다시 본 <You've got mail>에는 분명히 이런 대사가 있었다.
"You know that Joni Mitchell song?"
그런데 왜 기억 속엔 이 대사가 지워진 채 남아 있었던 걸까? 좀 더 쉽게 찾아 낼 수 있었는데 말이다.
2. 노래가 확 땡기신 분들은 꼭 전문 가사를 찾아 보시라고 권해드린다. 시적인 가사가 한마디로 죽여준다.
3. 음악 매니아들 사이에선 일종의 교과서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조니 미첼과 닐 영이 들린다면 팝 음악에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는. 그러니 취향이 아니라고 여겨지시는 분들이라도 잠시나마 음악을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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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람료 인상을 지지한다

영화 이야기 2007. 12. 19. 00:07 Posted by cinemAgora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몇 개의 포스트로 이 블로그엔 돌무더기가 한아름 쌓여 있다. 그런데 다시금 돌 맞을 포스트를 올리려 드니 걱정이 앞선다. 또 한번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지난 번 쓴 불법 다운로드 관련 글에 뒤이어 영화 관람료의 현실화 문제까지 제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영화계 단체들이 앞장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 나로선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일만 남았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가지 전제를 밝힌다. 첫째, 나는 영화기자이지, 영화인은 아니라는 것. 동의 못하실 분도 계시리라는 것 안다. 내 생각과 달리 이 직업군조차 광의의 영화인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며 일부 영화기자들의 행태가 그러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시장 논리에 휘둘리는 한국영화계에 영화 예술의 공공재적 정체성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고 강도 높게 촉구해 왔다. 그래서 영화계 내에 나를 고깝게 바라보는 분들도 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넘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지금 영화 관람료 인상에 대한 찬동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노릇이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1~2년까지 상존해온 이동통신사 멤버십 할인 혜택에 힘입어 영화 관람료의 기준선을 매우 낮게 책정하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지금 7~8천 원에 달하는 영화 관람료를 인상할 경우, 관객들의 심리적 저항감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영화 관람료 현실화가 절실하다고 믿고, 불법 다운로드 문제에 이어 다시한번 영화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한국의 영화 관람료가 그동안 지나치게 싸게 책정돼 왔으며, 그로 인해 영화 자본의 선순환 구조에 악영향을 미쳐온 사실을, 영화계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취재해온 기자의 양심상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가 대중의 생각만을 대변해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무엇이 적합한 방향인지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대중의 눈치를 보는 것 또한 기자로선 비겁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인들 스스로 과도한 제작비 상승 요인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역시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제작비란 기본적으로 영화의 표현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욕망의 크기에 연동되기 마련이다. 어떤 제작자라도, 또 어떤 감독이라도 더 '때깔' 좋고, 더 우수한 비주얼을 구현하고 싶어한다. 음향과 프로덕션 디자인에 공을 들이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제작비 상승을 부른 많은 요인 중에 거품으로 지적돼온 과도한 유통비용과 배우 개런티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영화인들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맞다. 여전히 그 노력은 충분치 않다. 영화 관람료 인상에 분개한 일부 관객들이 영화인들 스스로 변화의 몸부림을 보여주라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으라고 질타하고 있는 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영화 관람료 현실화를 촉구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까지 눈 감아 버린다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의 영화 관람료는 각각 1만 원을 상회해 2만 원까지 바라보는 유럽이나 일본 등과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낮다.(미국은 우리보다 다소 싸지만 든든한 해외 시장과 홈엔터테인먼트 시장이 뒤를 받치는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그 나라들은 선진국이니 단순 비교는 무리 아니냐는 항변이 나올 게 뻔하다. 예전엔 빅맥 지수라고 했지만 요즘엔 스타벅스 지수란 게 있다. 각 나라의 물가 현황을 비교할 때 자주 쓰이는 기준점으로 스타벅스에서 파는 까페라테의 가격이 얼마냐를 비교해 따지는 것이다. 이 지수로 보자면 일본보다 한국이 비싸다. 내가 경험하기론 스타벅스의 본고장인 북미와 비교했을 때도 한국이 더 비싸다. 공연 관람료는 어떤가. 유명 팝 뮤지션의 내한 공연은 기십만 원을 호가한다. 그래도 매진 사례다. 그래서 같은 뮤지션의 공연 관람료가 훨씬 싼 일본으로 일부러 원정 관람을 가는 분들도 있다. 다른 어떤 문화 상품의 가격을 비교했을 때도 유독 한국의 영화 관람료만큼은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이런 비교 논리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많은 분들의 심리적 저항감을 누그러뜨리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여전히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저항감을 부른 많은 책임은, 오히려 영화인들보다 멤버십을 앞세워 영화 관람료 할인 경쟁을 일삼은 이통사들에게 돌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영화 관람료의 체감 지수를 비상식적으로 낮춰 놓은 주범이기 때문이다.

극장에 들어가면 광고를 한다. 어떤 극장은 심지어 10개가 넘는 광고를 틀어댄다. 내 돈 내고 영화 보는데, 그에 앞서 생짜로 광고까지 봐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상식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80년대처럼 대한 뉴스나 애국가를 틀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는, 낮은 영화 관람료를 광고 수입으로 대신하려는 극장들의 욕심을 관객들이 암묵적으로 추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지금의 영화 관람료가 지나치게 비싸다고 느꼈다면 극장에서의 광고 폐지 캠페인이 당장 벌어졌어야 옳았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수긍이 안되실 분들 많은 것 같다. 수긍 안되는 게 당연하다. 영화 관람료의 인상은 바로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주머니 사정 빠듯한데 영화 관람료마저 올린다면 당장 다운로드해서 영화보겠다고 작심하실 분들 적지 않을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가 한달에 휴대폰 통신비로 지출하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점심 한끼 먹으려면 얼마나 써야 하는지. 그것에 비하면 영화 관람료 1만 원이 결코 비싼 것은 아니다. 하물며 뭔 콤보 어쩌구 하면서 극장 들어서기 전 먹거리 비용으로만 4~5천 원도 아낌 없이 쓰는 분들 많다.

좋은 영화를, 볼만한 영화를 먼저 만들라고? 맞는 애기다. 그러나 좋은 영화는 관객들이 흔쾌히 그 가치를 인정해줄 수 있을 때 나온다. 창의력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온 가요계가 결국 허구헌날 리메이크와 샘플링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 타산지석이다. 정말 볼만한 영화가 아니라면 관객들은 지갑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괜찮은 영화라면 7천 원 아니라 1만 원이라도 흔쾌히 쓰게 될 것이다. 까짓 커피 전문점 가서 까페라테 한 잔 덜 사먹어서라도 봐줄 것이다. 창의력과 독창성에는 그만큼의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적어도 문화 상품에 있어서는, 관객들이 내는 관람료는 단지 하나의 재화에 가격을 지불하는 것을 넘어 창의력과 독창성에 보내는 신뢰이자,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영화를 시장 논리로만 바라보지 말라는 주문은 영화인들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인들은 관람료 인상에 따른 위험과 기회의 양면적 가능성을 모두 알고 있다. 어쩌면 위험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조차. 그래서 고양이 목에 감히 방울을 걸고 나선 것이다. 위험이 크지만 그만큼 절박하기에 방울을 걸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금, 그것조차 재수 없다고 퉁겨 버린다면, 할리우드도 일본도 프랑스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정서를 담는 우리 영화들을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많은 부분 최근의 한국영화가 한심하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영화가 걸려 있는 극장을 찾고 싶다. 수가 읽히는 얄팍한 상업 영화들의 행렬을 한탄한다 할지라도 <살인의 추억>과 <타짜> <밀양>을 기다리는 설렘을 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또 돌 맞을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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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미우나 고우나, 죽을 때까지 보듬고 살았던 가족.
                                   
그러나, 지금은?  
              한국영화속, '요즘 가족'의 모습을 따라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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