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차 몰았다는 고 장자연, 알고 봤더니...

민섭's 3M+α 2009. 3. 24. 19:1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 24일 오전 공식 브리핑에서 경찰이 언급한 장자연의 자살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인 고 장자연의 소속사 대표 김 아무개 씨는 국내 매스컴과의 전화 통화에서 “(장씨가)유복하게 살았고 외제차까지 몰았는데 성 상납하고 맞을 이유가 있겠느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실제로 고인은 김 대표의 주장처럼 분당 소재의 복층형 빌라에 살았으며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닌 게 사실이다.

                  장자연이 살았던 복층형 빌라. 전세로 거주중이었다.


내가 고인의 경제 상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데스노트’라고 알려진 경찰 증거물이었다. 앞서 나는 지난 16일에 발행된 <일요신문> 879호를 통해 '데스노트'의 실체를 단독 보도한 바 있다. 경찰이 이 증거물을 입수한 것은 자살 직후다. 자살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고인의 집을 찾았다가 소설책 뒷부분에 고인이 직접 쓴 ‘데스노트’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한 것. ‘데스노트’라는 제목처럼 여기에는 본인이 싫어하는 연예관계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고인의 심경이 적혀있는 글들도 포함돼 있었다. 그 가운데 “생활고에 시달리는 내가 싫다”는 문장이 담겨 있었던 것.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유가족인 언니, 오빠와의 접촉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우선 고인의 고모를 찾아갔다. 고인의 고모는 현재 탄탄한 중소기업인 A 업체의 회장으로 소문난 재력가다. 고인의 가정이 유복하다고 알려진 까닭 역시 고인의 고모와 관련이 높다. 우선 고인의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시에선 고인이 ‘A 업체 회장 조카’로 유명했다. 그만큼 정읍에선 소문난 재력가 집안이라는 것. 고인의 부친 역시 A 업체와 연관이 깊다. 생전에 A 업체에서 고위직으로 근무했던 것. 그렇지만 고인의 부친은 지난 2002년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일단 고인의 고모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고인의 고모 장 아무개 씨는 “생활고 때문에 (장)자연이가 힘들어 했다니 말도 안된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컸고 지금도 그렇다”고 얘기했다.

                 장자연이 타고 다니던 외제차. 고인 소유가 아닌 리스 차량이었다.


전북 정읍에서 만난 시민들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평생 부족함 없이 쓸 만큼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런 예상의 중심에는 ‘A 업체 집안이니까’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 A 업체는 고인의 부친이 아닌 고모가 운영하는 회사일 뿐이다.

어렵게 정읍에서 고인의 부모가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지인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고인과 유가족이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추측은 말 그대로 추측에 불과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고인의 할아버지는 상당한 부자였지만 고인의 부모는 평범한 아파트에 살았는데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긴 했지만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줄 정도는 아니었어요. 두 자매가 먼저 서울로 떠나고 아들만 오락실 등을 운영하며 정읍에서 혼자 살다 몇 년 전 정읍을 떠났죠. 다만 둘째인 딸(고인의 언니)은 돈이 좀 있다고 들었는데 유산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상황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고 호화로운 집에 살며 외제차를 몰고 다닐 정도는 아닐 겁니다.”

                  장자연 명의의 국산 승용차. 고인이 아닌 오빠가 타고 다녔다고 한다.


고인과 유가족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도 확인이 가능한 부분 내에서 살펴봤다. 먼저 고인이 살았던 분당 소재의 복층형 빌라의 경우 전세로 거주 중이었다. 인근 부동산 업자에 의하면 “4년 전 쯤 전세 계약해 언니와 함께 살았었다”면서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집을 찾았는데 마침 그 집은 벚꽃이 피면 경치가 뛰어난 집이었다”고 한다. 전세 계약은 고인이 아닌 고인 언니 명의로 된 것으로 알려졌고 4년 전 계약 당시에는 고모가 동석했다고 한다. 고인의 언니는 개인적으로 돈이 조금 있었을 것이라는 지인의 얘기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또한 고인이 타고 다니던 외제 승용차 역시 고인 명의가 아닌 리스 차량이었다. 별도로 고인 명의의 낡은 국산 중형차가 한 대 더 있었는데 이 차는 고인의 오빠가 타고 다녔다고 한다.

유가족인 언니와 오빠의 직업에 대해서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빠의 경우 정읍에선 오락실을 운영했었고 보험 관련 일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울에 올라온 뒤에 뭘 하며 지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언니의 경우에는 정읍에서도 직업과 관련해 알려져 있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결국 지금까지의 확인 결과, 고 장자연이 비록 고급 주택에 살며 외제차를 몰고 다녔다 할지라도 소속사 대표의 주장대로 그녀가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단정 지을만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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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원작을 영화 감상에 앞서 먼저 읽느냐 혹은 나중에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감상을 얻을 때가 많다. 내 경우, 이를테면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뒤 원작 소설
을 읽으며 괜시리 통분을 금할 수 없었다. 책을 읽는 과정의 즐거움인 나만의 상상력을 영화에게 고스란히 빼앗겨 버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영화 자체가 너무 강렬해서였는지 소설의 주요 대목에서 자연스레 영화 속의 장면이 떠오르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이후에는 영화를 보기에 앞서 원작을 미리 챙겨 읽으려는 욕망이 더 커졌는데, 실제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같은 경우, 원작을 미리 읽은 게 영화를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헌데, 역시 원작을 미리 읽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반대의 경우였다.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감흥이 대니 보일이 감각적인 영상 언어로 재구성한 영화를 보며 훼손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나는 영화를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영화가 마뜩지 않은 게 내가 원작을 미리 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영화 자체가 별로이기 때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가 좋다 나쁘다고 섣불리 말하진 않겠다. 다만 원작에 비해 실망스러웠다는 말만 해두자.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2005년 발표된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의 소설 'Q & A'로부터 공간적 배경과 설정, 주요 인물을 따오긴 했으되, 적지 않은 부분을 각색했다. 영화 매체의 특성에 걸맞게, 혹은 할리우드와 인도를 비롯한 세계 시장을 동시에 겨냥한 다국적 흥행 전략에 걸맞게, 말하자면 선택과 집중(또는 배제와 생략)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왠지 원작이 지닌 '엑기스'까지 배제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영화는 주인공의 이름을 '람 모하마드 토머스'에서 '자말'로 바꿨다. 이름 하나 바꾼 게 뭐 대수인가 하실 분도 있겠지만,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많은 함의를 지닌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 문화가 한데 섞인 그의 복잡한 이름은 인도 사회가 내포한 종교적 복합성을 상징하고 있다. 아예 이름을 바꿔 버린 영화는, 그의 이름이 그렇게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과감히 들어낼 수 있었던 셈이다.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작에는 없던 형의 존재를 추가해 이야기를 형제 간의 애증 관계로 끌고 간다. 영화 속에서 형의 이름은 '살림'으로 불리는데, 원작에서의 살림은 주인공과 소년원 시절에 만나 줄곧 같이 지내게 된 의형제와도 같은 막역한 사이의 인물로, 볼리우드 영화 배우를 꿈꾸는 미소년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자말과 살림 형제가 종교간 분쟁으로 가족을 잃은 걸로 돼 있는데 원작에서 그건 이슬람교도인 살림이 겪었던 비극이다.

주인공의 직업 역시 원작에선 영화와 달리 술집 바텐더이다. 직업이 바뀐 것 역시 대수로운 변화다. 왜냐하면, 그가 늦은밤 바에서 손님의 사연을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역시 퀴즈쇼와 직결되는 배경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텔레마케팅 회사의 심부름꾼으로 설정한 영화는, 사연을 압축하고 그의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처지를 강조하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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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는 주인공 자말과 라티카의 멜로 라인이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자말은 어릴 적 부모를 잃은 뒤 함께 지내다 헤어진 라티카에 대한 식지 않는 사랑을 품은 채 살아간다. 그래서 형과도 대립하며 조직 보스의 정부가 된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역경을 감수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원작 소설에서도 살짝 비슷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해 라티카로 상징되는 여성성은 두 명의 인물로 나뉘어 따로 따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한 인물은 어릴 적 주인공의 옆집에 살던 소녀 구디야이고, 또 다른 인물은 우연히 알게 돼 사랑에 빠지게 된 어린 창녀 니타다. 두 여성 모두 거대한 가부장제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데, 그들과 동병상련을 느끼는 주인공은 그녀(들)에게 늘 진심을 담은 친절을 베푼다.

이밖에도 주인공이 18년 동안 겪어온 밑바닥 인생 역정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됐는데, 특히 주인공이 만났던 여러 주변 인물들을 통해 인도 사회의 단면을 담아낸 에피소드들은 거의 대부분 빠졌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인공이 경험한 선과 악 가운데 선(자말)은 이미 존재하므로, 악으로 분류될 수 있는 몇 인물만 집중 부각시켰다는 설명이 적절할 것이다(물론 그래야 스토리가 더욱 단순명료해질테니까).

아쉬운 것은 그러다 보니 영화가 어느 빈민가 소년의 인생 역전기이자 신파 멜로, 또는 권선징악의 교훈극으로 단순화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인도라는 이국적 시공간만 빌어왔을 뿐, 또 한편의 '아메리칸 드림' 영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의 구체는 빠지고 익숙한 추상만 남은, 뭐랄까, '감동'이라는 이름의 패스트푸드랄까?

어쨌든 당신에게 이 영화가 별로였든 혹은 무척 감동적이었든, 원작소설 'Q & A'만큼은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단, 반드시 영화를 보고 난 뒤 읽으실 것.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불편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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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꽃' 상처와 치유의 성찰

영화 이야기 2009. 3. 22. 00:48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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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의 홍대 앞은 인산인해다. 봄비가 오락가락, 날도 궂은데 주차장 골목은 개성과 젊음을 뽐내는 이들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인파를 뚫고 다큐멘터리 <할매꽃>을 보러 상상마당에 들렀는데, 바깥 세상과는 천양지차다. 나를 포함해 단 다섯 명의 관객. 객석을 슬쩍 내려다 보는 영사기사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며칠 전 YTN 뉴스 스튜디오에 나가 “<워낭소리>의 성공으로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 게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배급사 보도자료를 보니 개봉 주말 6개로 시작된 상영관이 다음 주엔 14개까지 늘어난다고 하니, 그렇다고 섣불리 비관할 상황도 못된다.

각설하고, 나는 <할매꽃>같은 다큐멘터리가 비록 <워낭소리>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반의 반 정도라도 관객이 들기를 바란다. <워낭소리>가 관객들의 보편적 향수를 끄집어낼 기회를 선사한 반면, <할매꽃>은 우리에게 내재된 상처, 그러니까 유전되고 상속되고 있는 상처를 들춰낸다. 헌데 그 상처가 이념이라는 문제와 얽혀들 때, 그것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보편’과는 거리가 먼 기피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누군가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떠올리는 것조차 치떨리는 과거의 상처라 할지라도 용감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면 용서나 화해, 혹은 치유는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할매꽃>의 문정현 감독은 그 일을 바로 자신의 가족사 안에서 수행한다. 자전적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띤 이 작품에서 감독은 임종을 앞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의 지난했던 삶을 정리해 보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부탁을 받는다. 따라서 그의 주요 취재 대상은 외할머니의 딸이자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일가 친척들이다.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민을 당한 뒤 그 후유증에 평생 시달린 외할아버지, 그를 면회갔다가 경찰이 쏜 공포탄에 정신병을 얻고 만 작은 외할아버지, 자수하러 가는 길에 총살당한 외할머니의 오빠 등이 산 자들의 회고를 통해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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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반 세기 전 좌우 이념 대립의 여파로 희생당한 이들을 넘어, 원죄처럼 주홍글씨를 안고 살게 된, 그러니까 살아남아 고통의 삶을 견뎌온 이들로 시야를 넓힌다. 묵묵히 가족의 쇠락을 감당해온 외할머니는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정작 말씀을 할 수 없는 외할머니의 삶은 자손들의 증언을 통해 추상적으로 조합된다. 우리는 그녀가 겪었을 고통을 짐작만 할 뿐이다. 알랭 레네가 연출한 <히로시마 내사랑>(1959)의 그 유명한 첫 장면에서 여자가 “히로시마를 봤다”고 말하자 남자가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반박하는 것처럼 증언자들의 말과 몇 장의 사진, 몇 컷의 비디오 클립만으로 할머니의 삶과 고통을 재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다.

영화 매체가 역사적 진실에 다가서려 할 때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이 무기력을 감독은 어떤 방식으로 극복할 것인가. 그의 대답은 상처를 유추해 들어가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상처의 잔재, 그의 부모 세대와 그 자신에게 남은 미결의 아이러니들에 집중하는 것이다. 좌우 대립의 생채기는 과연 과거 완료인가, 라는 가설에 대해 그는 외가 마을의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가운데 그 상처가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한다.

다큐가 진행되면서 하나의 플롯이 슬쩍 제시되는데, 외할머니의 오빠를 총살한 장본인이 어머니의 어릴 적 친구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이다. 감독은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어머니가 친구를 만나 그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믿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부탁에 머뭇거리고 관객은 이들 모자가 가족사의 거대한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 봉합하게 될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 세대에게도 유효한 질문이기에 더욱 절절한 고민으로 다가온다.

나는 이 다큐를 보면서 문정현 감독의 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감독이자 아들에게 “너는 너무 나만 옳고 다른 이들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면서 “살아 보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일침을 놓는 대목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반목과 대립의 역사로부터 배울 게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감독의 어머니는, 역사로부터 짊어진 치욕과 고통을 온몸으로 버텨온 외할머니의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중반에 감독이 자신의 부모님과 더불어 국가보안법과 미군 철수, 북한 핵문제 등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으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우습고도 씁쓸한 장면은, 이 다큐멘터리가 지닌 성찰의 진정성을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증명한다. 아쉽게도 내가 <워낭소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 성찰이, 그의 카메라 안에는 담겨 있었다. 이 영화의 선전을 기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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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연락이 왔다. 허찬 감독. 지난 연말 3M흥업이 마련한 '200만 원으로 영화찍기' 행사에 단편영화 <거울 공주>를 출품한 장본인. 빠듯한 출품 기한을 맞추느라 기술적인 허점이 많았던 터라, 연출자로서의 안타까움과 스탭, 배우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었나 보다. 행사 당일 뒷풀이 자리에서 "꼭 완성본을 다시 보여드리겠다"고 다짐을 거듭하더니 결국 약속을 지켰다.

재편집과 믹싱, 색보정 작업 등 후반 작업에만 꼬박 3개월의 공을 들인 허찬 감독은, 어제 연세대 학술정보관 내 미디어 감상실(그는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생이다)에서 3M흥업 멤버들과 주연배우 장문정 씨, 일부 스탭들을 불러 모은 뒤 다시 <거울 공주>를 상영했다. "한 말씀 하셔야죠?"라는 내 요구에 그는 상영관의 불을 끄더니 암전 상태에서 수줍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과연, 작품의 완성도가 눈에 띄게 향상됐다. 다소 거칠었던 편집의 흐름도 매끄러워졌고, 훨씬 선명해진 화면 때깔이 몰입을 도왔다. <거울 공주>는 비정규적 삶을 살아가는 20대 여성들의 일상에 대한 흥미롭고도, 설득력 있는 우화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평범한 일상의 그늘에 장르적인 박진감을 얹으며 풀어 헤치려는 그의 시도가 처음부터 미더웠던 나는, "이 상태로 출품됐다면 <거울공주>가 1등을 했을 것"라고 뒤늦은 찬사를 보냈다. "부디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돼 반향을 일으키기를 바란다"는 기대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던 그의 끈질긴 열정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또 한 명의 훌륭한 젊은 재능과의 인연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200만 원으로 영화찍기' 행사의 취지는 110% 달성된 셈이다. 증발되지 않는 창의적 열정을 증명해 보인 허찬 감독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도전! 200만 원으로 영화찍기] 행사 스케치와 출품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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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너무 넘쳐 아쉬운 영화

영화 이야기 2009. 3. 15. 14:39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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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스포일러 다량 함유
 

우선, 나는 이 영화의 문제 의식에 110% 공감한다. <극락도 살인사건>의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핸드폰>은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결코 웃을 수 없는 현대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우화를 제공한다.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와 고객 제일주의에 포획된 두 남자를 병치시키는 가운데 대립시키는 구도는 충분히 흥미로울 뿐더러 새길만한 구석이 적지 않다.

핸드폰을 잃어 버려 사색이 된 연예인 매니저와 "똥개" 같은 고객들에게 일상적으로 당하고 사는 현대판 머슴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지만 결국 두 사람은 '소외'라는 공통 분모에 묶여 있다. 연예 기획사의 오대표(엄태웅)는 소속 연예인을 팔아 먹기 위해 늘 핸드폰을 달고 살지만 누군가와 소통하는 방법을 까먹은 사람이다. 잃어버린 핸드폰과, 충전용 '꼬다리'에는 집착해도 그가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아내(박솔미)의 소통 욕구는 방치한다. 그러니까 그는 첨단 매체로 촘촘히 연결된 관계망 안에 있지만 진짜 소통으로부터는 철저히 소외돼 있는 현대인의 아이러니를 은유하는 인물이다.

오 대표의 핸드폰을 우연히 주운 걸 계기로 악마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정주임(박용우)은, 구매력의 물신화 과정에서 생겨난 다른 차원의 소외를 상징한다. 소비자를 일상적으로 고객으로 호명하는 소비 자본주의는 (사실은 소비의 노예인) 그들이 마치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소비자본주의의 피고용인들은 고객 앞에서 그 착각의 순간을 연출하도록 훈련받은 판촉 노예로서 이 기만의 과정에 동원된다. 거래의 물신이 관계를 지배하는 순간, 인간에 대한 존중과 예의는 쉽게 증발되고 가식 또는 모욕이 남는다.
 

이 의미심장한 상징 인물이 서로 대립하는 과정을 스릴러의 호흡으로 담아내려 한 <핸드폰>은, 그러나 애석하게도 매력적인 소재를 맛깔나게 포장하는 데는 실패한다. 오대표와 정주임의 배경적 상황을 너무 친절하게 보여주려 하다 보니 수습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고, 이것이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영화를 갈팡질팡하게 할뿐더러 호흡을 늘어지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건 영화니까’하고 넘어가기에는 이야기의 디테일이 떨어지는 부분도 몰입을 방해했다. 이를테면, 나는 이런 부분에서 쉽게 납득이 안됐다. 오대표의 아내는 왜 핸드폰을 주운 사람에게 처음 전화가 왔을 때 그의 연락처를 묻거나 직접 약속을 잡지 않고 오대표의 사무실 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을까. 고객 응대의 달인 정주임은 왜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변태성을 드러낸 것일까. 오대표의 폭력적인 언사 때문에 서서히 오기가 발동하며 악마성이 점층되는 게 좀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오대표는 정주임이 혼내주라고 한 두 사람의 행방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아냈을까. 정주임이 지시한 거라면, 그는 성추행남의 차가 어디에 주차해 있는지, 청소기 노인이 아침에 어느 공원을 조깅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오대표는 왜 하필 으슥한 뒷골목도 아닌 백주의 공원에서 노인을 린치하는 걸까. 정주임은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한 녀석이 그 시각 어느 피씨방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등등.

이런 의문들이 해결되지 않으니, 마지막의 반전은 여운도 충격도 주지 않는 사족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모든 요소들이 치밀하고도 설득력 있게 맞물려 있어야 하는 스릴러 치고는 이야기의 허점이 너무 많이 보인다. 설령 시나리오엔 다 들어 있었지만 러닝타임의 압박 때문에 생략된 거라 할지라도, 그런 사정까지 이해하고 넘어갈 관객은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잔가지를 치고, 디테일을 조금 더 보강했더라면 꽤 훌륭하고도 의미 있는 스릴러가 될 뻔한 <핸드폰>은, 110% 공감했지만 2% 넘치는 바람에 김 빠진 사이다가 됐다. 그리하여 배우들의 호연(특히 엄태웅!)과 꽤 잘 설계된 장면 연출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관객들의 공감 욕구를 끝내 '소외'시키고 말았다. 뭐든 과유불급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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