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새벽 3시의 음악들...

음악 이야기 2009. 2. 23. 01:4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몇 달 전부터 KBS 2FM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객원 DJ로 음악을 틀고 있다.
다음은 매주 일요일 새벽 3시부터 4시까지 방송한 트랙 리스트이다.

밥 딜런의 평전을 두 번째 읽고 있다.
살아 있는 아티스트의 평전을 읽는 다는 것은 묘한 느낌이다.
마치 산 채로 미이라를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 'I'm not there'에 랭보로 등장한 벤 위쇼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면 아무 것도 하지마라."

자신의 평전을 살아서 읽는 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오정연의 3시와 5시 사이 - 2월 1일 객원 DJ 선곡>

1. Galaxy Bounce / Chemical Brothers
2. Strike It Up / Black Box
3. Jazz Machine / Black Machine
4. Love Song / Love
5. Solo / 다이나믹듀오
6. Never Let Me Go / Bill Evens
7. Forget Her / Jeff Buckley


Forget Her - Jeff Buckley

단,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 비운의 아티스트.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주술처럼 청자를 사로잡는다.
미시시피 강에서 뜬금(!)없는 수영을 즐기다 그대로 삶을 마감해버린 이 우울한 보컬리스트는,
공기의 진동 속으로 자신의 감성을 때로는 농밀하게, 또 때로는 희석시켜 전달한다.
평온했던 감상자의 약한 감정의 고리를 찾아내 일순간 흔들어 놓곤,
눈물을 쏟기 직전 꼭 그 만큼의 위로를 건낸다.

자살로 삶을 마감한 아버지의 뒤를 따르듯, 느닷없이 떠나버린 그의 목소리가 그리운 날은,
누군가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눈물이 눈가에 가득 고인 날이라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오정연의 3시와 5시 사이 - 2월 8일 객원 DJ 선곡>

1. Family affair / Sly & the family stone
2. Pick up the pieces / Candy Dulfer
3. Jump street / Herb Alpert
4. Wishing on a star / Paul weller
5. Move on up / Curtis Mayfield
6. 걱정하지마 / H2O
7. I saw the light / Keiko Lee


Move On Up - Curtis Mayfield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이 흑인 아티스트는 그가 생전에 남긴 음악적 성과에 비해
국내엔 그리 높은 지명도를 획득하지 못한 인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음악의 빛나는 아우라가 손상을 입을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1942년 출생으로 시카고 소울의 개척자로서 음악계에 한획을 그었다.
기타리스트이자, 독특한 가성을 사용한 보컬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다.
60년대 그룹 Impressions을 이끌고 소울 음악을 선보인 커티스 메이필드는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상업적인 작법으로부터 떨어져 라틴 리듬과 혼 섹션의 독특한 결합을 시도 했다.
또한 당시로선 흔치 않은 싱어-송라이터 소울 아티스트였으며,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적인 영감의 한 축으로도 작용했을만큼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사이키델릭 록과 소울 펑크라는 이질적인 결합을 현실화 시켜냈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로 소개하는 <Move on up>은 일렉트로니카 그룹 Bran Van 3000이
<Astounded>에 샘플링으로 사용해 오마쥬를 바친 곡이기도 하다.
소울 펑크와 디스코의 시대를 예견한,
아니 태동시킨 또 한 명의 거장이 선사하는 유사이전을 감상해 보시라.



<오정연의 3시와 5시 사이 - 2월 15일 객원 DJ 선곡>

1. Nice / Duran Duran
2. Enjoy / D'sound  
3. Undo / Astro Bits
4. I'll be waiting /  Clive Griffin
5.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 Dianne Reeves
6. (it's just) Talk / Pat Metheny  
7. So what / Jeff beck
8. Dreams come true / Brand new Heavies



Enjoy (Live) - DSound
북유럽의 애시즈 재즈 그룹 D'Sound의 <Enjoy>는
몇 년 동안이나 내 MP3의 트랙 리스트에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 남아 있는 곡이다.

댄스 음악이란 참 묘한 음악이다.
경쾌한 리듬으로 마음껏 몸을 들썩이게 만들면서도
그 내면엔 단조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 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한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아무 근거 없는 찬사를 늘어 놓는 젊은 날의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그렇지 않았던가?
클럽에서 밤새 미친 듯 춤을 추면서도 해결되지 않았던 원인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렸던 기억들...

스스로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아직도 이런 류의 음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인가 하는 것이다.


 

<오정연의 3시와 5시 사이 - 2월 22일 객원 DJ 선곡>

1. Got to get into my life / Earth wind & Fire
2. Six play / George Benson
3. Move in the light / Two Ton Shoe
4. Teddy Picker / Arctic Monkeys
5. Hard on my love / Robin Thicke  
6. Hollywood Nocturne / Brian Setzer Orch
7. You made it / DJ Shadow
8. Shudder & King of snake / Underworld


King of Snake - Underworld

작년 펜타포트 페스티벌의 대미를 장식한 Underworld는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수록곡 <Born slippy>를 통해 국내 팬들에게 알려진 그룹이다.
1988년 결성 당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는 칼 하이드와 키보드의 릭 스미스 2인조 포맷이었지만,
뒤늦게 DJ 대런 에머슨을 팀에 받아 들이며 3인조 포맷으로 전환했다.
단순한 미디 사운드가 아닌 실제 연주를 곡에 삽입한다는 점에서 기타 그룹들과의 차별성을
찾을 수 있다.

일렉트로니카 그룹의 특성상, 클럽의 조명이 제거된 상태에서 100%의 감흥을 느끼기엔 무리가 있지만,
한 번이라도 이들의 음악에 신내림을 받은 클러버들이라면, 한 동안 벗어나기 힘든 약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약물과 대마초가 일반화된 유럽의 클럽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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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요즘 미국영화들이 심상치 않다. <본 얼티메이텀> <아이언 맨> <다크 나이트> 등이 제시한 할리우드 진영의 미학적 약진과 더불어, 최근 몇년새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전후해 극장에 걸리는 미국영화들은 묵직하고도 창의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지난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비 블러드>가 그런 에너지의 욱일승천을 확인시켰다면, 올해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들은 그 파장이 이들 안팎에서 전방위적으로 퍼져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공개된 <체인질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다우트>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비롯, 개봉을 앞두고 있는 <프로스트 vs. 닉슨>까지 가히 현기증이 날만큼 걸작들의 향연이다. 이런 마당이니 아직까지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와 <밀크> <슬럼독 밀리어네어> <레슬러> 등에 대한 신뢰와 호기심이 덩달아 하늘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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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시사회를 통해 본 <프로스트 vs 닉슨>은 올들어 지속되고 있는 내 감탄의 연대기에 방점을 찍어준 영화였다. 론 하워드가 메가폰을 쥔 영화는 "올해 최고 영화 중 하나"라고 추켜 세운 피터 트래버스의 극찬이 허풍이 아님을 증명한다.

두 이름 사이에 놓인 'vs'가 암시하듯, 이 영화는 두 남자의 대결 이야기다. 둘다 실존 인물이다. 한 사람은 영국 출신의 토크쇼 진행자 프로스트, 한 사람은 정적들을 도청한 대가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임기중 사임한 닉슨 전 대통령. 한 몫 단단히 챙기려는 동상이몽을 품고 두 사람은 TV 인터뷰를 통해 격돌한다. 국민의 공분을 산 닉슨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려는 진행자, 그리고 한물간 플레이보이 방송인을 제물 삼아 이 기회에 실추된 명예까지 회복하려는 닉슨의 입담 대결이, 마치 고수들이 일합을 겨루듯, 시종 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진행된다.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은 미디어와 정치 권력의 함수 관계에 대한 무시못할 시사점을 던진다. 어떻게 상업적 목적과 진실을 동시에 추구할 것인가.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놓고 TV 매체의 막전과 막후에서 벌어지는 진실 공방과 미디어 산업 내의 역학 관계는 방송법 개정안의 상정을 앞두고 또다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우리의 시점에서도 흥미로운 레퍼런스가 아닐 수 없다.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긴 정치적 부패의 상징자에게 보내는 조롱의 유머는 보너스다.  

론 하워드의 속도감 넘치면서도 정교한 연출은, 두 남자의 '말빨' 드라마를 한 편의 흥미진진한 무협영화처럼 느끼게 한다. 데이빗 프로스트와 닉슨 전 대통령의 인터뷰 영상을 기초로 2006년 초연된 원작 연극의 생동감 넘치는 각본을 만들어낸 피터 모건의 공이 크지만, 연극에서 영화로 그대로 옮겨온 두 배우, 즉 프로스트 역의 마이클 쉰과 닉슨 역의 프랭크 란젤라의 내공도 한치의 빈틈없이 완벽하다. 각각 영국과 미국 연극계의 대표 선수들이 스크린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의 실력 대결을 펼친다. 3월 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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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헬싱키 신드롬'(또는 헬싱키 증후군)을 검색해보자. '스톡홀름 증후군'을 혼동한 것이라는 친절한 답변을 얻게 될 것이다. '헬싱키 신드롬'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스톡홀름 신드롬 대신 헬싱키 신드롬을 사용하곤 한다. 더불어 '헬싱키 신드롬'이라 말하면 찰떡같이 '스톡홀름 신드롬'을 잘못 말한 것이라고 알아듣기까지 하니, 이 현상은 생각보다 전 범위에 걸친 대중적 오류임이 분명하다.

[다이하드1](1988)에는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카토미 빌딩이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정보가 미디어에 노출된 후, 방송국은 인질사건 전문가를 초빙해 생방송을 진행한다. 이때 초대된 범죄심리학 전문가인 하셀도르프 박사는 인질로 붙잡힌 사람들이 범인에게 심리적으로 동화되는 현상에 대해 언급하며 '헬싱키 신드롬'이라 말한다. 물론 이것은 틀린 용어이다. 그런데 잘못을 지적해야 할 방송 진행자는 한술 더 떠 '스웨덴의 수도 헬싱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몇 년 전 가까운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스톡홀름 신드롬'대신 '헬싱키 신드롬'이라 말한 적이 있다. 말할 당시에도 헬싱키가 맞는지 스톡홀름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다른 이들의 의견을 구했는나, 확실한 답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강경하게 스톡홀름을 주장하던 이들도 헬싱키가 맞을 수 있겠다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다이하드] 1편이 대화 주제에 올랐다. 그 영화를 보기 전에는 분명히 정확한 용어를 알고 있었는데, 영화에서 스톡홀름과 헬싱키를 혼동하는 장면을 본 다음부터 자신도 스톡홀름이 맞는지 헬싱키가 맞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영화에서 언급한 도시가 스톡홀름이면 헬싱키가 맞는 용어이고, 그 반대로 헬싱키라고 했다면 스톡홀름이 맞는 것인데, 정작 영화에서 박사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으니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는 별 소득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결국 우리는 이 답답한 풍경을 두고 「잘못된 정보가 강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유입되어, 알고 있던 정보마저 혼란에 빠트리는 현상」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헬싱키 신드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자고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인질이 범인에게 동화되는 심리현상이 '스톡홀름 신드롬'일 경우에 한해. 만약 그 용어가 '헬싱키 신드롬'이라면 우리가 명명하기로 현상은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불러야 하리라.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스톡홀름 신드롬'을 검색해 보았다. - 스톡홀름이 맞는 표현이구나. 그렇다면 앞으로 「알던 것도 모르게 만드는 잘못된 정보」는 '헬싱키 증후군'으로 불러야겠는걸. - 그날 모임에 참석하였던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스톨홀름 신드롬'을 검색하였다 한다. 그날 이후 우리는 '헬싱키 신드롬'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곤 하였다.

몇 번의 위기를 잘 넘겨 제법 장수하고 있는 KBS 연예오락 프로그램 <상상플러스>가 내게는 '헬싱키 신드롬'에 해당한다. 올바른 우리말 사용을 위해 기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연자가 익살스러운 설명을 덧붙이며 잘못된 단어를 정답으로 제시하는 광경이 반복되니,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정답이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고, 중간에 등장한 틀린 맞춤법이 더 강한 기억으로 자리잡는다.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틀린 정보가 더 강하게 인지되는 현상. 이 외에도 여러 경우가 있다. '근초고왕'과 '근고초왕'은 어떠한가. 친구가 '근고초왕'으로 써서 틀렸다는 말을 한 뒤부터 근고초가 맞는지 근초고가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했고, 국사시험 직전까지 근초고근초고를 되뇌었지만 막상 시험지를 받아들면 근고초가 어른거려 머리를 쥐어뜯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슬라예보 지젝'도 마찬가지이며, '시뮬라크르'와 '시뮬라르크' 역시 한 두 번 혼란스러워 한 게 아니니, 이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 비법을 전수받고 싶을 뿐이다.

혼란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근초고왕'을 '근고초왕'으로 기억하는 경우는, 근초고에 비해 근고초가 발음하기 수월하며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거센 발음인 'ㅊ'이 '근'과 '고' 사이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뒤에 놓이는 것이 어휘의 안정감을 살리는데 더 유리한 편이다 . 또한 '고초'라는 단어의 익숙함이 '근고초'에 더 힘을 싣게 만든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르크' 역시 마찬가지 경우이다. 발음이 강한 'ㅋ'이 '르' 앞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제일 뒤에 들어가는 것이 단어의 안정감을 주며, '라'와 '르'가 연결될 때 발음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슬라보예 지젝'을 '슬라예보 지젝'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사라예보'라는 지명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반면, 스톡홀름과 헬싱키의 경우는 [다이하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심리학 박사가 헬싱키로 잘못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앵커가 '스웨덴의 수도 헬싱키'라 덧붙임으로써 이중의 오류를 일으킨다. 박사는 앵커의 말을 수정하며 헬싱키는 핀란드의 수도라고 말하는데, 그 때문에 박사의 '헬싱키 신드롬'이라는 말은 높은 신뢰도를 확보하게 된다. 이 영화로 인해 '헬싱키 신드롬'은 강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머리속에 자리잡게 되었고, '스톡홀름 신드롬'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한 채 오류를 유발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글 역시 '헬싱키 신드롬'에 해당한다. 이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아마 스톡홀름신드롬과 헬싱신드롬을 헷갈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근초고왕과 근고초왕을. 예언하건데,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 몇몇은 앞으로 '스톡홀름 신드롬'과 '헬싱키 신드롬'을 혼동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생각하겠지. "그 때 그 글을 읽지만 않았더라도 스톡홀름신드롬과 헬싱키신드롬를 혼동하지는 않았을텐데"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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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 잔인한 심리보고서

영화 이야기 2009. 2. 17. 09:47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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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로 여겨질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영화의 출연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에 대해선, 많은 상찬이 이어진 마당이니 따로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는 일은, 어쩌면 상영관에 불이 켜지고 화장실에 다녀온 뒤에나 한숨 돌리며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소름 끼치는 연기 뿐 아니라 극 자체가 갖는 흡인력도 대단하기 때문이다.

동명 연극의 원작자 존 패트릭 샌리가 직접 연출한 영화 <다우트>는 제목 그대로 의심에 대한 영화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건 사유하고 있는 내 자신이었다는, 데카르트의 그 방법적 회의가 가리키고 있는 의심이 아니라, 여기선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불신과 혐오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알로이시스 교장 수녀(메릴 스트립)는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가 지적했듯, 단지 플린 신부(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긴 손톱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며, 그가 차에 설탕을 세 개나 넣는 게 싫었던 것 뿐이다. 물론 보수와 진보라는 교육관의 보이지 않는 대립이 배경으로 작용했겠지만, 신념의 발현태가 행동이라면 알로이시스는 플린 신부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혐오는 제임스 수녀의 사려 깊지 않은 추측에 힘입어 플린 신부가 흑인 학생과 동성애적 행위를 했다는 의심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의심은 플린 신부의 저항에 부딪히며 확신으로 증폭된다. 플린 신부의 입장에서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지만, 알로이시스 수녀의 입장에서는 근거가 충분하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관이다. 그녀는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를 보며 우리는 쉽게 플린 신부의 입장에서 분통 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상황을 연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근거 없는 직관에 휩싸여 살고 있는가. 혐오가 의심을 부르고,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비 논리적 상황을 얼마나 자주 목격하고 있는가.

싫은 건 그냥 싫은 것이다. 이유가 없다. 불과 1년 반 전에는 이게 다 다 무현 때문이었고, 지금 세상에선 이게 다 MB 때문이다. 빈자는 게을러서 가난한 거고, 부자들은 부도덕해서 풍족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쥐뿔도 없이 잘난 척 하고 싶어하고, 대중은 우매하기 이를 데 없어서 쉽게 조작의 대상이 된다. 구체는 휘발되고, 일반화된 적들이 가득하다. 이해보다 혐오가 빠르다. 관용보다 적대시가 편리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의심이 떠나지 않는다며 제임스 수녀를 붙잡고 통곡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에게서, 우리는 의심과 혐오를 지니고 살아가는 자의 불행을 절감한다. 그리고 나 역시 플린 신부보다 알로이시스에게 훨씬 더 가까이 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다우트>는 그 어떤 심리학 논문보다 더 냉철한, 잔인할 정도로 냉소적인, 우리 자신에 대한 심리 보고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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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프리뷰가 아닌 리뷰이므로 이미 영화를 본 분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목적으로 합니다. 당연히 영화를 못본 관객들 입장에선 스포일러로 여겨질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시간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훼손할지라도 어떻게든 자연을 지배해온 인간이 끝까지 지배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일 것이다. 시간을 뺀 모든 것은 소멸한다. 시간이 그렇게 만들지만 결코 제어할 수 없다. 시간의 제어라는 설정은 그래서 자주 판타지의 영역으로 포섭돼 왔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 머신은 인간의 정복과 지배의 역사에서 도도하게 예외로 남은, 시간에 대한 이성과 과학의 질투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면, 이라는 상상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회한에 대한 다른 차원의 페이소스를 제공한다. 하루만 다시 살 수 있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그런 환상을 앙증맞게 표현하고 있다.

데이비드 핀처의 역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모티브를 제공한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은 여전히 계몽주의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1920년대의 문화적 지형에서 쓰여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역시 시간의 순차성, 또는 신성에 대한 과학적 이성의 반발심을 드러내고 있다.

피츠제럴드에게 이 소설의 영감을 줬다는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앨버트 비글로페인이 쓴 그의 전기는 기록했다.

전지전능한 신께서 인간을 창조할 적에 내가 그 분을 보조할 수 있었으면 인간이 지금과는 정반대로, 즉 늙은 몸으로 삶을 시작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늙은 몸으로 태어나 노년의 비탄과 무분별로 삶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젊어진다면 나이 먹는 것을 꺼려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늙어가는 게 아니라 젊어지는 삶을 살게 되니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소설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보경 옮김, 노블마인 출간]에서 인용
)



그러나 막상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시간의 역류가 주인공에게 그리 행복한 삶을 선사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할아버지의 외형으로 태어난 벤자민은 처음엔 사교계의 평판을 의식하는 부모로부터 설움을 당하고, 너무 젊어진 노년에는 아들에게조차 삼촌이라고 부르라는 모욕을 감수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니까 짐짓 치기 넘치게 신성에 대한 거역을 시도했던 소설은 이내 신성의 위대함, 즉 시간의 순차성에 대한 복종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을 재해석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제목을 배신하되 시간의 절대성에 조금 더 굴종한다. 할아버지의 몸과 정신으로 태어난 소설의 벤자민과 달리 얼굴만 할아버지이지 아기의 몸과 정신 연령을 가지고 태어난 영화 속의 벤자민은 말하자면 시간을 거꾸로 사는 게 아니라 괴이한 병이 걸린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까 시간을 역류하는 건 오로지 그의 얼굴일 뿐이다. 여기서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어하는 영화의 전제는 모순에 빠진다. 거꾸로 가는 건 오로지 벤자민의 육체일 뿐이므로, 벤자민의 시간은 결코 거꾸로 가는 게 아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욕망이 읽힌다. 그러니까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육체의 늙어감을 안타까워할 뿐 시간이 존재를 소멸하는 과정 자체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신성을 거역하지 않되, 그 안에서 인간의 무력한 유한성이 남기는 표상이 싫은 것이다. 주름살이, 성긴 머리칼이, 쇠락한 성적 욕망이 안타까운 것이다.

영화는 늙어감의 역치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길 위에서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을 찰나 또는 순간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번개를 일곱 차례나 맞은 노인의 회고 속에서 그의 인생은 강렬했던 순간의 나열로 소환된다. 즉 자연의 느닷없는 기습이 그의 순간을 만든 것이다.

벤자민이 엘리자베스 애봇 여사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그러니까 심야 데이트에 나선 거리의 수은주가 너무 낮아 벌벌 떤 것도, 보드카를 사이에 두고 키스를 나눈 것 역시 순간의 찬란함이었다. 뉴욕의 데이시를 찾아갔던 것도 순간의 선택이었고, 돌아온 데이시와 사랑을 확인한 것도 순간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거역하고 싶어하는 시간이, 자연이 선사한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벤자민의 인생은 늙어감의 역치라는 점에서 특수하지만 순간의 점철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상한 인생에 흔쾌히 감정을 얹을 수 있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를 탁월하게 재해석한 핀처의 영민함이 빛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소설보다 100배 더 흥미로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시간은 소멸을 부르고 인간은 소멸 앞에서 무력하다. 그러나 순간에 대한 기억을 유전함으로써 끊임 없이 시간의 잔혹함에 도전한다. 물질의 최소단위가 우주만큼 광활하듯, 우리의 유한한 인생은 순간이라는 단위로 무한대로 미분된다. 영화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순간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언젠가 끝을 맺을 우리의 인생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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