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헬싱키 신드롬'(또는 헬싱키 증후군)을 검색해보자. '스톡홀름 증후군'을 혼동한 것이라는 친절한 답변을 얻게 될 것이다. '헬싱키 신드롬'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스톡홀름 신드롬 대신 헬싱키 신드롬을 사용하곤 한다. 더불어 '헬싱키 신드롬'이라 말하면 찰떡같이 '스톡홀름 신드롬'을 잘못 말한 것이라고 알아듣기까지 하니, 이 현상은 생각보다 전 범위에 걸친 대중적 오류임이 분명하다.

[다이하드1](1988)에는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카토미 빌딩이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정보가 미디어에 노출된 후, 방송국은 인질사건 전문가를 초빙해 생방송을 진행한다. 이때 초대된 범죄심리학 전문가인 하셀도르프 박사는 인질로 붙잡힌 사람들이 범인에게 심리적으로 동화되는 현상에 대해 언급하며 '헬싱키 신드롬'이라 말한다. 물론 이것은 틀린 용어이다. 그런데 잘못을 지적해야 할 방송 진행자는 한술 더 떠 '스웨덴의 수도 헬싱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몇 년 전 가까운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스톡홀름 신드롬'대신 '헬싱키 신드롬'이라 말한 적이 있다. 말할 당시에도 헬싱키가 맞는지 스톡홀름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다른 이들의 의견을 구했는나, 확실한 답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강경하게 스톡홀름을 주장하던 이들도 헬싱키가 맞을 수 있겠다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다이하드] 1편이 대화 주제에 올랐다. 그 영화를 보기 전에는 분명히 정확한 용어를 알고 있었는데, 영화에서 스톡홀름과 헬싱키를 혼동하는 장면을 본 다음부터 자신도 스톡홀름이 맞는지 헬싱키가 맞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영화에서 언급한 도시가 스톡홀름이면 헬싱키가 맞는 용어이고, 그 반대로 헬싱키라고 했다면 스톡홀름이 맞는 것인데, 정작 영화에서 박사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으니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는 별 소득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결국 우리는 이 답답한 풍경을 두고 「잘못된 정보가 강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유입되어, 알고 있던 정보마저 혼란에 빠트리는 현상」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헬싱키 신드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자고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인질이 범인에게 동화되는 심리현상이 '스톡홀름 신드롬'일 경우에 한해. 만약 그 용어가 '헬싱키 신드롬'이라면 우리가 명명하기로 현상은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불러야 하리라.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스톡홀름 신드롬'을 검색해 보았다. - 스톡홀름이 맞는 표현이구나. 그렇다면 앞으로 「알던 것도 모르게 만드는 잘못된 정보」는 '헬싱키 증후군'으로 불러야겠는걸. - 그날 모임에 참석하였던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스톨홀름 신드롬'을 검색하였다 한다. 그날 이후 우리는 '헬싱키 신드롬'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곤 하였다.

몇 번의 위기를 잘 넘겨 제법 장수하고 있는 KBS 연예오락 프로그램 <상상플러스>가 내게는 '헬싱키 신드롬'에 해당한다. 올바른 우리말 사용을 위해 기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연자가 익살스러운 설명을 덧붙이며 잘못된 단어를 정답으로 제시하는 광경이 반복되니,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정답이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고, 중간에 등장한 틀린 맞춤법이 더 강한 기억으로 자리잡는다.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틀린 정보가 더 강하게 인지되는 현상. 이 외에도 여러 경우가 있다. '근초고왕'과 '근고초왕'은 어떠한가. 친구가 '근고초왕'으로 써서 틀렸다는 말을 한 뒤부터 근고초가 맞는지 근초고가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했고, 국사시험 직전까지 근초고근초고를 되뇌었지만 막상 시험지를 받아들면 근고초가 어른거려 머리를 쥐어뜯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슬라예보 지젝'도 마찬가지이며, '시뮬라크르'와 '시뮬라르크' 역시 한 두 번 혼란스러워 한 게 아니니, 이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 비법을 전수받고 싶을 뿐이다.

혼란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근초고왕'을 '근고초왕'으로 기억하는 경우는, 근초고에 비해 근고초가 발음하기 수월하며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거센 발음인 'ㅊ'이 '근'과 '고' 사이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뒤에 놓이는 것이 어휘의 안정감을 살리는데 더 유리한 편이다 . 또한 '고초'라는 단어의 익숙함이 '근고초'에 더 힘을 싣게 만든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르크' 역시 마찬가지 경우이다. 발음이 강한 'ㅋ'이 '르' 앞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제일 뒤에 들어가는 것이 단어의 안정감을 주며, '라'와 '르'가 연결될 때 발음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슬라보예 지젝'을 '슬라예보 지젝'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사라예보'라는 지명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반면, 스톡홀름과 헬싱키의 경우는 [다이하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심리학 박사가 헬싱키로 잘못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앵커가 '스웨덴의 수도 헬싱키'라 덧붙임으로써 이중의 오류를 일으킨다. 박사는 앵커의 말을 수정하며 헬싱키는 핀란드의 수도라고 말하는데, 그 때문에 박사의 '헬싱키 신드롬'이라는 말은 높은 신뢰도를 확보하게 된다. 이 영화로 인해 '헬싱키 신드롬'은 강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머리속에 자리잡게 되었고, '스톡홀름 신드롬'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한 채 오류를 유발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글 역시 '헬싱키 신드롬'에 해당한다. 이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아마 스톡홀름신드롬과 헬싱신드롬을 헷갈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근초고왕과 근고초왕을. 예언하건데,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 몇몇은 앞으로 '스톡홀름 신드롬'과 '헬싱키 신드롬'을 혼동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생각하겠지. "그 때 그 글을 읽지만 않았더라도 스톡홀름신드롬과 헬싱키신드롬를 혼동하지는 않았을텐데"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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