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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프리뷰가 아닌 리뷰이므로 이미 영화를 본 분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목적으로 합니다. 당연히 영화를 못본 관객들 입장에선 스포일러로 여겨질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시간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훼손할지라도 어떻게든 자연을 지배해온 인간이 끝까지 지배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일 것이다. 시간을 뺀 모든 것은 소멸한다. 시간이 그렇게 만들지만 결코 제어할 수 없다. 시간의 제어라는 설정은 그래서 자주 판타지의 영역으로 포섭돼 왔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 머신은 인간의 정복과 지배의 역사에서 도도하게 예외로 남은, 시간에 대한 이성과 과학의 질투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면, 이라는 상상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회한에 대한 다른 차원의 페이소스를 제공한다. 하루만 다시 살 수 있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그런 환상을 앙증맞게 표현하고 있다.

데이비드 핀처의 역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모티브를 제공한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은 여전히 계몽주의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1920년대의 문화적 지형에서 쓰여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역시 시간의 순차성, 또는 신성에 대한 과학적 이성의 반발심을 드러내고 있다.

피츠제럴드에게 이 소설의 영감을 줬다는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앨버트 비글로페인이 쓴 그의 전기는 기록했다.

전지전능한 신께서 인간을 창조할 적에 내가 그 분을 보조할 수 있었으면 인간이 지금과는 정반대로, 즉 늙은 몸으로 삶을 시작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늙은 몸으로 태어나 노년의 비탄과 무분별로 삶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젊어진다면 나이 먹는 것을 꺼려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늙어가는 게 아니라 젊어지는 삶을 살게 되니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소설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보경 옮김, 노블마인 출간]에서 인용
)



그러나 막상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시간의 역류가 주인공에게 그리 행복한 삶을 선사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할아버지의 외형으로 태어난 벤자민은 처음엔 사교계의 평판을 의식하는 부모로부터 설움을 당하고, 너무 젊어진 노년에는 아들에게조차 삼촌이라고 부르라는 모욕을 감수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니까 짐짓 치기 넘치게 신성에 대한 거역을 시도했던 소설은 이내 신성의 위대함, 즉 시간의 순차성에 대한 복종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을 재해석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제목을 배신하되 시간의 절대성에 조금 더 굴종한다. 할아버지의 몸과 정신으로 태어난 소설의 벤자민과 달리 얼굴만 할아버지이지 아기의 몸과 정신 연령을 가지고 태어난 영화 속의 벤자민은 말하자면 시간을 거꾸로 사는 게 아니라 괴이한 병이 걸린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까 시간을 역류하는 건 오로지 그의 얼굴일 뿐이다. 여기서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어하는 영화의 전제는 모순에 빠진다. 거꾸로 가는 건 오로지 벤자민의 육체일 뿐이므로, 벤자민의 시간은 결코 거꾸로 가는 게 아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욕망이 읽힌다. 그러니까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육체의 늙어감을 안타까워할 뿐 시간이 존재를 소멸하는 과정 자체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신성을 거역하지 않되, 그 안에서 인간의 무력한 유한성이 남기는 표상이 싫은 것이다. 주름살이, 성긴 머리칼이, 쇠락한 성적 욕망이 안타까운 것이다.

영화는 늙어감의 역치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길 위에서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을 찰나 또는 순간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번개를 일곱 차례나 맞은 노인의 회고 속에서 그의 인생은 강렬했던 순간의 나열로 소환된다. 즉 자연의 느닷없는 기습이 그의 순간을 만든 것이다.

벤자민이 엘리자베스 애봇 여사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그러니까 심야 데이트에 나선 거리의 수은주가 너무 낮아 벌벌 떤 것도, 보드카를 사이에 두고 키스를 나눈 것 역시 순간의 찬란함이었다. 뉴욕의 데이시를 찾아갔던 것도 순간의 선택이었고, 돌아온 데이시와 사랑을 확인한 것도 순간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거역하고 싶어하는 시간이, 자연이 선사한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벤자민의 인생은 늙어감의 역치라는 점에서 특수하지만 순간의 점철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상한 인생에 흔쾌히 감정을 얹을 수 있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를 탁월하게 재해석한 핀처의 영민함이 빛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소설보다 100배 더 흥미로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시간은 소멸을 부르고 인간은 소멸 앞에서 무력하다. 그러나 순간에 대한 기억을 유전함으로써 끊임 없이 시간의 잔혹함에 도전한다. 물질의 최소단위가 우주만큼 광활하듯, 우리의 유한한 인생은 순간이라는 단위로 무한대로 미분된다. 영화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순간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언젠가 끝을 맺을 우리의 인생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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