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구역: 얼티메이텀

영화 이야기 2009. 4. 13. 11:09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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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해외 액션 영화들의 속편에는 2편, 3편과 같은 숫자를 쓰지 않는 게 유행인가 보다. 지난 주말 개봉한 <분노의 질주>는 '오리지널'이고, 이 영화 <13구역>에는 '얼티메이텀'이라는 부제가 따라 붙었다. 이게 다 잊혀질만할 때 '비긴즈'하고 '리턴즈'한 할리우드 맨들의 영향 때문이련가?

아무려나, 2006년 국내 개봉했던 <13구역>의 속편격인 <13구역: 얼티메이텀>은 그 부제에 걸맞게 궁극의 액션을 선보이려는 야심으로 가득차 있다. '프랑스의 제리 브룩하이머' 뤽 베송이 제작한 이 영화는 그가 줄곧 천착해온 맨몸 아날로그 액션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요즘엔 액션 장면에서 와이어나 CG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또 다른 흥행 포인트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 역시 그렇다. 100% 리얼 액션임을 영화의 안과 밖에서 자랑하고 또 자랑한다. 과연, 바로 그 리얼 액션을 수행하느라 엄청 고생했을 주인공들, 데이비드 벨과 시릴 라파엘리는 1편과 마찬가지로 건물 사이를 붕붕 날아 다닌다. 이른바 '파쿠르' 액션이다. 속편인만큼 스케일도 좀 커졌다.

영화는 액션 장면의 박진감을 강조하고 있지만, <13구역: 얼티메이텀>은 그 설정만으로도 꽤 흥미로운 영화다. 프랑스의 근미래, 13구역은 갱들의 소굴이자 우범지대이여, 이민자들과 빈곤층이 모여 사는 곳이다. 13구역을 주류 세계와 격리시킨 정부는, 경찰 살해 혐의를 뒤집어 씌워 이곳을 아예 파괴시켜 버리고자 한다. 그런 의도 뒤에 또 다른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찰 데미안은, 13구역에 거주하는 친구 레이토를 비롯, 여러 계파의 갱들과 힘을 합쳐 맨몸으로 맞서 싸운다.

정당한 약자와 부당한 강자의 이항대립. 이런 유의 액션 영화가 채택하기에 안성맞춤 플롯이다.
 헌데 영화의 이런 설정은, 프랑스가 처한 정치사회적 상황과 맞물리며 묘한 풍자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숱한 이민자들을 사회의 밑바닥으로 내모는 현실에 대한, 제법 뼈 있는 문제제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막대한 개발 이익을 탐내는 거대 자본과 그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의 검은 뒷거래가 있다. 우리로서도 낯선 얘기가 아니다.

비단 프랑스의 상황으로만 국한시켜 볼 일도 아니다. 끊임 없이 타자들을 양산하며 이들을 게토로 격리해온 것은 제국주의, 또는 서구적 근대화와 늘 동행해온 과정이 아니던가. 그래서 13구역을 이스라엘과 서구 열강에 포위된 가자 지구, 또는 중동으로 해석한들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보느냐에 따라 쾌감의 척도도 달라지겠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건물 사이를 질주하거나 도약하는 이들의 액션 역시, 내겐 단순한 몸의 쾌감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물결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몸짓처럼 보였다. 영화는 이들이 현상의 부조리를 걷어낸 뒤 체제와 타협한다는 순박한 결말을 준비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런 곱씹을만한 구석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킬링타임용 영화 리스트에서 해방시켰다. 15세 관람가. 4월 1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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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자단, 그리고 '엽문'

영화 이야기 2009. 4. 9. 02:04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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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류> 1993 원화평

 
<황비홍>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연걸이 한물 간 듯한 홍콩 무협의 명맥을 이어나갈 무렵인 90년대 초반, 한 낯선 얼굴의 액션 배우가 내 눈에 번쩍 뜨였다. <철마류>라는 작품에 등장한 견자단이었다. 실제 이연걸에 맞먹는 무술 고수로 알려진 그는, 원화평 감독이 황비홍 붐에 슬쩍 편승해 청조 말기를 배경 삼아 연출한 이 영화에서 단박에 내 시선을 가로채고 말았다. 오홋! 저 이의 무공은 사뭇 남다른 걸! 나는 그의 강하면서도 유연한 액션 연기에 감탄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약간 느끼하다 싶을 정도의 꽃미남 계열이어서, 액션의 파괴력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내뿜지는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과연, 그는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이연걸의 아성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가 영화 감독이자 무술 감독으로, 홍콩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맹활약을 펼쳐 왔다는 사실을 아는 국내 관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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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2002, 장이모우


어쨌든 <철마류> 이후 견자단의 모습을 볼 기회가 드물어 아쉬었던 차에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에서 은모장천으로 등장한 그를 만나게 됐다. 견자단은 <황비홍 2>에 이어 또 한번 이연걸과의 멋진 액션 신을 조합해 냈다. 중력을 유린하며 힘과 부드러움의 현란한 교차를 드러내는 고수들의 대결! 무협 장르가 안겨줄 수 있는 극상의 쾌감을 추구하려는 장이모우의 야심을 부족함 없이 채운 견자단은,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액션 장면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고 수려한 대목을 짧고도 강렬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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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황후> 2008, 정소동

사실 견자단은 그가 가진 내공과 상관 없이, 영화계에선 초대형 빅스타로서의 대우를 받진 못해 왔다. 직접 제작하거나 연출한 작품들을 빼면 주로 훈남훈녀 스타들을 빛내주는 조연에 머문 경우가 더 많았다. 지난해 개봉한 <연의 황후>에서도 여명과 진혜림의 멜로 라인에 치중하느라 정작 견자단의 액션은 눈요기 정도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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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 2009, 엽위신


그런 견자단의 진면목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뒤늦게나마 만들어졌다. 곧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엽문>. 명실상부한 견자단의 영화라고 불러야 마땅할 정도로, 무술 대가 견자단의 명품 액션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영화 <엽문>은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영춘권 고수 '엽문'의 일대기를 다룬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스토리 라인은 다소 전형적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기에, 중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데 앞장선 엽문의 일화를 통해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 <엽문>이 남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무협 액션 영화로부터 기대하는, 인간의 신체가 맞부딪칠 때 파열되는 날 것 그대로인 충돌의 쾌감과 움직임의 미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미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팔과 다리의 동선과 상하체의 자세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견자단의 존재감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그의 '간지 작렬' 무술을 보고 있자면, 박태환이 힘찬 팔 짓으로 물을 가르거나 김연아가 트리플러츠를 위해 도약하는 모습을 볼 때 터져 나오는 그 감탄,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움을 갖게 된다. 그는 이소룡이나 성룡과 확연히 다르고, 이연걸과도 또 다른, 견자단만의 무술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영화적 시각화를 위해 아크로바틱한 요소들을 도입한 기존 액션과 선을 긋기에 더 찬란해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이 영화에서 액션이 아니라 '무술'을 보여준다.

시사회를 통해 본 영화 <엽문>에서 견자단의 얼굴엔 젊은 시절의 느끼한 꽃미남 이미지가 빠진 대신 중후한 카리스마가 들어차 있었다. 벌써 40대 중반이 훌쩍 넘어섰지만 배우 견자단의 전성기는 사실상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뒤늦게나마 물 만난 견자단을 만나니, 내가 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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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성장한 조직의 내부를 살펴보면, 대체로 4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 1그룹은 조직결성에 참여한 초기 멤버가 주축을 이룬다. 창립멤버로 분류되는 이들은 회사가 이익을 내지 못하는 초창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참여했다는 점에서 동지적 관계를 형성한다. 사극으로 치자면 개국공신 혹은 반정공신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회사가 성공을 거두었을 때 공(功)을 가장 많이 거둬들이는 것도 이들이다.

창립멤버인 1그룹의 노력으로 조직이 일정궤도에 오르면 규모 확장을 위한 인력 유입이 시급해진다. 여유 자금이 부족한 회사들은 이때 열정적이며 경력이 좋은 편임에도, 학벌 등의 조건으로 인해 낮은 임금을 받아온 이들을 채용한다. 이때, ‘회사가 성장하고 있으며, 현재는 높은 연봉을 제공하지 못하나 함께 고생한다면 그 공을 잊지 않겠다’는 인간적인 접근이 독려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회사는 흙속의 진주를 찾듯 알찬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이렇게 채용된 직원들은 자신의 희생에 보답이 있으리라는 기대로 주인의식을 발휘하게 된다. 그들의 열정으로 회사가 성장하면 외부 인사를 초빙해오는 단계가 진행된다. 화려한 경력의 외부 인사에게 높은 연봉을 약속하며 스카우트해옴으로써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한 고비를 넘기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면 조직은 느린 성장기로 돌입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열정은 많지 않으나 이러저러한 경력의 대리급과, 신입사원들을 충원하여 보통의 기업과 유사한 조직구조가 마련된다.

벤처회사의 상당수가 이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 회사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1그룹과 3그룹, 2그룹과 3그룹 사이에서 출현한다. 1그룹은 자신들이 쥐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능력이 출중한 3그룹을 견제하려 한다. 3그룹은 1그룹보다 높은 성과를 제시함에도 막상 중요한 결정 앞에서 대표가 1그룹을 신뢰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제기한다. 2그룹의 경우는 창립멤버만 아닐 뿐 어려운 시기에 낮은 처우를 감수하고 합류했음에도 대우가 1그룹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과, 뒤늦게 참여한 3그룹에게 더 큰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4그룹이 업무에 열정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1~3그룹이 버티고 있는데, 자신의 차례가 언제 오겠는가.

갈등이 장기화되면 2그룹과 3그룹에서 낙오자가 발생한다. 몇 사람은 조직에서 이탈하거나 4그룹으로 도태된다. 살아남으려면 1그룹을 견제할 세력 형성을 위해 2,3그룹이 연합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재편 과정에서 4그룹은 ‘라인’ 싸움에 휘말리고, 운이 없다면 썩은 동아줄을 잡은 채 조직 바깥으로 내몰리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과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김남주)는 조직의 정치적 생리를 간파한 후, 이를 이용하기로 결심한 인물들이다. 장준혁과 천지애는 자신의 바로 윗선과 빚어진 갈등을, 더 높은 윗선을 통해 해결하는 전략을 취한다. 남편의 상사인 한부장 부부와의 갈등을 김이사 부부를 통해 해결하려는 천지애와, 외과과장과의 갈등을 부원장을 통해 해결하려는 장준혁은 그런 면에서 유사하며, 그만큼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하겠다. 

1~4그룹이 나름의 규칙을 통해 안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는 상황에, 장준혁과 천지애는 ‘조커’를 들고 등장한다.  
‘조커’는 영향력의 정도에 따라 다시 셋으로 구분된다. ‘낙하산’, ‘에스컬레이터’, ‘핫라잇’. 낙하산은 말 그대로 남들이 차례대로 오른 계단을 무시한 채, 중간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지칭한다. 중간과정을 생략하였다는 점에서 유리하나, 그 자체가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어서 오히려 주변의 견제와 소외를 감당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는 남보다 빠르게 승진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배경이 있을 때 가능하다. 핫라잇은 윗선과 연결되어 있으나 그 선이 크게 신경을 써주지 않을 때에 해당한다.

에스컬레이터가 장기적 성공을 보장하는데 비해, 낙하산과 핫라인은 당사자의 처신과 주변인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직속상관과 동료들은 낙하산과 핫라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데, 이는 단순히 질투의 차원이 아니다. 이들은 낙하산과 핫라인이 조직의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점과, 그로 인해 조직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낙하산과 핫라인을 몰아내려 하고 그 때문에 낙하산과 핫라인은 소외되기 십상이니, 윗선과의 친분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윗선과의 ‘친분’이 ‘결속’으로 이어질 전망이 없다면 말이다.

장준혁은 외과과장을 누르기 위해 부원장을, 다시 외과과장 편에 선 부원장을 누르기 위해 의사회회장과의 인맥형성을 도모한다. 천지애 역시 양봉순을 누르기 위해 오영숙을, 오영숙을 이기기 위해 은소현과의 친분확보에 주력한다. 이들의 전략은 자칫하면 자신에게 화를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만약 ‘평강회’ 회원들 중 일부가 천지애 편에 서 ‘세력’을 형성하게 될 경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천지애는 이사부인을 견제하는 대표자의 역할을 떠안아야 한다. 애초에 장준혁은 과장 자리를 노린 것이니 ‘킹’을 쓰러트리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싸움을 시작한 것이지만, 남편의 취직이 목적이었던 천지애는 졸지에 ‘킹’과 싸우는 ‘폰(Pawn)’이 되지 않았는가. 들어가기도 힘든 회사, 시작부터 험난하니 ‘조직원’ 되기 참으로 눈물겹다.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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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드라마'와 '캔디형 드라마'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주인공이 캔디처럼 명랑활발한가에만 있지 않다. 신데렐라가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새어머니에 의해 신분을 빼앗겼다면, 고아원 출신인 캔디에게 신분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신 계급으로 볼 때 캔디는 '빨간 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씨'에 속하며, 신데렐라는 '소공녀'에 가깝다. 신데렐라의 계급상승에는 잃어버린 신분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신데렐라 드라마는 귀족으로 태어난 자가 다시 귀족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 시킨다. 주어진 계급적 운명에 순응하라고. 상류층으로 태어난 자가 겪는 부당함과 그들의 몰락을 내 이웃의 불행보다 더 긍휼이 여기라고.


MBC 월화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는 네 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김홍식(김창완) 이사와 오영숙(나영희)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커플은 모두 30대로, 엉켜있는 애정사를 과거로 한 채 회사 내 계급관계 속에서 재회한다. 천지애(김남주)는 고교시절 자신의 미모만 믿고 친구인 양봉순(이혜영)에게 모멸감을 주었으며, 그로 인해 연인이던 한준혁(최철호)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준 채 헤어진다. 그녀는 이후 한준혁보다 좋은 조건이었던 온달수(오지호)와 결혼하지만,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백수가 되고 만다.  




세 커플의 신분은 태생적 차이를 경계로 삼는다. 허태준(윤상현)과 그의 아내 은소현(선우선)이 재벌가 출신으로 태어날 때부터 상류층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천지애와 온달수는 별 다른 노력 없이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천지애는 빼어난 미모와 더불어 남자를 휘어잡는 능력까지 갖추었으니 특별히 큰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인생에서 실패할 일은 없었으며, 온달수 역시 천재적인 암기력을 바탕으로 큰 노력 없이 서울대 의예과를 입학한다. 반면 양봉순과 한준혁의 경우는 다르다. 한준혁은 과학고-명문대 출신이긴 하나 노력형 수재로, 퇴근 후에도 밤늦게까지 회사 일에 손을 놓지 못하는 인물이다. 양봉순 역시 피나는 노력으로 현재의 미모와 능력을 갖추었으니 이들 부부 역시 닮은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내조의 여왕> 속 인물들은 같은 계급의 상대와 결혼하였다. 재벌은 재벌끼리, 노력파는 노력파와. 천지애와 온달수 역시 큰 노력 없이 성공이 보장된 운명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피라미드로 위치시킨다면 제일 위에는 허태준-은소현이, 2단계에는 김홍식-오영숙, 3단계에 한준혁-양봉순이 놓이게 된다. 현재 온달수-천지애 부부는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천지애를 향한 허태준의 마음이, 온달수를 향한 은소현의 마음이 애정으로 발전할 조짐이어서 이들 두 사람의 신분상승이 어떠한 형태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만약 신분 상승이 이루어진다면 이들은 단숨에 2단계에 위치한 김홍식-오영숙 위에 군림할 수도 있다.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2,3단계에 올라 선 이들 입장에서 보자면 새치기도 이런 새치기가 없다.

소시민적 시청자라면 재벌가 출신 허태준 부부나 좋은 조건으로 태어난 천지애 부부가 아닌, 노력형 양봉순과 한준혁에게 자신을 대입해야 옳다. 그러나 한준혁과 양봉순 부부에 감정을 이입하기보다는 천지애가 타고난 운명에 맞게 여왕의 위치에 올라서고, 온달수가 뛰어난 머리와 학벌을 인정받기 바라는 심정이 되니, 무엇 때문에 이 노력형 부부를 응원하지 못하는지 궁금해진다. 신데렐라와 소공녀가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너무 오랫동안 세뇌당한 탓일까? 아니면 준혁과 봉순이 과거에 대한 앙갚음으로 지애와 달수를 괴롭히는 것이 쿨하지 못해 보여서인가.

양봉순과 한준혁의 문제는 그들의 노력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데 있다. 두 사람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바라보느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 삶을 즐기지 못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그 삶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왜 노력하는 자가 불행해야 하는가. 부단한 노력은 왜 콤플렉스의 부산물로 인식되어야만 하는가.


시청자들이 천지애와 온달수를 지지하는 것은 그들이 몰락한 귀족이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노력을 즐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천지애거나 양봉순이며, 온달수이자 한준혁이다. 잘못된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현재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 온 몸에 가시를 두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내조의 여왕>이 지닌 경쾌함은 과거를 후회하느라 허비하기 쉬운 현재를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즐거움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지애와 온달수가 허태준과 은소현의 사랑을 통해 신분을 상승하는 것이야 말로 이 드라마가 걱정해야 할 가장 큰 위험요소라 할 수 있다. (태봉씨가 몹시 매력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고속승진의 지름길을 선택함으로써 '신데렐라 드라마'의 전형을 택할 것인가,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노력하는 즐거움을 잃지 않을 것인가. 이 드라마의 선택이 궁금하다.

Posted by 늙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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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왜 왔니’ 올해의 발견

영화 이야기 2009. 4. 3. 11:13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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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2009년의 4분의 1이 지났을 뿐이고, 그 사이 개봉한 한국영화라봤자 채 열 편도 안 되는 마당에 올해의 발견이라는 제목을 뽑은 게 좀 오버다 싶긴 하다. 하지만 왠지 이 표현을 쓰고 싶어진다. <우리집에 왜 왔니>는 여하튼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 가히 최고라고 할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지난해의 발견이 나홍진(추격자), 장훈(영화는 영화다), 이경미(미스 홍당무)였다면, 이 영화를 연출한 여성 감독 황수아, 또 한번 여하튼, 2009년의 발견 리스트에 맨 첫번째로 이름을 올릴만한 걸출한 신인임에 틀림 없다.

아내를 잃고 죽기만을 꿈꾸는 남자(박희순)가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려는 찰나, 심한 악취를 풍기는 젊은 노숙자(강혜정)가 불쑥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침입한다. 여자는 남자의 자살을 방해한 뒤, 그를 묶고 감금한다. 정신세계가 4차원을 넘어 족히 6차원 쯤은 돼 보이는 여자는, 자신의 옛 애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필 그의 옆 집인 이 집을 자기 마음대로 근거지로 삼은 것이었다. 묶인 남자는 죽어도 지금 죽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이상한 여자와의 '주객전도' 동거를 시작한다.

내 주변에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영화의 다소 황당한 설정을 이유로, 튀어 보이려고 몸부림치는 실소 유발형 코믹 멜로가 아니겠냐는 의구심을 지니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단언컨대, 꽤 가슴 찡한 멜로다. 이렇게 얘기해보자. 감성이 메마른 탓인지 선남 선녀 나와서 눈물 콧물 흘리는 멜로 영화에 거의 감동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내가, 익숙한 이별 이야기에 매움의 강도를 높인 고춧가루를 섞어 관객의 입에 꾸역꾸역 집어 넣는 듯한 그 자극-반응의 눈물 서비스를 마뜩지 않아 했던 내가, 이 영화를 보다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주인공들은 울지 않는 순간에 말이다.

불혹의 영화기자를 울린 이유가, 이것이 노숙자 여성과 자살을 꿈꾸는 30대 남자라는, 동정을 유발하는 이른바 루저들의 사랑 이야기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집착과 헌신이 동행하는, 사랑이라는 양가적이고도 보편적인 감정의 진화를 놀랍도록 세밀한 흡인력으로 툭 던져 놓는데야 눈물을 안 흘리고는 배길 도리가 없다. 요컨대, 멜로의 핵심적 목표가 관계의 서사가 아니라 감정의 환기에 있다면, <우리집에 왜 왔니>는 그 목표를 완벽에 가깝게 수행한다. 여기에 CF와 뮤직 비디오 연출로 다져진 황수아 감독의 여성적 감수성은, 비현실적인 미장센이 장식으로만 그치지 않도록 하는 노하우를 알고 있는 듯 보였다.(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살짝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혜정
박희순의 연기 호흡이야 따로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강혜정은 뒤늦게나마 자신에게 꼭 맞는 배역을 만난 기쁨에 충만해 있는 듯 보였고, 절제와 과잉의 간극을 조절할 줄 아는 박희순, 관객의 감정선까지 미묘하게 조절한다. 15세 관람가. 4월 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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