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사우나 콤플렉스? 필러 성형으로 간편히 OK~

애경's 3M+1W 2009. 5. 6. 20:0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의학기사를 써보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의학용어를 빌려오지 않으면 다분히 선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소재이기에 자료조사와 간단한 인터뷰를 좀 진행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수요가 많으니 공급이 늘어나는 거로군. 뭔 소리냐고? 얘기는, 며칠 전 모 매니지먼트사 이사와의 술자리에서 나온 ‘가장 hot했던’ 화제로부터 시작된다.

“내년부터 우리 매니저들 생일 선물로 제가 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30방이요. 하하하하” “엥? 30방? 그게 뭐예요?”
“실은 얼마 전에 우리 대표가 60방 시술을 받으셨거든요.”

필러 주사 얘기였다. 언젠가 취재를 빌미로 성형외과를 찾았던 적이 있는데, 의사는 ‘필러로 팔자주름과 이마의 굴곡만 채워도 훨씬 동안이 될 것’이라고 부추겼다. 웬걸. 지나치게 어려 보여서 고민인 내게 그런 제안을?!? 어쨌든 그 때 알았다. 수술을 하지 않아도, 꺼진 볼이 부풀어 오르고, 뭉툭한 콧대가 날카롭게 솟아나고, 이마 주름 혹은 팔자 주름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미녀 되는 건 순식간, 그것이 바로 필러 성형이 구현해 내는 마술이라는 것을.

한데 이 필러 성형이, 소리 소문 없이, 비뇨기과에서도 시술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꽤 오래 전부터. 

“얼마 전 대표가 사우나 갔다가 이모 배우님을 만났다네요. 이 배우님이 평소 사우나 콤플렉스가 있는지라 늘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등장하곤 했었는데, 그 날은 수건을 허리가 아닌 목에 감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더래요. 그길로 병원을 소개받았나 봐요. 60대를 찌르는데 아프긴 엄청 아팠다네요. 더군다나 중간 허리쯤 되는 위치에 하얀 막이 내려져 있어 시술에 들어가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 긴장감에 더 아팠다고 하더라구요.”
“주사 한 대만 맞아도 아픈데, 엄청 아프긴 했겠네요. 근데 효과는 좀 있대요?”
“완전 난리났어요. 자기 인생에 돈 600만원을 이렇게 의미 있게 써 본 적은 처음이라면서. 만나는 상대마다 다들 깜빡 죽는다면서. 최고 어쩌고 하면서 다들 한 마디씩 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진 상대를 만나서 그런 것 아닐까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실전에서 어떻든 간에, 남자들 사이에서의 자존심 회복 뭐 이런 거엔 확실히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더 엽기는 폰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친한 업계 사장들한테 쭉 한번 발송을 했나보더라구요.”
“헉. 진짜 엽기네요.”
“순차적으로 답장들이 막 도착하는데... 대부분의 반응이 ‘어디냐 그 병원?’이였대요?!? 아무튼 내년부터 우리 남자 매니저들 생일 선물은 고민 안 해도 되겠어요. 하하하”

Image by Dazed & confused vol 12

‘60방. 내 인생에 가장 값지게 사용한 600만원’이라는 문장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것이, 이 글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요즘의 성형은 하나의 트렌드다. 뷰티 스타일리스트 피현정이 낸 <시크릿 쇼핑: 성형도 쇼핑이다!>라는 책에 등장하는 한 설문에 의하면, 한국 남성의 40% 이상이 ‘성형 수술한 여자 친구도 상관없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아울러 대다수의 여성들 또한 수술해서 예쁘면 티 나도 상관없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여자들의 성형 나아가 연예인들의 성형은 이제 그러려니 용납되는 시대다. 일반인들조차 ‘바르는 성형 화장품’으로 자신을 관리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듣자하니, 도가 지나친 경우도 간혹 있다. 한 신인 여배우는, 허벅지를 탄탄하게 보이기 위해 ‘철판’ 소재의 의학재료를 삽입했다고 한다. 턱뼈 정도 갈아 없애는 건 이제 ‘수술’도 아니다. 하지만 탄탄한 허벅지 근육을 얻는 건 ‘강도 높은 꾸준한 운동’으로도 가능하다. 요는 이것이다. 남자들이 특정 부위에 행하는 필러 시술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대다수 ‘보통’ 여성들의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는 것이 중론. 하지만 그럴 필요 있어 보인다.

사우나 콤플렉스의 원인을 ‘강도 높은 꾸준한 운동’ 정도로 개선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수술 없이 약물 주입만으로 10분 이내에 시술을 끝낼 수 있고, 시술 후 즉시 일상생활이 가능하며, 이후 별도의 치료과정 없고 그 다음날부터 바로 샤워가 가능한 필러 주입법이, 같은 효과를 거두나 재료비가 다소 고가인 대체진피법에 비해 남자들의 화젯거리에 좀 더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스타일>의 저자인 백영옥 작가는 한 칼럼을 통해 “광대뼈를 깎고, 턱뼈를 잘라내고, 필러로 팔자주름과 이마의 굴곡을 채우니, 한가인 저리가라 호통 칠만한 절세미녀로 거듭날 것만 같았다” 정도로 마무리 되는 가상의 체험기를 적어내린 바 있다. 이제 필러로 콧대를 날카롭게 세우고 아울러 ‘자존심’도 단단히 세운 남자들이 이대근 저리가라 호통 칠만한 쾌남호걸로 거듭날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이번 09 F/W 패션 트렌드를 통해 존 갈리아노, 버나드 윌햄 등의 디자이너는 남자들에게 ‘치마를 입으라’ 선동했다. 실제로 많은 남성복 브랜드들이 치마는 물론 레이스나 핑크 컬러 등 전통적으로 여성복에서 사용되던 재단과 색상, 소재 등을 활용한 의상을 대거 내놓은 바 있다. 남성용 화장품이 대중화됐듯, 남자들을 위한 치마가 머잖아 거리를 누빌 거라는 전망이다. 그러니, 성형을 위한 필러 시술 또한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우길 필요 없어 보인다. 게다가 '자기 인생에 가장 값진' 투자였다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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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론에 무엇을 기대할까? 물론 사람마다 천양지차일 것이다. 누군가는 경제 상황과 관련한 더욱 풍성한 정보를 원할 것이고, 누군가는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자극적이고도 흥미로운 기사를 원할지도 모른다. 미디어에 대한 독자, 또는 시청자들의 욕구가 사람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송신자냐 수용자냐를 떠나 이 시대의 모두가 공인하는 언론의 덕목이 있긴 하다. 언론은 진실을 추구해야 하며, 시민의 알 권리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

이 지당해 보이는 덕목은, 그러나 현실 세계에선 자주 위협을 받아 왔다. 진실이 외부 권력의 압력이나 상업적 계산에 의해 은폐 또는 축소되는 일(용산 참사와 강호순 사건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의 보도지침이 대표적인 사례다) , 알 권리를 빙자해 선정성을 극단으로 밀어 붙이거나 취재 대상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 따위(이를테면, 신정아 알몸 사진이나 강호순 얼굴 공개 등). 언론의 정체성과 생존 방식을 놓고 언론간, 정치세력간 사상 최대의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 같은 화두는 강 건너 불 구경할 일이 아니다. 최근 극장가에 걸린 이 영화가 남달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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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신문 기자의 이야기다. 워싱턴 글로브지의 민완 기자 칼 매카프리(러셀 크로)는 도심 밤거리에서 두 젊은이가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을 취재하다가 미심쩍은 사실을 발견한다. 이 사건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하원의원인 콜린스(밴 애플릭)의 보좌관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사고로 숨진 사건과 연관성이 있음을 알아낸 칼은 신참 여기자 델라 프라이(레이챌 맥아담스)와 함께 특별 취재팀을 꾸린다.

요컨대,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언론이 숨겨진 진실을 좇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정석을 보여준다. 주인공 칼 매카프리는 그런 점에서 진실 추구의 화신이다. 그는 그가 좇는 사건에 친구가 연루돼 있다는 사실 때문에 때론 갈등하지만, 칼날 같이 냉철한 판단과 집요한 추적, 진실 보도에 대한 열망을 놓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런 칼 매카프리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현실 요소들이 대립항으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이들은 콜린스 하원의원의 문란해 보이는 사생활에 대한 보도를 타 언론사에 물 먹은뒤 회사의 경영 상태를 걱정하는 편집장(헬렌 미렌)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듣는데, 칼은 그것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버틴다. 빙산의 일각이 아닌 거대한 빙산의 맨 몸뚱아리가 드러나기 직전, 회사는 이제 취재를 끝내고 기사를 내라고 재촉하지만, 칼은 마감 시간을 늦추면서까지 최후의 진실 확인을 위해 현장을 뛴다. 결국 그 끈질긴 최후의 확인이 헤드라인을 바꾼다. 역사를 바꾼다.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물론 바다 건너 미국의 언론계와 정가를 배경으로 한 픽션 스릴러이긴 하지만, 한국의 언론 환경에 비출만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주요 일간지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사실과 관점만을 취사 선택하는 게이트키핑의 극단적 정파성을 드러내고 있는 한편, 인터넷은 이른바 '찌라시' 언론들의 무한대 속보 경쟁과 자극적인 낚시 기사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끈질긴 추적 보도의 미덕은 개에게나 줘 버릴 일인지도 모른다.(영화 초반, 칼은 자신을 상대로 손쉽게 취재를 하려던 인터넷판 기자에게 이렇게 냉소한다. "블로그 몇 개 돌아다니면 기사 나오지 않아?")

언론이 진실 보도에 대한 추구를 게을리 할 경우, 그 최종 피해자는 여론의 사각지대에 내몰리는 시민이 될 수밖에 없다. 언론의 환경 감시 가능이 작동하지 않은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IMF 사태는 그 타산지석이 됐지만, 내 보기에 한국의 언론들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이 땅의 모든 기자들이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를 관람하기를, 그리고 잊고 있던 그 열망을 되찾기를 희망한다.(포털 뉴스 편집자들도 꼭 좀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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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성기노출이 마케팅이라고?

영화 이야기 2009. 5. 2. 21:32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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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가 언론 시사회를 열어 첫 공개된 뒤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졌다. 언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는 열렸지만 일반에게 공개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사회 직후 <박쥐>의 네티즌 평점이 곤두박질친 것이다. 말하자면 1점 세례의 행렬이 이어졌다. 1점을 준 이들이 남긴 단평은 대동소이했다. 한마디로 '성기노출이라는 천박한 마케팅으로 관객을 낚으려고 한다'는 성토들이었다.

이 현상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을 품을 수 있겠다. 첫번째 질문, <박쥐>는 정말 성기 노출을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했는가? 내 대답은 "글쎄올시다"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와 관련해 홍보사가 보내온 30여 건의 보도자료 어느 곳에서도 송강호의 성기 노출을 직접 언급한 대목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당히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꽤 파격적인 내용을 의도적으로 쉬쉬해 왔다는 게 더 적절해 보일 정도다.  

그렇다면 영화사 측은 매우 영악하게도, 영화가 막상 공개된 뒤 생겨날 일종의 '파격 효과'를 노린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도 나는 '글쎄올시다'다. 왜냐하면 영화가 공개된 뒤 배포된 보도자료에서도 성기 노출과 관련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시사회 현상에서 기자들의 성기 노출과 관련한 질문이 잇따르자 영화사 관계자들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했다는 후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사측이 송강호의 성기 노출을 홍보 포인트로 삼아 관객들을 낚으려 했다는 혐의는 사실 무근이 된다. 이 대목에서 두번째 질문. 그런데도 관객들은 왜 그걸 영화사의 치졸한 마케팅 수법으로 바라보려 한 것일까? 

먼저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하자면, 송강호의 성기 노출을 대서특필한 것은 일부 언론들이다. 시사회 직후 언론들이 포털에 송고한 관련 기사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베일 벗은 '박쥐' 전라에 성기노출까지 '파격' 조이뉴스24
송강호, '박쥐'서 성기노출 열연...관객 충격 아시아경제
박찬욱, 성기 노출 감추고 싶지 않았다
OSEN
'박쥐' 송강호, 성기노출 '파격' "필요한 장면이었다" 스타뉴스
박찬욱 신작 '박쥐' 송강호 성기노출 '파격'
이데일리
'박쥐' 송강호 "성기노출 순교의식이라 생각" 뉴스엔


위에서는 <박쥐> 언론 시사회가 끝난 직후인 4시 반부터 약 30분간 송고된 기사들만을 추려 봤지만 이후에도 성기 노출을 제목으로 뽑은 기사들은 넘쳐 난다. 이처럼 송강호의 성기 노출 상황은 언론들이 '알아서' <박쥐>와 관련한 중요 의제(Agenda), 또는 프레임으로 부상시킨 셈이다. 즉, <박쥐>와 관련한 이후의 담론 구조를 '성기 노출'에 가둬 버린 꼴이니 영화사나 감독, 배우들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워할 일은 아니라고 봐야 마땅한 것이다.

사실 관계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이 이를 낚시질을 위한 홍보 수법, 또는 마케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 가운데 '제 3자 효과'를 적용해 보면 '나는 성기 노출 마케팅 따위에 낚이지 않지만 제 3자, 즉 다른 사람들은 쉽게 낚일 것'이라고 믿는 경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 질문에 대한 나의 가설은 이렇다.

네티즌들은 영화와 관련해서는 기사와 홍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 즉, 모든 종류의 영화 관련 기사를 홍보 마케팅과 동일시한다는 얘기다. 배후를 들여다 보면 일리 있는 현상이다. 무작정 보도자료를 베껴 쓰는 것으로 생존을 도모해왔던 인터넷 언론의 폐해가 관객으로 하여금 기사를 적정한 거리 두기를 전제로 한 공정성과 객관성의 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사의 홍보 문구를 배달하는 창구 정도로 간주하게 만든 것이다. 관객들의 성급함만을 탓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저널을 입맛에 맞춘 홍보 윈도로 다뤄온 영화사들과 거기에 손쉽게 편승해온 인터넷 언론들의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송강호의 성기 노출은 정말로 마케팅적 필요에 의한 자극용이었을까? 적어도 영화가 개봉된 뒤 나오고 있는 네티즌 평점이나 단평들을 보아하니 개봉전의 상황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그러니까 성기노출이 혐오스럽고 불쾌했다는 평가는 적지 않되, 그걸 낚시용으로 간주하는 시각은 줄었다는 얘기다. (그것 때문에 영화가 불쾌했다고 느끼는 분들이라면 진작 그걸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영화사와 언론들을 탓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알다시피 그런 상황도 아니다. 어쨌든 <올드보이> 개봉 당시 근친상간 설정이 (명백한 스포일러였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영화사에 의해 사전 노출되지 않은 데 대해 네티즌들이 성토를 쏟아낸 것과는 반대되는 상황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따라서 나는, 송강호의 성기 노출을 손님 끌기용이었다고 간단하게 결론내리고 마는 건 여러 정황상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화적으로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지라도 영화의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적절한 '장치'였다고 평가하는 게 옳다고 믿는다. 그의 성기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번뇌하던 뱀파이어 사제 상현이 그 자신 성(聖)으로 박제화되는 상황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그를 숭배하는 무리들을 종교적 환상에서 해방시키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장면에서 등장한다. 상현은 여신도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상황에서, 그를 당혹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신도들에게 그의 축 늘어지고 초라한 '자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사실, 한국영화 속의 성기 노출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개봉했던 장률 감독의 <이리>에서도 남성의 성기를 전면에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서적 충격의 정도라면 <박쥐>를 훨씬 능가하고도 남는다. 다만, 그것이 목 매달아 자살한 노인의 것이었다는 게 다를 뿐, 남성의 성기라는 것은 송강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그 때는 조용히 넘어갔던 성기 노출이 왜 <박쥐>에서는 이다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건지 한편으로 우습기도 하다. 과연 누가 천박한 걸까. 어쨌든, 이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싶어 말을 얹어 보았다.
 

관련글 '박쥐' 언론 시사 후기
       박찬욱이 소비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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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이 소비되는 방식

영화 이야기 2009. 4. 27. 20:06 Posted by cinemAgora
 
며칠전 <박쥐> 시사회 단상을 올렸더니 적지 않은 분들이 글이 너무 어렵다고 핀잔이었다. 쉽고 평이하게 쓰는 것만이 블로그적 소통의 정답일까 싶다. 이를테면 '창작과 비평'을 집어든 이들이 저자들한테 글이 너무 어렵다고 지청구를 부리진 않을 터이지만 웹에선, 특히 블로그에선 타깃 독자를 상정해도 소용이 없다는 게 딜레마이긴 하다. 그렇다고 글 시작하기 전에 '난이도 상중하' 이 따위 표시를 해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쨌든 박찬욱 감독과 관련한 옛글을 찾아 봤더니 2006년 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관련해 FILM2.0에 쓴 칼럼이 있었다. 대동소이한 얘기인데, 이건 조금 더 쉽게 읽히지 않을까 해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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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나 보다. 인터넷으로 감지되는 분위기만 봐도 그렇다. 박찬욱 감독, 임수정, 정지훈 주연의 영화라는 ‘네임 밸류’에 걸맞지 않게 이 영화에 대한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네티즌 평점은 5점 미만이다. 나는 이른바 '대중적 취향'을 수치적으로 단순화한데다, 끊임 없이 홍보 목적의 조작 시비가 일고 있는 네티즌 평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치라면 영화에 대한 초기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짐작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대한 관객 평가는 다양하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건 영화가 지나치게 ‘난해하다’ 는 평가들이다. 감독이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는 불평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비교적 ‘괜찮게’ 본 나로선 관객들의 이런 평가에 고개가 갸웃해진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영화에 작가적 서명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노릇일 터. 하지만 표면적으로도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하는데 생각이 닿으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군과 일순은 같은 정신병원에 살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다. 영군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고 밥을 안 먹는다. 이런 영군을 딱하게 여긴 일순은 그녀에게 밥을 먹이기 위한 모종의 작전을 실행에 옮기고, 그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는 어떤 정서적 파장이 생겨 난다. 제작진이 이 영화를 두고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라고 선전한대로, 박찬욱 감독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 체계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분열증 환자들의 엉뚱한 행동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고, 생물학적으로 젊디 젊은 두 남녀가 소통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이를테면 에로스의 에너지에 다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영화가 어렵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평단에서조차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려워 하면 어떡하나 지레 걱정하는 얘기들을 한다. 그 이유에 대한 나의 가설은 이렇다. 그동안 박찬욱의 영화는 늘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됐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미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알리바이를 등에 업고, 박찬욱 브랜드의 잠재적 상품성을 확신한 저널과 대자본의 압박은 그의 영화 세계에 범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예술가의 심오한 메타포가 숨어 있으리라는, 어떤 신뢰감을 조성한다. 그 결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정도는 ‘봐줘야’ 일정 수준의 문화적 향유를 한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어느새 그의 영화는 문화 소비 행위의 '격'을 일컫는, 일종의 브랜드 파워로 고착된다. 기표만 남고 기의는 사라져 버린 현상, 혹은 브랜드만 남고 담론은 휘발된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박찬욱 감독에게 이런 데 대한 저항적 자의식이 있었는지, 아니면 어떤 타협의 소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그는 영화가 지나치게 난해해 보일 수도 있는 여지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이 영화는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즐길 수 있는, 말그대로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로 완성됐다. 내 경우 두 사람의 병든 뇌에서조차 병들지 않고 흘러 나오는 에로스의 기운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영화의 마지막, 롱쇼트라 시각적으로 확실히 분간하긴 어렵지만, 발가벗은 채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비로소 섹스를 나누는 장면이라면, 박수 치며 축복해주고 싶을 정도의 감정적 고양을 경험하고 나왔다. 바로 그런 긍정적 휴머니티가 이 영화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미덕이었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박찬욱 감독이 대중에게 원한 지점도 그 정도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일부 관객들이 그에 신작에 대해 실망감을 안게 된 배경에는 앞서 말했듯 '박찬욱'이라는 문화 브랜드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신뢰가 역설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찬욱의 신작인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도, 정지훈과 임수정이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에 왠지 숨은 뜻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고, 애써 감독의 (심오한) 의도를 해석하려다 답이 안나오자, 영화에 대한 배신감을 넘어 박찬욱이라는 문화 브랜드에 대한 배신감으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감독의 입장 역시 '대략 난감'일 것 같다. 쉽게 말해도 어렵게 해석되고, 다른 시도를 하는 것조차 '이미 많이 가진 자의 여유'쯤으로 치부되는 처지에 놓였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그에 대해 약간은 안티 권력적 시선이 엿보이는 것 역시 앞서 말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홀로 남은 기표의 역습이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브랜드가 아닌 '창작자' 박찬욱은 선 하나를 그어 놓고 예술이라고 우기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내 눈에는 저널과, 일부 관객들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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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제목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만큼은 낚시질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사회에서 스스로 자유민주주의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분들이라면 신해철이 처벌 받는 게 당연하다는 논지로 이 글을 오해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허나 어쩐다? 나는 지금부터 북한의 로켓 발사를 축하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신해철을 옹호할 생각이다. (그러니 이것 역시 국가보안법상 고무 찬양죄에 해당하는 걸까?)

당신은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빨갱이들의 위협으로부터 수호해야 할 숭고한 무엇? 그렇다면 틀렸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사상의 자유 시장'을 전제로 한 가치이다. 다양한 생각과 사상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며 우열을 다투도록 내버려 두고 그 안에서 더 큰 설득력을 가진 사상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기도록 하자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서구의 시민 혁명이 봉건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피 흘리며 확인한 그 가치는, (우리가 근대화 과정을 통해 받아들였다고 믿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대전제이자 존재 근거이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는 신해철이 자신의 발언 때문에 감옥에 갈 하등의 이유가 없어야 한다. (실정법인 국가보안법이 있긴 하다. 이 법이야말로 우리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님을 반증하는 대표적인 봉건적 악법이다. 내가 노무현 전 정권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우파라면 당연히 수행했어야 할 봉건주의 탈출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그를 좌파라고 몰아 붙이는가! 진짜 좌파들이 땅을 칠 일이다.)

이 대목에서 자주 듣는 반론이 있다.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 그렇다. 남북이 대치되고 "북괴"가 호시탐탐 남한의 공산화를 노리는 마당에 자유도 무한정 허용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상황 논리가 정당하고 설득력 있다고 믿는 분들이라면 아예 자유나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선 안된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린 지금 전체주의적 통제 국가에 머물러 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추구만 할 뿐이라고 속시원히 인정했어야 옳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저들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다. 우리는 거짓말을 배운건가? 희한하게도, 이 자칭 '우월한 체제'는 반대 진영의 사람들의 입을 곧잘 틀어 막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아무나 잡아 감옥에 가둔다. 도대체 이게 뭐가 우월하단 말인가.

나는 신해철의 발언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지만, 그가 한 말을 존중한다. 왜냐면 그건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시민 각자가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그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이며, 혹시라도 그의 발언이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시민을 연예인 한 사람의 발언에 좌우되는, 판단 능력이 없는 바보로 치부하는 소산이다. (당신이 그런만큼 다른 이들도 똑똑하다.) 그런 생각을 한 이들은 정확히 말해,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시민의 자율성을 의심하는 봉건주의자다.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발언의 자유. 그것이 자유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따라서 그는 생각을 달리 하는 시민들에 의해 맹비난의 화살을 받을 수는 있어도(공론권적 발언에 대한 공론권적 책임!) 그 이유로 법과 권력에 의해 신체의 자유를 강탈 당해선 안된다. 그가 아무리 위험한 발언을 했어도 그래선 안된다. 그건 파시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건 체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체제를 배반하는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수호해야 할 핵심 가치를 내팽겨친 채 도대체 뭘 어떻게 수호하겠다는 말인가.  

신해철 사건은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그를 처벌한다면,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다. 한심하긴 하지만, 21세기 한국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닌!) '봉건과 근대의 대립'을 눈여겨 지켜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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