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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원작을 영화 감상에 앞서 먼저 읽느냐 혹은 나중에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감상을 얻을 때가 많다. 내 경우, 이를테면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뒤 원작 소설
을 읽으며 괜시리 통분을 금할 수 없었다. 책을 읽는 과정의 즐거움인 나만의 상상력을 영화에게 고스란히 빼앗겨 버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영화 자체가 너무 강렬해서였는지 소설의 주요 대목에서 자연스레 영화 속의 장면이 떠오르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이후에는 영화를 보기에 앞서 원작을 미리 챙겨 읽으려는 욕망이 더 커졌는데, 실제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같은 경우, 원작을 미리 읽은 게 영화를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헌데, 역시 원작을 미리 읽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반대의 경우였다.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감흥이 대니 보일이 감각적인 영상 언어로 재구성한 영화를 보며 훼손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나는 영화를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영화가 마뜩지 않은 게 내가 원작을 미리 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영화 자체가 별로이기 때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가 좋다 나쁘다고 섣불리 말하진 않겠다. 다만 원작에 비해 실망스러웠다는 말만 해두자.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2005년 발표된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의 소설 'Q & A'로부터 공간적 배경과 설정, 주요 인물을 따오긴 했으되, 적지 않은 부분을 각색했다. 영화 매체의 특성에 걸맞게, 혹은 할리우드와 인도를 비롯한 세계 시장을 동시에 겨냥한 다국적 흥행 전략에 걸맞게, 말하자면 선택과 집중(또는 배제와 생략)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왠지 원작이 지닌 '엑기스'까지 배제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영화는 주인공의 이름을 '람 모하마드 토머스'에서 '자말'로 바꿨다. 이름 하나 바꾼 게 뭐 대수인가 하실 분도 있겠지만,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많은 함의를 지닌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 문화가 한데 섞인 그의 복잡한 이름은 인도 사회가 내포한 종교적 복합성을 상징하고 있다. 아예 이름을 바꿔 버린 영화는, 그의 이름이 그렇게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과감히 들어낼 수 있었던 셈이다.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작에는 없던 형의 존재를 추가해 이야기를 형제 간의 애증 관계로 끌고 간다. 영화 속에서 형의 이름은 '살림'으로 불리는데, 원작에서의 살림은 주인공과 소년원 시절에 만나 줄곧 같이 지내게 된 의형제와도 같은 막역한 사이의 인물로, 볼리우드 영화 배우를 꿈꾸는 미소년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자말과 살림 형제가 종교간 분쟁으로 가족을 잃은 걸로 돼 있는데 원작에서 그건 이슬람교도인 살림이 겪었던 비극이다.

주인공의 직업 역시 원작에선 영화와 달리 술집 바텐더이다. 직업이 바뀐 것 역시 대수로운 변화다. 왜냐하면, 그가 늦은밤 바에서 손님의 사연을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역시 퀴즈쇼와 직결되는 배경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텔레마케팅 회사의 심부름꾼으로 설정한 영화는, 사연을 압축하고 그의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처지를 강조하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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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는 주인공 자말과 라티카의 멜로 라인이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자말은 어릴 적 부모를 잃은 뒤 함께 지내다 헤어진 라티카에 대한 식지 않는 사랑을 품은 채 살아간다. 그래서 형과도 대립하며 조직 보스의 정부가 된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역경을 감수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원작 소설에서도 살짝 비슷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해 라티카로 상징되는 여성성은 두 명의 인물로 나뉘어 따로 따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한 인물은 어릴 적 주인공의 옆집에 살던 소녀 구디야이고, 또 다른 인물은 우연히 알게 돼 사랑에 빠지게 된 어린 창녀 니타다. 두 여성 모두 거대한 가부장제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데, 그들과 동병상련을 느끼는 주인공은 그녀(들)에게 늘 진심을 담은 친절을 베푼다.

이밖에도 주인공이 18년 동안 겪어온 밑바닥 인생 역정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됐는데, 특히 주인공이 만났던 여러 주변 인물들을 통해 인도 사회의 단면을 담아낸 에피소드들은 거의 대부분 빠졌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인공이 경험한 선과 악 가운데 선(자말)은 이미 존재하므로, 악으로 분류될 수 있는 몇 인물만 집중 부각시켰다는 설명이 적절할 것이다(물론 그래야 스토리가 더욱 단순명료해질테니까).

아쉬운 것은 그러다 보니 영화가 어느 빈민가 소년의 인생 역전기이자 신파 멜로, 또는 권선징악의 교훈극으로 단순화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인도라는 이국적 시공간만 빌어왔을 뿐, 또 한편의 '아메리칸 드림' 영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의 구체는 빠지고 익숙한 추상만 남은, 뭐랄까, '감동'이라는 이름의 패스트푸드랄까?

어쨌든 당신에게 이 영화가 별로였든 혹은 무척 감동적이었든, 원작소설 'Q & A'만큼은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단, 반드시 영화를 보고 난 뒤 읽으실 것.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불편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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