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영화의 '삐리리' 법칙

영화 이야기 2007. 11. 8. 14:29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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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낙엽이 떨어진다. 싱글들은 옆구리가 시려 온다. 바야흐로 36.5도 짜리 난로가 필요해지는 계절이 다가온다. 눈에 들어오는 인간은 없고, 외로움에 사무치다 못해 삭신이 다 쑤실 분들 적지 않을 게 뻔하다. 로맨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다. 그만큼 사랑을 소재로 삼는 영화도 부지기수다. 가을의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으니 로맨스 영화들을 통해 사랑의 풍경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외로움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남녀들에겐 흥미로운 대리만족이 될지도 모른다.

인류를, 무엇보다 사랑에 굶주린 벗들을 연민해 마지 않는 cinemAgora, 이번주부터 '첫만남' '고통' '바람' 그리고 '이별'을 소주제로 로맨스 영화들을 말하기로 한다. 간혹 제 논에 물 대는 해석도 있다. 알아서 비웃어주시길.

(cinemAgora가 출연하는 SBS 라디오 '이승연의 시네타운' 방송 초고를 토대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로맨스의 전 과정에서 사람을 가장 흥분시키는 시점은 언제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일 것이다. 적지 않은 영화들에서 남녀는 첫눈에 반한다. 이 말은 곧 첫눈에 반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거꾸로 상투적이라는 얘기도 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걸 편의적으로 '삐리리 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여자(남자)가 남자(여자) 주인공의 시야에 나타난다. 제일 흔하게 써 먹는 방식은 슬로모션. 이런 장면에서 대개 여자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머리를 뒤로 한번 쓸어주기 마련이다. 지난 상반기에 개봉했던 <못말리는 결혼>과 같은 주로 로맨틱 코미디에서 자주 써먹는다. 이런 삐리리 신은 너무 흔해서 관객들을 금세 식상함의 수렁 속으로 빠뜨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이건 상대방의 외모적 매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주로 창의력은 일찌감치 쌈싸 드시고 제작자와의 의리로 버티는 감독들에 의해 애용되고 있다. 특히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기엔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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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간의 만남이 더욱 드라마틱하기 위해선 그냥 삐리리로는 2프로 부족하다. 극적인 계기가 있어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 극적인 계기로 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 우연한 만남이다. 헌데 그냥 우연하게 만나면 재미가 없다. 사건이 터져야 한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공연한 <노팅힐>(1999)에서 서점 사장 윌리엄 태커와 할리우드 여배우 안나 스콧은 거리에서 부딪힌다. 꽝! 참 얄궂게도 윌리엄은 주스를 다른 곳도 아닌, 안나의 가슴팍에 쏟는다. 다리도 있고, 배도 있는데, 왜 궂이 가슴팍인지 몰라도 어쨌듯 그곳이다. 악연이다. 둘의 악연은 그러나 우리가 예상하는대로 사랑으로 승화된다.

이런 극적인 만남의 장치를 아주 잘 활용한 한국영화가 있다. <엽기적인 그녀>(2001). 전지현이 전철에서 구토를 하고는 차태현을 향해 쓰러지며 "자기야~"를 외친다. 지금 돌이켜보면 살짝 닭살 돋지만,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설명해줌과 동시에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엽기적인 연애 행각을 암시하는 아주 훌륭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전지현이 구토만 하지 않았다면, 하필 그 앞에 선 '띨빵'한 녀석을 향해 '나 지금 필름 끓겨~'하는 SOS만 치지 않았다면, 우린 두 사람의 사랑스러울 정도로 '구여운' 사도 마조히즘적 연애 뻘짓을 놓쳤을지도 모른다(그렇다고 지하철에서 술취한 녀들만 찾아다니지 말라. 안쓰럽다). 그렇다. 사랑은 그렇게 우연한 사건, 어쩌면 적대적인 시추에이션에 의해 시작될 때 짜릿하다. 숱한 로맨스 영화들이 구사하는, 이른바 '삐리리'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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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영화 가운데 남녀간의 '삐리리'를 가장 오금 저리게 묘사한 영화는 바로 지금으로부터 60년도 훨씬 전에 만들어진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1945)였다. 이 영화 속의 남녀는 비록 유부남 유부녀의 신분이긴 하지만, 어느 기차역에서 아주 우연하게 조우한다. 기차가 지나가면서 주인공 여자의 눈에 티끌이 들어간다. 의사 신분인 한 남자가 바로 옆에 있다가 그 티끌을 빼준다. 그냥 빼주는 게 아니라 '훅' 입김을 불어서 빼준다. 이게 중요하다. '훅' 얼마나 짜릿한가. 그냥 빼준 게 아니라, 입김을 훅! 생전 처음보는 녀의 눈에 불어준 것이다. 이런 느낌, 의식적으로는 개의치 않을지 몰라도, 벌써 이 순간 두 남녀는 '삐리리'의 불꽃이 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는 나중에 '바람'을 얘기할 때 다시 언급하겠지만,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답고도 기가 막힌 삐리리의 지존을 보여준, 위대한 영화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런 삐리리를 통해 남녀가 즉각적으로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만큼 비현실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게 그 한순간의 삐리리 때문에 바로 교제의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가 도대체 몇이나 되겠나('섹스 앤 시티'의 사만다라면 몰라도). 마치 집에 가서 옷을 갈아 입는데 어디서 생긴 건 줄 모르는 라이터가 바지 주머니에서 잡힐 때처럼, 아니면 부지불식간에 생긴 종아리의 멍을 뒤늦게 발견할 때처럼, 그 삐리리의 순간은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슬쩍 기록된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으로 화한다. 가스 렌지도 스파크가 터진 뒤 점화가 되기까지 레버를 잡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요즘엔 그럴 필요 없는 가스 렌지도 있지만, 아무튼!). 처음엔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그러나 삐리리가 남긴 자국은 장기간 잠복한다. 바로 그 잠복기가 발병기로 접어들기 위해선 우린 또 한번의 계기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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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사랑의 불꽃이 마침내 점화에 이르는 과정을 가장 멋지게 그릴 줄 아는 감독은 바로 이안이다. 이번주 개봉하는 <색, 계>에서 우리는 그 실례를 접할 수 있다. 일본군 앞잡이 이(양조위)를 암살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한 애국적 스파이 여성 왕치아즈(탕웨이),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38년 홍콩. 이가 상하이로 옮겨 가면서 왕치아즈와 그의 동료들의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만, 3년 뒤인 1941년 그들은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역시 이번에도 이의 암살 계획을 숨긴 채. 그러나 암살하려는 왕치아즈는 이미 3년전 이의 어떤 치명적인 매력에 자기도 모르게 삐리리 돼 있었다. 잠복해 있었기에 몰랐을 뿐이다. 그건 이도 마찬가지. 3년 전의 첫 만남에서 왕치아즈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지만 단 한번의 식사 자리 이후 이는 무려 3년 동안이나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왔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폭발한다. 마침내 두 남녀의 화학 작용은 의지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두 사람의 사랑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은, 이들에게 서로에 대한 욕망을 눈치 채지 못하거나, 혹은 잠복시켜 왔던 3년간의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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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의 또 하나의 걸작 <브로크백 마운틴>(2004)에서도 마찬가지다. 황량한 산 위에서 한여름 양치기를 함께 한 애니스(히스 래저)와 잭(제이크 질렌홀)은 거대한 산 속에서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서로를 충동적으로 탐한다. 그 순간은 충동, 그 자체였다고 짐작할 수도 있고, 실제로 애니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각자의 배우자와 살림을 차린 뒤 마침내 4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자, 두 사람은 과거의 그 감정이 결코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리고 꾹꾹 눌러왔던 그리움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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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 영화만 너무 많이 소개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필자가 그의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다), <센스, 센서빌리티>(1995)도 빼놓을 수 없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지만, 이안이 탁월하게 재해석한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에드워드(휴 그랜트)가 엘리너(엠마 톰슨)를 찾아와 청혼하는 장면이다. 에드워드는 사실 따로 정혼자가 있었던 몸인데다 성격이 우유부단해서 자신의 진짜 사랑을 향해 과감하게 대쉬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못난 넘이다. 실연의 아픔을 곱씹으며 조용히 동생의 아픈 실연까지 바라보던 엘리너 앞에 어느날 수줍게 나타난 에드워드. 모자를 만지작 거리며, 결국 그가 진심을 털어 놓자, 우리의 심성 고운 엘리너는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썩어 문드러져 마침내 가슴 한 켠의 깊은 무덤에 묻히기 직전의 감성에 물꼬가 트이는 순간. 참을래야 참을 도리가 없이 흐르는 그 눈물에서 우리는 진짜 사랑의 꽃이 영글 때의 향기가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

이제 정리하자. 사랑은 우연의 삐리리로부터 시작된다. 삐리리의 순간은 그러나 극적인 계기에 의해 무의식의 언저리에 기록된다. 그걸 애써 의식의 언저리로 끄집어낸 채 곧바로 작업 전선으로 뛰어드는 용감무쌍함은, 사랑인지도 모른 채 사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발정 난 수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우린 사람이다. 사람은 생각하며 사랑한다. 그리고 사람의 사랑은 곱씹는다. 곱씹고 곱씹어, 잠복된 달뜸이 어찌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격정으로 화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므로 이 가을에 로맨스를 꿈꾸는 모든 옆구리 시린 이들이여, 스파크가 터졌다고, 삐리리의 순간이 왔다고 해서 함부로 들이대지 마시라. 익을 때까지 주춤대며 기다리는 미덕을 발휘하시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설령 사랑으로 추측되는 어떤 관계를 시작하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종국엔 사랑의 유효 기간이 어쩌구, 도파민 분비 기간이 저쩌구 하면서 비겁한 꽁무니를 빼게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마침내 사랑의 마그마가 폭발했다면, 그걸로 다일까? 말 할 필요도 없이 담금질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통의 담금질이다. 시련을 통과해야 사랑은 굳건해 진다. 그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하자.


2007/10/25 - [영화 이야기] - 戒를 넘는 色 <색, 계>

2007/09/11 - [영화 이야기] - 당신들의 로맨스가 아름답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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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왕가위를 추억하며

별별 이야기 2007. 11. 5. 09:17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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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듣는 소프라노 목소리, 그리고 모처럼 듣는 거침 없는 육두문자.
 "최광희, 이 씹새라~"
그인 줄 알았다. 내 죄책감의 원흉.
"늬 글 잘 보고 있는데..."
허걱, 글을? 젠장,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너만은 빗나갈 줄 알았는데.
"내가 너의 과거를 좀 알잖아, 근데...너 말야 너 좀 위선 떨더라. 씹새라."

그의 이름은 송성철이다. 이름하여 부랄 친구, 크레용과 연필에 눈이 멀어 함께 동네 교회에 다녔고, 브루마블을 하다가 주먹질을 했고, 홍길동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부잣집 재수 없는 녀석들의 나이키(혹은 프로스펙스) 신발을 훔치러 다녔다. 독서실 옥상에서 함께 건너편 빨간 조명 들어온 여관방만 골라 훔쳐보다가 슬쩍 권해오는 담배를 피웠다. 그가 폭로하고 싶은 과거가, 이를테면 이런거라면 나는 흔쾌하다. 요즘엔 이런 과거조차 들이대면 쿨한 듯 보이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내가 그를 죄책감의 원흉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내게 노는 것의 즐거움, 무엇보다 영화의 쾌감을 가장 먼저 알려준 친구(남들은 아버지가 잘도 알려주더만 우리 각자의 아버지는 너무 바쁘거나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였다. 그는 마이클 잭슨의 'Beat It'에 열광해 어설픈 문워킹을 흉내내던 나에게 'Eat It'이라는 '골때리는' 노래도 있다며 들려주고는 킥킥댄 친구다. 동네 극장에서 두 편 연속으로 심야 상영을 '때리던' 토요일은 밤이 좋았던 친구다. 영등포 명화극장에서 개봉한 <영웅본색>을 나와 함께 보러 가기 위해 누나가 아끼던 스테레오를 몰래 팔아 치웠고, <첩혈쌍웅>을 보고는 한 오십센티미터 거리에 누워서 나한테도 누으라고 하고는, "친구, 멋진 밤이었어!" 했던 친구다. 지금은 만인이 알고 있는 미키 루크의 망가짐을 제일 먼저 걱정했던 친구다. <크라잉 게임>을 보고는 나를 덥쳤던 친구다.  

십 년 전 쯤에는 속리산 언저리에서 전원 카페를 하며 동네 처자들에게 작업 걸며 살던 그가 지금은 뭘 하고 먹고 사는지 짐작은 하되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무튼 그는 여전히 몸을 움직이며 산다. 듣기에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고속도로에 난 균열을 때우는 일을 7년 이상 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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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와 내가 고 3때, 한창 입시의 중압감에 짓눌려 있던 나에게 와서 그랬다.
"광희야, 벽제 가자."
나는 물었다.
"벽제는 왜?"
"화장터를 찍고 싶어, 사람들이 죽는 걸."
그리고는 모래 시계를 구할 길이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시간의 영속성을 거부하는 매체는 모래 시계밖에 없는데 그걸 못구하니 사람이라는 모래 시계가 끝나는 곳에 가는 거라 했다. 싸인 코싸인에 골머리 썩이던 나는 "시간의 영속성이고 나발이고 바람은 쐬고 싶으니 벽제에 같이 가자"고 했고, 왕가위의 '중경삼림'과도 같은 그곳에서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 공기를 함께 마신 뒤 '영웅본색'의 소마처럼 다리 절뚝 대며 두시간이나 걸려 집에 돌아 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기시감과도 같은, 커트 코베인의 ' 틴 스피릿'적 하루였다.

그는 공부도 지지리 못하면서 어쭙잖게 영화 감독을 꿈꿨고, 나는 지지리 궁상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만 꿈꿨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고속도로의 균열을 찾으러 다니고, 나는 어쭙잖게 영화를 말한다. 그래서 그가 전화를 걸어 올때마다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다. 그는 내 마음 속의 왕가위, 주윤발, 미키 루크, 짐 자무쉬, 그리고 커트 코베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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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smile's music collection 1

음악 이야기 2007. 11. 4. 22:2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pat metheny group <(it's just)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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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일한 목표는 빨리 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진짜 멜로디를 뽑아내는 것이다.”


어느 날, 재즈의 창시자 루이 암스트롱에게 후배가 물었다.
"선배님, 재즈란 무엇입니까?"
한 동안 생각에 잠겼던 루이 암스트롱이 대답했다.
"친구, 재즈란 스윙하는 것이라네."
대답이 떨어지자 마자 후배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스윙이란 무엇입니까?"
다시 혼자만의 침묵에 잠겼던 루이 암스트롱은 자리를 일어서 bar를 나서며 말했다.
"그걸 알게되면 나에게도 좀 알려주게!"


팝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나도, 재즈란 여전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몇 권의 책을 읽고, 음악적 식견이 뛰어난 선배들의 고언을 들을 때면 '아, 재즈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 때뿐이다. 새로운 재즈 음악을 접하고 그 익숙치 않은 모양새와 난해한 해석에 빠져 들 때가 되면 재즈란 도무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무엇으로 진화해 가기 때문이다.

팻 메스니의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은 20년도 더 된 것 같은 청소년기의 어느 날이었다. 그의 음악을 들려준 선배에게 물었다.
"팻 매스니? 어떤 음악이야?"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던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시냇물이 흐르는 냇가에 앉아 집에서부터 정성스럽게 가져간 유리 잔을 조심스럽게 놓고, 맛있는 와인 한 잔을 따르는 기분의 음악..."
지금이나 그 때나 그 선배의 이야기는 해석불능이다. 그러나 팻 메스니의 음악을 듣다보면 가끔, 아주 가끔 그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있다. 음악과 내가 절묘하게 합일치가 되는 날이라고 할까? 그 날들 중의 대부분은 어딘가로 여행을 가는 차안에서 이루어진다. 창문을 열고 미풍에 머리를 날리며, 한 번도 머문적 없는 낯선 풍경을 지나쳐 달리다보면 팻 매스니가 말을 걸어오곤 한다. '어때 친구, 이제 재즈를 좀 이해하겠나?'

1955년(혹은 54년 생으로 알려져 있다.) 생인 팻 메스니는 이미 대가의 경지에 오른 기타리스트이다. 10대 시절, 버클리와 마이애미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을 만큼 그 실력은 일찌기 재즈 음악계에 알려져 있었다. 라일 메이스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그러나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그의 음악적 계적은 정통과 퓨전의 틈바구니 어딘가에 위치한 독창적인 것이다. ECM 레이블 시절을 통해 천재적 역량을 과시하면서부터 재즈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지만, 대가의 일대기가 그렇듯 다양한 변주와 변신을 통해 폭 넓은 스펙트럼을 들려준다.

그의 방대한 발표작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음반은 '87년 Geffen 레이블 시절 발표한 [(still life) talking]이다. 브라질 음악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는 이 음반은 이어폰을 귀에 꼽는 순간 지구 반대편의 열대림 가득한 원시의 자연으로 나를 데려다 준다. 보사노바와 삼바가 있는 나라. 호나우지뉴의 현란한 개인기와 끝없이 펼쳐진 사탕수수밭이 있는 나라. 앨범의 수록곡 중 <last train home>은 수 많은 프로그램의 시그널로 사용될 만큼 대중적으로도 알려진 작품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앨범에 4번 째로 담긴 <(it's just) talk>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누군가가, 아니면 낯선 풍경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이 곡은 인천 공항의 트랩을 오르는 순간부터 언제나 내 mp3에서 플래이 되는 곡이다. 여행을 위한 충실한 동반자라고 할까?

재즈란 이해하기 힘든 음악이다. 그 구성이 그렇고, 그 진화의 단계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기에 재즈란 매력적인 음악이다. 예측 가능한 서술 구조와 뻔한 결론에 식상한 우리들을 오즈를 찾아 떠나는 도로시처럼 만들어 줄 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선택은 여러분들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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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M, 낯선 것은 악인가?

영화 이야기 2007. 11. 4. 22:1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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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M은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첫 사랑이 아름답듯이...



M, 이 영화는 기억과 그 기억을 지우려하는 무의식에 관한 영화이다. M은 지금껏 첫 사랑을 잊고 있었음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리며,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지우려 하는 스스로에 대한 강박관념이 드러내는 환상에 시달린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한다는 그의 망상은 현실이 아니며, 자의식과 무의식의 충돌이다. 영화 속 내내 이연희가 맡고 있는 강동원의 첫 사랑은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으며, 이유도 모른 채 쫓긴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그녀의 불안은 결국 영화 속 M 자신의 죄책감이며, 미안함이다. 마치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지만, 막상 그 기억이 지워지려 하자 반항하기 시작하는 짐 캐리의 의식과 흡사하다. 또한 공효진이 연기한 M의 약혼녀마저도 이유없는 불안감과 기괴한 경험 속으로 빠져든다. 이 역시 현재의 여자를 옆에 두고도 첫 사랑에 집착하는 M의 죄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며, 현실의 공효진이 경험하는 것이 아닌, M의 환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 M은 감독 이명세가 데뷔작부터 집착해온 테마 '첫 사랑'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사유와 영상을 선사하고 있다. 누구나 갖고 있지만 시간 속에서 놓아버린 아련한 첫 사랑에 대한 기억이 환상적인 화면을 통해 영화의 전편을 휘감는다. 그러나 상투적인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의 수려한 영화 기교는 혼란스럽고, 짜증나는 무엇에 불과할 뿐이다.

노련한 나이와 풍만해진 뱃살에 감추어져 이제는 유치하다고(!) 버려진 첫 사랑의 그 설레였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면, M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원치 않는 듯 하다. 아니 그런 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 조차 애써 알려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저 낯선 것이기에 이 영화는 악한 영화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은 경향 신문 칼럼 '판'에 실렸던 jacosmile의 글이다.)
 

이명세 감독의 신작 영화 <M>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화려한 영상미와 난해한 이야기 구성을 가진 이 영화는 평론가들에겐 극찬을 받고 있지만, 인터넷 네티즌 평점에선 개봉작들 중 최하위를 달리고 있다. 예술 영화란 언제나 평단과 관객들의 상이한 평가를 이끌어 내는 것이니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반응하는 네티즌들의 혹평들은 조금 심한 감이 있다. ‘재미없다.’, ‘지루하다.’라는 일반적인 평을 넘어서 영화를 옹호한 사람들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직격탄이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문화계 동료가 팀 블로그에 올린 <M, 저주받을 영화인가?>라는 글에 ‘관객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쓰레기를 좋아하는 파리들, 닥쳐라!’라는 인신공격성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 정도면 웃고 넘어갈 만하다. 또 다른 반응엔 이런 글도 있었다. ‘인간아... 영화에 대해서 고민 좀 해보렴... 쓰레기 같은 10분짜리 몽환적 cf를 계속 반복해서 본 느낌...’


문화의 감상이란 불행히도(!) 감상자에게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요구한다. 높은 단계의 훈련을 거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급문화란 그저 어렵고 낯선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 고호와 피카소의 작품을 아무리 명작이라고 한다 해도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이상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 그림에 침을 뱉거나 욕설을 남기는 것이 정당화 되진 못한다. 유독 영화는 다른 장르의 예술에 비해 악성 댓글들이 여름철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영화는 극장을 통해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 예술로 그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지인들 사이에선 영화 <M>의 논쟁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설득력을 얻은 의견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것에 이유 없이 적개심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오프닝을 장식했고, 강동원이라는 티켓 파워 강한 배우가 등장하기에 친절한 서술 구조로 풀어내는 러브 스토리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일종의 혼란 상태에 빠졌던 것 같다. 익숙한 것을 기대했다가 낯선 것에 배신감을 느낀 관객들 일부가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현상들 속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악플러들의 대부분이 ‘대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이나, ‘대중을 우롱하는...’ 등등의 표현이 등장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보편적인 대중의 한 명이라 지칭하며 그 대중의 간판에 숨어 무차별적인 언어폭력을 구사하는데 정당성을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여행이다. 익숙한 삶보단 그렇지 않은 시간과 공간이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여행이 자신들을 작가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문화적 경험 역시 일상을 탈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조금 불편하지만 낯선 것을 쳐다보고 경험할 때, 사람들은 사고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문화적 경험이란 처음 가보는 여행처럼 개인의 교양을 끌어 올리는 검증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M>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감들을 경험하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대부분 젊은 층으로 추측되는 악플러들의 글을 보며 언젠가부터 어렵지만 새롭고, 복잡하지만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 때문이다. 다양한 문화적 혜택이 부족했던 시절, 학생들은 프랑스 문화원, 일본 문화원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늘 문화와 교양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요로운 2007년, 영화 <M>은 단지 그 모양새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더구나 대중이라는 미명아래 반지성주의의 함정에까지 빠져들고 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악’이라는 위험한 발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M>을 둘러싼 이런 현상 속에서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민족 분쟁이나, 다양성을 끌어안지 못하는 종교 전쟁의 비극까지 떠올렸다면, 너무 무리한 해석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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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와 연애 중?

애경's 3M+1W 2007. 11. 2. 10:2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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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는 제발, 그냥 안녕히 가십시오.



난 나쁜 남자가 싫다. 제 아무리 장동건과 정우성을 칵테일한 외모에 사돈의 팔촌까지 억 소리 나는 재산을 소유한 갑부집안 아들일지라도, 내 기준에서의 나쁜 놈이라면, 한 트럭을 갖다 바쳐도 노 땡큐다. 아울러 뼈 속까지 나쁜 놈도 못 되는 주제에, 어디서 주워듣거나 본 건 있어가지고 괜히 센 척 하며 여자 애간장을 타게 만드는 ‘연애 계의 쓰레기’ 같은 남자들은 더더욱 싫다. 그건 죄민수가 최민수 흉내 내는 것보다 더 코미디니까.

하기야 누군들 나쁜 남자가 좋다 할까. 어쩌다 보니 사랑에 빠진 남자가 ‘나쁜 남자’였을 뿐, 날 적부터 ‘나쁜 남자만 좋아할 운명’이라는 주홍글씨 새겨 박고 나온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을 터.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여자들이 불량식품 같은 나쁜 녀석들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곤 한다. 죄질이 가장 안 좋은 경우는, 여자의 순정을 이용해 금전적인 트러블을 만드는 인간이다. 무슨 ‘사건 25시’에나 등장할 법한 소재 같지만, 이런 남자들 때문에 속 끓이는 여자들 주변에 꽤 많았다.

사실 연애에 끼어든 금전문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한 광야의 예수에게 가해진 악마의 유혹과 같다. 악마는 믿음을, 금전문제는 사랑을 시험한다. 빌리고 갚는 ‘거래’라면 더더욱 그러한데,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부모나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공유하게 될 수록, 연인들은 위험한 ‘거래’를 시작한다. 계약서나 보증인 없이 ‘사랑’의 유효기간과 신선도만 담보 삼는 그런. 헌데 그럴 때 보면 피해자는 꼭 여자다. 번번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기막힌 드라마가 펼쳐진다.

지식에 날개를 달아준다는 사이트만 뒤져봐도 나쁜 남자에 관한 질문들이 차고 넘친다. 그 중 나쁜 남자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분류법은 다음과 같더라. [피해야 할 남자들은 크게 네 범주로 나뉜다. 지배하려는 남자들(보스, 해결사, 척척박사, 트집쟁이), 거짓말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남자들(탁월한 위장꾼, 카멜레온, 돈 주앙), 미성숙한 남자들(마마보이, 영원한 틴에이저, 오락가락 기회주의자), 마지막으로 감정적으로 덜 떨어진 남자들(과묵남, 냉혈한)이 그것이다. 그리고 잡종(?)과 기타 특별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말장난에 불과하다. 애초에 나쁜 남자만 좋아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여자가 없듯, 애초에 나쁜 남자로 살아가라고 프로그래밍 된 남자 또한 없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는 사실 별 게 아니다. 내 기준에서 나쁜 남자란, 날 덜 좋아하는 남자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라면, 마마보이건 돈 주앙이건 마초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는 절대로 나쁜 남자가 될 수 없다. 때려 죽여 마땅할 정도의 나쁜 놈이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자상하고 매너 좋고 따뜻한 남자가 된다. 그건 부동의 진리다.

결론은 이렇다. 결국 내 자랑인데, 그리하여 난 내 남자를 ‘나쁜 놈’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늘 그가 좋아하는 것보다 가급적 덜 좋아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 애정의 부등호가 ‘나를 향한 그의 사랑 > 그를 향한 나의 사랑’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자나깨나 신경 쓰고 산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나의 애정이 그의 애정을 넘어섰다 치자. 그렇더라도 그에게만은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표현의 수위를 조절한다. 덕분에 그는 늘 내가 자신을 덜 좋아한다고 속고 산다. 말이 쉽지, 이건 오뎅으로 피리를 만들어 부는 진기명기만큼이나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작업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빠지는 전략 전술, 그 연애의 기술은 한 두 번 노력해서 터득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로 인해 가슴에 아로새겨진 영광의 상처와 맞바꿔 얻어진 결실인 것이다. 그렇게 어렵고 피곤한데 굳이 왜 그런 수작을 부리냐고? 사실 난 나쁜 남자는 싫지만 ‘나에게만 잘해주는’ 나쁜 남자에겐 흥미 있다. 만약 내 남자가 세상 모든 여자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좋은 남자’였다면, 난 아마 그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나쁜 남자 길들이기’란 몸에 좋은 불량식품을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확률 0%의 게임 또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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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와 연애하려면, 보살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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