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씨와 변양균 씨의 로맨스를 보며

불륜이란 건 1부1처 결혼제도의 아킬레스건일까? 아니면 빛바랜 사랑의 그늘에 움트는 본원적 결핍의 산물일까. 혹은 제도에 갇힌 은밀한 욕망의 정당한 해방구일까. 뭔지 모르겠지만 이 정체모를 일탈 감정 혹은 행동이 문명 세계의 제도화한 인간들을 끊임 없이 괴롭혀 온 것만큼은 사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중의 잠재된 욕망을 건드리는 영화라는 장르가 이 핫한 소재를 놓칠 리 없을 터. 불륜 로맨스는, 수도권에 산재한 저 숱한 러브호텔의 수만큼이나 자주 애용돼 온 영화적 소재였다. 내가 본 영화 가운데 최고의 불륜 로맨스 영화는 데이비드 린의 <밀회>(Brief Encounter, 1945)였다. 중산층 가정의 모범적인 유부녀 로라 제슨과 역시 유부남이자 의사인 알렉 하비가 기차역에서 '우연한 조우'를 한다. 플랫폼에 기차가 지나가면서 로라의 눈에 티끌이 들어갔다. 의사는 그의 눈에 입김을 불어 티끌을 빼내 준다. 짧지만 짜릿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조우다. 게다가 에로틱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과연 두 사람은 시시 때때로 만나 밀회를 즐긴다. 그리고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할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고 알렉의 거처로 스며든다. 결정적인 순간, 얄궂게도 알렉의 룸메이트가 들이닥친다. 이 점잖은 남녀가 베란다를 통해 거처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 추레하고도 황망한 수치심이 여자의 얼굴에 가득하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위로할 길 몰라 역시 안타까울 뿐이다.

이 아름답도록 처연한 장면은, 몇해전 개봉했던 허진호 감독의 <외출>에서도 비슷하게 재연됐다. 이 영화는 배우자의 불륜을 알아버린 두 남녀 사이에 또 다른 불륜의 씨앗이 싹트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데, 두 사람의 불륜은 상대방의 배우자들이 앞서 저질렀던 불륜이 모티브가 된다는 점에서, 두 남녀 주인공의 매끈한 외모와 더불어 로맨스라는 감정의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정당화가 지나치다 싶어 오히려 불편한 영화였다.

불륜 로맨스 영화는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 이후 한국 멜로영화의 하나의 트렌드가 되다시피했다. 올초 나왔던 <바람피기 좋은 날>은 아예 결혼 제도 바깥에서의 사랑에서 어떤 쾌감을 발견하려 애쓴다. 최근 나온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지 않은 많은 기혼남녀들에게, 두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행복이라면 현재를 버리고 그 길로 달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은근히 부추긴다.

요컨대, 최근의 불륜 로맨스 영화들은 그 감정을 어쩔 수 없다고 얼버무리거나 혹은 찬양한다. 말하자면 로맨스는 죄가 없다는 얘기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도대체 이 불가해한 감정이 스며든 상황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남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불륜 로맨스를 한껏 아름답게 묘사하면서도 은근슬쩍 도덕적 안전장치를 장착했던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최근의 영화들은 (영화 바깥에선 도덕적 안전장치를 위한 적당한 제스처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영화 안에서만큼은 무기력한 파국이 아닌, 능동적 선택의 풍경을 포착한다. 불륜 로맨스에 대한 시대의 수용력이 이 정도가 된 셈이다.

학력 위조 파문으로 도마 위에 오른 신정아 씨와 변양균 청와대 기획실장 사이에 어떤 로맨스가 있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남의 사생활에 감놔라 배놔라 할 입장도 못되고 또 그래서도 안되지만, 이 경우엔 어쩔 수 없이 로맨스가 로맨스로 끝나지 않을 조짐이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러나 많은 영화들이 묘사한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에 이 케이스가 포함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이유가 있다. 눈에 든 티끌을 빼내며 시작된 소박함이라고 보기에 그들의 로맨스에는 감정 외의 것들이 너무 많이 개입한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 외의 것들이 로맨스를 위해 차출된 것인지, 아니면 로맨스가 감정 외의 것들을 위해 차출된 건지 검찰 수사 과정을 더 지켜볼 일이다. 어쨌든 아름다운 솜씨(美術)를 매개로 조우했던 그들의 로맨스는 전혀 아름답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다시, 로맨스는 죄가 없다. 하지만 가끔 로맨스의 당사자들이 로맨스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이야말로 불륜 로맨스가 내포한 가장 잔인한 함정일 것이다.  

,
BLOG main image
3 M 興 業 (흥 UP)
영화, 음악, 방송 등 대중 문화의 틀로 세상 보기, 무해한 편견과 유익한 욕망의 해방구
by cinemAgora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87)
찌질스(zzizzls) (3)
영화 이야기 (702)
음악 이야기 (34)
TV 이야기 (29)
별별 이야기 (122)
사람 이야기 (13)
3M 푸로덕숀 (156)
애경's 3M+1W (52)
민섭's 3M+α (27)
늙은소's 다락방 (26)
라디오걸's 통신소 (1)
진영's 연예백과사전 (4)
순탁's 뮤직라이프 (10)
수빈's 감성홀 (8)

달력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NM Media textcube get rss DNS Powered by DNSEver.com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3 M 興 業 (흥 UP)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cinemAgora [ http://www.ringblog.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티엔엠미디어 DesignMyself!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