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영화의 '삐리리' 법칙

영화 이야기 2007. 11. 8. 14:29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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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낙엽이 떨어진다. 싱글들은 옆구리가 시려 온다. 바야흐로 36.5도 짜리 난로가 필요해지는 계절이 다가온다. 눈에 들어오는 인간은 없고, 외로움에 사무치다 못해 삭신이 다 쑤실 분들 적지 않을 게 뻔하다. 로맨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다. 그만큼 사랑을 소재로 삼는 영화도 부지기수다. 가을의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으니 로맨스 영화들을 통해 사랑의 풍경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외로움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남녀들에겐 흥미로운 대리만족이 될지도 모른다.

인류를, 무엇보다 사랑에 굶주린 벗들을 연민해 마지 않는 cinemAgora, 이번주부터 '첫만남' '고통' '바람' 그리고 '이별'을 소주제로 로맨스 영화들을 말하기로 한다. 간혹 제 논에 물 대는 해석도 있다. 알아서 비웃어주시길.

(cinemAgora가 출연하는 SBS 라디오 '이승연의 시네타운' 방송 초고를 토대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로맨스의 전 과정에서 사람을 가장 흥분시키는 시점은 언제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일 것이다. 적지 않은 영화들에서 남녀는 첫눈에 반한다. 이 말은 곧 첫눈에 반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거꾸로 상투적이라는 얘기도 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걸 편의적으로 '삐리리 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여자(남자)가 남자(여자) 주인공의 시야에 나타난다. 제일 흔하게 써 먹는 방식은 슬로모션. 이런 장면에서 대개 여자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머리를 뒤로 한번 쓸어주기 마련이다. 지난 상반기에 개봉했던 <못말리는 결혼>과 같은 주로 로맨틱 코미디에서 자주 써먹는다. 이런 삐리리 신은 너무 흔해서 관객들을 금세 식상함의 수렁 속으로 빠뜨리기 일쑤다. 그럼에도 이건 상대방의 외모적 매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주로 창의력은 일찌감치 쌈싸 드시고 제작자와의 의리로 버티는 감독들에 의해 애용되고 있다. 특히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기엔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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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간의 만남이 더욱 드라마틱하기 위해선 그냥 삐리리로는 2프로 부족하다. 극적인 계기가 있어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 극적인 계기로 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 우연한 만남이다. 헌데 그냥 우연하게 만나면 재미가 없다. 사건이 터져야 한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공연한 <노팅힐>(1999)에서 서점 사장 윌리엄 태커와 할리우드 여배우 안나 스콧은 거리에서 부딪힌다. 꽝! 참 얄궂게도 윌리엄은 주스를 다른 곳도 아닌, 안나의 가슴팍에 쏟는다. 다리도 있고, 배도 있는데, 왜 궂이 가슴팍인지 몰라도 어쨌듯 그곳이다. 악연이다. 둘의 악연은 그러나 우리가 예상하는대로 사랑으로 승화된다.

이런 극적인 만남의 장치를 아주 잘 활용한 한국영화가 있다. <엽기적인 그녀>(2001). 전지현이 전철에서 구토를 하고는 차태현을 향해 쓰러지며 "자기야~"를 외친다. 지금 돌이켜보면 살짝 닭살 돋지만,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설명해줌과 동시에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엽기적인 연애 행각을 암시하는 아주 훌륭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전지현이 구토만 하지 않았다면, 하필 그 앞에 선 '띨빵'한 녀석을 향해 '나 지금 필름 끓겨~'하는 SOS만 치지 않았다면, 우린 두 사람의 사랑스러울 정도로 '구여운' 사도 마조히즘적 연애 뻘짓을 놓쳤을지도 모른다(그렇다고 지하철에서 술취한 녀들만 찾아다니지 말라. 안쓰럽다). 그렇다. 사랑은 그렇게 우연한 사건, 어쩌면 적대적인 시추에이션에 의해 시작될 때 짜릿하다. 숱한 로맨스 영화들이 구사하는, 이른바 '삐리리'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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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영화 가운데 남녀간의 '삐리리'를 가장 오금 저리게 묘사한 영화는 바로 지금으로부터 60년도 훨씬 전에 만들어진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1945)였다. 이 영화 속의 남녀는 비록 유부남 유부녀의 신분이긴 하지만, 어느 기차역에서 아주 우연하게 조우한다. 기차가 지나가면서 주인공 여자의 눈에 티끌이 들어간다. 의사 신분인 한 남자가 바로 옆에 있다가 그 티끌을 빼준다. 그냥 빼주는 게 아니라 '훅' 입김을 불어서 빼준다. 이게 중요하다. '훅' 얼마나 짜릿한가. 그냥 빼준 게 아니라, 입김을 훅! 생전 처음보는 녀의 눈에 불어준 것이다. 이런 느낌, 의식적으로는 개의치 않을지 몰라도, 벌써 이 순간 두 남녀는 '삐리리'의 불꽃이 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는 나중에 '바람'을 얘기할 때 다시 언급하겠지만,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답고도 기가 막힌 삐리리의 지존을 보여준, 위대한 영화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런 삐리리를 통해 남녀가 즉각적으로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만큼 비현실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게 그 한순간의 삐리리 때문에 바로 교제의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가 도대체 몇이나 되겠나('섹스 앤 시티'의 사만다라면 몰라도). 마치 집에 가서 옷을 갈아 입는데 어디서 생긴 건 줄 모르는 라이터가 바지 주머니에서 잡힐 때처럼, 아니면 부지불식간에 생긴 종아리의 멍을 뒤늦게 발견할 때처럼, 그 삐리리의 순간은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슬쩍 기록된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으로 화한다. 가스 렌지도 스파크가 터진 뒤 점화가 되기까지 레버를 잡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요즘엔 그럴 필요 없는 가스 렌지도 있지만, 아무튼!). 처음엔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그러나 삐리리가 남긴 자국은 장기간 잠복한다. 바로 그 잠복기가 발병기로 접어들기 위해선 우린 또 한번의 계기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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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사랑의 불꽃이 마침내 점화에 이르는 과정을 가장 멋지게 그릴 줄 아는 감독은 바로 이안이다. 이번주 개봉하는 <색, 계>에서 우리는 그 실례를 접할 수 있다. 일본군 앞잡이 이(양조위)를 암살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한 애국적 스파이 여성 왕치아즈(탕웨이),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38년 홍콩. 이가 상하이로 옮겨 가면서 왕치아즈와 그의 동료들의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만, 3년 뒤인 1941년 그들은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역시 이번에도 이의 암살 계획을 숨긴 채. 그러나 암살하려는 왕치아즈는 이미 3년전 이의 어떤 치명적인 매력에 자기도 모르게 삐리리 돼 있었다. 잠복해 있었기에 몰랐을 뿐이다. 그건 이도 마찬가지. 3년 전의 첫 만남에서 왕치아즈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지만 단 한번의 식사 자리 이후 이는 무려 3년 동안이나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왔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폭발한다. 마침내 두 남녀의 화학 작용은 의지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두 사람의 사랑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은, 이들에게 서로에 대한 욕망을 눈치 채지 못하거나, 혹은 잠복시켜 왔던 3년간의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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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의 또 하나의 걸작 <브로크백 마운틴>(2004)에서도 마찬가지다. 황량한 산 위에서 한여름 양치기를 함께 한 애니스(히스 래저)와 잭(제이크 질렌홀)은 거대한 산 속에서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서로를 충동적으로 탐한다. 그 순간은 충동, 그 자체였다고 짐작할 수도 있고, 실제로 애니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각자의 배우자와 살림을 차린 뒤 마침내 4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자, 두 사람은 과거의 그 감정이 결코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리고 꾹꾹 눌러왔던 그리움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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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 영화만 너무 많이 소개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필자가 그의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다), <센스, 센서빌리티>(1995)도 빼놓을 수 없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지만, 이안이 탁월하게 재해석한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에드워드(휴 그랜트)가 엘리너(엠마 톰슨)를 찾아와 청혼하는 장면이다. 에드워드는 사실 따로 정혼자가 있었던 몸인데다 성격이 우유부단해서 자신의 진짜 사랑을 향해 과감하게 대쉬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못난 넘이다. 실연의 아픔을 곱씹으며 조용히 동생의 아픈 실연까지 바라보던 엘리너 앞에 어느날 수줍게 나타난 에드워드. 모자를 만지작 거리며, 결국 그가 진심을 털어 놓자, 우리의 심성 고운 엘리너는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썩어 문드러져 마침내 가슴 한 켠의 깊은 무덤에 묻히기 직전의 감성에 물꼬가 트이는 순간. 참을래야 참을 도리가 없이 흐르는 그 눈물에서 우리는 진짜 사랑의 꽃이 영글 때의 향기가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

이제 정리하자. 사랑은 우연의 삐리리로부터 시작된다. 삐리리의 순간은 그러나 극적인 계기에 의해 무의식의 언저리에 기록된다. 그걸 애써 의식의 언저리로 끄집어낸 채 곧바로 작업 전선으로 뛰어드는 용감무쌍함은, 사랑인지도 모른 채 사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발정 난 수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우린 사람이다. 사람은 생각하며 사랑한다. 그리고 사람의 사랑은 곱씹는다. 곱씹고 곱씹어, 잠복된 달뜸이 어찌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격정으로 화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므로 이 가을에 로맨스를 꿈꾸는 모든 옆구리 시린 이들이여, 스파크가 터졌다고, 삐리리의 순간이 왔다고 해서 함부로 들이대지 마시라. 익을 때까지 주춤대며 기다리는 미덕을 발휘하시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설령 사랑으로 추측되는 어떤 관계를 시작하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종국엔 사랑의 유효 기간이 어쩌구, 도파민 분비 기간이 저쩌구 하면서 비겁한 꽁무니를 빼게 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마침내 사랑의 마그마가 폭발했다면, 그걸로 다일까? 말 할 필요도 없이 담금질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통의 담금질이다. 시련을 통과해야 사랑은 굳건해 진다. 그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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