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왕가위를 추억하며

별별 이야기 2007. 11. 5. 09:17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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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듣는 소프라노 목소리, 그리고 모처럼 듣는 거침 없는 육두문자.
 "최광희, 이 씹새라~"
그인 줄 알았다. 내 죄책감의 원흉.
"늬 글 잘 보고 있는데..."
허걱, 글을? 젠장,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너만은 빗나갈 줄 알았는데.
"내가 너의 과거를 좀 알잖아, 근데...너 말야 너 좀 위선 떨더라. 씹새라."

그의 이름은 송성철이다. 이름하여 부랄 친구, 크레용과 연필에 눈이 멀어 함께 동네 교회에 다녔고, 브루마블을 하다가 주먹질을 했고, 홍길동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부잣집 재수 없는 녀석들의 나이키(혹은 프로스펙스) 신발을 훔치러 다녔다. 독서실 옥상에서 함께 건너편 빨간 조명 들어온 여관방만 골라 훔쳐보다가 슬쩍 권해오는 담배를 피웠다. 그가 폭로하고 싶은 과거가, 이를테면 이런거라면 나는 흔쾌하다. 요즘엔 이런 과거조차 들이대면 쿨한 듯 보이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내가 그를 죄책감의 원흉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내게 노는 것의 즐거움, 무엇보다 영화의 쾌감을 가장 먼저 알려준 친구(남들은 아버지가 잘도 알려주더만 우리 각자의 아버지는 너무 바쁘거나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였다. 그는 마이클 잭슨의 'Beat It'에 열광해 어설픈 문워킹을 흉내내던 나에게 'Eat It'이라는 '골때리는' 노래도 있다며 들려주고는 킥킥댄 친구다. 동네 극장에서 두 편 연속으로 심야 상영을 '때리던' 토요일은 밤이 좋았던 친구다. 영등포 명화극장에서 개봉한 <영웅본색>을 나와 함께 보러 가기 위해 누나가 아끼던 스테레오를 몰래 팔아 치웠고, <첩혈쌍웅>을 보고는 한 오십센티미터 거리에 누워서 나한테도 누으라고 하고는, "친구, 멋진 밤이었어!" 했던 친구다. 지금은 만인이 알고 있는 미키 루크의 망가짐을 제일 먼저 걱정했던 친구다. <크라잉 게임>을 보고는 나를 덥쳤던 친구다.  

십 년 전 쯤에는 속리산 언저리에서 전원 카페를 하며 동네 처자들에게 작업 걸며 살던 그가 지금은 뭘 하고 먹고 사는지 짐작은 하되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무튼 그는 여전히 몸을 움직이며 산다. 듣기에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고속도로에 난 균열을 때우는 일을 7년 이상 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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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와 내가 고 3때, 한창 입시의 중압감에 짓눌려 있던 나에게 와서 그랬다.
"광희야, 벽제 가자."
나는 물었다.
"벽제는 왜?"
"화장터를 찍고 싶어, 사람들이 죽는 걸."
그리고는 모래 시계를 구할 길이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시간의 영속성을 거부하는 매체는 모래 시계밖에 없는데 그걸 못구하니 사람이라는 모래 시계가 끝나는 곳에 가는 거라 했다. 싸인 코싸인에 골머리 썩이던 나는 "시간의 영속성이고 나발이고 바람은 쐬고 싶으니 벽제에 같이 가자"고 했고, 왕가위의 '중경삼림'과도 같은 그곳에서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 공기를 함께 마신 뒤 '영웅본색'의 소마처럼 다리 절뚝 대며 두시간이나 걸려 집에 돌아 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기시감과도 같은, 커트 코베인의 ' 틴 스피릿'적 하루였다.

그는 공부도 지지리 못하면서 어쭙잖게 영화 감독을 꿈꿨고, 나는 지지리 궁상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만 꿈꿨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는 고속도로의 균열을 찾으러 다니고, 나는 어쭙잖게 영화를 말한다. 그래서 그가 전화를 걸어 올때마다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다. 그는 내 마음 속의 왕가위, 주윤발, 미키 루크, 짐 자무쉬, 그리고 커트 코베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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