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3사의 가을 라디오 개편을 바라보며...

음악 이야기 2007. 10. 28. 10:3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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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라디오 키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0월 28일 현재, 방송 3사 중 KBS와 MBC 라디오의 가을 개편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시나이다. 아니 어쩌면 음악 애호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뒷 걸음 친 개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상징으로 지난 21년간 전문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전영혁 DJ가 마이크를 놓은 것을 꼽을 수 있다. 허위 학력 사태의 유탄을 맞고 전사한 셈이다. 유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기타 다른 연예인들이 비록 도덕적 지탄은 있었을 망정, 자신들의 전문직에 학력 위조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정상참작 받아 여전히 생존해 있음을 빗대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대중적 기반이나 메니지먼트사의 지원을 받지 못한 프리랜서 DJ만이 하차라는 수순으로 그 음악적 여정을 끝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나마 차별적인 음악의 공급을 담당했던 전초 기지 하나가 폐쇄되었으며 나머지 프로그램들이 이전 프로그램들의 명맥 잇기에서 머문 것을 감안하면 '다양한 음악=라디오'라는 공식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아침부터 낮과 밤을 지나 새벽까지 똑같은 가요 틀기를 DJ들의 얼굴만 바꾸어 시행하고 있는 방송사 라디오 프로그램들에 차별적 선곡과 군더더기 없는 진행 방식으로 애청자들을 사로잡았던 전영혁의 퇴진은 라디오의 종말이라는 섬뜩한 단어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똑같은 음악 프로그램들의 대극으로써, 전문 DJ라는 명칭을 수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DJ로서 전영혁의 입지는 확고한 듯 보였다. 그러나 개편의 칼날은 이런 그가 지닌 음악계의 공적인 지위를 단숨에 박살 내 버렸다. 물론 그 빌미는 허위 학력이라는 그의 실수(!)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이면에 청취율(전영혁의 프로그램이 청취율의 사각지대에 위치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확보를 위한 KBS의 결단(!)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팝 칼럼니스트로서 몇 몇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방송 관계자들을 만나다보면 황당한(!) 의견과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전문적인 음악이나 선별적인 장르의 음악을 위한 프로그램에 대한 제안에 이런 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요새 촌스럽게 음악을 장르로 트는 프로그램이 어디 있어요?" 전문적인 음악을 다루거나 음악을 장르로 분화하는 것이 그토록 촌스러운 행위일까? 팝 음악의 메카로 불리우는 영미의 라디오 들은 대부분 시간대를 정해 장르로 나뉜 음악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그것은 음악이라는 대전제에 묶여 있긴 하지만, 팝과 재즈, 소울과 록, 대중 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팬 층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호러 무비와 로맨틱 코메디를 모두 좋아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문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왜 라디오 관계자들은 장르별 프로그램들이 국내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고 하는 걸까?

간단히 말해 광고를 위한 청취율 확보가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다. 상업방송인 SBS의 경우는 방송사의 태생상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준공익 방송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MBC는 비록 심야 시간대의 편성이긴 하지만, <이주연의 영화 음악실>과 <뮤직 스트리트 3부 황우창의 월드뮤직>, 그리고 프라임 타임에서 20년 가까이 롱런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 캠프>를 통해 최소한의 자기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공익방송을 지향하는 KBS의 경우는 다수라는 논리로 방송사가 지녀야할 계몽과 교양의 임무를 포기하고 있다. 만약 전영혁의 퇴진이 순수한 도덕적 문제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라면, 그가 맡았던 시간대에 다른 전문 DJ를 초빙하거나 프로그램의 성격만이라도 전문적인 음악 방송으로 남겨 두었어야 한다. 그러나 <All that chart>라는 이름으로 역시 똑같은 가요 음악만을 선곡하는 프로그램이 대체된 것은 청취율 확보를 위한 개편이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증거인 셈이다.

매카시 열풍과 싸웠던 미국 CBS 보도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Good night and good luck>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TV가 시청자들에 대한 계몽을 포기하는 순간 TV는 말 그대로 바보상자가 되어버린다.'

라디오의 FM이란 밴드는 음악 프로그램을 위해 특화된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라디오의 FM은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코너들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를 차지한 채, 또한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초대손님들의 신변잡기와 수다로 채워지고 있다. 몇 번인가 이런 상황에 대한 비판들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방송사들의 항변은 역시 청취율이란 단어를 풀어서 말한 '대중들이 원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영화 <Good night and good luck>의 대사를 인용해보자면, 'FM 라디오가 청취자들에 대한 음악적 계몽을 포기한 순간 이미 자기 본래의 기능을 포기해 버린 셈이다.' 그저 방송사의 수익을 위한 광고 창구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MP3를 통한 음악듣기나 인터넷 방송, DMB 등이 등장하면서 라디오가 포기한 음악들을 들을 수 있는 창구는 확보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과외학원이 충분히 늘어났으니 학교 교육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논리에 불과하다. 라디오를 벗어난 기타의 방법들은 선택이나 여과의 활동일 뿐 라디오가 맡아야할 기능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머리 아픈 영어가사가 등장하는 팝 음악을 뭐하러 들어야 하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까지는 팝 음악이 더 높은 수준의 음악들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음식점을 찾아 다니고, 같은 값이라면 더 좋은 옷을 사는 것이 당연한 것과 같다. 청취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교양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더 높은 단계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계단을 밟아 가는 것이다. 같은 금액이라면 동대문의 옷을 사겠는가, 아니면 강남 백화점 명품관의 명품 옷을 사겠는가?

일종의 우민화 정책같은 라디오 프로그램들의 폐해는 고스란히 청취자들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다. 최근 등장하는 가요들이 들려주는 낯뜨거운 표절의 현상들은 가요계가 스스로의 자정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팝 음악을 듣는 이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멜로디들이지만, 그 팝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의 소수로 전락해 버렸기에 발언권을 갖지 못한다. 더구나 가요 팬들에게 일종의 질타의 대상이기까지 하다. 전영혁 DJ의 프로그램 하차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몇 몇 생각 없는 광신도를 거느리고 있던 사이비 교주의 몰락.'

시대의 분위기를 재빨리 읽고 있는 미디어의 종사자들은 더 이상 가요계의 표절을 문화계 1면의 기사로 다루지 않는다. 아니 거의 거론하지도 않고 있다. 미디어 역시 독자 확보를 위한 전쟁중이니 다수 대중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이 관심 없어할 기사를 쓸 이유를 잃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눈을 가린다고 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메랑처럼 날아온 표절의 무감각한 시류는 가요계 일반의 창작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이 쯤되면 다음 세대에선 순수 창작의 가요를 기대하기 힘들 정도이기까지 하다.

언젠가부터 라디오의 청취율은 일정한 속도로 하강 라인을 그리고 있다.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꾸준히 줄고 있는 것이다. 라디오 관계자들은 그 원인을 인터넷과 기타 매체를 통한 음악 듣기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일견 옳으면서도 명백히 틀린 것이다. 라디오는 다른 매체가 갖지 못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TV가 갖지 못한 기능인 1:1 매체로서 '나만의 친구'라는 단어와 가장 부합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공허한 TV 프로그램들의 시청이 가지지 못한 친밀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인터넷과 기타 매체처럼 개인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편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저 전원 버튼을 누르고 주파수만 맞추면 2시간 동안 DJ가 틀어주는 자동 선곡을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능들이 장점으로 부각되기 위해선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일 장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청취율이란 미명아래 교복처럼 똑같은 취향과 목소리만 큰 다수를 선호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언제까지 앨범은 사지도 않은 채, 그래서 음악에는 관심 없이 오직 아이돌 스타들을 보기 위해 방송국 앞에서 플랭카드를 들고 연호하는 10대들만을 타켓으로 삼을 것인가?

들으려고 해도 들을 만한 음악이 없는 라디오의 미래는 암울하다. 단순히 듣는 것이라는 특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라디오의 고유한 성격 때문에 그 영향력은 다른 매체들에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약해져만 갈 것이다. 그렇기에 라디오의 프로그램들에 종사하고 있는 관계자들의 미래 역시 밝지 않을 것이다. 판이 커지지 않는다면 나누어 먹을 피자의 양도 줄어들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라디오의 위기에 아무도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Back to basic을 실행해야 할 때는 아닐까? 다양한 음악이 백화점처럼 진열되고, 사람들의 수다가 아닌 음악 본래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서의 라디오말이다. 비록 잠시나마 프로그램 각각의 청취율은 줄겠지만, 분명 장기적으론 라디오 전체의 청취율은 올라갈 것이다. 지금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에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함이란 소수의 매니아가 아닌 말 뜻 그대로 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민은 그 곳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라디오 키드들이 늘어난 곳에 라디오의 미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가을 개편은 그저 또 한 번의 개편이었을 뿐이라고 여기고 싶다. 적어도 라디오 키드로서 라디오의 역사와 함께 성장해온 팝 칼럼니스트의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라디오를 움직이고 있는 PD, 작가, DJ들 역시 팝 칼럼니스트와 같은 세대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하나의 희망으로 삼고 심다. 그들에게도 라디오의 부활이라는 똑같은 꿈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P.S.
지난 21년간 수많은 고비가 있었음에도 라디오 키드들을 훌륭히 키워내준 전영혁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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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위대하다. 많이 듣는 소리다. 그만큼 모성에 대한 칭송은 고금을 막론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비록 최근에는 가부장의 위기 상황에 대해 다분히 반대급부적인 부성애 찬양 영화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지만, 한국영화만 해도 <인어공주> <사랑해 말순씨> <말아톤> <엄마> <맨발의 기봉이> <허브>, 최근에는 하명중 감독의 직설적인 모성 찬양극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와 코미디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까지, 어머니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영화의 전통은 트렌드의 향방과 상관 없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만큼 시대와 환경을 막론한 보편적 감동의 원천을 찾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모성을 소재로 채택한 많은 영화들이 모성애의 강조를 위해 드라마틱한 사건을 만들어내는 경우를 자주 봐 왔다. 가족 휴먼 드라마라는 장르적 범주가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현실에서 모성의 풍경은, 적어도 제 3자가 보기엔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가정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거나, 때론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지지부진한 생계 전선에 나가거나, 대개 어머니의 처지는 어머니이기에 특수해 보이지 않는다. 요즘엔 자식들을 위해 입시 전문가를 자처하거나 대학 수강신청까지 대신 해주는 열성 어머니들이 있다고는 해도, 그것조차 모성의 소산이므로 유난스러워 보일지언정 보편적이지 않은 건 아니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일생에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순간이나 불의의 사고로 자식과 사별하는 순간 말고 어떤 극적인 드라마가 있을 수 있을까.

왜 없겠는가. 어머니의 눈에 자식이란 태어남부터 자라나는 모든 과정이 드라마다. 그 자식이 첫 걸음을 떼고, 처음으로 말 다운 말을 하는 순간, 더 커서 학교에 들어가고, 대학 졸업장을 받아오고, 취업을 하게 되고...순간 순간이 새록새록 드라마다. 차원이야 다르겠지만 자식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 군대 훈련소에 면회 온 어머니를 뒤로 한채 다시 병영으로 행진해 돌아갈 때, 꾸역 꾸역 '멋진 사나이'를 부르며 삼켰던 눈물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나는 아직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그 순간을 능가하는 드라마틱한 감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

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를 영화화한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는, 전형적인, 그래서 드라마적이지 않은 듯 보이는 한 어머니의 인생에서 드라마를 뽑아낸다. 언뜻 가장 드라마틱해 보이는 아버지와의 불화와 이별을 그냥 저냥 툭 묘사하면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커나가는 아들을 홀로 뒷바라지 하는 어머니의 고단하면서도 낙천적인 생을, 그리고 그 마지막을 아주 긴 러닝타임 내내 담담하게 묘사하는 데 그친다(오히려 아들의 방탕한 대학 시절과 지지리 궁상의 가난한 시절이 더 많이 나오는데, 그런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어머니는 마치 후경처럼 단단한 존재감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와 자식은 필연적으로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가 끝내 이별할 수밖에 없도록 맺어진 관계다. 그러므로 둘은 서로에게 드라마다. 이 영화 속의 어머니와 아들도 그렇다. 진학을 위해 탄광촌의 집을 떠나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특별하지 않은 풍경에서  꽤 큰 감동이 밀려 오는 데 대해 나는 놀랐다. 정성스레 싸주신 도시락을 먹으며, '힘내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쓰인,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편지 글을 읽으며 주인공이 울먹일 때, 장식이 달리지 않은 이 정직하게 보편적인 풍경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상 어머니와 아들간의 교감을 어떻게 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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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는 모든 관객들이 모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잠재된 아련함과 경외감을 신뢰한다. 신뢰하므로, 이렇다할 영화적 설정이나 장치 없이, 이를테면 주인공 아들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건널목을 건너는 순간의 슬로 모션만으로도 기꺼이 눈물을 훔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원작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릴리 프랭키 소설 속의 어머니는 말년에 아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이웃 주민들에게 애써 밥을 해 먹이는, 넉넉하고 호탕한 분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어머니는, 메마르고 황폐한 듯 보이는 도쿄라는 도시적 공간을 인정이 흐르고 살갑게 챙겨주는 '고향'으로 만든다. 그게 이 작품이 설파하는 진정한 어머니의 위대함이 아닐까. 자기 아들에 대한 헌신에만 그치지 않고, 모두에게 어머니일 수 있는 어머니성의 진면 말이다. 후반부의 암투병과 모자의 사별에 많은 비중을 할애한 나머지 영화가 이 부분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일본의 고두심, 또는 김혜자라고 불러야 하나? 영화 속 노년의 어머니를 연기한 키키 키린의 연기는 대단하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연기한 우치다 야야코는 그녀의 친딸이라는데, 실제로 참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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戒를 넘는 色 <색, 계>

영화 이야기 2007. 10. 26. 00:5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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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다. 영화 <색, 계>를 시사회를 통해 봤다고 했더니 질문들이 한 곳으로 쏠린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대부분 여성들의 것이다. "양조위가 진짜 벗어요?" "배우들이 진짜로 한다면서요?" "어디까지 나와요?"

야한 영화, 남자들만 밝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에로틱 신'에 대해서만큼 여성들의 관심도 간단치 않은 것 같다. 하물며 주인공이 누구인가. 한없이 슬픈 눈의, 안아주고 싶은 남자 양조위 아니던가. 그래서 그 질문들을 간단히 압축하면 양조위가 어느 정도 수위의 노출 연기를 선사하느냐, 렸다. 답은 간단하다. 다 벗고 보여줄 것 다 보여주며, 할 것 못할 것 다한다. 소문대로 양조위는 여배우 탕웨이와 정사 장면에서 실연을 펼친다, 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적지 않은 분들이 제일 궁금해 하실 부분에 대한 답을 제시했으니, 이제 이 영화는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를 탐문할 차례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제목 그대로다. 1940년대 상하이를 꿀꺽한 일본 괴뢰 정부의 개를 자임한 첩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한 애국적 스파이 여성이 노린다. 운 나쁘게도 동료들 중 가장 예쁘게 생긴 왕 치아즈(탕웨이)는 사업가의 매력적인 부인을 가장해 매국노에게 접근한다. 그를 유혹해 암살하려는 계획.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얄궂게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홀딱 빠져 버린다. 이 홀딱 빠지는 계기를, 영화는 제목 그대로 '색' 즉, 섹스에서 찾는다. 두 사람은 잠재적인 적이지만, 침대에서만큼은 변강쇠와 옹녀다. 육정(肉情)이 무섭다고 하던가. 육정이 드니 이성이 무뎌진다.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바야흐로 색(色)은, 계(戒)를 방해한다.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두 사람, 한 사람은 편안한 쪽에 섰고, 한 사람은 조금 더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쪽에 서 있다. 그런데 '색' 앞에서 두 사람의 선택은 무의미하다. 치사한 생존이냐, 대의를 위한 희생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중요한 건 '막 부인' 왕 치아즈가 "뱀처럼 몸안으로 들어오는" 이의 치명적인 매혹을 떨쳐낼 수 없다는 것이며, 의심 많은 이도 막 부인의 눈빛에서 다른 의도를 발견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30분간의 정사 장면에 집중한다면, 이 영화는 <감각의 제국: 상하이 편>이나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탱고>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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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작가 애니 프루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브로크백 마운틴>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중국 출신의 여류 작가 장 아이링의 단편 소설이 원작이다. 서로 다른 소설에서 빌어오긴 했으되, 이안은, 자연이든 시대든 인간을 짓누르는 환경 안에서 사랑이라는 감성에 쉽게 포획되는 인물들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탁월하다는 것을 이번에도 입증해 보인다. 어느 싸늘한 밤에 충동적으로 서로를 탐한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카우보이는, <색, 계>의 리와 왕 치아즈와 다르지 않다.

대관절 이 치명적이고도 신비로운 화학작용을 어떤 신념과 이성의 수사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나 이데올로기, 제도와 윤리가 단죄할 수 없는 유일한 지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남녀간에 생기는 불꽃일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사랑은 고통을 동반한다. 사랑은 보편적이되 누구도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므로 고통스럽다. 내가 아는 한, 이안은 그 모순적인 풍경을 가장 멋지게 묘파하는 작가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만난 모델 출신의 배우 탕웨이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다. 세우지 않은 코, 입술 위로 살짝 올라온 인중의 언덕, 깎지 않은 겨드랑이의 털이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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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남자들이 싸우는 이유

3M 푸로덕숀 2007. 10. 25. 21:4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시네마 자키 - 남자들이 싸우는 이유>


          기획 : cinemAgora
          연출 : PD the ripper
          출연 : jacosmile
                                                                          Copyright(c)2007 by 3M흥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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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하는 영화 감독이다. 줌인이나 줌아웃, 클로즈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이 완고한 예술가는 카메라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거나 불가피할 경우에만 아주 느릿느릿 패닝을 할 뿐이다. 그것도 주로 등장 인물이 프레임 바깥으로 걸어 나간 뒤에야 졸다 깬 사람처럼 더디게 뒤따라 간다. 나처럼 성질 급한 관객은 그 호흡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경계>를 보면서도 속으로 몇 번 외쳤다. '빨리 돌리란 말야, 이 게으름뱅이!'

그러므로 장률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존 영화보기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함을 뜻한다. 인물의 상황과 배경을 시각화해 제시하는 그의 방법론이 '응시와 관조' 또는 그를 통한 '사유의 투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영화는 대개의 관객들에게 고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른바 주류적이지 않은 예술을, 피카소나 잭슨 폴락의 그림을 응시하는 듯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면, 둑이 터진 듯 치고 들어오는 감정의 파고가 시야를 통해 가슴 속으로 급습해 들어오는 전율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작심이라도 한 듯, 부동의 지점을 급히 떠난 듯, 손에 들린 카메라가 절망과 격정, 혹은 관조와 해방의 경지에 이른 인물의 뒤를 바짝 뒤쫓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젖어드는 눈시울에 깜짝 놀랐다. <망종>에서도 그랬고, 이번 영화 <경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단순히 눈물샘을 자극하는 조장된 감동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픔, 막막함, 그리고 처연함 등 온갖 복잡한 감정이 융화돼 마그마처럼 치솟아 올라오는 그런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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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에 이어 이번에도 최순희 이야기다(그래서인지 이번에 순희를 연기한 배우 서정은 ,망종>의 순희(류연희)와 놀랄만큼 흡사한 캐릭터를 재연하고 있다). <망종>에는 김치 팔던 조선족 여인이었던 그녀가 이번 영화 <경계>에서는 어린 아들 창호(<망종>의 창호는 기찻길에서 놀다가 죽는다)의 손을 잡고 막막한 몽골 초원의 외딴 집으로 흘러 든 탈북 여성이 됐다. 두만강이라는 경계를 넘어 경계 없는 초원에 왔지만, 이곳에도 경계는 존재한다. 갈 곳 없는 순희와 거처를 공유하는 몽골 남자 헝가이는 어린 딸과 아내를 도시에 보낸 채 사막과 초원의 경계에서 투쟁 중이다. 두 사람간의 언어의 장벽은 경계가 되지만, 어린 창호는 그 경계를 훌쩍 넘는다. 초원을 살리려는 헝가이의 노력에 두 사람은 노동으로 화답하고, 그 또한 경계를 지운다.

남조선으로 떠남을 재촉하는 엄마와 달리 몽골 아저씨의 거처에 남길 원하는 창호는 초원에서 대화를 나눈다. "창호는 여기가 좋니?" "여긴 사람이 없잖아." "창호는 사람이 싫어?" "사람이 없으면 안전하니까." 사람이 없으면 안전하다. 맞는 말이다. 사람은 늘 경계를 만든다. 사람들 속에 언제나 참기 어려운 경계가 있다. 그러나 홀로 있어야 하는 외로움을 이겨내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북한을 탈출하면서 남편을 잃은 순희는, 헝가이의 취기에 의존한 구애를 뿌리친 대신, 다짜고짜 가슴을 만지는 젊은 군인의 몸은 거부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또 다른 경계가 생긴다.

장률은 묻는 것 같다. 왜 우리는 선을 긋고 말뚝을 박고 살 수밖에 없을까. 경계 짓기가 인간의 숙명일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것 말고는 무엇이 있겠냐고. 골치 아픈 문제다. 속 편하게 시대의 무게를 핑계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원시적 삶의 조건을 함의한 초원을 배경으로, 그 화두를 좀더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그러니 더 머리가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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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장률 감독, 신동호(창호),서정(최순희)


시사 전 무대 인사에서 장률 감독은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몽골 초원에 가 있다"고 했다. <경계>를 찍으면서 그곳에서 찍을 다른 영화들까지 계획을 해 놓았나 보다. 이 경제적일 수밖에 없는 비주류 감독은 시사회에 참석한 스탭들에게 물었다. "시사 끝나고 저와 함께 몽골 초원으로 다시 가실거죠?" 그들중 누군가 짧고도 분명하게 답했다. "아니요!" 영화 <경계>를 찍으면서 그들 사이에도 경계가 생겼나 보다. 그래도 그 풍경은 살갑고 귀여워 보였다. 배우들과 제작진에겐 마음대로 씻고 먹을 수 없는 초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경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계 짓기가 숙명이라지만, 경계는 때론 뛰어 넘으라고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계와 경계 사이에는 늘 어디론가 뻗어 있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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