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피

영화 이야기 2015. 3. 10. 08:20 Posted by cinemAgora




할리우드 영화 <엘리시움>으로 살짝 죽을 쑤었던 <디스트릭트 9>의 남아공 감독 닐 블룸캠프가 자신의 고향을 무대로 찍은 두번째 SF 영화. 홈그라운드라 그런지 다시 재기 만발. 펄펄 나는군요. <디스트릭트 9>에선 외계인의 시점으로 인간을 보더니, 이번에는 인공지능 로봇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봅니다. 연출만큼이나, 악역을 마다지 않은 휴 잭맨 존경스럽고, 시고니 위버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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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모순과 싸우시라

영화 이야기 2015. 3. 10. 08:19 Posted by cinemAgora

간혹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는데, 뒤늦게 온 분이 앞에서 먼저 택시를 잡아 타고 가는 경험을 합니다. 억울한 게 당연합니다. 택시를 기다린 건 내가 먼저인데, 슬쩍 앞에서 택시를 잡으니 부아가 치미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재개봉을 둘러싸고 영화계에 말들이 많습니다. 이 영화의 배급사가 재개봉을 추진하면서 예술영화전용관을 차지하는 바람에 다른 독립/예술영화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문제 제기입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엄밀히 말해 상업영화이므로 일리가 있는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듭니다. 한정된 상영 공간을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를 놓고 영화 창작자들이 쌍심지를 켜는 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자사 영화만을 밀어주는 대기업 계열의 멀티플렉스의 갑질이 근원적인 이유입니다. 이런 마당에 자식같은 영화를 어떻게든 더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제작자들의 절박함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또한 그 지푸라기를 잡는 바람에 떠밀려 가는 다른 영화들의 억울한 심정도 충분히 이해 영역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따져 봅시다. 이건 누구의 잘못인가요? 결국 자사 영화만을 밀어주는 수직계열화된 대기업 배급사와 멀티플렉스의 횡포가 낳은 결과가 아닌가요? 정작 그들은 쏙 빠진 채, 영화인들의 밥그릇 싸움처럼 비쳐지는 게 참으로 딱합니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얌체족을 욕하는 건 일면 자연스럽지만, 그건 택시 타는 곳이 정해 있지 않은 시스템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영화인들이 서로 싸우기 보다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 모순, 즉 수직계열화된 대기업에 정면으로 승부를 걸기를 바랍니다. 하다 못해 왜 한국영화계의 그 많은 단체들은 멀티플렉스에 예술영화전용관을 의무화하자는 입법 청원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슈퍼갑에 대항한 연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한국영화는 희망이 없습니다.

좀 싸우십시오. 각개전투하지 말고, 서로 싸우지 말고 어깨 걸고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우십시오. 만약 그런다면 무한한 신뢰와 응원을 보내겠습니다. 지금의 영화인들 모습은 정말 딱하고 비겁해 보입니다. 적어도 내가 영화 매체에 처음 발을 딛을 때만 해도 영화인들은 투사이자 지성인들이었습니다. 그 결기가 나를 영화로 이끈 중요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젠 더이상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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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이방인

영화 이야기 2015. 3. 10. 08:18 Posted by cinemAgora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고교 야구는 인기 스포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까지, 봉황기, 황금사자기 등의 고교 야구 대회 중계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TV 앞에 몰려 들었죠. 가물가물하지만, 제 기억에 그 때 재일동포 팀이 따로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재일동포 팀과 우리나라 고교팀이 붙을 때 사람들은 죄다 우리나라 고교팀을 응원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도 우리 동포들인데, 왜 사람들은 재일동포를 라이벌이나 적으로 생각했던 것일까요?

<우리학교>라는 다큐멘터리로 잘 알려진 김명준 감독이 이번에 <그라운드의 이방인>이라는 신작을 선보입니다. 그 영화를 보니,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도 차별 받고, 고국 방문을 위해 시합에 참가할 때는 조국 사람들에게 차별 받는, 희한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1982년 봉황기 대회에 출전했던 당시 재일 동포 고교 야구 선수는 영화 속에서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가 계속 이기니까 시합이 끝나면 사람들이 우리가 탄 버스로 몰려듭니다. 그리곤 욕을 해요. 쪽바리 한국 놈들이라고. 왜 한국말 못하냐고."

그렇게 우리에게 재일 동포는 몰이해의 대상이자 편리한 타자화의 대상이었죠. 그들이 조국 분단과 일본 내의 차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오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거나 관심을 가진 한국인들은 사실 매우 드뭅니다. 그저 조총련계와 민단계 동포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 정도 말고는 재일 동포 사회의 속사정은 오랫동안 남한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40여년 동안 한국 고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던 재일 동포 야구 선수들을 회고하는 가운데, 바로 그런 재일 한국인(또는 조선인)이 처한 정체성의 문제를 들춰냅니다. 이런 가운데, 영화의 제작진은 1982년 봉황기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던 재일 동포 멤버들을 다시 찾아내 잠실 야구장에 세우려는 프로젝트를 추진합니다. 그들중 일부가 이제 지긋한 중년의 나이가 되어 반갑게 재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다시 그 시절을 회고하자는 제작진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짐작컨대, 그들이 한국에서 가지고 돌아간 게 조국애가 아니라 더 큰 상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며 했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는 야구라는 스포츠를 매개로 한반도의 분단과, 그 상흔의 현재진행형인 재일 동포 사회를 진단하는 작품입니다. 분단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작 잘 체감하지 못하지만, 재일 동포 사회에서는 뼈저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단순한 스포츠 다큐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작품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가 얼마나 왜곡과 모순으로 점철돼 왔는지를 자꾸 상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단순히 한민족이라는 혈연주의를 넘어, 재일동포들은 바로 한국 현대사의 더욱 정직한 거울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이 영화는, 한국과 재일 동포 사회의 관계를 통해 우리 안의 잊혀진 미덕과 획득된 모순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건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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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 학살자의 고백록

영화 이야기 2014. 11. 16. 12:55 Posted by cinemAgora




다큐멘터리를 흔히 '기록 영화'라고 번역한다. 기록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기록의 주체와 기록의 대상이 존재한다. 카메라를 든 다큐멘터리스트는 주체가 될 것이고, 그가 포착하고자 하는 실재적 인물 또는 풍경, 사건 등이 대상이 될 것이다. 

카메라를 매개한 기록자와 피기록자의 어쩔 수 없는 간극은, 때론 불가피한 왜곡을 자초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다큐멘터리스트들이 끊임 없이 고민해온 화두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라는 기록 형식에 대해 조금 더 성찰적인 연출자의 경우, 때론 기록 대상에 깊숙이 개입하거나 참여해 인간적 연대를 바탕으로 진정성을 뽑아내기도 하고, 때론 (이를테면 마이클 무어처럼) 임의로 현실을 조작함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고발하기도 한다. 어쨌든 모두 기록자와 피기록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인 셈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연출한 <액트 오브 킬링>(11월 20일 개봉)도 어쩌면 그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록의 대상을 아예 기록의 주체로 참여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인다. 이 영화가 담아내는 인물은 1965년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자 대학살에 참여했던 이들이다. 당시 수백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군부 독재 정권이 사주한 젊은이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안와르 콩고는 당시 학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감독은 그에게 당시의 학살 상황을 재연하는 영화를 찍자고 제안하고, 그는 당시 그들의 영웅적(?)인 학살을 젊은 세대에게 역사로 남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 프로젝트에 협조한다.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안와르 콩고는 상세하게 설명하고, 그것을 재연한다. 이 때까지 그의 모습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TV 토크쇼에 나가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학살을 서슴없이 자랑한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부터, 그러니까 그가 한 마을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는 장면을 직접 지휘하면서부터 그의 표정이 바뀐다. 영화 작업이 진행될수록 안와르 콩고의 얼굴에는 그 때까지 잠복돼 왔지만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겨우 겨우 견뎌내왔던 학살자의 거대한 부채감이 덮쳐 온다. 이 드라마틱한 반전은, 창작자가 기록이라는 작업을 그 대상과 함께 수행했기 때문인데, 기록이 고백의 장치로 변모하는 순간인 것이다. 영화는, 안와르 콩고로 하여금 고백과 참회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용서와 구원의 매체로 격상되는 셈이다.

훌륭한 다큐멘터리는 기록을 통해 현실 세계에 대한 관람자의 의식을 환기시킨다. 더 훌륭한 다큐멘터리는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기록 대상의 삶을 바꿔 놓는다. 가장 훌륭한 다큐멘터리는 이 두가지 모두를 동시에 수행한다. 감히 말하건대, <액트 오브 킬링>은 가장 훌륭한 다큐멘터리다. 이 작품은 영화 매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장 드넓게 드러내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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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지성적 SF

영화 이야기 2014. 11. 4. 14:30 Posted by cinemAgora



영국의 논리주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인간이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선 의지와 지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이 글귀에서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이라는 말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라, 나는 의아했다. 그런데 그 의문에 대한 일말의 답을 제시하는 듯한 영화를 최근에서야 만났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다. 제목을 풀어 쓰면, ’행성간의 공간‘이다. 

과연,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행성 간의 공간을 탐험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물론 영화는 이 자들이 도대체 왜 행성 간의 공간을 떠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서사적 동기를 전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지구는 황폐해졌고, 시도 때도 없이 끔찍한 황사가 불어닥치며, 병충해로 인류는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 우주 안에서 지구를 대신할 새로운 공간을 찾아내야 한다. 그곳을 찾아내는 게 크리스토퍼 놀란 버전의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짊어진 임무다. 

신화는 영웅의 여정이다. 신화 속에서 영웅은 보통 세상에서 특별한 세상으로 나아가며, 묘약이든 깨달음이든 어떤 종류의 보상을 획득한 뒤 다시 보통 세상으로 귀환한다. 숱한 영화들이 바로 이런 신화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인터스텔라>도 예외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스토리의 전개에 새로울 게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바로 그 신화적 여정에 현대 물리학을 선원으로 초대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웜홀과 블랙홀, 상대성 이론이 동원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과학적 지식을 탑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럴 필요가 없다. 영화는 정서를 창출하는 매체이지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다. 어찌보면 이 영화가 동원하는 숱한 과학적 배경 지식은, 딸을 두고 무중력 공간으로 떠나야 하는 주인공 쿠퍼의 험난한 여정을 우주적으로 확대하는 특수성을 부여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그것이 갖는 함의로부터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보편성을 뽑아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우리의 상식에 시간은 과거로부터 걸어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똑같은 단위로 한걸음씩 쭉 뻗어 나간다. 시간의 지속성과 영원불멸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확증한다.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비극성, 또는 원초적 부조리의 근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왜곡한다. 왜곡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지평 속에서 시간이 실제로 왜곡되는 초현실적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전작 <메멘토>와 <인셉션>이 인간의 기억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시간의 의도된 왜곡을 보여줬다면, <인터스텔라>에서 놀란이 보여주는 도발적 상상은 대담하게도 유한성을 거역하는 윤회론적 경지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것은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상식이 지배하는 일상 세계와 우주 공간의 미스터리함이 결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얘기가 아니라는 게 그가 드러내는 탁월함이다. ‘행성 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에서 그가 발견해, 아니 상상해 제시하는 것이, 속인들의 무식을 깨우치려는 지사적 제스처, 혹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 선문답이 아니라는 것 또한 역설적으로 경이롭다. 이 영웅 신화는 형식적으로는 소박하게 출발해 거창하게 돌아오지만 내용적으로는 거창하게 출발했다가 소박하게 돌아온다. 과학으로 출발해 인문적 상상의 웜홀을 통과해 일상 세계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버트런드 러셀의 논리를 들이댄다면, <인터스텔라>는 더 없이 지성적인 영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인간에게 드리운 악을 참고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데 복무하는 지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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