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 Youth

영화 이야기 2015. 12. 25. 12:22 Posted by cinemAgora

영화 <유스 Youth>는 제목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이 80대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한 때 잘나가던 지휘자였지만 지금은 은퇴한 프레드 벨린저(마이클 케인), 생애 마지막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에 골몰하는 그의 영화감독 친구 믹 보일(하비 케이틀)이 그들이다. 이들은 스위스의 풍경 좋은 리조트 호텔에 머물고 있다. 평생지기답게 자주 차와 식사를 나누며 좋았던 시절을 회고한다. 심지어 그들의 청춘 시절 첫사랑이었던 여자와 믹이 잠자리를 했는지에 대한 가물가물한 기억을 놓고 티격태격한다.


이제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생의 마무리 단계에 놓인 공허로움 뿐이다. 프레드는 과거를 놓아버림으로써 공허에 굴복하고, 믹은 그래도 창작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열정으로 공허에 저항한다. 그래도 늙어가는 육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두 사람은 서로의 전립선을 걱정하며 소변을 시원하게 보았는지를 안부 삼는다. 영화는 대비적으로 리조트 호텔에서 일하거나 방문한 젊은이들의 싱그러운 육체를 보여준다. 그들은 늙어감과 죽음의 방문을 맞이할 운명의 이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그러나 과연 '젊음(Youth)'이란 무엇인가. 노인은 젊음을 잃은 대신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항상 진리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는 10대 소녀가 80년을 산 노인도 깨닫지 못한 통찰을 입에 담는다. 젊음이란 생물학적 차원의 청춘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것은 완숙의 반대말도 아닐 것이다. 영화에 따르면 젊음의 반대어는 죽음이다. 생물학적 죽음 뿐만 아니라, 영혼의 죽음, 즉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 그것과 함께 젊음도 상실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다면, 존재와 행위를 통해 자국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젊음이다.


<유스>는 걸출한 영화다. 이탈리아 출신의 파울로 소렌티노가 연출하고, 마이클 케인과 하비 케이틀, 레이첼 와이즈와 폴 다노의 명연기가 우아하면서도 통찰적이며 유보적인 인생론을 풀어낸다. 영화 막판에 등장하는 제인 폰다의 강렬함이란! 늙어감에 굴복하는 그녀의 자포자기는 완숙(또다른 의미에서의 젊음!)의 포스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반갑게도 한국의 소프라노 조수미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영화에서 생각을 찾는 관객이라면 놓치지 마시라. 1월 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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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자들 디 오리지널

영화 이야기 2015. 12. 25. 12:20 Posted by cinemAgora

12월 31일 개봉하는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을 봤다. 원래 개봉작의 러닝타임에 50분 정도가 더 추가됐다. 전반부에 안상구(이병헌)의 스토리가 더 촘촘해졌고 지배 카르텔의 막후 조종자 이강희 논설주간(백윤식)의 비중도 커졌다. 전반적으로 더욱 친절한 영화로 재탄생했다. 특히 엔딩 크레딧 중간에 추가된 이강희의 섬뜩한 독백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정의의 승리라는 단순 판타지에 머물지 않겠다는 감독의 서명처럼 보인다. 현실과 판타지를 돌고 돌아 극장문을 나서면 다시 괴물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강렬한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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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을 둘러싼 두번째 논쟁

영화 이야기 2015. 8. 13. 08:46 Posted by cinemAgora

강한섭의 반론과 최광희의 재반론


이것이 화폐영화다 - 강한섭 (평론가)
최광희의 <암살> 옹호론에 대한 반론


<암살>은 영화가 아니다. 대중영화도 아니다. 제7의 예술로서의 영화가 아니고 ‘관객이 원하는 것을 준다’는 자유주의 문화론이 말하는 대중영화도 아니라면 <암살>은 도대체 무엇인가? <암살>은 화폐영화다. 자본이 주는 억압과 공포를 스스로 자본이 됨으로써 해결하는 영화, 즉 자본을 내면화하여 아예 영화=자본이 된 화폐영화다. 그래서 최동훈은 상념을 상상력으로 표상하는 아티스트가 아니고 장인으로서의 연출가도 아니다. 최동훈은 화폐의 작동원리로 시청각적 기호의 집합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대한민국 넘버 원 펀드 매니저다.


그렇다면 <암살>이라는 화폐영화는 어떻게 만들어 지고 작동하는가? 바로 ‘15-1200- 180-1500-66-10000-30’이다. 화폐영화는 숫자로 표시되고 수의 상관관계로 설계된다. 세상을 수라는 양적 기호로 단순하고 명확하게 표시하고 나누고 조종한다. 독자 여러분은 <암살>의 난수표를 해석할 수 있는가? 15는 최동훈 감독이 영화 투자배급사 쇼박스와 두 작품을 연출하는 배타적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받은 ‘파격적’ 계약금 15억 원이다. 1200은 ‘암살 프로젝트’가 설정한 목표 관객 1200만 명이다. 이 수치는 물론 감독의 전 작품 <도둑들>이 동원한 관객 1298만 명에서 나온 것이다. 180은 영화의 제작비 180억원이다. 왜 180억 원인가? 180억 원을 투자하면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600만 명 정도다. 즉 <도둑들>의 흥행 반타작만 해도 손익분기점을 돌파하게 된다. 1500은 연중 최고의 흥행시즌인 여름휴가 시즌 중에서도 정점의 주말에 개봉하여 확보할 스크린 수다. 그리고 66은 대박 1200만 명 흥행에서 쇼박스가 얻는 수익금 66억원이다. 10,000은 <암살>의 개봉 시점에 코스닥 상장주인 쇼박스의 목표 주가다 (참고로 작년 8월 쇼박스의 주가는 3천원 정도였다). 이제 마지막 30은 무엇일까? 답은 글의 끝에 있다. 찾아보시라.


우리는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대중영화를 보며 울고 웃는다. 그러나 <암살>을 대중영화가 아니라 화폐영화로 호명하는 이유는 금융자본주의가 인간의 집합적 무의식의 영역을 들여다보면서 대중의 행동 패턴을 숫자로 정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사는 금융자본주의 세상은 사물의 고유한 개체성을 화폐의 투명한 숫자로 대체하는 시대이며 이러한 정보화의 과정을 통해 수집되는 빅 데이터로 미래의 사건을 기획, 연출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공간을 확장하는 클로즈업과 움직임을 확장하는 슬로모션이 보여주는 것처럼 영화 카메라는 ‘시각적 무의식으로 입장할 수 있는 문을 제공한다’. 이 지점에서 금융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주요한 산업인 영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투명한 숫자로 제조되고 작동되는 화폐영화가 등장하는 것이다.


즉 <암살>이 블록버스터 액션 활극의 장르를 가지게 된 것은 최동훈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15억원-1200만 명의 수량적 상관관계에서 도출된 180억 원이라는 수가 명령한 것이다. 영화 서사의 중심인 암살조의 대장으로 여성이 설정되고 그 역을 최고의 여성 카리스마를 가진 전지현이 연기하는 것도 화폐가 결정한 것이다. 여성 항일 투사의 전형성으로 안옥윤이라는 캐릭터가 창조되고 그 페르소나에 어울리는 배우로 전지현이 캐스팅 된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톱스타 전지현의 이미지에 따라 안옥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지현–이정재 투톱라인은 뭔가 약하기 때문에 서사적으로 꼭 필요하지 않은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이 설정되고 그 역을 남성 최고 스타 하정우가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2015년 여름 대한민국의 집합적 무의식의 풍경은 ‘암살 = 15+1200+180+1500+66+10000+30’이라는 새로운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투명한 숫자는 동시에 무의식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억압적 숫자인 것이다.


그러나 최광희 평론가는 1949년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실패를 사적 응징의 판타지로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최동훈 감독의 ‘열망적 인장’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조건을 달고 있지만 <암살>이 역사와 영화 그리고 ‘관객들의 공유된 기억과 무의식의 열망 사이에 놓인 함수’를 풀이하여 ‘역사 의식의 리얼리티’를 보여 주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나는 김구와 김원봉이 역사의 리얼리티를 재현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1200만 명 관객을 동원하는 대박영화의 재료인 순결하고 지고한 이상화된 민족주의의 대표자로 끌려 나왔다고 생각한다. 또한 마지막 시퀀스의 사적 응징도 한국인이 내면에 가지는 역사 의식의 리얼리티를 형상화하기 보다는 ‘독립군은 좋아하지만 독립 투쟁은 하지 않는’ 이기적인 보통 관객들에게 정의의 실현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최 평론가의 희망을 담은 분석과 주장은 <암살>을 긍정한 평론 중 가장 깊이 있고 진솔한 평론이다. 또 무의식은 설정된 목표에 따라 연속적이고 순차적으로 흐르기 보다는 충동적이고 무작위적으로 운동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희망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언론은 <암살>의 흥행 기록을 경마 중계처럼 보도하고 있다. ‘하루 백만 명 관람’, ‘개봉 닷새 만에 300만 명 돌파’, ‘한국영화 최단기 600만 명 돌파’ 등등. 그러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민족주의 마케팅과 뒤엉켜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 울분을 느끼는 자, 이 영화를 보라’는 말들이 횡횡하고 있다. <암살>의 1500개 스크린 수, 65% 스크린 독과점을 보도하고 전달하는 비판적 담론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금융자본주의 ‘15-1200-180-1500-66-10000-30’이라는 투명하고 억압적인 숫자를 통해 대중의 집합적 무의식을 공략하고 통제하여 마침내 전염력이 강한 디지털 무의식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15-1200-180-1500-66-10000-30’이라는 숫자는 바로 인간의 개별성을 제거하는 화폐의 서사였던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숫자에 의해 최적화되고 투명해 졌다. 결국 화폐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다. 이것이 화폐영화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비극이다.


답) 30은 최동훈 감독이 다음 배타적 전속 계약에서 기대할 수 있는 30억원 계약금이다.



별똥별에 소원을 비는 행위에 물리학은 없다.
강한섭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최광희 (평론가)


전제컨대 강한섭 평론가(이하 강한섭)의 '화폐 영화' 개념은 이 시대의 영화를 더 다층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유의미하며 유효하다. <암살>과 같은 대중 영화의 설정과 스토리, 핵심 쾌감 요소들을 만들어내는 게 영화 작가가 아닌, 화폐의 명령이라고 보는 그의 분석은 일견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같은 ‘화폐 결정론’(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이 영화 자체가 수용자들에게 전달하는 쾌감의 정체를 규명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는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왜냐면 영화는 늘 시대와의 상관 관계를 가지며, 흥행이라는 것은 창작자의 시대 구속성과 관객의 그것이 광범위한 접점을 만들어내는 결과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지만 나는 여기서 경영학적 의미에서의 흥행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의 사회심리적 현상, 즉 집단 심리적 현상으로서의 흥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화폐 영화라는 개념은 결코 설명할 수 없다.


강한섭은 이른바 '화폐 영화'가 수(數)의 상관 관계로 형성되고 작동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수란 영화에 투입된 제작비, 영화가 마케팅적으로 확보하는 스크린수, 또는 감독이 받는 개런티, 영화가 달성 목표로 삼는 수익 등이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이윤 추구의 목적을 내재한, 또한 투기성이 매우 강한 자본주의 영화 상품의 필연적인 유통 원리이지, 인문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영화 그 자체의 작동 원리라고 말하기엔 비약적이다. 이윤 추구가 영화의 인문적 기능을 압도하고 있다는 그의 문제 의식은, 타당하지만 영화 <암살>에까지 무차별적으로 대입시키기엔 무리가 있다. 그 설명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강한섭은 <암살>에 대한 최초의 분석 글에서 관객의 ‘분열된 쾌감’이라는 표현을 썼다. 요컨대 화폐 영화가 돈의 명령에 의해 설계된 영화이므로, 관객의 분열된 쾌감을 만족시키거나 강화시킨다는 요지로, 나는 이해한다. 도대체 분열된 쾌감이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그의 글에서 이것에 대한 정치한 부가 설명은 없는데, 아마도 이 대목에서 ‘분열된 쾌감’의 그 나름의 조작적 정의를 가늠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김구와 김원봉이 역사의 리얼리티를 재현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1200만 명 관객을 동원하는 대박영화의 재료인 순결하고 지고한 이상화된 민족주의의 대표자로 끌려 나왔다고 생각한다. 또한 마지막 시퀀스의 사적 응징도 한국인이 내면에 가지는 역사 의식의 리얼리티를 형상화하기 보다는 ‘독립군은 좋아하지만 독립 투쟁은 하지 않는’ 이기적인 보통 관객들에게 정의의 실현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반문한다면, 김구와 김원봉이 만약 서세원의 망작 <도마 안중근> 같은 영화에 나왔다고 할지라도 대박영화의 재료로 끌려 나왔다고 할 수 있을까? 김구와 김원봉은 항일 무장 투쟁의 상징화된 역사적 기표다. <암살>이 두 인물을 끌어 들인 것은, 팩션 영화가 리얼리티를 담을 수 있는 전략적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담론화’라는 과정, 즉 두 인물에 대한 재조명 열풍을 통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전지현의 긴 허벅지만큼이나, 김구와 김원봉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갖는다. 이것이 영화가 시대와, 또는 관객과 맺는 상호 작용의 실체적 단면이다.


그렇다면 ‘분열적 쾌감’이라는 말의 실체는 인용한 대목의 두 번째 문장에서 비교적 명징하게 규정된다. “마지막 시퀀스의 사적 응징도 한국인이 내면에 가지는 역사 의식의 리얼리티를 형상화하기 보다는 ‘독립군은 좋아하지만 독립 투쟁은 하지 않는’ 이기적인 보통 관객들에게 정의의 실현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주고 있다”는 대목이다. 내가 보기에 이 대목에서 “보통 관객의 허위 의식”이란, <암살>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설계된 화폐 영화라는 전제된 규정에 의해 끌려 나온 유추에 불과하다. 조금 거칠게 말해 그런 인식 자체가 ‘화폐 영화’라는 프레임에 모든 것을 꿰어 맞추기 위한 '분열적' 허위 의식일지도 모른다.


강한섭은 ‘화폐 영화=>분열된 쾌감의 야기’라는 등식을 발명해 놓고, 거기에 집착한 나머지 자본학적 수의 논리를 뛰어 넘는 인문적 열망, 사회적 담론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비유를 한번 해보자. 별똥별이 떨어질 때 사람들은 그 별이 어떤 물리학적 현상에 의해 밤하늘을 가르며 날고 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소원을 빌 뿐이다. 그리고 정체 모를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그 염원은 분열적 쾌감일까? 별똥별의 물리학적 원리가 실재하는 것만큼이나 거기에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염원도 '실재'하는 것이다.


<암살>이 돈을 벌든 말든, 최동훈이 얼마의 개런티를 받았든,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미완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집단 심리적 부채감을 해소할 것이다. 영화는 깨달음을 주기도 하지만 위안을 주기도 한다. ‘독립군을 좋아하지만 독립 투쟁은 하지 않는’ 이기적인 보통 관객들에게도 독립군을 좋아하고 친일파를 미워하게 만들 모티브는 필요하다. 그래야 독립 투쟁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암살>이라는 영화가 갖는 인문학적 좌표는 거기까지다.


<암살>은 당연하게도 이윤 극대화의 임무를 떠안은 최동훈의 영화이지 김기덕의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쾌감이 무조건 분열적인 것이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다. 조지 루카스에게 왜 장 뤽 고다르처럼 영화를 만들지 않냐고 따질 일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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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술대학교 강한섭 교수와 영화 <암살>을 놓고 논쟁중입니다. 일단 두 개의 글을 여기 옮깁니다.


<암살>의 쾌감을 부인하다

강한섭 (평론가)


불쾌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면 이 글을 디스해야 한다. 나는 지금부터 <암살>이 주는 영화적 쾌감을 냉정하게 부인할 작정이기 때문이다. <암살>은 한국인 관객을 슈퍼맨으로 만든다. 슈퍼맨이 크립톤 행성의 에너지를 담은 망토를 입으면 빛의 속도로 날아가 악당들부터 위협받는 지구를 구할 수 있듯이 <암살>을 보는 동포들은 영사가 시작되면 시공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신비한 힘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들과 함께 스크린의 상상 세계를 달리면서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된다. - ‘대한독립 만세!’


‘1933년 조국은 사라지고 작전은 시작된다’. 영화 포스터에 깊이 새겨진 메인 카피다. 메인 카피는 영화의 DNA를 담은 압축 파일이다. 우선 시간 디자인. 영화는 시간을 넘나드는 마력으로 1919년, 1933년 그리고 1949년이라는 별개의 시간을 연결한다. 19년의 사이토 총독 암살 사건은 논픽션이지만 1933년에 펼쳐지는 영화의 메인 사건으로서의 암살은 픽션이다. 그리고 49년의 초법적 처단도 허구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배신자에게 총탄을 발사하면서 저격수 안옥윤은 말한다. - ‘16년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는 가혹한 시간이 대중영화의 연속적이고 직선적이며 순차적인 시간으로 재탄생되는 순간이다.


영화적 공간을 부호화하는 기술도 만만치 않다. 미션이 실행되는 공간은 한반도의 경성이지만 미션이 결정되고 암살조가 만들어지는 곳은 중국의 상해와 만주다. 여기에 하와이 피스톨이 초대되어 카페 미라보에서 로맨스가 싹트고, 아일랜드 계림호 열차는 암살조를 경성역에 내려놓는다. 그러면 엇갈린 운명의 쌍둥이 자매가 조우하고 피의 결혼식이 펼쳐질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을 밝히기 시작한다. 관객의 몸은 어두운 공간의 의자에 묶여 있지만 관객의 마음은 땅을 접고 공간을 압축하는 축지법을 사용하여 한반도와 유라시아 대륙 그리고 세 개의 섬을 영화와 함께 연결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상적 지배력을 가지고 관객은 이제 3인조 암살단과 함께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기업인 강인국을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제 하나의 무명인으로서의 개인 관객은 ‘큰 타자’인 민족과 하나가 되어 한국인으로 재탄생되는 신기한 서사의 자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몇 사람 처단한다고 사라진 조국이 다시 나타나냐는 빈정거림에 안옥윤은 낮지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것이 <암살>이 주는 영화적 쾌감의 전모다. 영화는 이렇게 국민영화 급의 건강한 영화적 쾌감을 주는 영화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암살>은 그냥 한 편의 대중영화가 아니다. 순제작비만 150억 원이 투자된 한국판 블록버스터 기획 상품이다. 손익분기점은 관객 600만명 정도지만 거대 자본의 목표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대박 영화다. 거대 자본은 ‘친일파 암살을 둘러싼 엇갈린 선택과 운명’이라는 스토리에 움직이지 않는다. ‘민족은 하나고 영원하다는 환타지’라는 콘셉트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은 말한다. ‘오천년 역사, 삼천리 강산, 3천만 동포로 연결되는 스토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상식이고 환타지야. 그러니 2015년에 다시 조국과 민족을 호출하는 너의 실행 코드를 밝혀봐?’ 최동훈 감독은 10여 년 전 어느 독립투사의 사진을 보고 시간이 멈추는 ‘기묘한 정적의 순간’을 느꼈고 영화를 만들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자꾸 연기됐다. 연기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돈, 캐스팅, 아이디어인가?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2015년 7월 최동훈 감독이 공개한 조국과 민족의 환타지 서사를 거대한 스크린에 확대 표상하는 실행 코드는 ‘역사의 오락화’이고 기본 이미지는 ‘장총 든 미녀 저격수’다. 감독은 철저하게 거의 강박증 환자처럼 이 코드의 원칙을 준수하여 실천한다. 그래서 암살 작전 모의에서도 유머 코드가 삽입된다. 하와이 피스톨은 로맨스를 위해 설정되고 서사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영감은 그냥 웃기기 위해 등장한다. 삼엄한 경비망이 처진 경성역에 내리면서 암살단은 저격용 모신 나강 소총을 커다란 박스에 넣고 들어온다. 여기에 총이 들어있다며 외치는 격이다. 고독한 저격수의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 하나면 족할 암살 장면은 시가전으로 변해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자동차 추격과 군중 장면으로 긴박감 있게 보여준다. ‘역사의 오락화, 오락의 역사화’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드는 최소 조건이 아니고 영화의 중심 주제와 본질로 변한다.


그래서 영화 <암살>의 쾌감의 발원지는 민족과 조국이 아니라 깨진 안경, 모신 나강 소총, 포드 클래식 자동차와 같은 사물에 대한 매혹이거나 1930년대 상하이를 지배했던 ‘붉은 화려함’이나 담벼락을 건너뛰고 자동차 난간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속도와 사운드에 대한, 바로 스펙터클에 대한 전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쾌감의 절정은 부드러운 얼굴 곡선과의 대비로 더욱 시각적인 이정재의 가슴과 스웨드 재질의 롱 코트 속에 꿈틀거리는 하정우의 몸 그리고 장총의 탄환집을 두른 전지현의 긴 허벅지에 대한 몰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암살>의 쾌감은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육체의 한 부분에 대한 집착을 통해 발산되는 페티시즘이라는 왜곡되고 분열된 쾌락이다. 최동훈 감독은 미술과 의상 감독에게 ‘실제보다 화려하게,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담은 무서운 공간’을 주문했다. ‘역사의 오락화’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뛰어넘는 ‘리얼리티의 판타지화’를 거쳐 팩트와 주장의 경계를 무시하면서 마침내 진실과 거짓의 구분을 무시하는 ‘오락의 역사화’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암살>의 비밀을 드러내는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안옥윤이 아니라 그의 쌍둥이 자매 미츠코다. 미츠코는 아버지에게 사살되기 전에 대사인지 독백인지 말한다. “나도 독립운동가들 좋아해. 근데 우리 아빠도 좋아. 여긴 다 이렇게 살아. 독립운동가들 좋지만, 어쨌든 너는 안했으면 좋겠어”. 미츠코의 진술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선택한 일천만 관객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읽어야 한다 - ‘나도 독립운동가 영화 좋아해. 근데 신나는 영화가 더 좋아. 그러니 무조건 신나는 영화를 봤으면 좋겠어’. 미츠코는 아버지 강덕진이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니라 영화의 비밀 코드, 바로 관객의 분열된 무의식의 정체를 무심결에 폭로했기 때문에 사살된 것이다. 또는 타짜와 도둑들과 노는 처지지만 마음속에 깊은 아티스트의 허무를 간직한 최동훈의 고독한 자아가 죽인 것이다.


감독은 미츠코를 즉결 처분하고 관객의 분열된 욕망대로 전지현은 이쁘게, 하정우는 카리스마 있게, 이정재는 야비하게 보여준다. 멋있고, 코믹하고, 슬프고, 낭만적이며 게다가 감동적인 영화를 원하는 관객의 복합적 망상증을 존중하여 음모와 배신에 로맨스까지 섞어 액션활극을 만든 것이다.



'역사의 오락화'는 지탄받아 마땅한 것인가.
강한섭의 <암살> 비판에 대한 반론

최광희 (평론가)


강한섭 평론가가 쓴 '<암살>의 쾌감을 부인하다'는 글은 쾌감을 부인한다고는 하지만, 쾌감의 정체를 기가 막히게 분석하고 있다. 그는 <암살>이 만들어내는 영화적 쾌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묘파하고 그 실체가 '역사의 오락화'라고 규정한 뒤, 그것을 '부인'한다. 실체를 알아야 부인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강한섭 평론가의 글은 매우 의미심장하고도 유의미하다. 역설적으로 <암살>을 더욱 다층적인 시각으로 곱씹을 수 있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번 역설적이게도, 나는 거꾸로 강 평론가의 글 때문에 <암살>이 꽤나 잘만든 영화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또한 꽤나 유효한 영화라는 생각도 강화됐다.

그럼에도 굳이 반론을 쓰는 것은, 역사에 대한 지나친 엄숙주의의 냄새가 나는 그의 큰 전제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역사의 오락화가 가져올 역기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언술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나는 역사의 오락화가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리둥절하다. 역사는 늘 교과서에서 근엄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TV 다큐멘터리의 장중한 내레이션으로만 재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H.CARR의 유명한 선언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이며, 영화는 역사와 상상력의 끊임 없는 대화이다. 즉 영화는 영화적 쾌감을 통해 역사를 실어 나른다. 팩트와 허구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는 오롯이 그 쾌감을 위해 존재하며, 주인공들의 동선과 장면의 역동성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역시 관객들이 원하는 시청각적 쾌감을 위해 봉사한다. 그것은 매우 지당한 영화적 욕망이다.


강한섭 평론가는 거대 자본의 욕망이 역사의 오락화를 야기한 근본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대중 영화 가운데 자본의 욕망이 거세될 수 있는 작품이 있을까? 그 욕망은 당연히 이윤의 추구이며, 이윤의 추구는 관객들이 영화로부터 얻고자 하는 판타지와 관음증적 쾌감의 함수, 영화 산업의 전통 안에서 발견된 함수에 스토리와 캐릭터, 내러티브를 대입시키는 것이다. 그 대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감독들이 수두룩한 마당에, 최동훈은 그나마 수학이 진정으로 좋아서 너무 잘하는 모범생처럼 딱딱 대입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그 성공의 결과는 강한섭 평론가의 글 전반부가 매우 휼륭하게 분석하고 있다.)


쾌감의 정체를 '역사의 오락화'라고 규정하여 영화 <암살>의 대중영화적 의도 자체를 부인한 강한섭 평론가는 그것을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육체의 한 부분에 대한 집착을 통해 발산되는 페티시즘이라는 왜곡되고 분열된 쾌락"이라고 규명한다. 그 구체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영화 <암살>의 쾌감의 발원지는 민족과 조국이 아니라 깨진 안경, 모신 나강 소총, 포드 클래식 자동차와 같은 사물에 대한 매혹이거나 1930년대 상하이를 지배했던 ‘붉은 화려함’이나 담벼락을 건너뛰고 자동차 난간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속도와 사운드에 대한, 바로 스펙터클에 대한 전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쾌감의 절정은 부드러운 얼굴 곡선과의 대비로 더욱 시각적인 이정재의 가슴과 스웨드 재질의 롱 코트 속에 꿈틀거리는 하정우의 몸, 그리고 장총의 탄환집을 두른 전지현의 긴 허벅지에 대한 몰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맞다. 이것이 <암살>이 역사의 오락화를 위해 동원한 요소들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거기에 열광한다. 그러나 관객들이 열광하는 지점은 바로 그것 뿐일까? 앞서 언술한대로, 역사의 오락화는 대중 영화의 필연이다. 중요한 것은, 그 오락화 또는 설계된 쾌감이 어떤 주제 의식을 실어 나르고 있느냐인 것이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의 중국과 경성이라는 시공간의 상상적 재배치와 장총을 든 전지현의 긴 허벅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냐는 것이다. 관객들이 오로지 거기에 도취돼 역사의 왜곡된 해석과 리얼리티의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평론가의 엘리티시즘적 기우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든, 특히 한국영화는 그것이 스펙터클의 전율만을 제공한다고 해서 대중과의 광범위한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역사성'이라는, 대중의 공유된 기억과의 화학작용이 작동한다. 그것이 내가 <암살>이 단순히 역사를 오락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맥락적 전제이다.


최동훈의 <암살>은 1949년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실패에 이은 사적 응징이라는 판타지를 가미하고 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청산의 실패에 대한 응어리,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찜찜하게 보여주지 않고 완결적으로 해소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사실 영화는 앞서 강인국을 처단한 지점에서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최동훈은 약 20여 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을 더 쓴다. 어찌보면 사족과도 같은 엔딩 신을 덧붙이기 위해서다.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반은 걸쳐 있고 반은 순전히 상상에 걸쳐 있는 엔딩이다. 이런 걸 흔히 말하듯 감독의 '인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이 최동훈이 대중영화의 속성과 한계를 동시에 품으며 만들어낸 '열망'적 인장이라고 본다. 그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악을 불러내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영화 매체를 통해 매질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면은 리얼리티를 훼손한 것일까? 리얼리티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허구의 자조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대한 슬픈 대리 만족이다. 그렇게라도 응어리를 풀고자 하는 처연한 판타지다. 그리고 최동훈이 그 무리수의 장면을 밀어 붙인 것은 자신의 의도가 관객들의 미완의 열망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성공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사 의식의 리얼리티'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최동훈이 한국 근현대사와, 그에게 주어진 영화라는 무기와, 관객들의 공유된 기억과 무의식적 열망 사이에 놓인 함수를 꽤 근사하게 풀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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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영화 이야기 2015. 7. 21. 19:34 Posted by cinemAgora

영화 <소수의견>(감독 김성제)은 철거 농성장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을 둘러싼 진실 공방을 담아내고 있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두 명의 아까운 목숨이 희생된다. 한 명은 현장에 아버지를 보러 왔던 10대 소년, 또 한명은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의경이다.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뒤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경찰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철거민 박재호(이경영 분)는 검찰에 기소된다. 검찰은 박재호의 아들의 목숨을 빼앗은 건 경찰이 아니라 철거 용역이므로 박재호가 엉뚱한 경찰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국선 변호를 맡게 된 지원(윤계상 분)은, 그러나 박재호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그의 아들은 경찰의 과잉 진압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지원은 자신의 선배 변호사인 대석(유해진 분)을 사건에 끌어 들이는 한편, 대한민국을 피고로 하는 본격 소송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 여기자 한 명이 이들의 소송 과정에 깊이 개입하는데, 그녀는 바로 강제 진압 현장에 있었던 사회부 기자 수경(김옥빈)이다. 영화 속에서 수경은 당차고 정의로운 기자로 묘사된다. 그동안 대개의 한국영화 속에 비쳐진 언론의 모습이 다분히 권력에 기생하는 악어새나 특종을 위해 배신을 서슴지 않는 박쥐와도 같은 존재로 그려졌다면, 수경은 한국영화에서 모처럼 만나는 기자 다운 기자다. 그녀는 공권력을 앞세워 자신들을 옥죄어 오는 검찰 앞에서 주눅 늘고 힘겨워 하는 진원을 끊임 없이 응원한다. 그리고 여론을 진원 팀에 유리하게 작동하도록 기사를 쓴다. 수경 덕분에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법조계의 아웃사이더에 머물던 변호사 진원은 일약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서게 된다. 국가를 상대로 한 이 소송에서 그는 과연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국가 시스템에 대항하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이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과연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릴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몰입하게 만든다.


진원과 대석 팀은 소송의 와중에 검찰이 증거를 은폐하는 걸 넘어 조작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진원은 망설인다. 이걸 지금 공개하는 것이 과연 소송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가. 그들과 함께 증거를 확인한 수경은 눈을 반짝인다. 엄청난 특종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당장 기사를 쓰기 위해 달려간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진원이 막아 선다. “당신은 고작 이걸 기사화하기 위해 우리랑 여기까지 왔던 거야? 지금 그 까짓 기사 몇 줄이 그렇게 중요해?” 진원은 만약 이것이 기사화됐을 경우, 검찰이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방해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황이 더욱 꼬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이를테면 언론의 딜레마라는 건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지금 터뜨리면 엄청난 대특종이 될 터, 다른 언론들은 그걸 받아 쓰느라고 바쁠 것이고 기사화한 주인공은 일약 특종 기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소송의 목적이 최종적인 승리라면, 그러니까 피고인 박재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더 나아가 소송의 피고인 국가, 즉 대한민국의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라면, 기사화를 조금 늦추는 것도 전략적으로 맞다는 진원의 판단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수경은 매몰차게 진원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 기자야!”
이 말은 많은 뜻을 품고 있다. 자신은 특종 앞에서 망설일 수 없는 직업적 본능의 소유자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고, 확인된 사실 앞에서, 그것도 국가 권력의 엄청난 부도덕을 목도하고도 침묵하는 것은 언론의 윤리가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변호사의 전략과 언론의 윤리가 충돌하는 순간이다. 더 큰 진실을 위한 행보에서 어느 선택이 더 맞는 것인지는, 물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판단할 몫이다. 그러나 실제 언론인들이 숱한 보도 현장 속에서 겪게 되는 딜레마를 영화 <소수의견>은 매우 설득력 있게 펼쳐 보여준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불명확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사실을 잠깐 유보하는 선택을 할 것인가, 진실의 향방과 관련 없이 확인된 사실을 즉각 보도하는 선택을 할 것인가. 수경의 딜레마가 비단 영화 속의 상황으로만 머무는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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