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섭은낭

영화 이야기 2016. 1. 28. 12:43 Posted by cinemAgora

영화의 특성을 얘기할 때 흔히 거론되는 개념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다. 말이 좀 어려운 데 최대한 쉽게 말해 '서로가 서로를 베낀다'는 얘기다. '베낀다'는 표현보다는 '참고한다'가 더 적절하겠다. 그러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영화가 아니라, 선대의 영화들을 텍스트 삼아 자신의 텍스트를 만든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상호 텍스트성은 그래서, 주로 장르 영화에 많이 구현된다. 이를테면 세르지오 레오네가 미국 서부극을 참조해 <석양의 무법자>(김지운 감독은 이 영화를 참고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연출했다)와 같은 마카로니 웨스턴을 만들었고, 이것이 세르지오 코르부치의 <장고>와 같은 영화로 계승되었으며, 이걸 토대로 미국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통해 오마주를 바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니까 미국적 장르인 서부극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변주됐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셈이다.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이 연출한 <와호장룡>은 호금전으로 대표되는 홍콩 무협 영화에 대한 상호텍스트성의 훌륭한 사례다.


상호 텍스트성은 '재연'과 '재해석'을 통해 구현된다. 장르의 형식적 전통을 재연하고, 장르가 추구하는 바를 재해석함으로써 자신만의 텍스트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부분 두가지 요소가 결합되지만 재연에 좀더 방점을 찍는 경우가 있고, 재해석에 방점을 찍는 경우가 있다. 장이모우의 <영웅>이나 왕가위의 <일대종사>가 전자에 가깝다면, 설 극장가에 내걸리는 대만 감독 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은 후자에 가깝다.


실은 <자객 섭은낭>을 소개하기 위해 아는 척을 좀 했다. '상호텍스트성의 범주에서의 재해석'이라는 개념을 탑재하지 않으면 영화가 무진장 지루하게 느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허우샤오시엔은 무협 영화의 장르적 전통을 계승하되 자신의 연출가적 색깔을 엄청나게 부여했다. 무협을 완전히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무협 액션은 등장하되 결코 화려하지 않고, 갈등은 나오되 드라마틱하지 않다. 주인공 섭은낭(서기)는 영화를 통들어 단 세 마디 대사를 던진다. 클로즈업이 최대한 자제되고, 롱 쇼트나 익스트림 롱 쇼트가 자주 등장하며 화면 비율은 최근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4: 3 비율이다. 정적인 화면 위에 새 소리와 북소리, 간헐적으로 연주되는 초시공간적 음악이 얹힌다. 한마디로 <자객 섭은낭>은 역사상 가장 서정적인 무협 영화다.


따라서 이 영화는 낮설다. 낯선 영화적 문법을 지루하게 느끼는 관객들이 경향적으로 더 많은 건 분명하다. 그러나 낯선 것을 환영하는 관객이라면,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놓은 듯한 이 독특한 무협에 푹 빠져들 것이다. 허우샤우시엔은, 무협 용어로 친다면 영화의 무림 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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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소리

영화 이야기 2016. 1. 14. 12:40 Posted by cinemAgora

<로봇, 소리>는 부성애에 대한 영화다. 설정이 흥미롭다. 한국영화에선 사실상 처음으로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한다. 지구상의 모든 통화 내용을 감청해온 한 로봇이 위성으로부터 분리돼 한반도 서해상으로 추락하고, 때마침 10년 전 실종된 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와 만난다는 설정이다. 아버지는 로봇의 비상한 능력을 이용해 종적을 감춘 딸을 찾으려 한다. 이 영화의 정서는 인간과 로봇의 교감을 한 축으로,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회한을 한 축으로 맞물리며 나아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영화가 객석에 전달하는 감동의 적지 않은 부분은 영화관 바깥의 세상으로부터 튀어 들어온다. 어쩌면 "세월호 트라우마"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엇. 그냥 '보편적 부성애'라고 부를 수 없는, 한국이라는 시공간에 감도는 그 공기가 주인공의 입장과 만나는 것이다.


스토리 전개가 다소 전형적이긴 해도 이호재 감독의 연출은 비교적 준수하다. 이성민은 주연으로서 제몫을 다 한다. 눈물이 났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나서니 한숨이 나온다. 악착같이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부모들의 마음에 아랑곳없이 어처구니 없이 잔혹하고도 위험한 세상과 조우한 비루함 때문일 것이다. 이런 감정을 설명할 비평적 언어를, 나는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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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7일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보태졌다. 영화 <내부자들>이 ‘디 오리지널’이라는 부제를 단 확장판의 동원 관객수를 합쳐 역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것이다. 기존의 청불 영화 최고 흥행작은 2001년의 <친구>였으니 무려 15년 만의 기록 경신이다. 관객을 성인으로만 제한하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서 이 정도로 흥행했다는 것은, 이를테면 12세 이상 관람가나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의 천만 관객 동원에 맞먹는 흥행세라고 할 수 있다.


영화 그 자체에 대한 논평 말고도, 이를테면 이런 흥행 현상에 대해서도 평론가는 분석해야 한다. 무엇이 이토록 많은 관객들이 <내부자들>을 보게 하였는가. 단지 영화의 힘 때문이라고만 단순화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집단 심리적 기제가 <내부자들>의 흥행을 견인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나는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과 지난 8일 대담을 했다. 그는 영화가 처음 만들어져 내부 시사를 가진 결과, “400만 명 이상은 들겠구나”라는 예상이 나왔다고 전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두 배 이상의 흥행 성적을 낸 것이니, 그들의 예측이 빗나간 지점, 그러니까 400만과 820만 명 사이의 지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민호 감독은 이 영화를 ‘정의에 대한 영화’라고 스스로 규정했다. 그 규정이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정의가 구현되는 상황을 목격하고 싶은 관객들의 열망이 영화의 스타 캐스팅과 감독의 준수한 연출이 만들어낼 수 있는 흥행력 이상의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나는 본다.


감독과의 대담에서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한 ‘비호감’ 평론들을 화두로 삼았다. 영화가 처음 나왔을 당시, 적지 않은 평론가들이 <내부자들>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이동진 평론가는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효과 자체에 사로잡혀 있다”고 평했으며 씨네 21의 김현수 기자는 “내용이 부실하니 자랑할 건 배우들 뿐”이라고 혹평했다. 강유정 평론가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환상이 지나치면 환각이 된다”고 썼다.


요컨대, 영화 <내부자들>은 자극적이고 지나치게 적나라하거나 선정적이며, 영화의 복수극도 단순한 대리 만족 이상의 것을 주지 않는다는 의견들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의견이 틀렸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내부자들>이 “한국사회 리더 그룹을 모두 파렴치한으로 만든 영화”라고 일축한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불쾌감과, 평단 일각의 불쾌감 사이에 놓인 아주 미묘한 접점을 감지하게 된다.


그것을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영화를 ‘프로파간다’, 즉 대중 선동의 매체로 보는 관점이다. 역사적으로 영화는 실제로 대중 선동의 매체로 기능했다. 이른바 ‘몽타주 이론’으로 유명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과 같은 소비에트 감독은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이를테면 <전함 포템킨>(1925) 같은 작품들을 찍었다. 레니 르펜슈탈의 <의지의 승리>(1934) 같은 다큐멘터리는 충실한 나치 선동 영화로 기능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대종상에서 반공영화상을 받으면 외화 수입권을 주는 방식으로 영화를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의 도구로 활용했다.


이런 영화의 역사를 반추해보면, 영화가 대중의 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선동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는 시각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 시각에서 자칫 간과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또 한편으로는 창작자가 가진 시대 의식의 투영물이며, 따라서 현실의 투영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볼록 거울’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현실이 추하거나 잔혹할 때 영화는 그것을 은유하는 표상을 만들어낸다. <내부자들>의 이른바 ‘성기 동맹’ 장면과 손을 자르는 장면은, 감독 우민호가 감지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공기를 영화적으로 표상화한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자극적인 효과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자극’으로 치면 영화 <7번방의 선물>이 갑이다. 그 영화는 관객들에게 감정이 남아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눈물샘을 쥐어짜는 다양한 자극 기제를 총동원했다. 하지만 그 자극으로 얻은 눈물은 파블로프의 개가 흘린 침 분비물과 다름없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내부자들>의 정의 구현은 어쩔 수 없이 판타지다. 누차 강조하는바, 대중영화는 관객에게 판타지를 선사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갇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판타지가 현실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냐, 아니면 강유정 평론가의 우려대로 그저 환각제에 머무는 것이냐이다. 영화 <암살>의 친일파 염석진 처단은 명백한 판타지다. 그러나 대중은 그 영화를 통해 친일파가 실제로는 청산되지 못했다는 현실을 슬쩍 상기할 수도 있다.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내부자들>에서 안상구와 우장훈의 연합작전으로 기득권 카르텔이 붕괴되는 것 역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은 명백한 판타지다. 그러나 적어도 파렴치한 협잡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현실을 씁쓸하게 상기하며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역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우민호 감독과의 대담에 참석한 한 관객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보면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신문과 뉴스에서 보았던 것들이었습니다.”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라고 말하는 영화 속의 이강희 논설주간은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 한쪽 손이 잘린 상태로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오른손이 없으면 왼손으로 쓰면 되지요.” 결코 쉽게 붕괴되지 않을 철옹성 같은 지배 시스템이 극장문을 나서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달라고 감독은 관객들에게 슬쩍, 그러나 인상적인 방식으로 부탁한다. 따지고 보면, 현실을 가리는 일등 공신은 이미 정치권력과 자본에 의해 단단히 장악된 언론 매체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이런 영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


2016년 뉴스타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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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영화 이야기 2016. 1. 9. 10:35 Posted by cinemAgora

스티브 잡스의 전기 영화로는 <스티브 잡스>가 애쉬튼 커처 주연의 <잡스>(2013) 이후 두번째다. 그만큼 그가 현대 기술 혁명에 끼친 영향력을 방증하는 셈이다. 그는 혁신가이자 불도저같은 비즈니스맨이었으며 고집스러운 장인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냉혈한 자본가였고, 의리보다 전진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잡스>가 스티브 잡스의 혁신가적 성취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면, 마이클 패스벤더가 잡스로 분한 <스티브 잡스>는 그의 이면, 그러니까 뒷모습을 비추는 듯한 영화다. 실제로 영화는 그가 신제품 발표회를 앞둔 상황에서 여러 주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친 딸을 친 딸이 아니라고 우기고,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시연을 가능하게 만들라고 윽박지르고, 타임지가 자신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지 않은 데 대해 화를 내고, 회사의 동료들과 매킨토시의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을 벌인다. 영화는 시종일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제품 발표회에 나선 그 멋진 잡스가 아닌, 신경질적이며 집착적이고 애플 컴퓨터만큼이나 폐쇄적인 그의 또 다른 자아를 재조명한다.


따라서 <스티브 잡스>는 그에 대한 칭송의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평전이다. 한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감독 대니 보일과 독일 출신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 영국 출신 배우 케이트 윈슬렛은 스티브 잡스라는 미국의 '영웅 텍스트'에 대한 재해석 작업을 탁월하게 합작해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특정인에 대한 특정 정보를 넘어선, 열망과 결핍, 갈등과 화해의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한 명의 보편적 인간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이다.


그런 면에서 잡스는 죽어서도 행복한 인간이다. 적어도 숭배의 동상에 갇혀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문제적 인간'은 예술가들에 의해 환영 받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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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

영화 이야기 2015. 12. 31. 09:16 Posted by cinemAgora

실연이든 이혼이든 짝을 잃은 이들이 모이는 호텔이 있다. 이 호텔에 머무는 제한 기간은 45일. 그 사이에 짝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로 변하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찾아야 하고, 만약 거짓임이 밝혀져도 동물이 된다.


데이비드(콜린 파렐)도 그래서 이곳에 왔다. 하지만 도통 마음에 드는 짝을 찾을 수가 없다. 동물은 되고 싫고(그는 영화 제목처럼 만약 동물로 변한다면 랍스터가 되기를 원한다. 오래 살고 번식력이 뛰어나다는 게 이유다.) 어찌저찌 같은 호텔 투숙객 중에 대략 취향이 비슷하다 싶은 여자와 짝이 됐으나 그건 또 다른 악몽이었다. 결국 데이비드는 이곳을 탈출해 숲으로 들어간다. 거기엔 함께 있되 절대 사랑 놀음을 해서는 안되는 외톨이 그룹이 존재한다.


황당한 설정이다. 그러나 슬쩍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영화 <더 랍스터>(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제도로서 강요되는 사랑과 극단적인 독신주의를 동시에 냉소하는 우화이다. 데이비드가 속하게 되는 두 상반된 그룹을 대비시키면서 그 어떤 경우든 사랑에 대한 작위적이고 법칙적인 룰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가장 사랑다운 사랑은 무엇일까. 물론 영화는 그 답 역시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짝을 찾든, 혼자이든 어쨌든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에 드리운 필연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달콤한 고통이 있을 가능성을 슬쩍 열어 둔다.


콜린 파렐은 많이 늙었다. 배가 축 늘어진 늙음 그대로의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다. 레이첼 와이즈와 레아 세이두는 이 황당한 영화의 우화성에 설득력을 얹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송강호나 전지현이 박정범 감독(누구인지 아시나?)의 독립영화에 출연한 거나 마찬가지인 작품이다. 유럽 영화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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