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르

영화 이야기 2015. 3. 10. 08:27 Posted by cinemAgora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 운동을 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오마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이 영화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대로의,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정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논평을 가하고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는 오히려 그들이 처한 환경, 그러니까 분리 장벽이 강요하는 관계의 왜곡, 뜻을 함께 한 이들 사이에 강제되는 불신의 풍경을 미시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영화 속의 정의롭고 아름다운 청년들은 평범한 우정과 사랑을 누릴 권리를, 자신들도 모른 채 박탈 당하고 마는 것이죠.

이 영화를 보면서 개인의 삶과 개인들간의 관계는, 온전히 개인들의 몫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다시금 통렬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불행하다면, 그 불행을 강제하는 이 시대와 사회 환경이 아주 큰 가해자로 군림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개인의 불행이 언제나 개인이 열등하거나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불행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미디어는 끊임 없이 입심 좋은 힐링 전도사들을 통해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하죠.

톡 까놓고 말해, 군대에 강제 징집되는 건 젊은이들에겐 불행입니다. 가장 왕성하게 공부하고 활동할 수 있는 나이에 상명하복이 당연시되는 계급 사회의 룰을 내면화하고 사회에 나와야 하는 한국의 남성들은 불운합니다. 사회는 그걸 신성한 의무로 끊임 없이 포장하고 군기피자들을 마녀사냥하며 분풀이의 장을 마련해줍니다.

사실 더 근원적인 원인으로 나아가면, 우리 사회의 많은 불행과 불안이 분단에 기인합니다. 분단은 상시적인 위협이자, 권력자들에겐 편리한 공포 조장의 알리바이로 기능합니다. 분단이 낳은 우편향적인 파시즘이 남한에선 피땀 흘려 지킨 '자유민주주의'로 통용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로운 나라이되 사상 표현의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 나라이되, 상명하달 식의 금지에 익숙합니다.

바로 이런 환경이 개인들의 삶에도 압도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단지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 집단 공포증과 집단 신경증이 지배하는 공기 속에서 사람들간의 관계도 자주 과민하게 파멸됩니다. 위선은 미덕이 되고 솔직함은 악덕이 됩니다. 기회주의는 당연한 처세이고, 원칙주의는 철 모르는 순진함으로 홀대 받습니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경쟁을 강요받고, 타인들의 욕망을 욕망하라는 미디어의 주술에 항상 노출됩니다.

우리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우리의 삶을, 우리의 관계를, 더 인간적으로 더 화목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영화 <오마르>를 보고 나오면서 그런 침울한 질문들이 머리속에 맴돌았습니다. 장벽이 삶을 왜곡하는 상황은, 팔레스타인만의 문제는 아닌 게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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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

영화 이야기 2015. 3. 10. 08:25 Posted by cinemAgora




마이클 키튼.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팀 버튼이 감독한 <배트맨> 시리즈의 그 배트맨입니다. 배트맨을 패러디한 게 비교적 분명한 <버드맨>에서, 그는 한때 잘 나갔던 슈퍼 히어로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이자 지금은 대중들로부터 잊혀진 퇴물 배우로 나옵니다. 그런 그가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를 통해 재기를 노리는 신경증적인 과정이 <버드맨>의 중심 스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실제 대중들의 뇌리 속에서 슬쩍 잊혀진 마이클 키튼이 바로 자신의 처지를 영화 속의 캐릭터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나오는 에드워드 노튼과 나오미 왓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들어감에 따라 전성기를 갈무리한 배우들의 처절한 자의식이 캐릭터에 마구 베어 나오고, 그것이 이 영화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마치 <레슬러>의 미키 루크를 볼 때의 그 아릿함을 연상시키되, 천재적인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치기 어린 형식 실험으로 말미암아 시종일관 팽팽한 심리극을 보는 듯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단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트릭이지만, 어쨌든 카메라는 단 한번도 화면 전환을 하지 않고 인물과 공간 사이를 부유합니다.

어쨌든 이런 게 영화의 진경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영화는 연극 무대를 핑계 삼아, 값싼 구경거리가 된 할리우드 영화와 그 앞에 줄을 서는 멍청한 관객들을 실컷 조롱합니다. 어쩌면 나를 향해 있을 그 조롱은, 그러나 통쾌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멍청합니다. 실재와 허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닙니다. 우리로선 영화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최대치의 치욕입니다. 이런 치욕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인물과 형식도 그렇습니다. 마이클 키튼은 자신의 현재를 모욕하는 버드맨 시절 분신과 끊임 없이 갈등합니다. 영화도 초현실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슬쩍 슬쩍 넘나들며 영화가 영악한 건지 관객이 우둔한 건지, 아니면 반대인지 헷갈리게 만듭니다. 바로 그런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통해, 영화는 예술과 엔터테인먼트가 한 끗 차로 자존심 대결을 펼치는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우스운 자화상을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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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삼바

영화 이야기 2015. 3. 10. 08:24 Posted by cinemAgora




프랑스 영화 <웰컴, 삼바>에서는 근래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짜릿한 롱테이크 도입부를 선보이고 있었다. 영화의 첫 신을 롱테이크로 설계하는 연출 방식은, 이를테면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이나 로버트 알트먼의 <플레이어> 같은 작품에서 기가 막히게 보여준 바 있는데, 이 영화도 그에 못지 않은 롱테이크의 미학을 과시한다.

카메라는 어느 화려한 파티장을 비추면서 출발한다. 1920년대 의상을 입은 이들이 스윙 댄스를 추고 있고, 행복에 겨운 이들이 풍요로운 파티를 즐기고 있다. 거대한 높이의 케이크를 춤을 추던 두 커플이 살짝 커팅하고 나면, 쫙 빼입은 급사 네 명이 그 케이크를 번쩍 들어 주방쪽으로 나른다. 카메라가 그들을 따라 가면 어느새 바깥의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파티장과는 분위기가 180도 다른 주방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분주하게 각종 요리를 만들어내는 조리사들이 비쳐지고, 카메라는 그들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요리의향연을 탐닉하는 척 하다가 슬쩍 귀퉁이를 돌아 더 들어간다. 이제부터 파티장에선 볼 수 없었던 이들이 나온다. 주로 흑인들. 그들은 흥청망청 파티장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접시들을 정신 없이 닦고 있다. 카메라는 이윽고 무표정한 상태에서 마치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반복적인 노동을 하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삼바(오마 사이)다.

공간을 부유하는 단 한 컷으로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인 프랑스의 축약도를 그려 보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처한 이 사회의 좌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기가 막힌 롱테이크다. 요컨대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의 고되고 반복적인 노동이 뒤를 받치는 곳. 더 정확하게 말해 프랑스 주류의 백인들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흘러든 저임금 노동자들(국가는 그들을 불법 이민자라고 부른다.)의 희생이 강요되는 곳. 국가간 불평등이 강제한 '소외'의 풍경을, 그 롱테이크 한 컷으로 단박에 붙잡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게 영화의 쾌감이다. 카메라의 각도와 움직임을 주제 의식과 어떻게 결부시킬 것인가. 바로 그런 창작자의 고민과 성찰의 결과를 목격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고민의 결과를 만나고 나면, 희열과 여운이 동시에 밀려든다. 영화를 보며 얻게 되는 진짜 감동은, 예상된 자극에 예상된 반응을 하며 눈물 한방울 흘리는 게 아닌,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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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예술하는 시대

영화 이야기 2015. 3. 10. 08:22 Posted by cinemAgora

한 때 한국영화계에 '작가주의'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영화는 '작가(auteur)로서의 감독이 중심이 된 예술'이라는 선언적 테제는 프랑수아 트뤼포로 대표되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정신이었고, 이것은 누벨바그에 자극받은 일군의 평론가들에 의해 90년대 이후 한국에도 삽시간에 유행했다. 실제로 9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영화계는 작가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철수, 박광수, 장선우, 여균동, 임상수,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박찬욱, 임순례 등 소위 '작가'로 분류되는 감독군이 모두 이 때 등장했고, 비록 흥행은 엇갈렸지만 대체로 이들 새로운 작가군은 평단의 환호를 받았다.

이 말을 꺼낸 것은 현재의 한국영화에 과연 작가가 존재하냐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국제시장>은 윤제균의 영화일까, CJ의 영화일까. <명량>은 김한민의 영화일까, CJ의 영화일까. 그런 영화에 작가주의 프레임을 들이대는 게 애시당초 번짓수를 잘못 찾은 일 것이다. 요컨대, 그런 영화에는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노림수와 거기에 동원되는, 감독 명찰을 단 테크니션들이 존재하지 시대에 대한 작가적 통찰을 기대할 수 없다.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는 작가들, 이를테면 홍상수나 김기덕, 이창동 등만이 힘겹게 자기 색깔을 지키고 있지만, 대중의 관심권에서 한참 멀어진 데다, 적어도 그들의 뒤를 이을 작가군이 10여년이 넘도록 등장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영화계에선 재빠르게 상업영화 진영으로 넘어가기를 바라는 신인들이 바늘 구멍을 통과하려고 애쓰는 낙타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한국영화는 단연코 작가의 시대가 아니다. 자본이 예술하는 시대다. 관객들은 작가가 아닌 자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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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뢰

영화 이야기 2015. 3. 10. 08:21 Posted by cinemAgora



일찌감치 연쇄 살인범이 잡힌 뒤의 사적 복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영화는, 중반 이후 연관성이 없는 듯한 사건을 배치합니다. 그렇게 되면 관객은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을 하기 마련이죠. "뭐 이렇게 뜬금없지?" 혹은 "저건 분명 나중에 관련 사건으로 밝혀질거야." 요컨대 돌출적으로 보이거나, 수가 읽힌다는 겁니다. 이 영화가 바로 그렇습니다. 미스터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결말이 쉽게 보입니다. <살인의 추억>에 이어 이 영화 속에서도 형사 역을 맡은 김상경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살인의 추억>의 김상경은 봉준호의 실력이었구나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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