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 굿 걸' 끝나지 않은 성장통

영화 이야기 2014. 9. 21. 17:13 Posted by cinemAgora



다코타 패닝이 훌쩍 컸다. <아이 엠 샘>의 깜찍한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성인 연기를 한다. 그동안 <트와일라잇>이나 <런어웨이즈> 같은 작품을 통과해오면서 폭풍 성장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딱 스물이다. 그 나이에 걸맞게 대학 입학을 앞둔 스무살 청춘의 이야기를 찍었다. <베리 굿 걸>(9월 25일 개봉)이 그 작품이다.

릴리(베리 굿 걸)는 예일대 합격증을 받아 놓고 뉴욕 크루즈의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절친 제리(엘리자베스 올슨)는 가수를 꿈꾼다. 막연한 미래를 향해 달려오느라 멘탈(mental) 중심의 성장기를 보낸 그들은 이제 미뤄 두었던 2차 성징이 강제하는 두번째 성장 단계, 즉 피지컬(Phisical)의 신세계로 진입하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막 노는 건 아니다. 조심스레 달뜬 연애를 꿈꿀 뿐이다.

이런 와중에 사진 작가 데이빗(보이드 홀브룩)을 우연치 않게 만난 두 친구는 동시에 이 훈남에게 홀딱 빠진다. 제리는 데이빗을 짝사랑하는데, 데이빗은 릴리에게 마음이 있다. 제리에게 상처를 입히기 싫은 릴리는 몰래 데이빗과 밀회를 즐긴다. 결국 이 상황이 더 큰 상처를 만들어낸다.

<베리 굿 걸>은 딱 스무살 청춘들에게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담백한 호흡으로 담아낸다. 스무살, 한 발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한 발은 세상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걸쳐 있는 시절. 쿨한 척 하는 건 배웠지만 아직은 쿨할 수 없는 나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성장통도 안과 밖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진다.

비록 당사자는 심장이 터지도록 괴롭고 힘들다 할지라도, 청춘이 사랑스러운 건, 그들이 상처를 주고 받을지언정 진심을 위장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세 명의 청춘이 딱 그렇다. 다코타 패닝은 예쁘다. 친구 역으로 나온 엘리자베스 올슨은 더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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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의 경우, 영화의 첫 머리에 이런 자막을 자주 볼 수 있다. "This film is based on true story." 당연히, 실화라는 걸 밝히는 게 영화에 대한 흥미도를 올리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실화 바탕의 영화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실존 인물은 그의 실명 그대로 등장한다. 


그런데 한국영화의 경우, 비록 실화가 바탕이라 할지라도 이런 자막을 붙여야 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허구를 가미해 재구성했습니다." 

35년 전의 상황을 극화한다 할지라도, 그 주인공이 자살한 전직 대통령이며, 여전히 사회 일각의 저주 대상이라면, 위와 같은 자막은 필수적이다. 노무현은 송우석이 되어야 한다. 사회가 실화를 실화 그대로 소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 영화는 허구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하여 창작자와 관객들이 모두 '눈가리고 아웅'의 가상 현실적 분노에 동참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언론 자유와 표현의 자유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풍경이다. 이 풍경 안에서는 솔직함은 악덕이 되고 기만이 미덕이 된다. 그러니 창작자들이 실화이지만 실화가 아닌 척 우회로를 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0월 2일 개봉하는 <제보자>도 마찬가지다. 실화 바탕의 영화다.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과 그것을 보도한 PD 수첩의 고군분투기를 담고 있다. 역시나, 영화 속에서 그 어떤 것도 실화의 실명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영화 초반의 자막도 <변호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 영화는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과연, 황우석은 이장환 박사가 되고, 서울대학교는 한국대학교가 되며, PD수첩은 PD추적이 되고, 심지어 복제양 돌리는 복제개 '몰리'로 둔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실화를 실화라고 대놓고 말 못한 채 관객이 알아서 사실 관계를 눈치껏 추론하기만을 바라는 이 영화는 바로 그렇게 '눈가리고 아웅'해야 했던 한 시대의 초상화를 담는다. 맹목적이다 못해 비틀린 애국주의가 어떻게 허구를 진실로 믿게 만들었는지, 그것을 뒤집어 진실의 민낯을 드러내는 게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 일인지를 재연한다. 기억할 것이다. 황우석의 진실이 벗겨질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PD수첩에 돌을 던졌는지. 심지어 YTN을 비롯한 언론사들까지 앞장서 애국 포퓰리즘을 동원한 진실 가리기에 편승했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청맹과니일 때 진실을 보는 소수의 시선은 쉽게 외면당한다. 그런데, 그 시대는 과연 과거 속의 해프닝으로만 머물러 있는가? 

바로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두 가지 씁쓸한 추억과 소회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첫째, 빗나간 애국주의가 연출하는 거대한 맹목과 폭력이 참여 정부 시절인 불과 9년 전에 벌어졌다는 것. 둘째, 그래도 그나마 그때가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탐사저널리즘의 순기능이 작동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는 것 . 

잘 만든 영화다. 임순례 감독과 제작진, 박해일 등의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막내 PD 역의 송하윤은 신선한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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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상속되는 채무

영화 이야기 2014. 9. 16. 10:31 Posted by cinemAgora



프랑스의 여성 감독 클레어 드니의 누아르 <돌이킬 수 없는>(9월 25일 개봉)은 불친철한 영화다.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관객들이 생각할 여지를 엄청나게 안겨준다는 얘기다. 이것은 누군가에겐 별로 달갑지 않을 게 분명한 단점이자, 동시에 미덕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계급 사회가 강제한 비극을 복수극의 형식으로 따라간다. 누아르이지만 익히 봐온 할리우드의 누아르와는 완전히 호흡이 다르다. 낯설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낯설 뿐이지 나쁜 게 아니다. 이 낯선 미로에서 감독의 권유(?)대로 차근차근 영화 내용을 재구성하다 보면, 이 세계에 대한 끔찍한 통찰이 불쑥 뛰어 든다. 그것은 끔찍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기도 하다. 강한 자들은 늘 이기고 약한 자들은 늘 진다. 그 패배의 언저리에 강자와의 선을 긋는 단호함이 아닌 암묵적 동조와 화간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들의 비겁한 화간이 야기한 최종적 피해자는 늘 영문도 모른 채 당하는 그 다음 세대들이다. 그 살풍경은 한국사회에서 더욱 첨예하게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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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니슨이 요즘 펄펄 난다. <테이큰> 효과다. 뒤늦게 액션 히어로다. <A 특공대>서부터 <언노운> <논스톱>까지 죄다 액션 영화다. 이 양반, 환갑이 넘었다. 왕년에 권투 선수였다. 그 때 코가 부러졌다. 무너진 듯한 코 라인이 오히려 포스를 뿜어낸다. 

9월 18일 개봉하는 <툼스톤>은 그러나 <테이큰> 유의 액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누아르에 가깝다. 원작은 로랜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라는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영화의 정서도 제법 하드보일드하다. 

리암 니슨은 맷이라는 이름의 사립 탐정이다. 전직 경찰이기도 하다. 어느날 그에게 사건 의뢰가 들어온다. 의뢰인은 마약상이다. 위험하다. 그래서 거부한다. 그러나 사건이 범상치가 않다. 의뢰인의 아내가 납치돼 끔찍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맷은 나선다. 이런 와중에 노숙하는 흑인 꼬마를 만난다. 둘은 파트너가 돼 유사 사건들을 추적한다. 서서히 사건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간다.

요즘 할리우드 영화는 초반부터 정신 없이 몰아붙인다. <툼스톤>은 그렇지 않다. 러닝 타임 한 시간 정도를 탐정 추리물의 호흡으로 간다. 후반부에 폭발시킬 에너지를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데 집중한다. 호흡이 다소 낯설다. 그래서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부가 그 지루함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준다. 걸작은 아니지만 졸작도 아니다. 그냥저냥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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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주의

영화 이야기 2014. 9. 5. 22:00 Posted by cinemAgora

직업이 영화평론가라 그런지 나는 문화주의자다.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를 꿈꾼다. 정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문화는 정치도 바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국의 정치가 후진적이라면, 그건 시민의 문화가 후진적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또 믿는다. 기껏 영화 한편으로 존경하는 대통령이 달라질만큼, 문화적 체질이 허약하기 때문이라고 역시 믿는다.

국민TV 라디오에서 나름 야심차게 진행했던 영화 프로그램이 8월로 막을 내렸다. 듣자하니 재정이 어려워 프로그램들을 줄였는데, 정치 시사 프로그램만 빼고 긴축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정치 시사 프로그램 백날 들어봤자, 나라가 바뀌나? 평소의 신념을 확인하는 선택적 노출과 선택적 주목만을 강화할 뿐이다. 사고의 융통성보다 내편만이 옳다는 생각을 고착시킬 수 있다.

내 생각이 극단적인지 몰라도, 공동체가 진화하려면 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되고, 의식의 변화는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문화는 세상에 다종다양의 의견이 존재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새길만한 통찰을 건져 올리는 행위다.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계관을 가다듬는 행위다. 그래서 문화는 인간이 밥을 해결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의 또다른 밥이었다. 굶어 죽을지언정 동굴에 벽화를 남긴 게 인간이다. 공자도 "시로써 일어나서 예로써 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論語 '泰伯')고 했다. '정치학'을 남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는 동시에 '시학(詩學)'을 남겼다.

나름 진보적인 매체조차 정치 시사 우선주의에 빠지는 모습은 씁쓸하다. 정말이지 그렇다. 문화가 결여된 진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켄 로치나 우디 앨런에 대해 토론할 수 없는 진보를 믿지 않는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으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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