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전음악에 관해서만큼 나는 쥐뿔도 모르는 무식쟁이다. 모짜르트니 바하니 헨델이니 베토벤이니 주워 들은 건 적지 않지만, 들어도 어느 음악이 누구의 것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한때는 클래식에 필이 살짝 꽂혀 라디오 채널을 종일 고전 음악 프로그램에 맞춰 놓은 적도 있긴 했다. 그래도 "아, 음악 좋다"하고 말았다. 저게 누구의 어떤 곡인지, 어떤 배경과 역사성을 지닌 곡인지 알아보고 싶은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으니 스스로 딱한 지경이었다.

허나 운명이니 월광이니 비창, 전원과 같은 소나타나 교향곡 제목을 들으면 적어도 공통분모가 베토벤이라는 것 정도는 알 깜냥이니 10월 11일 개봉하는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에 슬쩍 눈길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눈이 깊은 배우 에드 해리스가 <폴락>에 이어 또 얼마나 괴팍한 예술가의 영혼을 제대로 연기했나 보고 싶기도 했고. 언론 시사회를 대한극장에서 한다니 음향이 제대로겠구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드림걸즈> 이후 변변한 음악영화 만난 기억이 까마득한데 생경한 클래식이라도 오랜만에 귀 좀 즐거워 보자 했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래식이라면 젠체하는 꼰대들의 우아뻥 취향을 만족시키는 부르조아의 갇힌 예술이라는, 록 지상주의의 도그마에서 여전히 완전히 발을 빼지 못하고 있는, 실은 지지리도 무딘 감성의 낼 모레 마흔 아저씨, 오늘 이 영화 보다 졸도할 뻔했다. 영화 중간의 9번 교향곡 '합창'의 초연 장면 때문이었다.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의 카피스트로 일하며 천재성을 인정 받은 여성 음악가 안나 홀츠가 주인공이다. 베토벤은 이제 그녀가 펼치는 대리 지휘에 의존해 그 자신은 듣지 못하지만 그의 손놀림에 의해 완성될 걸작을 펼쳐 보일 찰나다. 이 순간, 카메라는 귀먹은 베토벤의 안내자를 자처하다 그 자신 완전히 곡에 몰입한 무아지경의 안나와 연주자들 사이에 숨은 그녀를 지휘대에서 슬쩍 슬쩍 바라보는 베토벤의 손놀림을 번갈아 보여준다. 춤을 추듯, 서로를 애무하듯, 아니면 서로가 공감한 천상의 음악에 만취해 흐느적대듯. 안나는 베토벤의 악보를 카피했지만, 이제 베토벤이 순수 열정의 화신 안나의 매혹을 카피하고 있는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음악을 매개로 교감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장 영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황홀한 장면에서, 나는 숨이 가빴다. 절정에 이르러, 대규모 합창단의 '환희의 송가'가 힘찬 하모니로 공연장을 압도한다. 마치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올라가는 듯한 힘, 그것은 신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발악적 기상처럼 들린다. 이 즈음에 이르자 굵고 짜릿한 에너지가 꾸역꾸역 내 가슴 위로 치받아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카핑 베토벤>은 내게 감동적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뒤에도 9번 교향곡을 완성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베토벤의 말년은 신의 선물처럼 그에게 다가와 또 다른 영감을 안겨준 것으로 설정된 안나 홀츠라는 가상의 여인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재연된다.

듣는 이의 가슴을 쾅쾅 울리고 마는, 땅을 너무나 사랑해 신과의 합일을 앙망한 베토벤의 열정이 당대의 연주회장에 앉아 있듯, 고스란히 내 가슴에도 카피됐다. 한편으로, 추잡한 욕망에 의해 예술이 강간당하고 있는 계절에 예술의 본원을 상기시키는 이 영화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

'한국영화 사랑'주의의 허실

영화 이야기 2007. 9. 13. 17:54 Posted by cinemAgora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랑해 달라고? 뭘, 어떻게?
한판 승부 패러다임에 갇힌 한국영화 주류 담론

“한국영화 요즘 많이 어렵습니다. 관객 여러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한국영화 많이 사랑해주십시오.” 지난 여름까지 한국영화 시사회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인사말이다. 제작자든, 감독이든, 배우든 한국영화의 위기를 성토하며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읍소했다. 지난 3월 근육질 블록버스터 <300>이 불을 지핀 할리우드의 맹공세가 7월의 <트랜스포머>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으니, 사실 올 상반기의 한국영화는 죽을 맛이었다. 관객이 안 들고 투자가 얼어 붙는 악순환 속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사랑을 애걸하는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그런데 나는 가끔, 이 ‘한국영화에 대한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의구심이 생긴다. 할리우드 영화를 사랑하지 말라는 얘긴지, 할리우드 영화만큼 한국영화도 사랑해 달라는 얘긴지, 아니면 할리우드 영화 빼고는 다른 나라 영화를 다 사랑하는데, 그 중에 한국영화도 포함시켜 달라는 얘긴지 헷갈리다. 구체성이 결여된 채 뭉뚱그려 사랑해 달라는 말에는, 관객들의 관람 선택에 있어서도 애국심의 작용을 바라는 은근한 바람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검증된 흥행 코드를 적당히 뒤섞어 놓고 대충 안정적인 흥행을 바라는, 목불인견의 기획영화들에게조차, 단지 그것이 한국영화라는 이유만으로 지지와 관심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지난 여름 <트랜스포머>로, <해리포터>로, <다이하드 4.0>으로 달려간 수 백만 명의 관객들은, 한국영화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한국영화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정당화하는 분위기는, 특히 언론에 의해 자주 부추겨져 왔다. 매달 발표되는 한국영화 점유율은 그 편리한 근거로 자주 활용되곤 한다. 언론들에 의하면 한국영화는 점유율 50%를 넘기면 다행이고 그 이하로 떨어지면 위기다. 또 할리우드 영화가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면 한국영화는 큰일 난 거다. 그러다가 한국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 한국영화 부활의 신호탄이란다. 그리곤 예의 화려한 부활이다. 언론에 의해 한국영화는 일년에도 몇 차례씩 죽었다가 살아난 메시아가 된다. TV 영화 정보 프로그램의 상투적 멘트도 이 패러다임에선 예외가 아니다. “관객들의 사랑에 힘입어 불쑥불쑥 커가는 한국영화를 보니 흐믓한 마음이 듭니다.” 이런 말, 이젠 아주 지겹다.

얼마 전에 한 방송국 시사 프로그램으로부터 출연 섭외를 받았다. <화려한 휴가>와 <디워>라는 영화의 쌍끌이 흥행이 한국영화 부활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견해를 말해 달라는 거였다. 출연할 코너의 틀이 벌써 그렇게 짜여 있으니 방송에 나가 할 말이라곤 앵커의 예정된 질문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예, 그럴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한국영화의 침울한 분위기에 어느 정도의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네요.” 따위의 하나마나한 용비어천가를 지껄이는 것 뿐이었다. 방송에 나가 소개하고 싶은 숱한 걸작들, 극장에서 외면 받고, 불법 다운로드의 저주로 인해 부가판권 시장에서조차 설 땅이 없는, 그 많은 주옥 같은 영화들을 소개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스크린 독과점과 다양성 확보에 대해 말할라 치면 골치 아프다고 손사래부터 친다. “시청자들 그런 거 관심 없어!” 내가 방송 시사 프로그램에 불려 나갈 일은 프로그램 말미에 양념처럼 끼어든 ‘한국영화 선전’ 소식을 전할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나는 관객들이 이를 테면 <본 얼티메이텀>과 같은 걸작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극을 얻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스 프루프>와 같은 영화는 또 어떤가. 앞서 개봉했던 <굿 셰퍼드>나 <뜨거운 녀석들> 등 올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들 가운데서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맹렬하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들이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 저널리스트로서의 소임을 잊고 반 한국영화적 언행을 일삼는 게 되는 걸까? 지금의 분위기에선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안 그러면 모순이 되니까.

요컨대, 한국의 영화문화를 둘러싼 주류적 담론은 여전히 할리우드와 한국영화의 한판 승부라는 대결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현실이 그러할진대, 그것을 외면하란 말이냐고 따질 분도 계실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론이 문화적으로 열려있지 않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한국영화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호소하는 문화적 애국주의가 영화 문화의 획일화라는, 다양성 결여의 살풍경을 슬쩍 가리는데 악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톡 까놓고 말해보자. 관객은 <디 워>를 사랑했을지언정, <좋지 아니한가>와 같은 수작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둘 다 한국영화인데도 말이다. <화려한 휴가>를 사랑했을지언정, 비슷한 시점에 한국 공포영화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극찬을 들은 <기담>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둘 다 사랑스러운 한국영화인데도 말이다. 흥행 양극화라는 잔인한 현실, 흥행 양극화를 부추기는 더욱 잔인한 배급 시장의 반문화적 약육강식 논리가 버젓이 활개치고 있는데도, 한국영화는 8월 이후 욱일승천의 기세로 화려하게 부활했으니 아무 문제 없는 것이다. 언론은 다시 ‘한국영화 만세’ 모드에 돌입했다. 통탄할 노릇이다.


비단 흥행 시장뿐이랴. 하물며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 싸움에서도 ‘한국영화 사랑’의 이데올로기는 그 실효를 상실한 지 오래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일부 영화인들이 보여준 이중적인 행태를 볼모로, 스크린쿼터 사수의 정당성에 ‘이유 없음’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그토록 한국영화를 사랑해 달라고 외치더니 당신들은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했느냐는 반격이다. 한국영화 전성기에 편승해 얻어진 유명세에 힘입어 호의호식하거나 앞뒤 안 맞는 모순적인 언행을 일삼는 무리들로 순식간에 전락해 버린 것이다. 실상이 이와 다를지언정 한번 급속 냉각 모드에 들어간 여론은 쉽게 바꾸기 힘들다. 냉정한 현실이다.

어쩌면 맹목적인 한국영화 사랑 캠페인이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던 부작용이 이제야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캠페인에는 우리는 왜 한국영화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며, 그에 앞서 우리가 영화를, 그리고 문화를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총론을 건너 뛰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적 체험 행위란 결국 다름과 차이를 체득하고 존중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바라볼 때 얻는 쾌감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세계의 논리에 대응한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의 언어를 통해 제대로 인식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다름을 존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와 동시에 외부의 문화가 갖는 다름을 체험할 권리도 우리에겐 있다. 그 생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의 한정된 인식이 확장되는 짜릿한 경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이유로 한국영화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영화만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한국영화에 대한 사랑은 다양성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국영화를 사랑해 달라고 읍소하는 영화인들은, 미국에서 온 저 영화와 일본에서 온 이 영화, 태국에서 온 그 영화도 한꺼번에 사랑해달라고 말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좋은 영화를 사랑해달라고 말해야 한다. 한국영화가 침체에 빠진 것만큼이나 좋은 영화들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해야 한다. 개선을 위해 지금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지금, 이런 말이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지난 몇 해 동안 적지 않은 논객들이 문화 애국주의의 함정을 경계하며 다양성의 본질을 상기하려 애썼지만 정책 책임자나 산업의 이해 당사자들에겐 순진한 말장난으로 들렸을 뿐이다. 위정자는 한국 영화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데 지금처럼 친절하게 복무하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영화라는 대표 선수는, 할리우드라는 골리앗을 상대로 홈그라운드에서만 드라마틱한 승부전을 펼치며 국민들의 역사적 문화적 콤플렉스를 대리 해소해줘야 한다. 그것을 중계하고 있는 언론이나 다양성 담론이 숨쉬지 못하는 틈을 타 독점을 공고히 하며 이윤을 부풀리는 대규모 영화 자본가들에게 어떤 영화가 시민의 영혼에 거름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들어설 자리는 크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나는 믿지 않는다. 오늘도 여전히 한국영화를 사랑해 달라고 읍소하고 있는 그들의 진심을.

* 9월 13일자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 기고한 글입니다.

,

방문자 100만 돌파 기념 영화 퀴즈 이벤트

별별 이야기 2007. 9. 12. 16:3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저희 3m흥업은 우연하게도(!) 5월 18일에 오픈했습니다. 그런데, 오픈후, 겨우 100여일 만에 방문자 100만명을 돌파해 버렸습니다. 그저 우리끼리 킥킥댈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고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같이 놀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어쨋든, 한 달에 한 번씩 하기로 한 선물이벤트를, 이번에는 '100만 돌파 기념'으로 업그레이드 합니다.

이 블로그를 가끔 찾아 오셨던 분들은 방법을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설명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방식이 약간 변경됐습니다.

일단, 쉽게 말해서 저희가 내는 문제를 빨리 맞힌 분들(!)께 유명배우가 직접 사인한 사인북을 선물로 드립니다. 이번에는 100만 돌파 기념으로 사인북 3권을 걸겠습니다. 제세 공과금+우송료. 그딴거 없고, 그냥 공짜. 그럼, 무엇을, 어떻게, 누구에게 주냐고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무엇을?   영화배우들의 친필(!) 싸인북. 송강호를 비롯, 박용우, 한지민, 하정우, 봉태규, 정려원, 정진영 등등. 배우별로 하나, 또는 두개씩 십여개쯤 있습니다. 장물은 아니니, 걱정들 마시라.

2. 어떻게?   PC통신시절, 천리안 영퀴방 스타일의 문제가 하나 나갑니다. 그럼, 싸인북이 갖고 싶은 분은 정답과 함께 연락 가능한 메일주소를 '비밀댓글' 남기시면 됩니다.

3. 누가?  정답을 맞힌 분들중 선착순 3명에게 영화배우 싸인북 목록이 메일로 갑니다. 그럼, 그중 하나만(!) 선택하시라. 바로, 택배 아저씨 불러서 날려줄 예정. 택배비? 아직은 약간 여유 있는 3M흥업이 부담하니, 걱정마시길.
 
자, 그럼, 문제 나갑니다. 아래 7가지 힌트를 보고, 연상되는 배우 이름을 비밀댓글로 올리시면 됩니다. 먼저 정답을 맞힌 3분께 선물 나갑니다.

1. 박하사탕
2. 'ㅈ 됐다' (뭔지 아시죠?)
3. 달마야 놀자
4. '난 너 사랑하는 거야.'
5. 오로라공주
6. 고모부
7.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자, 선물이 탐나시거든 '비밀댓글로 정답과 메일주소'를 남기시라.
정답 응모는 13일 오후 4시에 마감합니다.

,
신정아 씨와 변양균 씨의 로맨스를 보며

불륜이란 건 1부1처 결혼제도의 아킬레스건일까? 아니면 빛바랜 사랑의 그늘에 움트는 본원적 결핍의 산물일까. 혹은 제도에 갇힌 은밀한 욕망의 정당한 해방구일까. 뭔지 모르겠지만 이 정체모를 일탈 감정 혹은 행동이 문명 세계의 제도화한 인간들을 끊임 없이 괴롭혀 온 것만큼은 사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중의 잠재된 욕망을 건드리는 영화라는 장르가 이 핫한 소재를 놓칠 리 없을 터. 불륜 로맨스는, 수도권에 산재한 저 숱한 러브호텔의 수만큼이나 자주 애용돼 온 영화적 소재였다. 내가 본 영화 가운데 최고의 불륜 로맨스 영화는 데이비드 린의 <밀회>(Brief Encounter, 1945)였다. 중산층 가정의 모범적인 유부녀 로라 제슨과 역시 유부남이자 의사인 알렉 하비가 기차역에서 '우연한 조우'를 한다. 플랫폼에 기차가 지나가면서 로라의 눈에 티끌이 들어갔다. 의사는 그의 눈에 입김을 불어 티끌을 빼내 준다. 짧지만 짜릿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조우다. 게다가 에로틱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과연 두 사람은 시시 때때로 만나 밀회를 즐긴다. 그리고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할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고 알렉의 거처로 스며든다. 결정적인 순간, 얄궂게도 알렉의 룸메이트가 들이닥친다. 이 점잖은 남녀가 베란다를 통해 거처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 추레하고도 황망한 수치심이 여자의 얼굴에 가득하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위로할 길 몰라 역시 안타까울 뿐이다.

이 아름답도록 처연한 장면은, 몇해전 개봉했던 허진호 감독의 <외출>에서도 비슷하게 재연됐다. 이 영화는 배우자의 불륜을 알아버린 두 남녀 사이에 또 다른 불륜의 씨앗이 싹트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데, 두 사람의 불륜은 상대방의 배우자들이 앞서 저질렀던 불륜이 모티브가 된다는 점에서, 두 남녀 주인공의 매끈한 외모와 더불어 로맨스라는 감정의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정당화가 지나치다 싶어 오히려 불편한 영화였다.

불륜 로맨스 영화는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 이후 한국 멜로영화의 하나의 트렌드가 되다시피했다. 올초 나왔던 <바람피기 좋은 날>은 아예 결혼 제도 바깥에서의 사랑에서 어떤 쾌감을 발견하려 애쓴다. 최근 나온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지 않은 많은 기혼남녀들에게, 두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행복이라면 현재를 버리고 그 길로 달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은근히 부추긴다.

요컨대, 최근의 불륜 로맨스 영화들은 그 감정을 어쩔 수 없다고 얼버무리거나 혹은 찬양한다. 말하자면 로맨스는 죄가 없다는 얘기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도대체 이 불가해한 감정이 스며든 상황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남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불륜 로맨스를 한껏 아름답게 묘사하면서도 은근슬쩍 도덕적 안전장치를 장착했던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최근의 영화들은 (영화 바깥에선 도덕적 안전장치를 위한 적당한 제스처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영화 안에서만큼은 무기력한 파국이 아닌, 능동적 선택의 풍경을 포착한다. 불륜 로맨스에 대한 시대의 수용력이 이 정도가 된 셈이다.

학력 위조 파문으로 도마 위에 오른 신정아 씨와 변양균 청와대 기획실장 사이에 어떤 로맨스가 있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남의 사생활에 감놔라 배놔라 할 입장도 못되고 또 그래서도 안되지만, 이 경우엔 어쩔 수 없이 로맨스가 로맨스로 끝나지 않을 조짐이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러나 많은 영화들이 묘사한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에 이 케이스가 포함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이유가 있다. 눈에 든 티끌을 빼내며 시작된 소박함이라고 보기에 그들의 로맨스에는 감정 외의 것들이 너무 많이 개입한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 외의 것들이 로맨스를 위해 차출된 것인지, 아니면 로맨스가 감정 외의 것들을 위해 차출된 건지 검찰 수사 과정을 더 지켜볼 일이다. 어쨌든 아름다운 솜씨(美術)를 매개로 조우했던 그들의 로맨스는 전혀 아름답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다시, 로맨스는 죄가 없다. 하지만 가끔 로맨스의 당사자들이 로맨스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이야말로 불륜 로맨스가 내포한 가장 잔인한 함정일 것이다.  

,
SHOW 광고의 창의력 부재에 대해 씁쓸함을 표한 '어디서 본 듯한 SHOW'(http://mmnm.tistory.com/89)라는 포스트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글쓴이가 표절로 몰아붙일 생각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분들이 해당 광고를 두고 '표절이냐 아니냐'로 의견들이 갈리고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광고를 15년 이상 직접 만드는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광고 디자이너로 보이는 한 분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 광고업계의 상황에 대해 경청할만한 아주 자세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는 열악한 교육 과정과 기형적인 공모전, 광고업계의 영세성, 광고주의 인식 부족이 차용과 표절을 부추기고 있다고 전하고, 이런 상황때문에 종사자들의 창의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특정 광고의 표절 여부를 심판하는 것을 떠나, 이를테면 이런 댓글을 통해 제 포스트의 애초 의도대로, 광고계의 창의력 부재를 야기하는 구조적 문제를 둘러싼 정당한 논쟁으로 물꼬를 터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해당 댓글을 더욱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별도의 포스트로 발행합니다. 글쓴이에게 따로 허락을 구할 길이 없었으나 이런 문제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실 것으로 믿어 댓글을 그대로 긁어다 붙였습니다. 단, 글쓴이의 생각을 최대한 그대로 전하는 선에서 일부 오타와 행간 간격을 교정했음을 밝혀 둡니다.


제목: 광고를 15년 이상 직접 만드는 입장에서


같은 디자이너로서 순전히 제 주관적인 변명아닌 변명이겠지만..

위와 같이 순전히 디자이너의 자질문제를 논하기전에
기형적인 광고업계의 생리또한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나라 광고업계의 현실이 외국의 유수한 광고회사들에 비해
인식도 시간도 지원도 열악한건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나라 광고계의 문제점을 제가 아는 한도내에서 읊어 보겠습니다.

1. 광고를 가르키는 교육계부터가 기형적인 공모전이라는 제도하에서
습과적으로 표절을 하게끔 만듭니다.

실무에서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은연적으로 표절에대해 관대해지는 나쁜 버릇이
생기게 합니다

광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크리에이티브가 중요한거 다 알고 있고요..
대학에서 전공하고 각종 공모전, 전람회 등등

우리나라 교육에서부터가 문제가 많습니다.
공모전을 준비하다보면 수상작품들을 보다보면 어디서 본듯하거나 거의 그대로 배낀
작품들이 많이 보입니다.

왜냐면 비슷한 원서들, (광고를 배우거나 디자이너가 공부할수있는 책자는 외국의 유명 공모전, 또는 실제 방송또는 출판되었던 작품들의 수상작품 편람집들 같은 )국내에 소개되는 일본 광고, 미국광고 등의 광고책에 나오는
스틸, 장면들을 그들만 본게 아니고 우리도 봤기때문에..어디 어디 나오는 것이라는거
조금만 주의깊게 보면 알지요..
그래서 불만이 많고 수장작들에 대한 불신도 많았고요..

하지만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그대로 베껴서 카피만 살짝 달리 가는 작품들도
많이 봤습니다.

그걸 평가하는 교수들이 그많은 작품들을 다 일일히 볼수 없기 때문에 (광고책자하나가 백과사전만 합니다) 교수 입장에서는 상받은 좋은 광고만을 수록한 책자를 그대로 베끼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줄수 밖에 없습니다.

교수들이 그 방대한 광고 책자를 일일히 다 볼만한 시간적 여유가 학생들만큼 없기 때문이죠.

그런 카피 작품들이 버젓이 수상작품으로 선정될때는 속이 치밀어 오릅니다.
저거 어느 책자에서 몇페이지에 나오는 장면이나 광고컨셉인데..

우리나라 광고 공모전은 누가 누가 표안나게 잘베끼나..그런 대회인듯합니다.
솔직히 누가 말하진 않지만 광고를 전공한 학생들이나 광고인들은 알겁니다.
속으로 뜨끔한걸...

좋습니다.

배울때는 남의것을 카피하는것도 일종의 수업이니 너그럽게 넘어갈수있습니다.

저또한 그렇게 광고를 배울때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다른 장르에 써먹거나 조합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광고라는 작업이 어디서 뚝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고 생활 전반의 모든것들로부터
차용하는 작업이기때문에 표절이라고 볼수있는 부분이 애매한 것들이 많습니다.

같은 차용이라고 해도 최대한 고민하고 고뇌한 흔적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같은 광고인들은 딱보면 알지요..

그스틸을 그컨셉을 이렇게 응용할수도 있구나.. 정말 기발하구나..

문제는...습작들의 수준에서 머물러야할 버릇이..
실무에서도 연장선상으로 흘러간다는게 문제입니다.

2.광고기획사의 영세성

우리나라 광고는 다른 나라의 광고시장과는 특수한 경우입니다.
광고시장 자체가 협소하고 디자인 자체를 경시하는 풍조가 많았지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제가 광고를 배울때만해도 인식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였죠..
소위 말하는 간판쟁이 보듯 찌라시나 만든다느식의 경시풍조들..

광고의 인식이 부족하다보니 제작공정을 무시한 무조건적인 결과물만 내놓길
바랍니다.

즉, 잛은 기간에 여러건을 쳐내야 하는
상황속에서 매번 아이디어가 빛을 발할순 없지요

학생때 생각해뒀거나 평소에 미리미리 생각해놓은 아이템을 그때 그때
펼치다보니 몇건은 정말 잘 써먹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바닥이 날때가 있습니다.

광고주가 의뢰하여 그 결과물을 며칠내에 만들어 내는것도 한두번이죠..
마감이 빠듯한 속에 피말리는 전쟁을 하루도 아니고 그것을 업으로 삼다보니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에 쫏겨 광고책자부터 펼치게 됩니다.
그중 컨셉에 비슷하게 맞는것을 적당하게 버무리게 됩니다

3.클라이언트(광고주)의 인식부족

한마디로 클라이언트의 입김이 너무도 강합니다.

우리나라 클라이언트의 인식속에서는 디자이너의 창의력을 펼치기엔 너무도 힘듭니다.

디자이너가 아무리 창의력을 발휘해도 광고주의 입맛에 안맞으면 사장되는게
현실입니다.
광고주가 좋아하는 색에 맞춰 개발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소비자에게 먹히지 못하는
우를 자주 범하게 됩니다...

물론 그속에서도 빛나는 무릎을 탁 칠만한 아이디어와 소재들이 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입맛 속에서도 얼마든지 최대한 실력을 발휘할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드문 경우이고요

4. 디자인에 대한 정당한 댓가

앞의 광고기획사의 영세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들이고 완성도를 높혀도 그 댓가가 초라하다면
누가 그광고를 맡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소위 알고있는 마케팅비가 어마어마하다는거 알고 계시겠지만
그건 다 거품입니다

대부분은 방송국 등 대중매체에 실리는 비용이지 크리에이티브의 댓가가 아니죠
신문광고를 일례로 들면 우리나라 오대 일간지에 전면광고 올리는게 요즘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현업에 있었을땐 5천에서 9천정도 들었습니다.

방송국에서 피크시간때 15초짜리 광고물 돌릴때 얼마가 들겠습니까?

길거리 광고판에 포스터나 간판물 설치할때 비용이 얼마가 들겠습니까?
대부분 그런비용이지

한프로젝트 디자인을 했다고 수십억 수백억을 주진 않거든요..
실제 광고대행사들이나 기획사들에 돌아가는 비용은 고작 얼마 안됩니다.

그나마 대형 광고대행사들은 형편이 나은거죠..

5. 학력, 인맥을 떠난 실력있는 디자이너 채용

제가 부산출신이지만 대부분의 직장생활을 서울에서 하다보니 충무로에서 (충무로에 영화판만 있다고 하시면 섭합니다. ^^*) 하루가 멀다하고 접었다 다시 차렸다 하는
많은 영세 기획사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모두 금강기획이나 MBC애드컴이나 대규모 광고기획사들만 있는게 아니죠

저희 업계에서 말하기로는 원청이라고 하죠..

원청을 받고 그걸 다시 하청을 주는..우리나라 대부분의 기업현실이겠지만..
광고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여러업체들이 달라붙습니다.
금강기획이나 MBC애드컴이나 대규모 광고기획사들이죠

그걸 다시 하청을 줍니다 중소규모의 업체들에게
방송물은 직접 원청에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인쇄물 같은경우는 하청을 주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중소 광고기획사들..

그밑으로는

여러분들이 알고 계신 찌라시, 명함집, 간판집 등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는
디자이너들

이것이 우리나라 광고업계의 구조입니다.

그들 중에는 대기업 광고기획사들보다 더 실력있고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없겠나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학연, 지연, 인맥 위주의 사회다보니
실력있지만 적재 적소에 그 인재를 쓸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형 광고대행사들 채용 기준을 보면 누구나 다 참가할수 있을듯해보이지만

소위 알아준다는 학교외의 학생들은 솔직히 서류심사에서 떨어집니다.

광고업계에서는 첫단추가 중요합니다.

저같은 경우는 지방대 전문대 출신 치고는 제법 잘풀린 케이스죠..
인턴생활을 호텔기획실에서 하다보니 그나마 다른 친구들보단
나은 경우입니다.

학생시절때 그것도 못한친구들은 여기 저기 지원서 넣고 헤매다 걍 간판집 명함집 들어간 친구들도 많습니다.

학생시절의 그열정을 포기하고 자영업이나 다른 업계로 전업한 친구들도 많지요

대형광고대행사로 들어갈수 있는 방법은

첫째 공채 신입이죠..

우리나라 인사권을 가진 실무자들은 학연을 많이 따집니다. 지방대는 진짜
서류심사부터 떨어지는 경우 많습니다.

둘째 특채입니다.

경력자 뽑을때죠..

아주 드물지만 저처럼..중소기획사에 있다가 경력으로 채용이되는 케이스죠
원청일을 자주 맡다보니 그쪽 실장님 눈에 들어 뽑혀 자기회사에 지원해보라는...

세번째는 각종 공모전 등등의 발군의 수상경력입니다

하지만 위의 첫번째 교육의 문제에서 밝힌것처럼..
우리나라 공모전은 작품을 평가하는 교수나 실무자에 따라 너무 주관적이라는겁니다.
같은 학연에따라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학생들을 수상케 하는 비리가
너무 심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모 스포츠 연맹처럼 어느대 출신아니면 국대로 나서기 힘들어
추성훈처럼 다시 국적을 포기하는 그런 케이스죠..

공모전때 다수의 수상작을 배출해야 자기 학생들이 많이 취업을 나가기때문에
뭐라도 하나 줘야하는 의무감때문에 공정성을 잃는 교수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저의 경우는 그래서 죽어라 국제 공모전중심으로 출품을 했습니다만..

그외에도..
같은 조건일때는 인사권자들이 주로 같은 대학출신들을 뽑습니다.
저도 면접관이 면접시 후보자가 같은 학교 일때 000교수님 아직 잘 계시냐고 물어볼경우 같이 면접보면서 소외감을 많이 느낍니다.

직장에서도 지방전문대 출신이라 주위에서 은근히 깔보는 경우도 은연중 많이 느꼇고요

하여튼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제점이죠..학연, 인연, 지연은...

그리고도 몇가지 더 있지만 글이너무 길어지니...이만 줄일께요..

하여튼 각설하고.........................

대놓고 베낄때는 같은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써 부끄럽습니다.
저도 표절에 자유로울수 없고 또 표절을 해봤기때문에..그부분은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모든걸 일개 디자이너 책임으로 돌리기엔 너무하단 생각이 듭니다.

글쓴이가 제시한 표절이냐 아니냐?

결론을 말하자면

글쓴이가 제시한 '쇼를하라' 케이스는 제가 생각하기엔 차용이라고 하기엔
표절에 가깝다고 봅니다.

'쇼를 하라'라는 런칭광고는 네이밍쪽으로 접근한 경우인데..
그걸 풀어나가면서 굳이 비쥬얼을 일본 유수의 수상작품의 스틸을 차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엔 개연성이 너무 떨어진다고 봅니다.

광고를 전공하지 않는 일반분들도 지적하신부분처럼 제가봐도 같은 이유로
표절이라고 보여지네요..

얼마든지 쇼를 하라는 네이밍 컨셉을 맞춘다면 그보다 더 많은 다양한 스틸이 있는데
굳이 그쪽으로 맞춘것은 제가 생각하기엔 광고주의
입김이 어느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집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
BLOG main image
3 M 興 業 (흥 UP)
영화, 음악, 방송 등 대중 문화의 틀로 세상 보기, 무해한 편견과 유익한 욕망의 해방구
by cinemAgora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87)
찌질스(zzizzls) (3)
영화 이야기 (702)
음악 이야기 (34)
TV 이야기 (29)
별별 이야기 (122)
사람 이야기 (13)
3M 푸로덕숀 (156)
애경's 3M+1W (52)
민섭's 3M+α (27)
늙은소's 다락방 (26)
라디오걸's 통신소 (1)
진영's 연예백과사전 (4)
순탁's 뮤직라이프 (10)
수빈's 감성홀 (8)

달력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NM Media textcube get rss DNS Powered by DNSEver.com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3 M 興 業 (흥 UP)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cinemAgora [ http://www.ringblog.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티엔엠미디어 DesignMyself!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