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에 왔습니다

영화 이야기 2007. 10. 3. 12:05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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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 없이 부산에 왔다. 매년 가을 부산은 내게 순례지가 된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다는 것은, 척박한 흥행 논리에 함몰된 박스오피스의 공해지를 떠나, 모처럼 청명한 숲길에서 피톤치드를 마시는 일과 같다. 공기가 더 잘 들어오도록 팔을 들어 폐를 넓히듯, 새로운 영화적 자극에 민감하도록 감수성의 촉수를 가다듬는다.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를 예술로서의 영화를 찾는다. 희망을 탐색한다.

부산은 또한 사람을 만나는 공간이다. 티켓 오피스에 줄지어선 젊은이들의 열정을 만나고, 거장에게 함부로 질문을 던지는 시네필의 치기를 만난다. 영화 홍보를 전제로 마케터를 통해서야 겨우 만날 수 있는 배우들에게 뭘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사냐고, 뭘 믿고 그렇게 연기가 안 느냐고 물을 수 있다. 갈수록 주름살이 늘어가는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취기 어린 '큐트' 댄스를 만날 수 있다. 세월이 지나도 철 들지 않는 감독들에게 이제 좀 어른이 되라고 다독일 수 있다. 자원활동가들의 어눌하지만 예의 바른 긴장감을 목격할 수 있다. 새벽 찜질방에 널부러진 영화제 폐인들의 산송장을 미소 가득 안고 건널 수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운 좋게도 남포동 무대 인사의 사회를 맡았다. 덕분에 해운대에서 한 시간 거리의 그곳을 매일 출퇴근하게 생겼다. 유지태와 송혜교, 지진희와 강성연을 관객들에게 소개해야 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다. 남포동이 떠나갈 듯한 그 함성을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벌써부터 골이 지끈댄다(<엠>의 강동원을 소개해야 할 해운대 쪽 진행자는 나보다 훨씬 더 머리가 아플 것이다). 그래도 막상 그들 앞에 서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될 게 분명하니 이른 두통도 흔쾌하다. 게다가 영국의 거장 피터 그리너웨이의 핸드프린팅 행사를 진행해야 하다니! 두통이 심장으로 전이된다. 이런 영광을 내 생애에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이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부산에 있는 동안 파티의 유혹을 거절할 힘이 남는다면 블로깅을 하겠다. 기자의 특권으로 조금 더 농밀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 특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낮엔 영화에 취하고, 저녁엔 사람에 취하고, 밤엔 술에 취하고, 새벽엔 바닷바람에 취할 게 분명한 나의 부산영화제 기행,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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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재를 부를 승자도, 쫄딱 망한 패자도 없었다. 추석 대목 시즌의 치열한 흥행대전은 결국 그렇게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이렇다할 대박 영화가 나오지 않았고, 특히 한국영화들은 대개 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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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엔 <사랑>이 맨 앞줄에 있다. 그러나 비교우위다. 주말 사흘과 연휴 사흘을 합친 전국 관객이 110만 명을 살짝 넘었다면, '대박'이라고 장담하기엔 머쓱한 수준이다. 그나마 서울 관객수에선 <본 얼티메이텀>에 약 3만여 명 뒤졌다. 결국 100개 이상의 스크린 우위를 바탕으로 서울보다 한국영화 선호도가 높은 지방 쪽에 승부수를 띄운 전략이 먹힌 셈이다.

<사랑>이 그나마 비교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자체의 흡인력이 셌다기 보다 상황 변수가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상황 변수란, 앞서 기선 제압에 나섰던 세 편의 한국영화, <권순분여사 납치사건>과 <즐거운인생> <두 얼굴의 여친>이 관객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익숙한 흥행 코드로 관습적 흥행을 욕망한, 고만고만한 명절용 코미디에 대한 식상함이라 할 수 있겠다. <상사부일체>가 <두사부일체>와 <투사부일체> 등의 전편들이 세운 업적을 일거에 가려버리는 민망한 스코어(전국 64만 9천여 명)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 대표적인 방증이다. 결국 이같은 정서가 '다른' 장르로 들이댄 <사랑>에 반대급부적인 관심을 촉발시킨 셈이다. 자체 흥행 뇌관이 약한 상태에서 반대급부에 의존했으므로 1위 타이틀은 거머쥐었으되, 그 흥행 폭발력은 크지 않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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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이라는 측면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건 전국 150만 관객을 챙긴 <본 얼티메이텀>도 마찬가지였다. 올 추석 흥행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은 사실상 맷 데이먼이 날고 뛰는 할리우드 산 첩보 스릴러 뿐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영화는 그동안 텃밭이나 다름 없었던 연중 최대 대목 시즌을 맞아 관객들의 '표심'을 사로 잡는데 실패했다. 이건 올 상반기의 거듭된 부진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해온 한국영화 산업 전반에 또 한번의 뼈 아픈 타격이 될지도 모른다.

명절 연휴 코미디 불패 신화의 유통기한이 다가오고 있다는 조짐은 지난해 추석 <타짜>의 빅히트로 어느 정도 예고된 바 있다. 그런데도 기획자들은 '추석엔 웃겨야 산다'는 낡은 잠언을 포기하지 못했다. 관객들은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로 화답했다.

추석 연휴 주요 영화 흥행 스코어
*괄호안은 서울 스크린수

작품명                    스크린수            서울 주말         서울 연휴            전국누계
============================================================================
사랑                        400(85)               113,700           130,600              1,103,000
본 얼티메이텀           303(84)               132,000           144,000              1,509,000
권순분여사납치사건   363(76)                 68,000           108,000              1,208,000
인베이전                  173(53)                 59,200            63,900                358,100
즐거운인생               330(78)                 58,000            90,000                784,000
상사부일체               306(64)                 55,100            72,000                649,400
두 얼굴의 여친          297(58)                 26,800            29,000                663,800

*영진위 통합전산망이 아닌, 별도 취재로 확인한 각 영화의 실관객수(근사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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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에 TV를 꺼야했던 이유

TV 이야기 2007. 9. 26. 01:28 Posted by cinemAgora
명절 연휴에 고향 갈 일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하릴없이 TV를 켜놓고 이른바 '재핑'이라는 걸로 소일하기 마련이다. 이 채널 저 채널 옮기다 보면 명색이 공중파라고, 그나마 얼굴 좀 아는 연예인들이 떼로 몰려 나온 명절 특집 방송이라는 걸 앞다퉈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세 편의 공중파 특집 프로그램을 보다가 질려서 TV를 꺼버리고 말았다. 하나는 신정아 학력 위조 사건에 고무(?)돼 학력을 주제로 토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개그맨 서경석이 사회자로 나선 겉모양부터 일단 신기해 보여 조금 봤는데, 고등학교를 중퇴한 연예인이 나와 학력보다 중요한 게 실력이란 걸 자신의 체험담을 통해 얘기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좀 가다 보니 가관이다. 거기 또다른 게스트로 나오신 고승덕 변호사. 서울대 법대 출신에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패스, 예일대와 하버드대 석사라는 엄청난 학력의 소유자를 모셔다 놓고, 한편에선 학력보다 실력이니 어쩌구 하더니, 한쪽에선 진짜 학력의 진수가 어떤건지 얘기하고 있다. 위조하지 않고 진짜로 학력을 쌓은 그는,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 이런 자 앞에서 부끄러워 하라. 썩어 빠진 신정아여,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걸까? 수박 철도 지났는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박 겉을 단체로 핥고 있는 토론 프로였다.

변호사로서 고승덕의 수임률이나 승률을 우리는 알길이 없다. 그저 그가 고시 3개를 패스하고, 대한민국 국민까지 다 알고 있는 미국 명문대 학위만 3개를 가지고 있는 유명인이라는 것 밖에는. 애초에 교수를 꿈꿨다는 그 양반이 왜 그리 많은 명문대 석사 학위를 필요로 하게 된 건지 알 길이 없다. 과정이야 어떻든 그는 학력 중심 사회의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고, 또 자의든 타의든 그걸 바탕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에게 본질적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그렇게 공부가 깊은 법조인으로서, 얼마나 억울한 사람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 오셨냐고.

그러고 보니 사회자로 나온 서경석에게도 아무도 이렇게 묻지 않았다. "당신은 말했죠. 내가 만약 학력 덕 봤다면 이 정도에서 머물렀을 것 같냐고.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보죠. 당신이 그나마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 별로 웃기지 않는 개그 실력으로 사회하는 수준까지 갔겠냐고."

보다보니 오바이트가 쏠려서 후딱 채널을 돌렸더니 추석 특집 스타 골든벨이다. 개그맨들 대거 앉혀 놓고 사회자 지석진은 얼마나 잘났길래, 개그맨들 얼굴 품평으로 웃기려 든다. 그래서 누가 더 못생겼나 시합하고 있다. 하라는 퀴즈는 안하고 프로그램 시작하고 나서 얼추 10분 이상 서로의 외모들을 가지고 오락가락이다. 오지헌이 스스로 못생겼다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하니, 뒤에 있던 여자 연예인이 한마디 한다. "나도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참 놀고 계시네요." 그 멘트로 웃기려 했다면 당신이야말로 놀고 계셨다.

이쁜이들한테 상투적인 상찬을 퍼붓는 것만이 외모 지상주의가 아니다.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놀리는 것도 거꾸로 외모지상주의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악질 중의 악질이다. 공중파 TV는 버젓이 이런 짓을 저지른다. 휘영청 한가위 달 보며 엉뚱한 소원 빈다. 조상님이여, 악질 프로그램의 공해를 해결해주시압.

연휴 방송에서 가장 불쌍한 이들은 아나운서들이다. 어나운싱(알리기)하려고 취직했다가 쇼를 강요당하니 그들은 명절만 되면 쇼걸이 된다. 추석날 오후에 그들은 저마다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개그맨 가수들하고 짝짓기 놀이 하고 있다. 학창 시절에 경향적으로 좋은 대학 다니며 아나운서 되려고 공부 깨나 하셨을텐데, 처연하고 측은하다. 피디님들의 눈에 그들의 학력은 하등 중요할 이유 없나 보다. 이 대목에선 얼마나 귀엽고 예쁘게 보이느냐만 중요한가 보다.

그렇다고 연휴 방송이 마냥 후진 건 아니다. 가끔 기특한 게 있으니 그건 평소와 달리 셧더마우스하시고 세곡씩 연달아 음악만 트는 라디오의 BGM 특집 방송이다. 차라리 일년 내내 이런 특집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 결심한다. 다음 명절 연휴엔 결코 TV를 켜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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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료란 이름의 불량 어음

음악 이야기 2007. 9. 26. 01: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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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음반시장의 구세주?

 

얼마 전부터 음악계에는 서태지의 컴백에 대한 뉴스가 간간이 올라오고 있다. 구체적인 일정이나 뚜렷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문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 움직임(!)이 잡힌 것 아니냐는 희망적인 해석이 뒤를 잇는다. 팬들은 물론이려니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음악관계자들까지도 그의 컴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유사 이래 최악이라는 음반 시장의 돌파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태지의 2004년 발표 앨범 [로보트]가 50만장에 가까운 판매를 기록하며 숨통을 틔워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김건모를 통해 100만장 음반 시대를 열었던 것이 불과 10여 년 전 일인데, 2007년 상반기 10만장 이상 판매된 앨범이 단 2장이라는 시장 조사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하향 곡선을 그리며 축소되어온 음반 시장이기에 이젠 익숙해 질만도 하지만, 그래도 회생의 불씨는 없을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 음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딜레마이다.


음반 산업, 아니 나아가서 음악 산업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있다. 바로 불법 MP3 다운로드이다. 아티스트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경제적 분배를 방해함으로 창작 의욕을 저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몇 달 전, 영국의 팝 아티스트 엘튼 존은 ‘5년 만 인터넷을 폐쇄하면 명곡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불법 MP3가 한국이나 영국이나 문제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곡을 만드는 작곡, 작사가들과 아티스트들 사이에선 또 다른 볼 멘 소리가 나온다.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정식 유통되고 있는 MP3의 실연료와 저작권료에 대한 부분이다. 1,000원 안팎으로 사용료를 지불하는 핸드폰 통화 대기음의 경우 곡을 만든 작곡, 작사가들은 9%, 그리고 연주와 노래를 한 아티스트들은 4~6%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일단은 유통 경로를 맡고 있는 대행업체들과 이동 통신 업체들의 몫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다. 이 문제는 여러 번 거론된 것들이니 다시 이야기해봐야 입만 아픈 얘기이고, 나머지 가려진 부분은 그나마 작곡, 작사가와 아티스트들이 받아야 할 몫마저 제대로 지급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실연자 협회와 저작권 협회에 대한 불만이 높은 것이다.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의 주제곡을 작사하고, <주몽>의 주제곡을 작곡한 후배는 내게 이런 투정을 한 적이 있다. “정산에만 1년이 넘게 걸리고, 그 정산마저도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덜렁 얼마 정도의 돈을 보내주는 것으로 끝이에요. 웃기는 건, 자세한 내용을 알려달라고 해도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다는 한심한 핑계만 대고 있다니까요!” 이런 불만은 내 주변의 작곡, 작사가와 가수들 거의 모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돈은 걷히지만 그 돈이 실연자와 저작권자에게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연한 비밀처럼 도는 이야기엔 이런 것도 있다. ‘매일 전화해서 항의를 하면 6개월, 대충 독촉을 하면 1년, 그리고 그냥 기다리면 언제 실연료와 저작권료를 받을지 모른다.’ 톱 아티스트의 경우 받아야 할 돈이 몇 억은 훌쩍 넘는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농담반 진담반이지만, 1년이 넘도록 지급이 미루어지고 있다면 그 이자 수익도 마땅히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곡을 만들고 연주, 노래하는 아티스트들은 언제 받을지 모르는, 더구나 덤핑 할인도 불가능한 어음을 받고 있는 셈이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불법 다운로드를 이야기할 때 마다, 가장 큰 목소리로 음악 시장을 망치는 불법 운운하는 실연자 협회와 저작권 협회 사람들에게 알려드리고 싶다. 불법 다운로드의 문제 이전에 아티스트들의 창작 의욕을 가장 먼저 저해시키는 것은 실연료와 저작권료의 비정상적인 지급 형태라는 것을. 자신들의 직무 유기를 먼저 고치는 것이 음악 산업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첫 걸음이라는 것을 왜 그 분들만 모르는 걸까.  

* 8월 경향신문 오피니언에 실었던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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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연휴를 맞아 가족들과의 분주하고 살가운 한때를 준비하고 계실 분들 많겠죠. 하지만 그냥저냥 방구석에 콕 들어 박혀 두문불출하실 이른바 '방콕족'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 분들, 그냥 시간 죽이지 마시고 괜찮은 영화로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해서 추천 DVD를 소개해드립니다. 전제컨대, 일반적인 오락영화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극장 흥행에서도 큰 재미 못본 영화들입니다. 그런데 챙겨볼만한 포인트가 있는 작품들입니다. 스펙터클과 오락이라는 강박을 내려 놓으시면 '다른 미덕'이 보일지도 모르는, 명절 송편만큼의 정서적 영양가 가득 찬 작품들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은 먼지로부터 와서 먼지로 사라집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며 인간의 운명이죠. 그러나 인간은 바로 그 운명에 거역할 줄 아는 존재. 시간이 흐르는 한, 그리고 살아 있는 한, 운명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노력은 멈추지 않습니다.


조금 거창하고 철학적인 얘기로 시작해 봤습니다. 사실 우리가 걸작으로 기억하고 있는 많은 SF 영화들은,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인 화두를 던져 왔죠. 조금 멀리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블레이드 러너>가 그랬구요. 가장 최근에는 <매트릭스>라는 영화도 떠오릅니다.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이 영화 역시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트래인스포팅>과 <28일 후> 등의 영화로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던 영국 감독 대니 보일의 SF 영화, <선샤인>입니다. 빛을 잃어가는 태양을 살리려는 한 우주선의 여행을 통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제법 묵직합니다. 지금부터 귀기울여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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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 2호, 7년 전 행방불명된 1호의 뒤를 이어 죽어가는 태양을 살리기 위해 급파된 우주선. 이카루스호가 지구를 떠난 지 벌써 16개월, 점차 태양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오랜 우주 생활로 8명의 대원들은 이제 지칠대로 지쳐 있습니다.


“24시간 후에는 지구와의 통신이 끊길지도 몰라.” 이제 이들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고립된 상황에서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게다가 대원들은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 별거 아닌 일로 치고 박기 일쑵니다.


거대한 크기의 우주선 이카루스 2호, 맨해튼 섬 크기만한 핵탄두를 탑재한 채 광대한 우주를 건너 태양으로 접근합니다. 이제 그들은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 수성을 지나가게 되죠. 태양을 배경으로 오른쪽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수성, 우주의 신비 앞에 지구 최고의 전문가들도 넋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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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주는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일 뿐일까요?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나약하고 초라한 미물일 뿐입니다. 식어가는 태양 빛을 살리겠다고 나섰지만, 그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대원들은 직감적으로 눈치 채고 있죠. 그것은 어쩌면 신의 뜻을 거역하는 일. 그러나 지금으로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류의 생명이 이들에게 달렸으니까요.


비상 사태 발생! 한 대원의 실수로 우주선 외부에 기체 손상이 일어났습니다. 방법은 직접 우주선 바깥으로 나가 수리하는 것. 선장이 직접 나서기로 합니다. 선장과, 동행한 젊은 물리학자 캐파(실리언 머피)는 위험을 무릅쓰고 손상된 기체 수리에 나섭니다. 네 개의 고장난 패널을 고쳐야 하는 게 이들의 임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싶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또 다시 일어납니다. 우주선 밖에 나가 있는 선장과 캐파의 안전을 위해 수리 받는 부위를 태양의 반대편 쪽으로 돌려 놓은 사이 태양열을 견디지 못한 산소 정원 쪽에서 불이 난 것입니다. 잘못하면 핵탄두까지 위험해지는 상황.


결국 우주선을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두 명의 대원은 어떻게 되는걸까요? 임무 완수를 고집하며 귀환을 거부하는 선장, 캐파의 안타까운 부르짖음도 소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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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태양열의 공세! 그 순간, 이미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가공할 우주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 목숨이 끊기는 직전까지도 그는, 인류 가운데 누구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그 빛의 극단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죠. 어쩌면 그는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새의 깃털로 날개를 만들어 무모한 꿈을 이루려 했지만 태양에 지고 말았던 신화 속의 이카루스처럼 말이죠.


선장을 잃은데다 소중한 산소 정원까지 불에 타 버리자 남은 대원들은 망연자실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충분한 산소가 없어 임무 완수가 불가능해진 상황. 이제 대원들은 서로의 목숨을 대가로 하면서까지 임무를 끝내야 할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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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영화는, SF 장르 안에 밀실 공포적인 스릴러를 담아내는, 흥미로운 전환을 보여줍니다. 광대한 우주를 항해하는 이카루스 2호의 내부 공간은 폐쇄 공포증을 연상시킵니다. 대니 보일 감독은, 공간과 공간이 촘촘히 엮여 있는 우주선 세트를 통해 우주라는 감옥에 갇혀 버린 대원들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태양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겠죠. 적당한 거리를 벗어나 가까이 가면 인간을 파괴시키는 것처럼. 우주는, 광대하게 열려 있는 공간이자 또한 닫힌 공간이기도 한 것이죠. 철학적 메시지를 장착한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태양과의 불가능한 싸움, 우주와의 덧없는 격투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 또는 인간의 위대함이 드라마틱하게 드러납니다.


아무도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계속하는 7명의 대원들, 그들은 과연 태양에 핵탄두를 발사해 신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선포할 수 있을까요?

*목포MBC '시네스쿨' 출연 코너의 방송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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