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회부 사건 기자로 일할 때의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당시 출입하던 강남경찰서 기자실에 보도 자료 하나가 들어왔다. 한 아버지가 자신의 아내와 고등학생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검거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보도 자료를 읽던 기자들이 멈칫했다. 살해 동기가 근친상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놓고 각 언론사의 강남경찰서 출입 기자들은 토론을 벌였다. 과연 이 사건은 보도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사건이 지나치게 엽기적인 것을 떠나, 살해 동기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윤리적 가치에 현저히 위배되기 때문에 보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런 합의에 따라 기자들은 사건 기자를 총괄하는 시경캡에게 보고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어떤 언론사도 해당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 환경이 지금과 많이 달랐던 15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 최근에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15년 전 기자실의 풍경처럼 기자들이 각사의 입장을 떠나 사건의 보도 가치를 놓고 토론할 수 있을까. 지금의 언론 환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어느 한 곳에서라도 보도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걸 보며 “물 먹었다”고 생각하는 타 언론사가 받아 쓰고, 인터넷 언론들이 줄줄이 이어 쓰지 않았을까?


내가 이런 짐작을 하는 것은, 그만큼 최근의 뉴스가 그 어느 때보다 선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누가 더 선정적이냐를 놓고 경쟁이라도 하는 듯, 자극적이며 엽기적인 사건들이 연일 뉴스를 통해 수용자들에게 전달된다. 혹여 하루 종일 뉴스만 시청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금세 염세주의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만큼 뉴스 속의 세상은 ‘말세’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13년 여름 개봉한 <더 테러 라이브>는 그런 뉴스의 선정성을 비꼬는 영화였다. 테러범이 뉴스 앵커(하정우)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자신과의 통화 내용을 방송에 내보내지 않으면 마포대교를 폭파하겠다고 위협한다. 처음엔 그저 장난 전화이려니 하고 무시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마포대교가 폭파되고 만다. 앵커는 이것이 엄청난 특종임을 직감한다. 방송국은 지체 없이 생방송 체계로 전환하고 테러범과의 전화 통화 내용을 생생하게 중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비극의 연쇄극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 한 방송 언론인은 내게 “언론의 윤리적 차원에서 이런 상황은 현실적으로 벌어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니까 <더 테러 라이브>가 설계한 설정은 허무맹랑한 것이라는 얘기다.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영화가 그런 허무맹랑한 상황을 상상력의 무대 위에 펼쳐 놓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뉴스가 끝도 없는 선정성 경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지 않겠소?”하는 반문이다. 당시 55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관람해 그 반문에 화답했다. 그것은 <더 테러 라이브>가 제기한 언론 환경의 부조리함에 대해 관객들이 부분적으로든 전반적으로든 공감했다는 걸 반증한다.


미국에서 TV 시청과 수용자의 현실 인식 간의 상관 관계와 관련한 유명한 실험이 있었다. TV를 많이 시청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들의 사회가 실제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그만큼 방송 미디어가 현실을 더욱 과장하고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뉴스는 세상의 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 의무보다 당장의 시청률을 높이겠다는 강박이 앞선 나머지 언론 종사자들이 뉴스 속의 세상을 실제보다 더 참혹하고도 우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 행복지수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현실에 혹시라도 언론도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가? 지금의 방송 뉴스에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건 무리인가?


YTN 사보 3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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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하드 데이즈 나잇

영화 이야기 2016. 4. 27. 06:08 Posted by cinemAgora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우수한 여러 미덕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나간 것에서 지혜를 찾고, 현재를 개선하려는 의지에 활용한다. 그리하여 역사학은 인문학의 요체이기도 하다.


문화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영화에만 국한해도, JJ. 에이브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계승자이며 스필버그는 알프레도 히치콕의 명백한 계승자이다. 스탠리 큐브릭은 수많은 후대의 영화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즈 야스지로는 일본 감독들의 경배 대상이다. 늘, 언제나, 과거의 유산이 현재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로부터 단절된 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다.


레전드의 전수는 그래서 중요하다. 당장의 유행과 트렌드를 좇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이유는,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더 깊어지고 더 풍요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불후의 명곡'으로 잠시 회고될 뿐, 레전드를 기억하고 전수하는 시도는 파편적일 뿐이다. 신중현, 들국화, 김광석, 심지어 서태지조차 엑소에 열광하는 세대에겐 듣보잡이다.


어쨌든, 행운스럽게도, 우리가 레전드를 찾기 전에 때로는 레전드가 말을 걸어온다. 5월 5일 국내 최초 개봉하는 <비틀즈: 하드 데이즈 나잇>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1964년에 발표돼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던 이 작품은, 비틀즈의 비교적 초창기 모습, 그러니까 수많은 소녀팬들을 거느리며 대중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의 탄생을 예고할 무렵의 모습이 담겨 있다.


비틀즈는 이 영화를 위해 기획한 곡들을 그들의 3집 앨범 'A Hard Day`s Night'에 고스란히 실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기왕 낼 음반 작업의 이전에 일종의 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였던 셈인데, 단순히 홍보 이상의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존 레논을 비롯해,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는 영화 속에서 바로 그들 자신을 연기한다. 그래서 연기들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더더욱, 모든 형식적이고 고매한 것을 혐오하는 그들의 면모가 유감 없이 드러난다.이를테면 방송국을 향한 기차 여행에서 한 노신사가 그들의 품격 없음을 탓하자, "돼지 우리는 돼지에게 맡기자" 하면서 객실을 나가 버리는 식이다. 한 기자가 "미국에는 어떻게 진출했나요"라고 묻자, 존 레논은 대답한다. "그린랜드에서 좌회전해서요."


전국으로 생방송될 공연 무대를 앞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해프닝을 통해 영화는 네 명의 멤버가 가진 개성과 20대 젊은이의 자유분방함을 표현한다. "이것이 비틀즈다!" 영화는 결코 이들을 추켜 세우지 않는 가운데, 레전드의 당도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 선언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 유명한 뮤직 비디오는 사실 이 영화의 도입부 장면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SgAXrPwZ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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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영화 이야기 2016. 4. 26. 06:02 Posted by cinemAgora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은 기이한 톤의 영화다. 여기서 '기이하다'는 건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영어 속어 중에 '그로티 Grotty'라는 말이 딱 적당할텐데, '그로테스크'에서 유래된 이 말은 '저급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B급 감수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결과적으로 (잘 만든 B급 영화들의 명예인) 컬트적이지 않고, 말 그대로 A급이 아닌 B급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정쩡하다.

흑백 텔레비전의 시대(딱히 어떤 시대라고 특정 지울 수 없는 아무튼 근과거의 어느때)에 홍길동이라는 탐정이 20년 전의 원수를 찾아 나서고, 어쩌다 원수는 다른 세력에 의해 먼저 납치를 당하고, 결국 원수의 엉뚱한 손녀들과 함께 원수와 원수를 납치한 세력을 찾아 나선다는 게 기둥 줄거리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고색창연하면서도 한편으로 만화적인 색감을 연출한 (아마도 <300>과 같은 이른바 그래픽노블룩을 추구한 듯한) 이 영화는 주인공 홍길동의 캐릭터를 그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구구절절 설명한다. 길고도 장황한 내래이션의 지루함은, 그가 데리고 다니는 원수의 어린 손녀딸이 펼치는 말개그로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데, 그걸로는 엉성한 이야기를 구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뒤로 갈수록 이야기는 도약을 넘어 비약한다. 게다가 과도하게 미키마우징(영상의 톤과 음악의 분위기를 일치시키는 영화음악 작법)을 추구한 음악은 영화 전반을 덮고 있어, 어떨 때는 인물의 대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홍길동은 분명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고 있는데, 활빈당의 총책은 휴대전화로 받고 있는 것 같은 설정은 용서하기로 하자. 어차피 이 영화는 이런 저런 장르적 클리셰들을 영화광적으로 모아 놓은, 소년의 딱지 수집 깡통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서부극의 한 공간처럼 보이는 여관이 등장하고, 그래서 적들의 소굴은 무슨 반지의 제왕의 바위성 같아 보이며, 그래서 막판은 금주법 시대의 총기 난사 누아르에 등장할 법한 장면의 탐닉적 재연으로 치닫는다.

'사라진 마을'이라는 부제를 단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름 한국형 히어로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보고자 한 야심이 읽힌다. 그러나 그 야심은 이야기의 구멍을 설명 강박과 덕후적인 미장센으로 덮어 버리는 빈곤한 연출에 의해 묻혀 버렸다. 그래서 제법 스타일리쉬하되, 역설적으로 스타일의 번짓수를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영화가 끝난 뒤 남는 질문은 딱 하나다. "그래서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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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영화 이야기 2016. 4. 21. 10:07 Posted by cinemAgora

요즘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영화는 작정이라도 한 듯 코믹스의 양대 산맥 캐릭터들이 내분을 일으킨다. DC 가문에서 슈퍼맨과 배트맨이 대립(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하더니, 마블 가문에선 어벤저스 멤버들이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 진영으로 나뉘어 싸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내전'을 뜻하는 부제 그대로다. 어벤저스가 분열된다. 내전의 이유는 결국 어벤저스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다. 즉, 그들이 정의를 지키겠다고 나섰는데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 많아지므로, UN이 그들의 활동 범위를 제약하는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낸 게 화근이었다. 이 조치에 캡틴 아메리카는 즉각 반발한다. 아이언맨은 일리 있는 문제 제기라며 국제적 합의를 수용한다. 그래서 두 캐릭터가 대립하게 된 것이고, 서로 동맹을 만들어서 싸우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슈퍼 히어로의 내분 상황은, 1) 프랜차이즈 영화의 특성에 기반한 필연성, 2) 슈퍼 히어로라는 캐릭터 자체에 내포된 필연성으로 구분해 생각해볼 수 있다.


1)의 관점에서 슈퍼 히어로는 끊임 없이 타자를 전제해야 하는 존재인데, 이렇게 저렇게 온갖 절대악들을 다 끌어왔으니 이제 더 이상 상상할 수 있는 대립물(타자)을 창조해내기가 마땅치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니 시리즈를 이어가기 위해 서로 싸우는 이야기로 선회한 것이다.


2)의 관점은 1)의 관점과 맥락적으로 닿아 있되 미국사회와의 상관성이라는 콘텍스트를 고려한 것이다. 즉, 다분히 미국적 캐릭터인 슈퍼 히어로는 태생적으로 타자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성과 닮아 있는 지점이다. 슈퍼 히어로는 정의의 사도, 또는 기독교적 메시아의 만화적 상상임과 동시에, 그 문화적 기의는 아메리칸 원주민, 공산주의, 제 3세계, 베트남, 중동 등 타자 위에서 존립 근거를 확인하고 군림해온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열망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 그러니까 미국의 일방주의적 폭력으로 말미암아 테러의 위협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은, 어벤저스의 존재가 갖는 모순과 정확하게 조응한다. 즉, 정의를 위하겠다고 나섰지만, 그 나선 행위 자체가 악당을 양산하는 셈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이 빠졌던 딜레마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분석은 오락영화로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보게 될 많은 관객들에겐 하등의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오락적 차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그럭저럭 재미 있다" 한마디면 족하다. 조금 덧붙인다면, "앤트맨과 스파이더맨이 조역으로나마 가세했다" 정도의 팁. 그러나 앞선 언급한 두 개의 관점을 탑재한다면, 기왕 보는 거 다른 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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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어화'의 흥행 부진에 대하여

영화 이야기 2016. 4. 21. 10:06 Posted by cinemAgora

평론가는 늘 꿈을 꾼다. 내가 좋게 본 영화를 관객들도 좋게 보기를.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영화가 흥행도 잘 되기를. 그러나 이런 기대 가운데 열 중의 아홉은 보기 좋게 어긋난다.


좋은 영화가 흥행한다? 현실에선 반드시 그러하지 않다. 그렇다면 흥행한 영화가 좋은 영화다? 역시 반드시 그러하지 않다. 나는 기왕이면 좋은 영화가 흥행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기대에 끼어드는 무수히 많은 난관과 걸림돌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배급력은 가장 중요한 변수다. 스크린수가 흥행을 좌우하는 세상이다. 언론은 그걸 예측하고, 발빠르게 스크린수를 많이 잡을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에 주목한다. 그래야 지들도 시청률을 챙기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들의 관심추도 거기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


물론, 평론가가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와, 관객이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에는 간극이 있다. 그러나 모든 평론가가 한 영화에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지 않듯, 모든 관객이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도 없다.


여기서 뽑아져 나오는 게 "다수의 관객이 좋아하는 영화"라는 경향성이다. 그 경향성이 결국 대중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것이다. 하여, 평론가도 부지불식간에, 그 대중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완성도를 따지게 된다. 그런데 대중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종국에는 틀렸다는 딱지를 받게 되면 도무지 대중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해어화>의 흥행 부진 이유를 곰곰히 생각하다 말이 길어졌다. 왜 부진할까? 나는 이 영화가 대중적인 화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아름다운 비극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부진할까?


내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내가 주장할 수 없듯이, 당신 역시 내 관점이 완전히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관점은 주관적이니까. 역시 주관적으로 유추되는 객관적인 흥행 부진의 이유는 있다.


여성 투톱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여성 원톱 영화인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남자 둘이 여성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싸우면 그럭저럭 흥행이 된다. 그건 적어도 여성들의 진화심리학적 로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 하나를 두고 여성끼리 싸우는 건 남자도 여자도 용서가 안되는 것이다. 그건 남자의 공포이자 여성의 안티 로망이다. 게다가 오로지 사랑을 얻기 위하여 시대의 부조리와 화간하는 척 강간당한 소율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 유사한 맥락에서, 이 나라는 남자들의 나라이며, 여성들조차 남자들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뻑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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