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러제트

영화 이야기 2016. 6. 20. 16:27 Posted by cinemAgora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의 그 어떤 권리도 국가 권력이 알아서 흔쾌히 내어준 것은 없다. 여성 참정권도 마찬가지다. 일찍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는 서구 국가들에서조차 20세기 초반까지 여성들은 투표권을 가질 수 없었다. "여성은 남성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덜 성숙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갖다 붙였다.


이 영화 <서프러제트>는 191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운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캐리 멀리건이 맡은 세탁 공장 노동자 모드 와츠는 남성 중심주의가 상식이었던 시대에 여성의 권리를 깨달아가며 투표권 쟁취에 나서는 투사로 변모해간다. 그녀는 단지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남편에게 쫓겨나며 아들까지 빼앗긴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단단해진다.


메릴 스트립은 단 한 장면에 등장하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진두지휘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명연설을 인상적으로 재연한다. "우리는 법을 파괴하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여성을 위한) 법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지금은 상식이 된 여성의 동등한 참정권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굳은 신념으로 비이성적 사회에 반기를 든 용감한 여성들의 피와 희생에 의해 쟁취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귀족 부인이 아닌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는 걸, 이 영화는 확인시켜준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은 서구 민주주의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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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영화 이야기 2016. 6. 20. 16:25 Posted by cinemAgora

영화 <비밀은 없다>를 보는데 자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고백>의 나카시마 테츠야의 냄새가 났다. 오마주는 영화의 전통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스타일을 위해 스토리의 정합성을 희생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다. 그러나 나는 이경미의 전작 <미쓰 홍당무>에서 우연치 않게 드러난 천재적 개성을 보았다면, 이 영화에선 '내가 얼마나 천재인지를 보여주겠어' 하는 조바심을 보았다. 그래서 반짝이되 여운이 길지 않은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가 알게 모르게 박찬욱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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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영화 이야기 2016. 6. 2. 12:42 Posted by cinemAgora

이토록 영롱할 수 있을까? 또한 이토록 가슴 아플 수 있을까? 초등학교 4학년 왕따 소녀 선이가 어른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이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아이는 왜 친구를 가질 수 없는가. 왜 어렵사리 얻은 전학온 친구마저 빼앗겨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선이의 잘못인가. '다름'을 외톨이로 만들어버리는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것을 방관하는 어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우리의 인간성 자체가 원래 그렇게 돼 먹은 것인가.


영화 <우리들>(감독 윤가은)은 꽃처럼 아름답고 해맑은 아이들 속에서 어떻게 '소외'가 만들어지는지를, 딱 그 나이의 눈높이에서 포착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영화가 아동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초등학생을 등장시켰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비겁하고 폭력적인 편가르기 심리에 대한 정밀한 보고서와도 같다. 올해 독립영화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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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영화 이야기 2016. 6. 1. 08:26 Posted by cinemAgora

영화 <특별 수사: 사형수의 편지>는 전형적이되 전형적이지 않다. '부당한 강자에 맞서는 정당한 약자의 투쟁'이라는 플롯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이되, 캐릭터의 설계와 캐스팅에서 고정 관념을 비껴간다.


이를테면 주인공 김명민이 변호사(성동일) 사무실의 사무장으로 등장하는데, 김명민이 변호사이고 성동일이 사무장으로 나오리란 예측을 깨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변호사가 마구 질주하는 사무장의 조수처럼 행동한다는 점에서 웃음이 파생한다.


악랄하고도 파렴치한 재벌가로 김영애가 캐스팅된 것도 의외의 한 수다. 그녀의 우아한 무표정 뒤에는 재벌가의 추악한 품격을 지키려는 악마성이 이글거린다. 그건 김영애이기 때문에 가능한 아우라다.


영화 <베테랑>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는 재벌의 전횡에 대한 관객들의 기시감적인 불만과 접점을 만들어내려고 애쓴다. <베테랑>이 그걸 정의로운 형사(황정민)와 망나니 재벌 3세(유아인)의 대립 구도로 단순화했다면, <특별수사>는 돈벌이와 복수심에만 골몰하던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를 동인으로, 저항-좌절-반격-더 큰 좌절-대대적인 반격이라는 시소게임을 더 정밀하게 배치하고 있으며, 점층하는 액션 위에 두뇌 싸움을 얹어 놓았다.


부도덕한 재벌가에 대한 응징에 나서는 주인공이 검사도 경찰도 아닌 변호사 사무장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즉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는 공권력조차 이미 재벌에 의해 포획된 것으로 전제한다. 그 전제는 한국사회라는 맥락에서 설득력이 있다. 꽤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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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영화 이야기 2016. 5. 26. 08:41 Posted by cinemAgora

나는 이 영화가 중반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섹스신을 위한 거대하고 화려한 장식처럼 보였다.


박찬욱의 영화는 경향적으로 작가적 야심과 자본의 야심인 센세이셔널리즘의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한다.


이번 영화에서의 레즈비언 섹스신을 프랑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그것과 곰곰히 비교해 보았는데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그 장면이 소박하지만 아름다웠다면 이 영화에선 남성 시점의 관음 욕망과 거기에 화답하려는 의지를 엿보았다. 그래서 나는 <아가씨>를 한편의 우아한 퀴어 포르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부르겠다.


어차피 이야기는 서양의 원작 소설에서 끌어 왔고 박찬욱이 한 일은 스릴러라는 장르적 재배치와 관음적 섹스신과 탐미적인 세트를 추구한 것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며 내가 박찬욱의 영화에서 슬쩍 맡게 되는, 타락을 의도한 부르조아 예술가의 허세의 냄새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확증을 얻은 것 같다.


그는 오로지 미장센을 위해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도 관념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창착자다. 미장센을 고민하시느라 시대의 고통조차 접목과 추상의 일본 정원처럼 동원하시는 "깐느박"인 것이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영국의 사회주의자 감독 켄 로치에게 돌아갔다. 적어도 그는 "깐느"가 아닌 노동자를 위한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장식도 거의 없고 소박하다. 영화의 진경은 돈 처들인 프로덕션 디자인보다 프로이트적 남근기의 수준에서 벗어난 예술가의 성숙한 시대 정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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