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역사에서 올해만큼 시대극이 많이 개봉했던 적이 있었던가? 연초 각각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은 <귀향>과 <동주>가 의미 있는 흥행 성적을 거둔 데 이어 지난 여름에만 <아가씨><봉이 김선달><인천상륙작전>(희대의 졸작인 이 영화가 700만을 넘어선 건 정말 불가사의다. 하긴 이 나라에서는 심형래의 <디워>조차 700만이 넘었다.)<덕혜옹주> 등의 시대극이 잇따라 개봉했다. 이런 기세는 추석 연휴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과 강우석 감독의 신작 <고산자: 대동여지도>까지 추석 특수를 노리고 극장가에서 맞붙는다. 그야말로 시대극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 시대극은 충무로에서 일종의 금단의 열매와도 같은 것이었다. 독이 든 사과라는 예가 더 적절할까? 그만큼 그 이전에 시도된 시대극 가운데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징크스는 깨지라고 있는 법. 이준익 감독이 ‘시대극은 안된다’는 불문율을 깨뜨린 주인공이 됐다. 코믹 시대극 <황산벌>이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뒤로도 기획자들은 시대극을 만드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스크린으로 옮기며 나란히 천만 관객을 돌파한 뒤에야 비로소 ‘과거를 재연하는 것이 먹힌다’는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넘기면서 시대극의 전성기를 예고했다.


사실상 지금까지 천만을 넘긴 한국영화 가운데 시대극의 비중은 꽤 높다. 14편 가운데 8편이 가깝게는 80년대(<변호인>), 멀게는 조선 중기(<명량><광해: 왕이 된 남자>)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그런데 이런 시대극의 전성기 안에서도 건드려선 안되는 금지 구역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일제 강점기이다.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해일과 김혜수가 출연한 <모던 보이>나 지난해 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삼았다가 처참하게 흥행 실패했다. 이 징크스 역시 누군가 깨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나타났다. <암살>의 최동훈 감독이었다.


영화 <암살>은 친일파 처단이라는 한국 근현대사 미완의 숙제를 영화로나마 통쾌하게 해소시킨다.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라는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의 대사는, 우리의 해방이 그저 강대국간의 전쟁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는 열패감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설치된 반민족행위자특별위원회(이른바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자 안옥윤은 직접 친일파 처단에 나선다. “16년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이 한 마디 대사는 미처 이루지 못한 친일파 청산에 대한 응어리에 대해 영화가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위로였다. 실제로 최동훈 감독이 이 영화를 기획한 데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패배 의식을 극복하기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액션 활극의 틀을 빌어 솜씨 좋게 자신의 목표를 이뤘다.


이런 한편, 지난 여름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는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덕혜옹주의 골곡진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재연하려는 영화의 시도는 이른바 영화적 드라마 라인을 만들기 위해 사실과 다른 부분을 억지로 구겨 넣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녀가 한글 학교를 운영하려 했다든가, 조선인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라는 말을 했는지 등의 사실 여부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이 영화의 역사 의식에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이다.


나는 대한제국을 미화하거나 옹호하는 모든 시도를 반대한다. 대한제국은 국권을 일본에 넘긴 매우 무능력한 봉건 왕조였을 뿐이다. 영화가 그려낸, '최후의 황녀'라는 이름으로 수식된 덕혜옹주의 굴곡진 삶 속에는 그런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 있지 않다. 역사에 가정이란 건 없지만, 만약 대한제국이 서양처럼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 공화정으로 바뀌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랬어도 덕혜옹주의 삶이 허망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건 모든 봉건 왕조의 비극이다. 그걸 일제 강점기라는 기왕의 시대적 비극을 볼모 삼아 재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대한제국은 열강에 포위된 조선왕조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리고 상해에 거점을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 이후에 왕정복고가 아닌, 공화정을 추구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진실이다. 덕혜옹주는 그 역사적 격랑에 휩싸인 비극적 개인, 그냥 그 개인일 뿐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격랑에 휩싸여 절망을 맞은 개인들은 그녀 말고도 무수히 많다. 무수히, 무수히 많다. 일제 말기에 징병당해 필리핀에서 포병으로 싸운 내 아버지의 이야기도 한편의 영화이지만,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어지려면 국권을 빼앗긴 허수아비 황제(고종)가 그 와중에도, 환갑을 앞둔 나이에 궁궐 나인과 섹스를 해 태어난 딸쯤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추석 특수를 노리고 개봉하는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특기인 누아르적인 쾌감을 위해 일제 강점기의 시대 상황을 동원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동원’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 역사의 아픔 속으로 감독이 더 깊이 천착해 고민한 흔적이 영화 내내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독 김지운은 의열단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끌어오면서 이정출이라는 허구의 친일파 경찰을 앞세운다. 그리고 그가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에 의해 포섭돼 얼떨결에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되는 상황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다.


이 영화의 대립 구도는 정확하게 말해 ‘조선인 vs. 조선인’이다. 이정출은 처음에 김우진과 대립하며, 나중에는 그보다 더 악질적인 친일파 경찰 하시모토와 대립한다. 이런 가운데 의열단 안에 밀정이 있다는 의심이 퍼지면서 폭탄을 상해에서 경성으로 운반하려던 김우진의 미션은 더욱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누가 배신자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상황은 스파이 영화의 단골 소재다. 김지운은 그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파이 영화와 어둡고 음습한 누아르 풍의 영화를 추구했고, 일제 강점기는 그의 영화적인 야망을 위해 불려 나온 것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독립군 박희순이 일본 경찰에 둘러싸인 채 총 맞은 자신의 발가락을 억지로 떼어내는, 이해 되지 않는 황당무계한 장면이 뜬금없이 들어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한마디로 김지운에게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속하지 않았던 세계이며, 오로지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시공간인 것이다. 이것이 영화 <밀정>이 <암살>에 미치지 못하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물론,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안옥윤의 선언과 같은 패기는 이 영화에 없다. 김지운의 일제 강점기는 여전히 패배의 습한 늪이다.


나는 이것을 역사 의식의 부재라고 부른다. 물론 감독은 재미도 있고 흥행이 잘 되는 영화를 내놓으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밀정>은 꽤 손님이 들 것이다. 역사의 진실보다, 감독이 깊은 고민 끝에 토해내는 역사 의식의 숭고미보다, 송강호와 공유를 보고 싶어 선택할 이들이 더 많을 게 분명한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김지운의 전작 <달콤한 인생>만큼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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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영화 이야기 2016. 9. 3. 19:46 Posted by cinemAgora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붕괴'는 굉장히 역설적이게도 '친숙'하다. 우리는 멀쩡한 다리(성수대교)가 두부처럼 잘리는 것을 목격했고, 멀쩡한 백화점 건물(삼풍)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도 보았다.


한편, '터널'이라는 공간은 다층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길을 막은 산을 뚫었다는 표층적 의미 말고도, 삶의 어두운 국면을 은유할 때 우리는 곧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터널'과 '붕괴'가 만났을 때 연상되는 메타포는 심층적이되 단순하다. 실제로 터널은 토목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영화 <터널>은 그걸 무너뜨린다.


붕괴된 터널은 영화가 직관하는 한국 사회이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시공간. 그건 영화적 설정이되, 영화 바깥의 세상에 대한 논평이다.


터널 안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하정우는 허술하게 설계된 터널에 영문도 모른 채 갇혀 버린 보통 사람이다. 그를 구조해내려는 바깥의 상황은 한 사람의 '생명'을 대하는 우리사회의 축소판이다.


현장에 얼굴을 들이민 장관은 "잘 협의해서 잘 해결하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일삼고, 사람이 매장된 바로 옆의 터널 공사를 추진하려는 세력은 발파 공사를 강행하려고 한다. 매장된 하정우가 수십일이 지나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끝까지 붙잡지 못하는 건 여기, 대한민국 사회의 실용주의적 공기가 필연적으로 도출하는 결론이다. 그리하여, 그는 끝내 그 자신을 스스로 구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영화 <터널>에서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현장을 방문한 장관이 여성(김해숙)으로 설정돼 있는 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는 지나치게 현실을 직접적으로 은유하지 않기 위해, 그래서 관객들의 가슴을 쥐어짜지 않으려고, 코미디를 뒤섞는 안간힘을 쓴다. "이건 영화입니다. 영화이니까 편안하게 보세요."라는 제스처를 쓴다. 그런 제스처가 거꾸로, 나는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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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영화 이야기 2016. 9. 3. 19:45 Posted by cinemAgora

연상호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엄밀히 말해 <부산행>의 프리퀄이 아니다. 프리퀄이라 부를 수 있으려면 두 작품간의 합리적 선후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묘사한대로 서울역을 중심으로 서울 시내가 좀비 지옥이 된 상태라면 다음날 공유가 태연하게 딸을 데리고 부산행 KTX를 탈 수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려나,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실사 대중영화 <부산행>보다 훨씬 더 연상호스럽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묘한 게 캐릭터와 스토리의 개연성 부족이 큰 흠이 되는 실사영화와 달리 정서라는 진공 상태 안에서 그 흠조차 용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비와 좀비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한 이 작품의 정서는 한국 사회의 폐부를 더욱 날카롭게 풍자한다. 그래서 경찰이 좀비로부터 달아나는 산자들에게 물대포를 쏘는 어리둥절한 상황도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좀비를 피해 달아나는 두 인물을 공유와 마동석이라는 탈계급적 캐릭터로 타협했던 <부산행>과 달리 노숙 노인과 가출 소녀라는 사회적 약자로 설정한 것 역시 연상호의 주제의식이 빛나는 대목이다.


<부산행>이 기획(돈)의 승리라면 <서울역>은 연상호(작가)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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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지난 2014년 말에 개봉한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다큐멘터리로선 전무후무한 48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앞서 2009년 새해 벽두에 개봉한 <워낭소리> 역시 293만 명을 동원했다. 두 작품 모두 웬만한 상업 대중영화 못지않은 흥행성과를 거둔 것이다.


무엇이 이들 다큐멘터리에 이토록 많은 관객들이 몰려가게 했을까. 답은 단순하다.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감동을 얻는 것은, 그것이 극영화이든 다큐멘터리이든 중요하지 않다. 아니,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더욱 생생한 날 것 그대로의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 그야말로 백년해로할 때까지 서로를 끔찍이 사랑했던 노부부의 사랑(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노동을 통해 교감한 시골 할배와 늙은 소의 우정(워낭소리)은 그 자체로 깊고도 보편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며 감동을 선사했다.


현실 고발을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비록 우리나라의 사례는 아니지만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의 작품 <화씨 911>은 미국 개봉당시 다큐멘터리 사상 최초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911테러를 빌미 삼아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부시 행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이 영화는 부시 행정부 시절에 개봉해 흥행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당대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적 외교 노선에 대한 반감을 작품이 수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무어는 4년 뒤, 미국의 민영 의료 보험 체계가 어떻게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는지를 고발한 <식코>로 또 한번 미국의 견고한 시스템을 향해 돌을 던졌다.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한다고 해서 마냥 설교조인 것만은 아니다. 마이클 무어는 특유의 수행적 양식, 그러니까 어떤 엉뚱한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쉽고도 명쾌하게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대가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그 자체로 상당한 재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어쨌든 미국은 <식코>가 개봉한 이듬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당선시켰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전국민의 건강 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이른바 ‘오바마 케어’를 실현시켰다.


앞선 사례들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다큐멘터리도 극영화 못지 않은 재미를 안겨준다. 
둘째, 다큐멘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뉴스타파 최승호 피디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자백>도 그런 점에서 앞서 말한 두 가지 미덕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다큐멘터리에는 많은 양식이 존재하는데, 다큐멘터리 연구가 빌 니콜스에 따르면, 시적, 설명적, 참여적, 관찰자적, 성찰적, 수행적 양식이 대표적이다. 이런 양식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을 여기서 늘어 놓을 생각은 없다. 나는 다만, <자백>을 극영화에 해당하는 장르적 구분으로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규정한 이 영화의 장르는 ‘미스터리 추격 스릴러’다.


화교 출신의 탈북자 유우성 씨가 서울 시청에서 근무하던 중 국정원에 의해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그는 검찰에 간첩 협의로 기소된다. 그리고 뒤이어 탈북한 그의 여동생 유가려 씨 역시 국정원의 조사에서 오빠가 간첩 행위를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실토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뉴스나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팩트’라는 것이다. 그러나 팩트가 곧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탐문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 유우성 씨는 국정원이 주장한 대로 간첩 행위를 한 게 맞는가?
둘째, 여동생 유가려 씨가 국정원에서 진술한 내용은 사실인가?


자,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이제부터 제작진은 이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을 풀어내기 위한 탐문에 나선다. 제작진은 유우성 씨의 간첩 혐의가 국정원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국정원과 검찰이 내세운 증거들을 하나하나씩 검증해 나간다. 놀랍게도, 유우성 씨가 북한을 방문해 보위국의 지시를 받았다는 국정원과 검찰의 주장이 억지임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조작 증거가 발견된다. 결국 유우성 씨는 대법원 판결을 통해 간첩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왜 동생인 유가려 씨가 국정원 조사 과정에서 오빠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는 거짓 자백을 했을 것이라는 미스터리가 남는다. 영화 <자백>은 유가려 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미스터리를 풀어 헤친다. 강압과 회유. 그렇다. 우리가 짐작하는 바대로 유가려 씨는 거짓 자백을 하면 오빠와 함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국정원의 회유에 속은 것이다. 이렇게 국정원은 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증거들을 조작하거나 짜맞추었다. 그리고 검찰은 국정원의 방침대로 그들을 끝내 간첩으로 만들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만약 <자백>이 유우성 씨와 관련한 하나의 사건을 추적해 진실을 드러내는 데 그친 것이라면, ‘훌륭한 작품’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 인색했을 것이다. <자백>이 이뤄낸 탁월한 영화적 성취는, ‘간첩 조작‘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국가 폭력을 구조적으로 파헤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조작에 앞장 섰던 당사자들에게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돋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이다. 최승호 감독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따라 붙을 때, 그는 우산으로 자신을 가린 채 묵묵부답이다. 이때 카메라 감독이 그의 우산을 번쩍 들어올릴 때, 그 무고한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려던 최종 책임자는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장면이다. ’늬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하는 듯한, 대한민국 권력의 민낯이 그렇게 상징적으로 그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간첩 조작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도 마찬가지다. 당시 그가 간첩이라고 밝혔던 이들은 모두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다면, 왜 간첩도 아닌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었을까. 최승호 감독은 미침 일본으로 떠나는 그의 앞에 나타나 당시 그가 저지른 일에 캐묻는다. 그러나 그 역시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한다.


영화 <자백>은 “어떤 세력이 무엇을 위해 무고한 이들을 간첩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추적 보고서와도 같다. 그리고 추적의 영상 기록은 정말 오싹하다. 그 어떤 공포스러운 미스터리 추격 스릴러보다 더 오금이 저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스크린이 만들어낸 가공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문을 나서면 우리가 마주쳐야 할 세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고, 어쩌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공포는 우리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하는 걸 넘어, 매우 현실적인 공포를 안겨준다. 그런데 그 공포는 각성을 전제로 한다. 즉, 영화 <자백>은,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그러려니 한, 어쩌면 거의 완전히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었던 일들을 재구성해 보여줌으로써, 공포와 각성을 동시에 안겨준다. 그 공포와 각성의 의미는 최승호 감독이 제작 과정의 체험을 증언한 이 말로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공포를 다스리며 한 발 한 발 걸어 온 3년이었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을지, 무슨 일을 할지 몰랐다. 어쨌든 겨우 여기까지는 왔다. 모두 손 잡고 저 마지막 공포의 벽을 넘어갔으면 좋겠다. 우리 내면의 공포의 벽을 넘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울 수 없다.” <자백> 최승호 감독


이제,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미스터리 하나가 더 남는다. 그들은 왜 간첩을 만들어내는가? 아니, 그들에게 왜 간첩이 필요한가. 나는 여러분이 이 영화를 통해 그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 보기를 권한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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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스

영화 이야기 2016. 9. 3. 19:39 Posted by cinemAgora

미국 CBS의 저명한 뉴스 프로그램 '60분‘의 프로듀서 메리 메이프스는 굵직한 특종을 많이 만들어내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2004년 부시 전 대통령의 재임 선거를 앞두고 대형 특종의 냄새를 맡게 된다. 그것은 바로 부시 전 대통령이 베트남전 참전을 기피하기 위해 아버지 부시의 인맥을 동원해 일부러 공군 조종사가 된데다, 훈련조차 불성실하게 했다는 것.

현직 대통령의 군문제를 파헤친 이 특종은 결국 전파를 타게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가 입수한 증거들이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져 나온다. 그리고 오히려 '60분' 팀이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된다.

영화 <트루스>는 말 그대로 ‘진실’이라는 뜻이다. 영화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벌어진 방송 저널리즘의 한 의미심장한 실제 사건에 주목한다. 요컨대 가장 자유로워야 할 언론조차 경쟁사의 깎아내리기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경쟁사들은 심지어 메리 메이프스의 정치적 성향까지 문제 삼았다. 그녀가 부시를 원래 싫어했기 때문에 악의를 가진 짜맞추기 취재를 했다는 식이다.

이 영화는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게 언론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증거의 조작 여부를 놓고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정작 부시 전 대통령의 군 시절 비리에 대한 진실은 증발되고 마는 상황, 그러니까 취재 방식의 타당성 논쟁의 늪에 빠져 진실이 묻혀 버리고 마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이건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을 두고 벌어진 MBC와 YTN의 공방과 매우 유사하다.)

케이트 블랜쳇이 실존 인물 메리 메이프스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모처럼 중견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앵커 댄 레더 역을 중후하게 연기했다.

(참고로, 이 보도에 간여됐던 이들은 모두 부시 재임 직후 CBS에서 해고되었다. 한편, 황우석 강압 취재라는 대형 오보를 지휘했던 YTN 보도국장은 퇴사후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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