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에 대한 통렬한 복수극, 나훈아 쇼

음악 이야기 2008. 1. 29. 10:2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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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5일, 케이블 TV를 통해 생방송된 나훈아의 기자회견은 '완벽한 시나리오의 쇼'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한 편의 위대한 걸작(!)이었다. 룸싸롱 괴담과 증권가의 루머를 인터넷에 퍼나른 네티즌의 기획력. 그 기획을 확대, 재생산이라는 형식으로 홍보해낸 언론. 그리고 신들린 듯한 연기로 기자회견장을 장악한 나훈아의 열연. 일찌기 헐리웃의 어떤 블록버스터도 보여주지 못한 장관의 볼거리였다.

기자회견 이후, 언론은 나훈아의 일갈에 기가 죽은 듯 침묵하거나 그의 한판승을 겸허히 인정하는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다. 인터넷에 음모론을 스스럼 없이 유포하던 네티즌은 기적을 본 신도들처럼 나훈아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건 무엇인가?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이야기는 돌아돌아 원점으로 돌아왔으니 해프닝이라고 봐야 하지만, 그간 투입된 제작비와 동원 스텝들의 숫자를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웃기지도 않는 대작 코미디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이 코미디의 중심엔 나훈아가 있다.

악의 가득한 네티즌에게서 시작된 음모론이 미디어를 통해 증폭되는 동안 나훈아는 침묵했다. 해명할 것이 없으니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그의 기자회견 내용은 일견 옳은 듯 하지만 옳지 않다. 그것은 그가 연예인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음에서 시작된다. 기자회견에서 밝혔듯 40년의 시간동안 가수로서 활동했다는 것은 그 동일한 시간만큼 미디어를 이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쇼를 홍보하고 앨범과 보도자료를 미디어에 뿌리고, 인터뷰를 통해 팬들을 만나온 가수라는 뜻이다. 그러나 양날의 칼과 같은 미디어를 활용과 이용의 가치로만 받아들였을 뿐, 그 관리에는 소홀했던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수많은 괴담과 루머가 난무하는 동안 그는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다. 자신만 정직하면 그만이라는 말은 불행히도 연예인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연예인도 자연인이다. 사생활에 대한 보호를 받아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최초의 잘못이 미디어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확대, 재생산의 결과에 나훈아 자신의 방관이 결탁해 있음은 무시할 수 없다. 말하고 싶지 않아도 말해야 하는 것은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택한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훈아의 설교엔 귀담아 들을 부분이 분명히 있다. '기자들이 한 발만 더 뛰었어도 일개 루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는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속도전에 뛰어든 인터넷 기사들은 사실 확인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직 페이지 뷰 숫자만이 진실일 뿐이다. 신속, 정확의 요소 중에서 신속은 무한대로 나아가고 있지만 정확이란 부분은 그에 반비례해 한없이 떨어져 내려가고 있다. 인터넷 특종이라는 신조류에 휩쓸린 21세기의 미디어들은 기사를 꾸민 루머의 진원지가 어디였는지 명확하게 찾기 힘든 장점을 십분 이용한다. 맞는 기사라면 자신들이 최초라 주장하고 엉뚱한 내용으로 판명났을 경우엔 찌질한 네티즌 탓으로 그 화살을 돌린다. 한심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을 우린 이미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다.  

이런 미디어 상황과 나훈아의 방심(!)이 이루어낸 운명의 쇼가 바로 기자회견이었다. 11시부터 시작된 기자회견에서 나훈아는 선방을 날렸다. "질문은 받지 않겠다." 이 선언적 발언은 이후 진행될 기자회견을 '나훈아 쇼'로 만들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힌 셈이다.
인간적인 호감과 동정심을 이끌어내는 개인소사를 중심으로 했던 초반부. 미디어의 책임론을 주장하며 전세를 이끌어가는 중반부. 그리고 테이블 퍼포먼스를 통한 대망의 하이라이트의 연출과 두 여배우의 고통과 그 치유를 부르짖는 아름다운 엔딩까지.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가 나훈아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를 통해 구현되었다. 전쟁에 승리한 장군처럼 보무도 당당히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는 그를 보며 미디어와 대중은 최면에 빠져 버렸다. '아,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카리스마의 아름다움이구나!'라는 감탄사를 토해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인가?

결과만 말하자면, 그 동안 인터넷을 떠돌았던 괴담과 루머 그 어느 것도 명확히 해명 된 것이 없다. 그저 나훈아의 어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다시 한 번 그의 입을 빌리자면 '한 일이 없으니 해명할 것이 없다'라는 바로 이 부분이 나훈아 기자회견을 하나의 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기 위해선 질문과 대답이라는 검증을 거쳐야만 한다. 몇 몇 기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면 기자회견을 통해 그 간의 행적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질문이 있어야 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졌어야 조각난 이야기의 나머지를 완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음모론의 시작이 개념 상실의 어떤 네티즌에게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증폭의 과정에서 미디어가 제기했던 궁금증과 의혹엔 객관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준비된 해명과 미디어에 대한 그의 비난만이 난무했고, 사실에 대한 확인은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자회견은 감독, 주연을 맡은 나훈아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고 와야 했던 일방의 '쇼'가 되어버린 셈이다.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기자회견을 자신의 리사이틀 쇼로 만들어버린 나훈아의 탁월한 천재성에 감탄하게 된다. 말 그대로 연예계 일반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그의 뛰어난 혜안과 40년의 연륜이 가져온 미디어 플레이의 성과(!)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한 판의 해프닝 아닌 해프닝엔 더욱 큰 아쉬움이 남는다. 상황이 이렇게 커져버리기 전 사전에 방지 하려는 의지가 조금만 있었다면 해외토픽을 통해 전세계로 이 코미디가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좀 더 친절한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면 여전한 이 찜찜함도 해소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훈아는 자신을 음해(했다고 여겨지는)한 미디어에 대한 통렬한 복수극을 펼쳐 보이고 싶었을 뿐 그 이상의 어떤 의지도 갖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네티즌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나훈아의 입지가 강화되고 덕분에 미디어들도 용비어천가를 닮은 기사를 실어 나르기 바쁘지만, 냉정히 사건을 분석해온 몇 몇 기자들의 머릿속엔 풀리지 않은 부분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우린 동어반복같은 코미디 한 편을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감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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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 얼얼한 리얼리즘 스릴러

영화 이야기 2008. 1. 29. 00:34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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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이 벅차 오르기 마련이다. 내 경우, 만약 '죽이는' 영화를 불행히도 혼자 봤다면 억울함이 몰려 온다. 극장문을 나서자마자 누군가와 영화에 대해 주저리 주저리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기 때문이다.

28일 언론 시사회를 통해 본 <추격자>도 내겐 일종의 '가슴 벅찬' 영화였다. 지난해 말 호평 속에 흥행에도 어느 정도 성공한 원신연 감독의 <세븐 데이즈>에 필적할만한, 아니 능가한다고 말해도 과찬이 아닐, 또 다른 차원의 '잘 만든 스릴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수다를 나눌 상대를 찾으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뭐랄까, 말문이 막혔다고나 할까. 그것은 이른바 웰메이드 장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벅찬 쾌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가 각성시킨 현실의 생생한 잔인함 때문에 영화 속 피해 여성들처럼 나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얼얼함. 급히 담배 몇 개비로 이 후유증을 추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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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나홍진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쓴 그의 장편 데뷔작 <추격자>는 '리얼리즘 스릴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마땅할 정도로 현실감이 넘친다. 극장 안에 머문 가공의 공포가 아닌, 극장 바깥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활개치고 다니는 연쇄살인범의 잔혹함이 공포가 아니라, 그의 숙주라 할 수 있는 세상의 끔찍한 무기력, 그리고 그들이 빚어낸 미필적 공모가 실체적 공포다. 그래서 더 공포스러운 것이다.

잊을만 하면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이 터지는 나라에서, 놀러 나간 두 아이가 실종된 지 수십일이 지나도 행적조차 찾지 못하는 나라에서, 예의 영화 속의 공권력도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다. 시민에게 똥물을 뒤집어 쓴 서울시장 때문에 경찰 위신이 땅에 떨어진 사이,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인 매춘부들은 너무나 쉽게 도륙의 대상이 된다. 다 잡아 놓은 범인을 두고 증거와 절차를 따지고 있는 사이, 매춘부 포주인 엄중호(김윤석)가 사적 응징에 나선다. 피해 여성들을 위험 속으로 내몬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이제 공권력을 대신해 연쇄살인마 지영민(하정우)이 시체를 숨겨 놓은 곳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영화가 남다른 지점은,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 권력=가부장=수컷'들의 '처연한 삽질'을 등호로 묶어 놓고 냉소적으로 꿰뚫고 있는 감독의 예민한 통찰력이다. 십 수명의 부녀자들이 납치 살해되는 상황에서도 중요한 것은 똥물을 뒤집어 쓴 국가 권력의 허울만 남은 위신일 뿐이다. 용의자를 심문하면서, "너 여자랑 섹스 못하지?"라며 성불구로 몰아가는 공권력의 모습은, 스스로도 불구가 된 남성적 질서에 대한 적반하장적 옹호로 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여성의 성을 착취해 돈을 벌던 엄중호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가련한 가부장(공권력)의 가공할 무능력에 혀를 차며 돌연 '진짜 가부장'으로 환골탈태, 정의 회복의 길에 나선다!(영화는 피해 여성 한 명의 어린 딸을 엄중호에게 떠맡김으로써 '유사 부성애'를 그의 행동의 동기로 부여하는 '시늉'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걸 정당화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관점에선 논란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모순의 뫼비우스 띠에서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고 너무 쉽게 파멸되고 마는 것은, 결국 폭력적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인간성일 뿐이다.

어쨌든, 한국영화의 흐름 가운데 최근 두드러져 보이는 장르영화의 진보는 확실히 환영할 만하다. 더더욱 감독들이 장르 관습에 매몰된 나머지 사회적 맥락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격스러울 정도다. 이제 우리는, 나홍진이라는 걸출한 신예의 탄생을 통해 한국 장르영화의 진일보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2월 14일 개봉.

<추격자>를 논하면서 김윤석과 하정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완성도를 떠받친 많은 부분은 두 배우의 연기 내공에서 비롯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짜>의 아귀로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는 김윤석은 이 영화를 통해 명실상부한 주연급 배우로서의 존재 증명을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줄곧 저예산 영화만 출연하다 고른 대중영화에서 하필 악역을 고른 하정우는 또 어떤가. 필모그래피 관리에 철두철미한 이 젊은 피는, 자신의 연기 영역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방법을 영악하리만큼 잘 알고 있는 배우다. '선'과 '악'으로만 양립시킬 수 없는 두 배우의 아우라를 절묘하게 배합한 캐스팅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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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많고, 짜릿한 불량식품 같은 나쁜 남자?
             능력도, 재미도 없지만, 몸에 좋은 착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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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가진 걸로 잘이나 하면 다행이지!"


배우 이혜영이 다시 스크린으로 왔다. <하류인생>에 특별출연한 걸 제외하면 <피도 눈물도 없이> 이후 사실상 6년 만이다. TV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오들희로 대중에게 각인됐지만 영화 쪽에서는 항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만큼 더딘 행보. 어쩌면 전환기적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더 게임>이 그녀에게 새긴 자국을 엿봤다.
(※민감성 체질의 독자에겐 스포일러로 여겨질 내용이 살짝 포함돼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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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희 <더 게임>을 보고 두 가지 불만이 있었다. 뒷부분의 다소 엉성한 수습이 설정 자체의 참신성을 갉아 먹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당신이 뒤에 가서 너무 흐지부지 사라져 버리더라. 굉장히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이혜영 나도 놀랐다. 그럴 것처럼 홍보는 해놓고…

최광희 그러게. 포스터까지 찍었지 않은가.

이혜영 포스터에서 빼달라고 그럴까, 그럼?

최광희 개봉 일주일 남았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러나. 어쨌든 당사자로서는 아쉬움이 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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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 시사 전까지는 매우 자신 있다가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주눅이 든 기분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애초에 대본을 받았을 때 큰 비중의 역할은 아니었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고 또 감독이 나를 굉장히 원했기 때문에 배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겠다, 하는 게 약속이었다. 그런데 지켜지지 않은 거지. 적어도 촬영된 분량만 나왔어도 만족했을 텐데. 예를 들어 살해 당하는 장면도 이틀에 걸쳐서 찍고, 찍으면서 한 배우는 다치기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과감히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글쎄, 이해는 한다. 윤인호 감독이 감정을 끝까지 쫓아가는 힘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부분은 역시 윤인호 답게 처리가 됐는데, 내 역할에 있어서는 감독이 나한테 거짓말을 했거나, 하여튼 그래서 어쩐지 편집 때도 안보여주더라. 그러더니 과감히 들어냈더라고. 너무 아쉬웠다. 나는 오랜만에 영화를 하는 것이고, 모처럼 감독이 나한테 러브콜을 보냈기 때문에. 이번을 계기로...이 영화를 계기로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지, 이런 각오를 했는데,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광희 결과적으로 2008년을 힘차게 출발하려는 포부에 찬물을 끼얹은 셈인가? 심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편인가, 아니면, 뭐 이 정도야, 하고 조금 있으면 잊혀질 수준인가.

이혜영 나를 기억하고, 또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조금 아쉬워하겠지.

최광희 사실, <피도 눈물도 없이> 이후 너무 영화를 안 했다. 그 영화 이후 충무로에서 더욱 적극적인 행보를 펼칠 것으로 기대를 했건만.

이혜영 그 때 이후 대본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둘째를 갖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재미 있는 대본들 많았다. 그 중에 영화화 됐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도. 하하.

최광희 그래도 2004년부터는 TV 시리즈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걸 계기로 다시 충무로로 복귀할 수는 없었던 건가?

이혜영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아기 낳고 10개월 지난 뒤부터 한 건데, 그 작품으로 알려진 뒤로는 고만고만한 배역만 들어오더라고. 엄마 역할만. 이건 내가 아니라도 할 사람이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오들희’는 자기 일을 가진,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여자였지.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더 게임>이 끝나고 어떤 대본이 들어올까 궁금하네.

최광희 <피도 눈물도 없이>가 나름대로 의미 있었던 지점은 이혜영이라는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은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이혜영 그랬었나? 사실 <피도 눈물도 없이>도 처음 시사로 봤을 때 조금 실망했다. 나는 그래도 두 여자의 이야기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정재영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류승완은 찍은 걸 안 쓰고 그러진 않았다. 대신 정재영 부분을 더 많이 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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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이> 2002

최광희 분량의 문제라기보다 당시 맡았던 삶에 찌든 택시 운전사라는 캐릭터 자체가 그 때까지 이혜영이라는 배우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 그런 강한 색깔의 장르 영화에 계속 출연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얘기를 듣고 나니 둘째 아이가 복병이었군.

이혜영 그러게. 이제 또 셋째까지 가지면 나는 다시는...하하.

최광희 TV 시리즈에서의 캐릭터를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전의 이미지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팜므 파탈적이고, 약간 초현실적인 느낌이랄까?

이혜영 거기에 더 적성이 맞는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한번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긴 한데...그 때도 말이 많았다. 거친 삶의 현장에 있는 여성인데, 음색이 불만이다, 소리가 경선이라는 배역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지적들을 받았다. 내 목소리 톤에서 오는 한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내 매너리즘이기도 하고 내 개성이기도 하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힘들고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반면, <더 게임>의 이혜린이라는 역할은 힘들지 않고 편안하게 했다. 이런 역할이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최광희 나한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그런 느낌?

이혜영 그렇지만 내가 그런 장르를 특별히 선호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뿐이다.

최광희 사실 배우로서 내 고유의 캐릭터를 이렇게 만들어가겠다, 설정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지 않았나.

이혜영 그렇지. 가진 걸로 잘이나 하면 다행이지.

최광희 목소리 톤이나 발성이 연극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초창기에 연극을 해서 그런 건가?

이혜영 본래 소리가 그렇다. 초등학교 때부터 애들이 그랬다. 너 소리가 왜 그래? 너 목소리 만들어서 내? 화장 안하고 아이들이랑 같이 다니면 이혜영이라고 잘 못 알아 봐도 소리 때문에 다들 알아본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내 소리가 싫은 적도 꽤 많았다. 연극에서도 나 같은 목소리가 거슬리고 튈 때가 많다. 어쨌든 소리는 타고 난 건데, 오히려 소리 훈련을 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게을러서 안 한 거지. 연극 때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을 거다. 번역극과 뮤지컬로 연극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래서 훈련을 받으면 좋아질 수도 있을 거다.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최광희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은 없나?

이혜영 왜 없겠어. 지금은 일단 영화를 열심히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야...하하. 아이들 갖고 나서는 연극 거의 안 했다. 안 한 지 한 10년 된 것 같다. 대본은 계속 들어오고 있다.

최광희 너무 까다롭게 고르는 거 아닌가?

이혜영 솔직히 사생활도 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냥 바쁜 거다.

최광희 하긴 엄마 역할도 중요할 테고.

이혜영 중요하지! 낳았으니 어떡해?

최광희 낳으려고 낳은 거 아닌가? 하하. <피도 눈물도 없이> 때 인터뷰에서 다섯 살 난 첫딸 이야기 잠깐 했는데, 지금 11살 정도 됐으니 엄마가 뭐 하는지 정도는 알 때가 됐겠다.

이혜영 지금도 내가 뭘 하는지 잘 모른다. 일부러 찾아서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그런 데 익숙한 환경에서 크다가 자연스럽게 배우의 꿈을 가지게 됐는데, 자꾸 그런 걸 딸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완전히 분리해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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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렬한 이미지라고 한다면 거기에 걸 맞는 증거물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그거 하나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 나는 없다. 왜 그게 아쉽지 않겠나."


최광희
지금 탄탄한 활동을 하고 있는 30대 여배우들이 적지 않은 데 반해 이미숙을 제외하곤 40대 여배우들은 거의 씨가 말랐다.

이혜영 열심히 할게, 그러니까. 미숙이 언니랑 다시 전화도 하고 같이 열심히 하자고 해야지.

최광희 활동하는 데 나이라는 게 현실적인 제약으로 느껴질 때는 없나?

이혜영 전혀. 26살 때 이미 날 43살로 본 사람도 있는데 뭐. 어렸을 때 아주 노련한 척 하면서 이미 나이 많은 여성 역할을 했기 때문에 별로 못 느끼겠어, 그런 거.

최광희 이를테면 사람들의 시선이라든가, 혹은 캐릭터의 제약이라든가.

이혜영 그런 거 별로 못 느껴, 진짜. 어렸을 때도 청춘 멜로 영화의 이십대 연기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때 오히려 한 쉰 된 것 같으신데 참 안 늙는다는 얘기까지 들었을 정도니까.

최광희 배우에겐 구축된 이미지가 강점이 되긴 하지만 굴레가 되기도 한다. 당신의 경우, 상대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강해 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휴먼 드라마에는 잘 안 맞겠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거다. 강한 느낌의 초현실적인 캐릭터나 장르 영화 외에는.

이혜영 그래서? 그런 영화 중에 내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게 있나?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런 영화로 크게 부각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런 이미지를 줄까? 왜 그럴까?

최광희 사실 나도 인터뷰 하기 전에 약간 부담감을 가졌다. 도도하고도 강한 자의식을 가진 분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이혜영 그런데 직접 보고 얘기해보니까 어때?

최광희 수더분한, 동네 옆집 아줌마 같은 느낌?

이혜영 맞아. 하하하.

최광희 그런데 사람들이 갖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면, 그냥 그 컬러로 밀고 나가야겠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이혜영 난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 전혀 없다. 그냥 이대로 잘이나 했으면, 그런 생각은 들지.

최광희 잘이나 했으면, 이라는 말 자주 하신다.

이혜영 이혜영의 대표작이다, 라고 할만한 걸 꼽을 수 있나?

최광희 글쎄, <피도 눈물도 없이>가 그나마 가장 각인돼 있지.

이혜영 그래도 장미희 하면 <겨울 연가> <사의 찬미>, 이런 작품 생각 나잖아. <사의 찬미>는 내가 한국에서 초연할 때 참여해서 상까지 받은 작품이다. 그런데 윤석화 선배가 그 역할 너무 좋다고 해서 노영심 씨랑 뮤지컬 해서 롱런 상연했지. 사람들은 <사의 찬미>윤석화 선배의 작품으로 기억하지, 내가 초연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영화화 됐을 때도 대본을 받은 적이 있지만 결국 장미희 언니가 하게 됐다. <사의 찬미>의 윤심덕은 내가 무대에 있을 때 참 좋아했던 역할이었고, 영화로까지 이어간다면 좋겠다 싶은 생각을 했었다. 프랑스 배우 화니 아르당도 마리아 칼라스를 무대 위에서 하고, 영화로까지 하지 않았나. 그런 것처럼, 내가 강렬한 이미지라고 한다면 거기에 걸 맞는 증거물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그거 하나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 나는 없다. 왜 그게 아쉽지 않겠나. 그런 걸 하고 싶다. <사의 찬미>나 다시 해볼까? 하하.

"난 장미희 같은 배우가 돼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에바 가드너 같은 배우가 될 거야, 오히려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스크린 속의,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동경하면서 배우의 꿈을 갖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할리우드 스타의 여신 같은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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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게임> 2008

최광희
영화
쪽에선 어떤 분들과 주로 교류하나?

이혜영 아무하고도 교류 안 하지만 언제 봐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최광희 평소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다는 얘긴가?

이혜영 전혀 없다.

최광희 성격이 문제인가? 이 바닥이 문제인가?

이혜영 나한테 문제가 있겠지. 촬영 끝나면 그냥 바로 집으로 간다. 그러다 보니까 서로 잘 모를 수 있겠다. 앞으로 그런 것도 잘해 볼게. 헤헤.

최광희 스스로의 성격을 어떻다고 생각하나?

이혜영 까다롭고 낯도 잘 가리고. 그리고 약간 우울증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우울하거나 연약하거나, 그런 수동적인 모습을 별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옆 사람이 피곤하니까.

최광희 그 얘기를 들으니 일상적인 세계에서 동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 이를테면, <선셋 대로>에 나오는 글로리아 스완슨하고 묘하게 중첩 되는 부분이 있다.

이혜영 그런 얘기 하는 기자는 또 처음 보네.

최광희 기분 좋은 소리인가?

이혜영 보는 눈이 있다는 거지, 날카로운 데가 있네. 하하하.

최광희 아무튼 그래서 사람들이 약간은 거리감을 두고 보는 게 아닐까?

이혜영 내 세대가 그런 거지. 내가 어렸을 때는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 같은 사람들이 막 TV에 나오고 그랬는데, 장미희 같은 배우가 돼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에바 가드너 같은 배우가 될 거야, 오히려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스크린 속의,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동경하면서 배우의 꿈을 갖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할리우드 스타의 여신 같은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겠지. 본 게 그런 거니까. 본 경험과 본능적인 게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 거겠지.

최광희 장미희 씨도 여신적 이미지의 여배우라는 측면에서 비슷한 것 같다. 사실 그런 이미지가 70-80년대에는 어느 정도 통했지만 90년대 이후부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방법론이 된 거지. ‘아름다운 밤이에요’라는 말이 코믹 코드로 활용됐던 것처럼 말이다. 시대는 변하고 나이는 들었는데, 저 분들은 예전의 고전적 우아함 속에 남아 있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슬쩍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이혜영, 그렇게 생각하라 그러지. 나는 거기에 맞출 생각이 없고.

최광희 요즘 후배들을 보면 연기 패턴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은 안 하나?

이혜영 이를테면?

최광희 <피도 눈물도 없이>에 함께 출연했던 전도연도 그렇고.

이혜영 글쎄 나는 못 느끼는데, 감독들이 얘기하더라, 좀 다르죠? 이렇게. 나는 근데 잘 모르겠어, 뭐가 다른 건지. 다만, 도연이는 그런 게 있어. 우리 때 같으면 어떤 신이 주어지면 생각을 많이 하고 몰입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그런데, 도연이는 그냥 해, 그냥. 그건 세대가 다른 데 따른 거지. 나도 특별히 변화를 가져야 할 역할이라든가, 좀더 달라진 걸 증거해야 할 계기를 만나게 되면 다른 패턴의 연기가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일부러 달라져야 한다거나 고민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그래서 더욱 독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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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대로 한 프로젝트를 통해서 고통의 시간을 경험하며 커가고 싶었다."


최광희
이혜영 고유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을 아직 못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혜영 만나고 싶은 감독들이 몇 명 있긴 하다.

최광희 이를테면 누구?

이혜영 정지우 감독. 영화가 참 좋았다. <사랑니>가 특히 좋았다. 김기덕이나 임상수 감독도 같이 일해 보고 싶다. 이창동 감독 영화의 그 여성들! 그런 감독 많지 않다. 배우를 탈진시키는, 그런 감독을 만나고 싶어.

최광희 그건 곧 기 싸움에서 당신을 압도당할만한 감독을 못 만났다는 뜻인가?

이혜영 지금까지 만났던 감독들은 다 나를 좋아했고, 잠재된 게 많다고 인정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대하는 바가 많았다. 이를테면, 왜 그거 있잖아, 너 잘하는 거, 이런 식이었다. 그럼 나는 그게 뭐예요? 그러지. 난 나대로 한 프로젝트를 통해서 고통의 시간을 경험하며 커가고 싶었다. 난 한 영화 찍으면서 기분이 달라지고 그래서 표정이 바뀐다. 방문 열 때 다르고 닫을 때 표정이 달라, 마치 딴 사람처럼. 그래서 그걸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 승완 감독도 그걸 많이 잡아줬고, 윤인호 감독도 신경을 많이 써줬지. 옛날의 감독들도 나한테 많이 배려해줬고.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나온 것 같다.

최광희 싸워야 할 때는 좀 싸워야 하는데 너무 좋은 게 좋은 식이었다, 이 말씀인가?

이혜영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된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아. 프로덕션 전체가 화목하게 잘 끝나는 것을 바라는 편이라서 싸우고 쟁취하고 그런 걸 안 했던 것 같다. 앞으론 그런 것도 팍팍 싸워서 얻어내든지, 바꿔볼까 봐. 하하.

최광희 부디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독을 만나 좀더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예전의 토크2.0 시절엔 마지막에 행복하냐는 질문을 꼭 했다. 다시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혜영 행복해.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야. 잘될 것 같아, 2008년엔.

PHOTOGRAPHER 김병구
의상협찬 이세이미야케, 티슈즈, GIORGIO FERRI, CHOII
FILM2.0 설합본호(토크2.1)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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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설 극장가는 그야말로 난형난제의 흥행 국면이 펼쳐질 전망이다. 연휴를 앞둔 1월 31일 한국영화만 무려 4편이 맞붙는다. 신하균과 변희봉, 신구 배우의 앙상블을 선보이게 될 스릴러 <더 게임>과 일제시대를 배경 삼은 두 편의 영화, <라듸오 데이즈>와 <원스 어폰 어 타임>, 그리고 황정민과 전지현을 앞세운 휴먼 드라마 <슈퍼맨이었던 사나이>가 그것이다. 여기에 한 주 늦게 개봉하는 로맨스 영화 <6년째 연애중>과 또 한 편의 휴먼드라마 <마지막 선물>까지 가세하게 되면, 무려 6편의 한국영화가 설 연휴 극장가를 놓고 '박 터지는' 흥행 대결을 펼치게 되는 셈이다.(이렇게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 다니지 말고 분산해 개봉하면 얼마나 좋겠냐만, 대목을 노리는 영화사들의 심정이야 이심전심일 터이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도 이해는 간다. 여하튼 이들 영화 가운데 한 두 편 빼고는 다 망하게 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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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영화 가운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도 이상한 노릇은 아니다. 황정민과 전지현이 만났다니 그 연기 조합이 어떨까 호기심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말아톤>과 <좋지 아니한가>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정윤철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니 영화의 만듦새에 대해서도 살짝 신뢰감이 돋는다. 최근 내가 만난 영화인들도 하나 같이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을 물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영화계 안팎에서 올 설 연휴 최대의 흥행 변수로 여겨지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나는 영화에 대해 어땠냐고 묻는 분들에게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의 진심은 알겠어요. 진정성도 있고 미덕이 있는 영화라는 것도 인정해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영화가...심심해요."

말 그대로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내용적으로 괜찮을 뿐만 아니라 정윤철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화다. 감독이 자신을 슈퍼맨이라고 주장하는 한 '정신 이상자'의 선행을 빌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발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매우 유의미하다는 것까지 알겠다. 이기적인 환경 파괴와 극단적인 개인주의, 그리고 도덕 불감증의 살풍경이 슈퍼맨의 어깨를 짓누른다. 슈퍼맨은 이들 괴물과 맞써 싸운다. 이 엉뚱한 정신 이상자는 결국 우리가 잊고 지냈던 선한 마음과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웃다가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이 슈퍼맨이, 그리고 감독이 관객에게 의도한 감정의 흐름이라면,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제법 뚝심 있게 그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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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결정적으로 그 뚝심이 관객이 허용할 수 있는 감정의 경계를 살짝 넘어섰다 돌아온 느낌이다. 내게 그것은 계몽에 대한 어떤 강박처럼 보였다. 진심이 완곡하게 돌아 관객의 폐부를 파고 들어가 그 안에서 주체적으로 하나의 상을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진심을 곧장 언어화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의 능동성을 방해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슈퍼맨의 입을 빌린 감독의 발언이라는 게 분명해 보이는, 이를테면 "돕지 않으면 도우려는 마음도 사라지잖아요." "현재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도 바뀌지 않습니다."와 같은, 자못 '좋은 생각'스러운 대사들이 대표적이다. 세상 바라보는 답답한 마음 알겠는데, 그 마음을 해석하고 주체적으로 내면화할 관객의 힘을 끝까지 신뢰하지 않는다면, 자칫 잔소리로만 들릴 수 있는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영화는 설교나 강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심심하다. 자칭 '슈퍼맨'(황정민)의 과거사가 밝혀지는 순간까지, 슈퍼맨의 이어지는 엽기적 선행과,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송수정 피디(전지현)가 슈퍼맨의 진심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장황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영화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다 생긴 '과유불급'의 오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꽤 괜찮은 영화라는 칭찬이 아깝지 않았을 뻔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황정민이 선보이는 또 한번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감독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내겐 범작의 수준의 머물고 말았다. 곱씹을만한 얘기를 들려주는 이 영화에서 곱씹을만한 잔상을 얻지 못한 나는, 다만 이 영화와 함께 했던 두 시간 동안의 '착한 시간'을 스스로 대견해 했을 뿐이다.
 

까칠한 휴먼 다큐 피디로 변신한 전지현에겐 자꾸 CF 속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일본의 한 유명 배우는 시대극 출연을 앞두고 스스로 광고 출연을 6개월 간 중단했다고 한다. 그가 맡을 영화 속 캐릭터를 관객들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배려였던 셈이다. 어젯밤 TV에서 란제리 바람으로 요염한 둔부를 흔들어대던 그 뽀얀 얼굴이 슈퍼맨과, 그를 짓누르는 이 지랄 같은 세상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참으로 감정이입 안되는 건 나만의 경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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