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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것이 거짓으로 판명날 때가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대단히 편의적인 것이어서 어떤 복잡한 변수에 의해 실체와 다른 왜곡된 상(像)을 간직하게 되면, 곧잘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기 일쑤다. 

<어톤먼트>의 꼬마 숙녀 브라이오니도 그렇다. 언니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이제 막 달뜬 사랑의 감정을 나누게 된 하녀의 아들 로비(제임스 맥어보이)를 색정광이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어느 더운 여름날, 집 앞 분수대에서 펼쳐진 두 사람의 에로틱한 신경전을 목격하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짝짓기 나이가 된 어른들끼리의 수작'을 이해할 수 없었던 브라이오니에게 창 밖으로 펼쳐진 그 장면은, 언니가 외간남자 앞에서 억지로 옷을 벗게 되는 이상한 상황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로비가 혼자만의 치기로 세실리아에게 쓴 음란한 편지를 우연히 브라이오니가 먼저 읽게 됨으로써, 브라이오니가 품고 있었던 로비의'색마 혐의'는 거의 기정사실이 돼 버린다. 결정적으로, 서재에서 언니와 로비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장면까지 목격하게 됐으니, 브라이오니의 뇌리에서 로비는 빼도 박도 못하게 '음흉한 짐승'으로 굳어진다. 브라이오니의 편견이 부른 또 다른 오해는 결국 언니와 로비의 생이별을 야기하고 만다.

<어톤먼트>는 한 소녀의 편견과 오해가 부른 두 남녀의 불행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혹한 시대 상황과 맞물리며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의 '기막힌' 사연은, 브라이오니의 참회의 기록 안에서 재구성되는데,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피해자로서의 로비와 세실리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씻을 수 없는 참회를 안게 된 브라이오니의 처지에도 공감을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사실 구체적 삶의 국면에는 수많은 우연적 사건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게 마련이다. 누구도 누구를 원망할 수 없다. 죄가 있다면, 하필 그 때 그들 사이에 끼어든 우연의 장난이다. 관계 안에서 그 우연의 장난에 쉽게 포로가 되고 마는 인간의 처지가 처연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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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어톤먼트>는 러브 스토리다. 그것도 지독히 고전적인, 운명의 장난에 휩싸이고 시대의 무게에 짓눌린 두 남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이 식상해 보일 듯한 레퍼토리를 범상치 않게 만든 것은, 빛 바랜 러브스토리를 '참회'의 액자 안에 넣어 오히려 더 찬란하게 만든 원작자 이언 맥큐언의 몫만은 아닐 것 같다. <오만과 편견>의 조 라이트가 시청각적으로 재구성한 영화는, 그 자체로도 매우 '시네마틱'해서 영화 보기의 고전적인 즐거움을 상기시킨다.

눈에 번쩍 뜨일 인상적인 장면이 적지 않은데, 특히 공간과 인물, 카메라의 움직임과 음악이 역동적으로 조응하게 만드는 조 라이트의 솜씨는 남다르다. 영화의 첫 장면, 타이핑 소리를 연상시키는 음악을 깔며 거대한 저택의 복도를 잰걸음으로 거니는 브라이오니를 카메라가 따라가는데, 영화 중반에 간호사가 된 그녀가 병동 복도를 행진할 때 역시 같은 스타일의 카메라 워킹을 선보임으로써, 인물의 캐릭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특히 전투중 낙오된 로비가 오랜 우여곡절 끝에 겨우 해변가의 본대에 합류했을 때 펼쳐지는 꽤 긴 롱테이크는, 전쟁의 피폐함을 총과 폭탄 없이도 충분히 긴장감 있게 담아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음악상은 괜히 받은 게 아니었다.

<비커밍 제인>으로 '훈남' 대열에 합류한 제임스 맥어보이(눈빛과 표정이 왠지 양조위를 닮았다)와 <오만과 편견>의 키이라 나이틀리의 조합도 썩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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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의 뒤에 숨은 국가

영화 이야기 2008. 2. 23. 15:27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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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개봉한 마이크 니콜스의 <찰리 윌슨의 전쟁>은, 앞으로는 휴머니즘의 얼굴을 하고 뒤로는 열심히 주판알을 퉁기고 있는 국가주의의 실체를 비웃는다. 영화는 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아프간 반군들에게 무기를 대주는 데 간여한 한 하원의원의 실화를 재구성해 보여준다. TV 시리즈 <웨스트 윙>에서 노골적으로 민주당 출신을 대통령으로 설정한 바 있는 아론 소킨이 각본을 썼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 역시 다분히 반(反)공화당적인 냄새가 풍긴다.

마약과 집단혼음을 즐기는 방탕한 하원의원 찰리 윌슨(톰 행크스)과 그와 가끔 자는 사이인 기독교 근본주의자 조앤 헤링(줄리아 로버츠)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새삼스레 충격을 먹고, 부지런히 애국주의적(?) 음모를 펼친다. 명분 없이 전쟁에 공개 개입할 수 없었던 터라, 아프간 반군에게 미제 무기가 아닌 소련제 무기를 사 주는 편법으로 몰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이 이들의 아이디어였다. 의회가 예산을 승인하도록 만들기 위해 찰리 윌슨이 동원한 방식은 간단하다. 팔 다리가 잘려 신음하는 아프간 난민들의 참경을 하원의장에게 보여주고 '이런 몹쓸 놈들'이라는 인도주의적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제스처에 불과하다. 뒤에 도사린 계산은 소련의 팽창을 어떻게든 저지하고 중동을 사수해야 하는 미국의 노림수였다. 그러니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폐허가 된 땅의 복구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게다가 20여 년 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구 소련이 했던 것처럼 그 땅을 공격했다. 어쨌든, 정치 풍자극으로서의 이 영화가 비웃는 지점은 패권주의의 추한 얼굴을 숨기기 위해 휴머니즘이 '동원'되는 풍경이다. 국가는 휴머니즘의 뒤에 숨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국적 외교의 근간일지도 모른다.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결국 <찰리 윌슨의 전쟁> 역시 미국의 마지막 양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찰리 윌슨과 같은 날라리 하원의원에게도 살아 있는 정의로운 측은지심, 아프간의 전후 복구를 걱정하는 CIA 요원의 의리 같은 게 아니겠냐고, 아론 소킨은 은근히 말하는 듯 하다. 이런 그의 정치적 관점은 <웨스트 윙>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정리하자면, 그의 청사진 속의 미국은 패권을 갖되 그 힘을 합리적으로 구사하는 온화한 맏형의 이미지다. 그렇지 못한 미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도 미국은 여전히, 아주 자연스럽게 패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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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밴티지 포인트>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 있음]

대놓고 미국 대통령이 저격당한다는 설정을 통해 미국에 대한 적의까지도 상품화한 <밴티지 포인트>에 비하면, 그나마 <찰리 윌슨의 전쟁>은 매우 세련된 정치 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다. 남다르게 보이려고 하는 형식적인 치장에 가깝되, 내용적으로는 크게 쓸모 없어 보이는 다중 시점이라는 틀을 동원하고 있는 <밴티지 포인트>는 짐짓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 노선에 대한 반성의 시늉을 펼쳐 보인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다섯 차례가 넘게(다 세보진 못했지만 아주 자주 나온다)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 자체가 '우린 맞아도 싸'라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건 말그대로 자학의 시늉이다. <밴티지 포인트>는 결국 세계 평화를 이루는 것은 평범한 이들의 가슴 속에 놓여 있는 착한 심성이라는 성선설적 마무리를 선보인다. 미국 대통령을 쏘아 죽이려는 세력들도, 암살 위협에 놓인 대통령도, 그 사이에 목숨을 걸고 암살의 배후를 추격하는 경호원도 알고 보면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거기에 희망이 있는 게 아니냐는 거다. 그런데 그걸, 누가 모르나? 반 테러리즘으로 포장된 국가 패권주의의 얼굴에 살풋 미소가 번진다. 우린 다 사람이 아니냐고. 나도 반성할테니 너도 반성하라고. 우리를 그만 욕하라고. 제발이지 때리는 대로 맞고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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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는 방안, 거울을 응시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
               그들의 내면을 투사하는 거울의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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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3M흥업 동료 필진 jacosmile 님과 '오디언'의 신설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인 '김태훈, 최광희의 쾌변' 첫 방송에 출연했다. 지난 번 <우생순> 흥행 예측이 결과적으로 적중한 데 대해 약간 우쭐해진 cinemAgora, 출연중에 즉석으로 흥행 예측 내기를 제안하는 호기를 부렸다(재미 들렸나^^). <추격자>의 첫 주말 관객수 알아맞추기 내기를 했는데, (오차 한계 플러스 마이너스 5만 명을 전제로) 70만 명을 불렀다. 그랬더니 jacosmile님께서 저녁 내기에서 출연료 내기로 판돈의 규모를 대뜸 높이는 <도성>의 주성치적 베팅을 일삼는 바람에 cinemAgora 간이 콩알만해지고 만다(리뷰 안쓰겠다는 베팅보다 돈이 더 무섭다ㅠㅠ). 결국 20만 명 줄인 50만 명으로 예측을 변경하는 급굴욕을 선보였으니, 지금 이 박스오피스 포스트를 쓰고 있는 cinemAgora는 속으로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다. <추격자> 첫주말 전국 관객수가 70만 명에 거의 육박한 68만 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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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추격자>로선 경사다. 비록 할리우드 SF 액션 영화 <점퍼>에게 1위 자리는 내주었지만, 이 정도라도 꽤 선전했다는 자체 평가가 나올만 하다. 게다가 입소문이 장난이 아니다.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등급이 다소 불리한 부분이긴 하지만, 적어도 지난해 말 개봉한 <세븐 데이즈>에 필적할만한 흥행세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예측이 나올만 한 상황이다. 똑같은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였던 <세븐 데이즈>의 경우, 첫 주말 4위라는 비교적 부진한 출발을 보인 바 있지만, 결국 '몰라봐서 미안한' 관객들의 뒤늦은 성원에 힘입어 200만 명 이상의 관객수를 챙긴 바 있다. 게다가 <추격자>의 오프닝 스코어가 <세븐 데이즈>의 두 배 가까이 된다는 점도 이런 예측에 설득력을 안겨주고 있다.

섣부른 평가이긴 하지만, 아직 흥행력(티켓 파워)이 본격 검증되지 않은 김윤석과 하정우 투톱 카드를 내민 <추격자>의 성공적인 시장 안착은, 영화 흥행의 열쇠는 시나리오의 완성도와 작품의 질이라는 지당한 이치를 새삼 확인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관객들은 웰메이드 장르 영화를 함부로 외면하지 않는다. 이런 사례가 많아져야 일부 스타급 배우들에 대한 개런티 거품이 빠진다. 돈을 벌어주는 것은 결국 참신한 기획과 탄탄한 연출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것이 필자인 cinemAgora가 (비록 내기에 아깝게 져 속은 쓰리지만) <우생순>에 이어 <추격자>의 흥행 가도에도 노골적인 응원을 보내는 이유다.


주말 박스오피스(2008.2.15~17)

순위         작품명          서울 주말         전국 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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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점퍼             182,900           768,400
2위         추격자            174,100           681,300
3위   스파이더위크가의 비밀    54,000           180,000
4위     원스 어폰 어 타임      33,600         1,463,700
5위      6년째 연애중          33,500         1,038,400
6위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27,500            91,500
7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17,400         4,032,500
8위        더 게임             16,800         1,436,000
9위      대한이 민국씨         13,400            80,400
10위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2,000           561,000
10위     찰리 윌슨의 전쟁       2,000           170,000

#순위는 서울 관객수 기준

*관련 포스트
2008/01/28 - '추격자' 얼얼한 리얼리즘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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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돌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영화 속 우리 아이들.
                    과연, 현실 속의 아이들도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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