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관람 전 가이드

영화 이야기 2018. 5. 17. 09:03 Posted by cinemAgora

이 글은 오늘 개봉한 영화 <버닝>의 프리뷰다. 프리뷰(Preview)는 말 그대로 미리 보는 것. 일종의 관람 전 가이드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나는 영화가 "볼만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상품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별점 따위를 매기는 건 아예 혐오한다. 다만, 평론가는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에게 유용한 팁을 주고(Preview),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에게는 여운을 곱씹을만한 해석을 제공(Review)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두번째 작업, 즉 리뷰(Review)는 나중에 따로 쓸 것이다.


각설하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일반적이며 전형적인 영화 문법에 익숙한 분들에겐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는 관객들에게 능동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주는 연출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그건 사실 이창동이 관객들을 매우 수준 높은 교양인으로 대우하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요즘 관객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 걸 낯설어 한다는 점이다.


영화 <버닝>도 그렇다. 관객들은 이창동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한국 사회의 상황에 맞춰 재해석한 이 영화에서 그가 촘촘히 배치해 놓은 힌트들을 통해 영화의 주제 의식을 스스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 뭥미?"하고 극장문을 나서게 될 것이다.


두 가지 힌트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영화 속 유아인의 대사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와 스티븐 연의 대사 중에 나오는 "메타포"다. 영화 속의 주인공 종수는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처한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이나 전종서가 연기한 해미도 미스터리한 인물들이다. 영화는 종수를 알쏭달쏭한 인물들이 펼치는 알쏭달쏭한 상황 속으로 이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 자체도 수수께끼이며 거대한 메타포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진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혼란을 느낀다면, 이창동의 덫에 단단히 걸려 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혼란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이다.


거기에 대해선 추후에 다시 쓰겠다. 영화를 보기 전에 당신이 명심할 한가지, 이창동의 영화에 '재미'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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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마르크스

영화 이야기 2018. 5. 9. 09:43 Posted by cinemAgora

요즘은 영화 리뷰를 쓰는 것도 망설여 진다. 글이란 읽히려고 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영화 리뷰를 찾아 읽지 않는다. 벌써 900만 명이 본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에 대해 쓰면 좀 읽을 것이다. 대개 더 많은 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영화에 대한 글은 경향적으로 조금 더 읽힌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의 볼 일 없는 예술영화에 대해 끄적여 본들 관심을 끌기엔 애시당초 글러 먹은 세상이다.


하물며 공산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레드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 있는 이 나라의 공기에서 이 영화를 수입해 개봉하려고 하는 영화사가 제 정신인지 나도 의아할 지경이다. 그러니 이 글 역시 광범위하게 읽히기에 글러 먹었다. 그러나 쓴다. 기억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해, 이 영화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다. 산업 혁명의 와중에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삶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려 했던 어느 유대인 출신 독일 청년이 어떻게 그같은 사상적 지평에까지 도달했는지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영화이므로 그가 집필한 <자본론>과 같이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아프진 않다. 칼 마르크스의 관계로부터 드라마를 뽑아낸다. 당연히 그의 사상적 동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빠질 수 없다. 자본가의 아들이지만 노동자의 처지에 가슴 아파하고, 될썽부른 나무를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엥겔스가 없었더라면 19세기 노동 운동의 태동도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 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는 칼 마르크스가 청년헤겔학파와 결별하고 가난과 박해와 싸우며 불과 30세에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기까지의 상황을 다룬다.


대학 시절에 <공산당 선언>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자본론>도 읽으려고 '노력'은 했다. 역사적 맥락을 모른 상태에서 읽으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해설서를 구해 읽었다. 영화를 보니, <공산당 선언>의 시대적 맥락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흥미롭게도, 엥겔스의 아내이자 동지 레니가 두 거두의 철학을 아주 쉽게, 동시에 울림이 큰 대사로 풀어 놓는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요. 자유를 위해서는 싸워야 해요. 싸우려면 가난해야 하고요."


공산주의에 대한 평가와 이념적 지향과는 별개로, 칼 마르스크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후대의 철학자와 경제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하는,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유럽의 열린 문화 지형을, 나는 흠모한다. 게다가 밥 딜런의 노래 "Like Rolling Stone"이 칼 마르크스와 이렇게 근사하게 어울릴 수 있다니! 5월 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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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어게인

영화 이야기 2018. 4. 19. 16:14 Posted by cinemAgora

좌절은 영화 속 주인공의 필연적 숙명이다. 그러나 극복 역시 숙명이다. 이 두 요소는 99% 이상의 영화가 채택하는 이야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색다르게 변주하느냐가 영화적 성패를 가른다.


<리브 어게인>(4월 26일 개봉)은 그걸 부녀 뮤지션의 이야기를 통해 변주한다. 여주인공 주드(앰버 허드)는 목하 좌절 중인 30대 초반의 막 나가는 펑크록 뮤지션이다. CM송을 부르며 근근히 먹고 살다 집세도 내지 못해 쫓겨난 그녀는 별 수 없이 죽도록 싫은 아버지 폴(크리스토퍼 월큰)의 집을 찾아간다. 한때 ‘로맨스의 황제’라고 불렸지만 이제는 퇴물이 되어 버린 아버지는 결혼과 이혼을 숱하게 되풀이한, 딸보다 더 막나갔던 뮤지션이다. 그런데 성격은 딸과 정반대. 만사 천하태평에 듣든 말든 "왕년에 내가" 타령. 이미 잊혀진 스타가 되어버린 처지를 애써 무시하며 언감생심 컴백을 노린다. 만사가 안풀려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딸이 그런 아버지와 코드가 맞을 리 없다. 게다가 한동안 얹혀 지낼 수밖에 없게 됐으니 다음 이야기는 굳이 말 안해도 알 것이다. 그렇다. 티격태격 좌충우돌의 나날들.


주드의 록음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폴의 컴백이 철들지 못한 노인의 아집이라고 몰아세우는 딸. 아버지는 지나치게 낙천적이라 문제이고 딸은 너무 비관적이라 문제다. 어쨌든 유일한 공통점은 객관적으로 둘 다 좌절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대를 이어 음악을 하는 부녀는 둘다 세상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있다. 아버지는 퇴물이 되었고, 딸은 음악계의 변두리를 맴돌고 있다. 영화는 여기서 은근한 끈을 엮는다. 서로를 조롱하고 무시하지만, 어쩌면 두 사람은 어서 좌절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동지적 관계인 것이다.


영화의 제목 <리브 어게인>은 영화 속 폴의 자작곡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다시 살 수 있다면...” 이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만약 당신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지나온 날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어쩌다 이렇게 됐지? 누가 내 삶을 이렇게 망쳐 놓았지? 누구 탓이지? 회한으로 가득 차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영화는 뻔하긴 해도 정신 건강에는 좋은 팁을 넌지시 던진다.


“다시 살 수야 없지. 한 번 더 해봐. 지금, 바로 지금 말이야.”


이 영화의 원제는 “One More Ti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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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우먼

영화 이야기 2018. 4. 10. 15:30 Posted by cinemAgora

"그리하여 둘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맺는 유치한 동화가 아닌 이상은, 우리가 이야기 장르를 통해 접하는 사랑은 비극이 아니고서야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 비극적 요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무리 성(聖)스러운 감정이라고 해도, 필연적으로 속(俗)의 세계에도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사랑에도 등급과 자격을 만든다. 봉건 시대에는 신분 제도나 가문간의 알력 등이 그러하였다. 따라서 비극성은 자명했다.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우리에겐 <춘향전>이 있다.


그런데, 21세기 언저리의 영화는 어떻게 사랑의 비극성을 만들어낼 것인지 딜레마에 빠졌다. 남녀간의 사랑에서 비극을 뽑아내기에 인간의 짝짓기 환경이 지나치게 전략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른바 '연애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분주하게 주판알을 퉁기는 남녀의 짝짓기 전략이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치는 곳. 그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속(俗)할대로 속해져 버린, 편리하게는 서로 사랑이라고 부르되 진짜 사랑은 아닐 수도 있는 연애 관계의 보편적 풍경이 된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속의 세계의 '유사 사랑'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되는 게 마땅할 것이다. 이런 유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는 밀고 당긴다. 사랑을 하지 않고 롤플레잉게임을 한다. 감정과 감정이 아닌 전략과 전략이 맞붙는다. 풍속이 그러하니 로맨틱 코미디는 명맥이 아주 길다. 그 대신 고전적 비극으로서의 사랑 이야기로부터 얻는 숭고한 감동은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필연적으로 성스러운 비극을 탐내는 이야기꾼들로선 아주 난감해진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현대 영화에서 고전적 사랑의 비극은 빈번하게 성적 소수자들로부터 뽑아져 나온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이야말로, 물론 당신이 그들을 변태 취급하지 않고, '있다'고 인정만 한다면, 성(聖)과 속(俗)의 세계에 걸쳐 있음으로써 파생되는 비극성을 추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번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런 영화들이 도리어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뛰어 넘는 사랑의 진경(眞景)을 드러낸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그랬고, 캐나다의 천재 감독 자비에 돌란의 <로렌스 애니웨이>가 그랬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시선과 편견의 폭력을 뛰어 넘으려 애쓰고, 그러나 좌절하고 마는 구조적 부조리에 갇힌다. 그 좌절은 잔영이 매우 길다. 끝내 이어지지 못하지만 생의 너머로까지 가지고 갈만큼 깊다. 그리하여 비극이되, 숭고하다. 이야기 속의 사랑은 찬미되는 비극이다.


4월 19일 개봉하는 칠레 영화 <판타스틱 우먼>도 그 계열에 서 있다. 이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서설이 길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에 대해선 길게 설명하지 않을 작정이다. 앞에서 말한 기본 전제를 이해한 이들이라면 영화를 충분히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만 이 정도만 가이드 삼아 말해 두도록 하자.


영화는 이구아수 폭포의 웅장한 풍경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에 삽입된 '옴브라 마이 푸 ombra mai fu'를 부르는 장면으로 맺는다. 이구아수 폭포는 그 크기만으로도 신성함을 드러내지만 따지고 보면 중력에 굴복하는 거대한 물의 추락이다. 아주 단순한 자연 현상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자연이 창조한 그 규모의 미학에 압도 당한다.


어쩌면 사람의 사랑도 그토록 압도적인 자연일 것이다. 재고 따지고 밀고 당기느라 그 숭고함을 까먹어 영화로만 갈구하게 된 감정의 이구아수 폭포. 그런데 왜 영화는 하필 '옴브라 마이 푸'로 끝맺는 것일까? 노랫말에 그 힌트가 들어있을지 모른다. 여러분이 찾아보시라. (다양한 번역이 있지만 여기선 영화의 번역을 그대로 옮긴다.)


이런 그늘은 없었네
이 세상 그 어느 나무 그늘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이토록 감미로운 그늘
이런 그늘은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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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영화 이야기 2018. 3. 22. 12:26 Posted by cinemAgora

일본 영화를 볼 때 가장 부러운 것은 너무나 탄탄한 원작 시장이다.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만화도 예술의 경지이니, 일본 영화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건 결국 단행본 시장의 규모에 연동되는 것이기도 하다. 출판이 사실상 고사 직전인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책을 안읽으니 좋은 이야기가 나올 저변이 얕고, 영화 역시 이렇다할 원작 스토리를 건져 올리기 어려운 게 우리 현실이다.


3월 29일 개봉하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역시 부러움 반 시샘 반의 기분으로 봤다. 원작은 소설인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이야기다. 주인공 '검은머리 아가씨'가 온갖 요괴들을 만나고 다니며 펼치는 하룻밤의 기괴하고도 엉뚱한 모험 위에 슬쩍 로맨스 라인을 걸쳤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름과 개성도 기발하고 발칙하다. 그러고 보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청춘 버전 느낌도 받았다. 애니메이션만이 구현할 수 있는 창의적 비주얼에 코믹 뮤지컬까지 얹었다.


영화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느니, 이 영화의 주제가 가사를 소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딱 이 이 작품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그녀가 찬 스케이트보드가 
큰 길로 날아갔어
빗물받이 속으로 미끄러져
희미한 어둠을 밝히지
발돋음을 해봐도 닿지 않았던 소년들이
세계를 뒤흔들어
'너답게'라는 말은 한 귀로 흘려 버리자
이유없는 설움을 
양쪽 무릎에 싣고
황야에 홀로서서
저쪽으로 비틀비틀 걷다가, 다시
흔들흔들 걸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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