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랑

영화 이야기 2018. 7. 23. 15:11 Posted by cinemAgora

김지운 감독의 신작 <인랑>은 오시이 마모루가 각본을 쓴 일본 애니메이션이 원작이다. 사람의 탈을 쓴 늑대, 테러 단체 섹트 등의 컨샙트는 그대로 가져왔되, 스토리라인은 각색이 많이 되었다. 한국화, 혹은 로컬라이제이션을 위해 통일 한국 직전의 상황을 가정했다.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한다. 통일을 반대하는 테러리스트 집단과 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특기대 또는 인랑의 대립 구도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저항의 항과 억압의 항이 시대와 맞지 않으니 아마도 관객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거기에다 공안부와 특기대가 도대체 왜 암투를 벌이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주절거리는 설명조 대사만이 강동원과 한효주의 러브 라인을 지탱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다.


이 영화 138분을 축구에 비유하자면, 전후반 90분을 다 뛰고도 득점이 나지 않아 연장전으로 돌입해 놓고 지루한 승부차기가 계속되는 꼬락서니다.


원작을 각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꽤 훌륭하게 해내는 감독들이 있다. 이안은 장아이링의 짧은 소설을 <색, 계>를 통해 아주 유려한 비극으로 승화시켰다. 데이비드 핀쳐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탁월한 재해석을 얹는데 성공했다.


김지운은 승화와 재해석 모두 실패했다. 자본의 논리에 굴종한 동시대의 한국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독창적인 플러스 알파를 얹는 데 게을렀기 때문이다. 원작의 컨셉트를 한국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대입시켜 놓고 원리를 이해 못하고 공식만 외운 학생처럼 만들었다. 그러니 아우라는 증발하고 짝퉁 로보캅만 남았다. 그런 감독이 김지운 뿐만이 아닌 게 작금 한국 영화의 문제다.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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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영화 이야기 2018. 7. 9. 09:50 Posted by cinemAgora

영화 <변산>은 대단히 소박해 보이는 영화이지만 많은 것들이 있다. 아니, 많은 관계들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애증, 어릴적 친구와의 애증, 자신을 짝사랑했던 여인과의 애증. 대개의 영화는 이 세가지 중 하나를 기둥으로 삼고, 나머지를 서브 플롯으로 넘긴다.

그런데 <변산>은 이 세가지를 모두 기둥 삼는다. 세 개의 관계를 관통하는 공통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것은 '애증', 즉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감정적 양가성이다. 그것은 주인공 학수의 또 다른 애증 대상인 고향 변산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상징화되고 랩이라는 음악을 매개로 형상화된다.

이런 이야기 구도는 대중 영화의 트렌드로 봤을 때는 무리수이되, 미덕이기도 하다. 삶이란 어떤 하나의 관계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관계, 단 하나의 갈등에 집중하는 영화적 전략으로부터 멀어진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삶의 진면목과 더 닮을 수 있게 된다. 관건은 전략으로부터의 이탈 전략으로부터 어떻게 관객을 설득한 것인가, 이다.

이준익 감독의 현대극은 모두 그 설득 전략으로써 음악을 활용했다. <라디오스타><즐거운 인생><님은 먼곳에>가 그랬고, 이번 작품 <변산>도 그렇다. 동시대의 젊은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주인공을 래퍼로 설정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영리한 선택이다. 랩이란, 21세기 대중 문화에 적응한 시詩라는 문학 장르의 진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랩은 '고백'의 매체다. 한 인간에게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들만큼이나 다양한 층위의 감정이 랩을 통해 발설된다. 이 영화의 학수를 둘러싼 상황에 더 없이 안성맞춤인 음악 장르다.

<변산>에서 지역성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것을 전라도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변산이 드러내는 전라도성은 그동안의 영화들이 다뤄왔던 경상도성과는 확실히 다른 결을 보여준다. 경상도의 드라마가 지나치게 비장하다면, 전라도의 드라마는 비극적 삶에서 해학을 건져 올린다. <변산>도 그 향토적 맥락을 잘 알고 활용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랩 가사는 주연배우 박정민이 직접 썼다고 전해진다. 이준익 감독은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자기 삶의 놀이터로 삼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 놀이터에서 배우들이 신나게 노는 걸 낄낄대며 지켜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준익은 낙천주의자다. 그는 과거로 갈 때는 비극을, 현재로 올 때는 희극을 선호한다. 인간은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긍정해야 살아갈 힘을 얻는다. '힘들어도 웃자.' 이 단순한 말은 충분히 힘들어 한 사람이 하지 않으면 전혀 울림이 없다.

비관을 모르는 낙천은 가식이다. 고등래퍼 김하온의 낙천에서 진심과 힘이 읽히는 건, 그가 빈첸의 비관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과거의 상처와 정면 승부하지 않으면 언제나 회피의 뒤안길에서 적당히 감당할만한 편리한 한숨만 짓고 살 뿐이다.

<변산>은 이준익이 <사도><동주><박열>이라는 세 시대의 세 상처를 아프게 관통하고 돌아온 뒤에 짓는 현재의 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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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영화 이야기 2018. 7. 2. 08:25 Posted by cinemAgora

<마녀>의 박훈정 감독은 2010년 즈음 꽤나 촉망 받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2010)가 모두 그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흥행과 작품성에서 반응이 엇갈렸지만, 박훈정은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첫 연출작 <혈투>는 배급사조차 홍보를 포기할 정도로 망작이 되어 버렸다.

여기까지의 필모그래피만 보더라도 박훈정의 영화적 취향은 금세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악마성을 그리기를 좋아한다. 동시에 선과 악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물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것은 철학이 깃든 통찰이라기 보다 장르적 필요에 의해 불려 나온 것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담배 꼬나물고 내뱉는 욕설과 폼을 잡는 대사도 그렇거니와, 장면에서 장면으로 이어지는 호흡은 너무나 전형적이라 그만큼 영화를 많이 본 관객이라면 다음에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그건 흔히 영화광적 영화 감독들이 갖는 편향성이기도 하다. 장점이되 단점이기도 하다. 철학의 부재는 이야기의 부재로 이어진다. 하여 그의 영화에는 자극적이고 선혈이 낭자한 장면의 강렬함은 있되, 이야기의 밀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좋은 이야기는 골방에서 익힌 트릭이 아니라 넓은 세상에서 길어올린 깊은 생각에서 우러 나온다.

사실상 <신세계>가 그의 유일한 흥행작인데, 이 작품은 솔까말 홍콩 영화 <무간도>의 짝퉁이다. 흥행이 된 것은 그나마 황정민의 캐릭터 플레이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작품들, 그러니까 <대호>는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어리둥절한 영화였고, <브이아이피> 역시 접보물과 형사 액션물이 어리둥절하게 짬뽕된 영화였다. 두 작품 모두 흥행 실패했다.

이번 영화 <마녀>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컨셉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선혈이 낭자하고, 액션에 이야기를 억지로 동원한 것 역시 전작들과 비슷하다. 이런 자극성을 무조건 탓할 수는 없다. 상호텍스트성은 장르 영화의 중요한 줄기이기 때문에, 여러 장르의 영향을 잔뜩 받아 구겨 넣은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플러스 알파다. 박훈정의 영화에는 그게 빠져 있다. <신세계>에서는 캐스팅 운이 좋아 황정민이 그 알파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감독이란 직업은 운으로만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녀>는 박훈정의 운이 다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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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루시

영화 이야기 2018. 6. 26. 12:37 Posted by cinemAgora

외롭습니까? 사랑하고 싶으세요? 어쩌죠? 주변에 사랑할만한 사람이 없다고요? 딱하군요. 발에 차이는 아무나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말이죠.

<오! 루시>의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도 그런 여자입니다. 직장에서는 왕따, 가족들은 나몰라라, 외로움에 사무쳐 지내는 40대 노처녀, 그나마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가 그녀의 유일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 조카가 어느날 미국에 가게 되었다며 자신이 다니던 영어 학원에 대신 다니라고 말합니다. 이모에게 남은 학원비를 챙겨 여비를 마련할 심산이었죠.

그래서 찾아간 영어 학원, 준수한 원어민 영어 강사 존(조쉬 하트넷)은 세츠코를 보자마자 대뜸 포옹부터 합니다. 그게 친밀감의 미국식 표현이라는군요. 그리고 세츠코에게 '루시'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 줍니다. 금빛 가발까지 씌워주니 세츠코, 아니 루시는 뭔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존재감 제로에 수십년 전 애인을 친언니에게 빼앗긴 원한에 사무쳐 있는 이 한심한 여인의 삶에 극적인 변화의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오! 루시>는 외로움과 사랑의 함수 관계에 대한 영화입니다. 외로움은 사랑의 전제 조건이지만, 거기에 매몰되면 사랑이라는 감정도 조작할 수 있겠지요. 감정이야 조작하든 말든 상관 없지만, 그게 관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 부조리가 발생하기 일쑤입니다. 자기 감정을 돌보느라 타인을 사랑이라는 명분에 동원하는 건 착취입니다. 따라서 조심해야 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괴물에 먹혀 괴물이 되지 않도록 말이죠.

테라지마 시노부는 2005년 <바이브레이터>라는 영화에서 아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는데, 영화로는 참 오랜만에 보게 됩니다. 가부키 명망가의 딸인데, <바이브레이터>에서 수위가 꽤 높은 섹스신을 선보여 집안의 망신을 샀던 용감한 배우입니다. 야쿠쇼 코지도 조연으로 나옵니다. 아무리 잘 나가도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 건 일본 배우들의 미덕입니다.

이번주 팟캐스트 '불금쇼' 녹음 때 이 영화를 소개했는데, 진행자 최욱 씨가 아주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더군요. "일본 영화는 너무 슴슴해요." 슴슴함의 매력을 모르는 이에게는 권하지 않습니다. 6월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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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

영화 이야기 2018. 6. 21. 13:44 Posted by cinemAgora

음악가는 소리를 통해 철학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음악은 우리의 청각에 닿는 단순한 음의 조합이 아니라, 소리라는 감각적 추상언어로 상징화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음악가의 생각과 논평입니다.

일본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는 그런 철학적 음악가로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그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을 소리의 조합으로 풀어 냅니다.

그런데 그가 소리를 조합하는 방식은 자연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새 소리와 바람 소리와 물통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채취해 음악에 삽입합니다. 얼음이 녹는 소리를 "낚기 위해" 북극까지 찾아갑니다.

바이올린의 활로 심벌즈의 측면을 긁어서 소리의 전형성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끊임 없이 새로운 소리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와도 같아 보입니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의 첫 장면에서 그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폐허가 된 마을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쓰나미로 인해 물에 잠겼던 피아노를 연주해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말합니다.

"쓰나미가 순식간에 밀려와서 소리를 자연으로 되돌려 놓은 겁니다. 그래서 나는 자연이 조율해 준 그 쓰나미 피아노 소리가 굉장히 좋게 느껴져요. 즉, 일반적인 피아노 소리는 인간이 억지로 조율한 부자연스러운 상태인 거지. 인간에겐 그게 자연스러운 소리겠지만 자연의 관점에선 아주 부자연스러운 거죠. 그런 억지스러움에 대한 혐오감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는 한 음악가의 필터를 통해 추출된 한 편의 간결하며 아름다운 영상 사운드트랙입니다. 규격화된 대중 음악의 "억지스러움"에 지쳐 있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통해 쉼과 통찰을 동시에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다행히 아직 극장에서 상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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