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산>은 대단히 소박해 보이는 영화이지만 많은 것들이 있다. 아니, 많은 관계들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애증, 어릴적 친구와의 애증, 자신을 짝사랑했던 여인과의 애증. 대개의 영화는 이 세가지 중 하나를 기둥으로 삼고, 나머지를 서브 플롯으로 넘긴다.
그런데 <변산>은 이 세가지를 모두 기둥 삼는다. 세 개의 관계를 관통하는 공통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것은 '애증', 즉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감정적 양가성이다. 그것은 주인공 학수의 또 다른 애증 대상인 고향 변산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상징화되고 랩이라는 음악을 매개로 형상화된다.
이런 이야기 구도는 대중 영화의 트렌드로 봤을 때는 무리수이되, 미덕이기도 하다. 삶이란 어떤 하나의 관계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관계, 단 하나의 갈등에 집중하는 영화적 전략으로부터 멀어진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삶의 진면목과 더 닮을 수 있게 된다. 관건은 전략으로부터의 이탈 전략으로부터 어떻게 관객을 설득한 것인가, 이다.
이준익 감독의 현대극은 모두 그 설득 전략으로써 음악을 활용했다. <라디오스타><즐거운 인생><님은 먼곳에>가 그랬고, 이번 작품 <변산>도 그렇다. 동시대의 젊은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주인공을 래퍼로 설정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영리한 선택이다. 랩이란, 21세기 대중 문화에 적응한 시詩라는 문학 장르의 진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랩은 '고백'의 매체다. 한 인간에게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들만큼이나 다양한 층위의 감정이 랩을 통해 발설된다. 이 영화의 학수를 둘러싼 상황에 더 없이 안성맞춤인 음악 장르다.
<변산>에서 지역성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것을 전라도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변산이 드러내는 전라도성은 그동안의 영화들이 다뤄왔던 경상도성과는 확실히 다른 결을 보여준다. 경상도의 드라마가 지나치게 비장하다면, 전라도의 드라마는 비극적 삶에서 해학을 건져 올린다. <변산>도 그 향토적 맥락을 잘 알고 활용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랩 가사는 주연배우 박정민이 직접 썼다고 전해진다. 이준익 감독은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자기 삶의 놀이터로 삼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 놀이터에서 배우들이 신나게 노는 걸 낄낄대며 지켜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준익은 낙천주의자다. 그는 과거로 갈 때는 비극을, 현재로 올 때는 희극을 선호한다. 인간은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긍정해야 살아갈 힘을 얻는다. '힘들어도 웃자.' 이 단순한 말은 충분히 힘들어 한 사람이 하지 않으면 전혀 울림이 없다.
비관을 모르는 낙천은 가식이다. 고등래퍼 김하온의 낙천에서 진심과 힘이 읽히는 건, 그가 빈첸의 비관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과거의 상처와 정면 승부하지 않으면 언제나 회피의 뒤안길에서 적당히 감당할만한 편리한 한숨만 짓고 살 뿐이다.
<변산>은 이준익이 <사도><동주><박열>이라는 세 시대의 세 상처를 아프게 관통하고 돌아온 뒤에 짓는 현재의 미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