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하이드

영화 이야기 2018. 5. 25. 17:18 Posted by cinemAgora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우리 모두에겐 '존재감'이 필요합니다. 가족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무리 안에서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확인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엄청난 무기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왕따는 타인의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박탈하는 폭력적 행위죠. 단순한 괴롭힘을 넘어 따돌리는 것 역시 폭력인 것은, 자존감 또는 존재감이 사람에게 대단히 중요한 심리적 자산이자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존재감 제로인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 지킬이 있습니다. 그녀는 30년이 넘게 교사 생활을 했지만, 동료 교사는 물론 학생들로부터도 무시를 당합니다. 정말 못 가르칩니다. 아는 건 많은데 가르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왜 아이들은 자신을 무시할까?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의 시작은 아주 단순한 데서 출발합니다. '말릭'이라는 이름의 장애 학생은 자신을 가장 괴롭히던 문제아였습니다. 이 아이를 자신의 실험실로 불러 특별 교습을 시켜준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수학 문제를 생각을 통해 풀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녀가 말릭에게 가르친 것은, '생각하기'였습니다.

지킬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반계 학생들에게만 허용된 조별과제를 자신이 가르치는 기술계 학생들에게도 적용합니다. 기술계 학생들은 우리의 실업계처럼 집단으로 존재감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말썽을 피우고 선생 말을 무시하는 건, 그 아이들이 존재감을 확인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던 셈이죠. 어쨌든 지킬이 이 아이들을 일반계와 똑같이 대우하게 되니, 지금까지 그녀를 무시하던 학생들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의미심장합니다. 나의 모멸감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연민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존재와 그 가치를 존중하니, 나의 존재감도 커지는 것입니다.

영화 <미세스 하이드>라는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을 보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맞습니다. 완전히 다른 양면성을 지닌 지킬과 하이드의 상황을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인물에게 적용시킵니다. 조금 황당하다 싶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이 유머러스한 휴먼 드라마는, 인간의 양면성이란 건 분열적인 측면과 동시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잠재적 능력을 뜻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수학 공식에도 철학이 있습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깊게 새길만한 '생각'을 안겨주는 것, 저는 그것이 좋은 영화의 미덕이라고 믿습니다. <미세스 하이드>는 재미도 있고 좋은 영화에 속합니다. 5월 3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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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의 기록 '서산개척단'

영화 이야기 2018. 5. 24. 08:41 Posted by cinemAgora

"이게 나라냐?"

많이들 들은 소리일 겁니다. 그쵸. 세월호 사건 직후, 최순실 국정 농단 직후 이 나라 곳곳에서 울분 섞여 터져 나왔던 소리들이죠. 그때 우리는 생각했을 겁니다. 나라란 과연 무엇일까? 국가란 과연 무엇일까. 나를 위하지 않는 국가가 국가인가? 내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가 나라일까?

그 의문에 담긴 울분과 분노를 그저 삼키고 만 데 그치지 않아, 우리는 촛불 혁명을 성공시켰고,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다운 나라에 살고 있나요? 그건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우리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고 믿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나라가 나라답지 않았던 시절을 끊임 없이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조금 더 나라다운 나라, 나를 위한 나라, 내 아이를 위한 나라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똑바로 응시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바보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역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도 아마 "이게 나라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4.19 혁명 이후 사회 각계에서 각자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일본 사관 학교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할 때 배운 사무라이 정신으로는, 그 자유로운 무질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해서 그는 총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지금부터 내가 짱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한손에는 '반공' 한손에는 '번영'의 슬로건을 들고 온 국민을 향해 군인 답게 "약진 앞으로!"를 외쳤습니다.

이번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서산개척단>은 바로 그 "약진 앞으로!"의 명령에 희생된 이 나라 국민의 일부를 이야기합니다.

충청남도 서산에 가면 거대한 간척 사업에 의해 농지로 개간된 땅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다를 땅으로 메꾼 이들은, 대부분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된 이들이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시절, 거리를 떠도는 이들을 무조건 잡아 이곳에 풀어 놓고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맞아서 죽었습니다.

이 개간 사업을 조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천억 원에 달하는 경제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은 한푼도 개간 사업을 위한 인건비에 쓰이지 않았고, 박정희의 장기 독재를 유지하는데 쓰였습니다.

웃기죠? 북한에는 아오지 탄광이 있고, 일본에는 강제 징용이 있었다고 욕을 해대면서, 정작 우리 안의 '군함도'는 우리가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국가의 폭력에 짓밟히고 기만에 속은 이들이 여기 이땅에 존재하는데도 말이죠. 교화와 갱생을 빌미로 거기 끌려왔던 이들은 말합니다. "박정희 때문에 이만큼 먹고 살게 되었다고들 떠드는데, 박정희는 그만큼 많이 죽였다."

거기 서산에는 여전히 그때 끌려 왔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간 사업을 마무리 하면 땅을 무상 분배해줄 거라는 거짓 선전에 속아 죽을 힘을 다해 일했습니다. 국가는 어느새 표정을 바꿔 그들에게 임대료를 내라고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스무살 안팎의 나이에 서산 개척단에 납치 또는 동원되었던 그 청년과 처녀들은 모두 노년이 되었고, 아주 뒤늦게 묻습니다. 그게 나라였냐고. 그리고 또 묻습니다. 지금의 나라는 그들에게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냐고.

이런 질문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서산개척단>은 이 시대의 정신 못차리는 저널리즘이 하지 못하는 질문을 집요하고도 세밀하게 찾아 던집니다. 나는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들에게 최고의 경의를 보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뿐이라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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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다시보기 3.

영화 이야기 2018. 5. 21. 14:56 Posted by cinemAgora

#3. 남산타워와 수음


우연히 어릴적 친구 해미를 만난 종수는 그녀의 방에 초청된다. 산동네의 흔한 원룸 주택, 해미는 말한다. "이 방은 북향이라 해가 비추지 않아. 남산 타워에 비친 햇빛이 반사되어 잠깐 들어와." 그리고 그날 종수는 해미와 성적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종수는 그 달뜬 성적 상황에서 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벽을 바라볼까? 종수의 시점으로 비쳐지는 벽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해 보인다. 과연 해가 잘 들지 않는 집 답게. 그 축축한 벽은, 해미와 종수의 처지가 다르지 않음을 확증하는 기호와도 같아 보인다.


햇빛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마저 차별을 가한다. 해미가 받는 빛은 직사광선도 아니고, 그나마 남산 타워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이다. 그게 해미가 누릴 수 있도록 허락된 사회적 자산이다. 종수는 해미와 섹스한 그 순간, 자각하지 못하되, 막연하게나마 어떤 계급적 동질감을 확인했을 것이다.


종수는 여행을 떠난 해미가 부탁한대로 고양이 밥을 주러 해미의 빈방에 들른다. 그때마다 종수는 수음을 한다. 그때 그는 창밖의 남산타워를 바라보고 있다. 수음을 하는 종수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건 해미와 나눈 성애의 기억을 소환하는 의식일 뿐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그의 표정이 수음을 할 때의 얼굴 치고는 지나치게 어둡다. 그리고 그때 왜 그는 타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도 '버닝'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그런 것 같소? 하고 말이다.


남성 중심적 사회의 억압적 지배 질서는 흔히 '남근주의 falocratism '라는 말로 표현된다. 여기서도 메타포가 기능한다. 타워는 남근주의를 상징하는 장치로 읽힐 가능성이 높다. 그 남근주의는 해미를 억압하되, 종수의 남근을 자극한다. (해미가 자주 관음적 시선의 대상이 됨을 상기하자.) 하여, 종수의 남근은 황홀한 석양을 배경으로 웃옷을 훌쩍 벗은 해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종수는 삽입 성교를 할때보다 영화의 후반부 해미가 수음을 해줄 때 훨씬 더 흥분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실 이 장면도 종수의 상상일 가능성이 높다.) 종수는 해미와의 섹스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성적 불능 상태다. 그것은 종수가 남근주의 세상의 무기력한 루저이며, 동시에 해미를 남근의 부역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해미의 허름한 방에 간접적인 햇빛만 반사해 뿌려주는 남산타워처럼, 종수도 그런 존재인 것이다. 종수는 타워 앞에서 보란듯 수음을 하고 슬쩍 해미의 사진을 바라본다. 시선을 통한 심리적 소유.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그러나 타워의 정체는 사실 흠모와 질투의 대상인 벤이다. 진짜 지배자. 지배자의 레토릭은 애매모호함이다. 벤은 그 애매모호함으로 해미를 볼모로 종수의 의식을 송두리째 지배한다.


그러니 종수가 벤에게 한 이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해미를 사랑해요." 이 바보는 왜 '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작 해미가 아닌 벤에게 내뱉는 것일까? 거기에는 서브 텍스트가 숨겨져 있다. "나는 해미를 너의 값비싼 남근에 빼앗길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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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다시보기 2.

영화 이야기 2018. 5. 20. 09:18 Posted by cinemAgora

이 글은 영화 <버닝>에 대한 두번째 리뷰다. 앞서 쓴 글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관람한 이들만 읽기를 권한다.

#2. 메타포

메타포를 한국어로 옮기면 '은유'다. "~처럼" ""~와 같이"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끌어와 'A는 B다' 식으로 비유하는 수사법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처럼 말이다. 이때 호수는 시인의 마음을 드러내는 메타포가 된다. 검색하면 다 나오는 메타포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영화 <버닝>에서 '메타포'라는 말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건,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이 그 단어를 내뱉기도 했거니와, 그가 내뱉는 또 다른 단어 '비닐 하우스'가 메타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벤은 종수에게 말한다. "나는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그리고 그는 종수가 사는 파주 시골 마을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또 다른 비닐 하우스를 태울 작정이라고 말한다.

해미가 사라질 즈음, 종수는 자기가 사는 마을의 버려진 비닐 하우스들을 매일 점검한다. 벤이 말한대로 실제로 집 주변의 비닐 하우스가 타는지를 구경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어떤 비닐 하우스도 타지 않는다. 다만 해미가 사라졌을 뿐이다.

따라서 비닐 하우스는 벤의 메타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종수는 그걸 실체가 있는 비닐 하우스로, 즉 직유법으로 받아들인다.

이 시퀀스의 한 대목에서 종수는 어느 버려진 비닐 하우스의 일부를 실제로 태워 보려고 시도한다. 그 행동은 의미심장하다. 종수는 벤의 이상한 취미를 모방하려는 충동을 갖는 것이다. 계급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종수가 언뜻 벤을 모방해 보려는 심리는,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눠진 이 세상의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자, 영화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메타포다. 빈자는 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따라서 그들의 일탈 심리도 격하된 차원에서 모방의 대상이 된다.

종수가 해미와 함께 벤의 화려한 멘션에 초대 받았을 때 내뱉은 이 말도 일종의 메타포다. "이 나라에는 왜 이렇게 개츠비가 많아?"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처럼, 그때 그는 도무지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여유롭게 사는 이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해미를 둘러싸고 벤에 대한 그의 계급적/성애적 질투가 선언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무튼 은유를 직유로 받아들였던 종수는, 벤이 표상하는 유한 계급의 은유에 기만 당한다. 그들은 알쏭달쏭한 말로 부에 상응하는 스노비즘적(속물적 교양주의) 품격으로 치장한다. 실제로 똑똑할 수도 있다. 교육 자본의 차이는 있는 자가 더 똑똑하고 우아하며 교양 있도록 만들고 있다.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아니다.

종수는 어쩌다 끼게 된 이들의 교양 넘치는 파티에 적응할 수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갖는 위화감의 정체도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파티가 끝나면 그는 북한의 대남 방송이 들리는 허름한 시골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 지점(강남)에서 눈에 보이는 경계 지점(휴전선 마을)으로. 그런데 종수의 살벌한 터전조차 벤에게는 한적한 휴양의 공간이 된다.

종수는 비닐 하우스가 타는 대신 해미가 사라진 상황을 맞게 된다. 그리고 문득, 밴을 둘러싼 다양한 실마리들이 실체와 대응되는 메타포라고 여기게 된다. 화장실에서 발견된 해미가 차고 있던 것과 똑같은 시계, 화장품 세트, 도검 세트, 사라진 고양이 등.

그럼에도, 그는 결과적으로 벤의 '있어 보이는' 메타포에 질질 끌려다닌 셈이니, 이제 벤을 둘러싼 다양한 사물과 현상이 모두 메타포이며, 거기에 대입되는 실체가 있다고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재구성한 진실은 과연 진실일까? 아무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벤을 제거한 뒤 태워버리는 것이다. 벤의 기만적 은유법은 또 한번 종수를 통해 직유적 파괴로 번역되어 모방적으로 실천된다.

그런데 이것조차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닐 수 있다. 앞서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종수가 비쳐진다. 카메라는 해미의 방에서 바깥으로 나와 마치 액자 속에 있는 것처럼 방 안의 종수를 비춘다. 그리고 바로 이어 벤이 종수의 칼을 맞는 장면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건 종수의 글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상황이라고 볼 여지를 남긴다. 종수는 자신을 혼란에 빠트린 벤에 대한 저항 혹은 복수를 글 속의 상상을 통해서야 실천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영화의 인물들과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한국 사회를 은유하는 거대한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풀리는 건 하나도 없는데,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소설가를 꿈꾸지만 뭘 써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청년 실업자 종수가 처한 상황이다. 어쩌면 종수는 이 시대를 무기력하면서도 어리둥절하게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의 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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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다시보기 1.

영화 이야기 2018. 5. 18. 15:43 Posted by cinemAgora

이 글은 이번주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 대한 리뷰(review)다. 앞서 쓴 관련 글에서 나는 preview와 review의 차이를 설명했다. preview는 관람전 가이드라면 review는 다시(re) 보는 것(view)이다. 즉, review는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정서와 메시지를 해석해봄으로써 그 여운을 곱씹어보려는 시도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를 관람한 분들만 읽기를 권한다. 영화의 디테일과 결말까지도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버닝>에 대해선 몇 가지 키워드를 매개로 해석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례로 키워드 하나씩을 꺼내 영화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오늘은 일단 전종서가 연기한 해미라는 인물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자.


#1. 해미
종수(유아인)가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어릴 적 친구 해미는 꽤나 당돌한 아가씨다. 두 번째 만남만에 종수와 섹스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 돌연 아프리카로 훌쩍 여행을 떠날 정도로 삶에 적극적이다. 그럼에도 그녀에겐 무언가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 시대 청춘이 처한 궁핍한 삶에서 그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 가운데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영화 속의 해미는 그러나 주체처럼 보이는 객체이다. 즉, 종수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인물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해미의 상황이 단독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녀는 종수의 시선과 인식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래서 해미는 불쑥 종수에게 성애의 흔적을 남기고 곁을 떠났다가 벤(스티븐 연)이라는 미스터리한 남성과 함께 나타나며, 또한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다. 이것은 종수의 혼란과 집착, 강박증을 불러 일으킨다.


해미는 자신이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적이 있는데 종수가 구해주었다고 말한다. 종수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수는 그걸 믿어 버린다. 그런데 해미의 실종 이후 우물의 존재에 대한 관계자들의 증언이 엇갈린다. 해미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했다면 왜 그런 것일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 해미라는 인물이 미스터리한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종수가 그녀를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미는 종수가 믿어 버린 대로 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일 수도, 그냥 훌쩍 종수를 떠나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앞서 해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자. "죽는 건 무서워. 하지만 사라지고 싶어. 그냥 없었던 것처럼."


해미는 한국의 사회적 지형 속에서 종수와 같은 계급적 처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수의 얼터 에고(대체 자아)이자 결핍과 혼란, 욕망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종수에 의해 착취되는 젠더적 판타지이기도 하다.


판타지는 투영의 주체만 존중하지 객체에 대한 존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폭력적인 양태로 나타난다. "너 왜 남자들 앞에서 옷을 그렇게 벗어? 그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 해미의 아름다운 젖가슴은 종수의 시선에만 독점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때 불쑥 계급적 적대자이자 잠재적 연적인 벤의 시선이 그녀의 자유 의지가 발현된 장면을 공유하고 있음을 종수는 불쾌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 장면에서도 사실상 해미는 없.다. 해미의 엉뚱한 춤을 존중하듯 비웃는 시선으로 바라본 상류층 젊은이들이 그랬듯, 소유욕에 사로잡힌 종수의 시선에도 존중은 빠져 있다. 시선의 폭력. 그러니 해미는 원래 없었고, 그때 다시 없어진 것이다.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한다. 내가 인식하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있는 것. 내가 인식함으로써 있게 되는 것. 해미의 실체는 종수의 인식 속에서만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없다. 물리적 실체가 사라진 것만 없는 게 아니다. 우리의 많은 관계 안에서 있는 자는 동시에 사라짐을 당한다. 종수가 일자리를 얻으러 간 자리에서 이름이 아닌 "3번"으로 불리듯, 우리는 분명히 있지만, 익명의 부재자 취급을 당한다. 그게 이 사회에서 종수가 처한 입장이고, 동시에 해미가 종수에게 취급되는 방식이다.


판타지는 또한 진실을 미궁에 가둔다. 이 미궁이 종수가 갇혀 있는 감옥이다. 그래서 종수는 또 다른 미스터리의 축인 벤에게 무력하게 털어 놓는 것이다.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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