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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단짝 친구와 나는 봉천 사거리의 초원극장과 관악극장을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어김 없이 찾았다. 거기에 가면 단 돈 천 원을 내고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데다, 필이 제대로 꽂힌 영화의 경우, 그냥 공짜로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 페이스>에 열광했고, <베티 블루>의 잔인한 사랑에 치를 떨었다. <천녀유혼>을 볼 때의 설렘은 또 어땠나. 왕조현이 첫 등장하자마자 저마다 숨겨 온 아버지의 카메라를 일제히 터뜨린 남학생들 사이에서, 침만 꼴깍 삼켰던 그곳, 동네마다 있었던 동시상영관이었다.

70~80년대 동시상영관은 거의 재개봉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로버트 태권 브이가 봉천극장에 왔을 때만 해도 동네 꼬마들은 당시만 해도 극장과는 까마득하게 멀다고만 느껴졌던 우리 집 앞까지 줄을 섰다. 개봉관은 있는 집 애들만 찾는 별세계인줄로만 알았던 우리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 동시상영관 초대권을 얻기 위해 떡볶이를 사먹었고, 열심히 개구멍을 찾아 다닌 끝에 옆 건물 옥상에서 극장 화장실 창문으로 뛰어 넘어들어가는, 아슬아슬한 성룡적 액션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악한 영사시설은 틈만 나면 프린트를 끊어 먹었다. '부르륵'하며 스크린이 흰색으로 변하면, 돈 천 원을 내고 들어왔을지언정 엄연한 손님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우~ 천 원 내놔라~!" 비 내리는 화면, 뚝뚝 끊기는 편집, 지글거리는 음향이 짜증을 불러 일으킬지언정, 그것은 그것 자체로 동시상영관 특유의 문화적 공기를 형성하며 함께 든 관객들간의 묘한 유대감을 만들어내곤 했던 것이다.

동시상영관에 간다는 것은, 뭐랄까, 어른들이 할지 말라고 하는 금기를 몰래 저지르는 것과 같은 묘한 흥분을 안겨줬다. 일종의 하위문화적 쾌감이랄까. 동네 만화방에 가서 심야에 몰래 트는 홍콩산 포르노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 이런 심리를 기가 막히게 알고 있는 극장들은, 이를테면 <죠스>를 틀 때, <뼈와 살이 타는 밤>같은 야시시한 영화도 함께 틀어 리비도가 넘쳐 흐르는 동네 꼬마 녀석들을 불러 모았다. 미성년자 출입금지 영화라지만, 노골적으로 학생들의 출입을 막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학생 주임이 떴을 때를 대비한 퇴로를 미리 확보해 놓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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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골 때리는' 감독 가운데 한 명인 쿠엔틴 타란티노에게도 (물론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종류의 생생한 추억이 있었다는 것을 영화로 확인하는 것은 나로선 새삼스레 신기하다. 그가 미국의 동시상영관인 그라인드하우스를 들락거리며, 싼 제작비로 최대한 자극적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에 열광했다는 사실은, 태국 올로케이션이라는 찬란한 카피를 달고 한국형 B급 영화의 진수를 선보였던 <늪에서 늪으로>(이 영화에는 한국영화 최초의 헬기 신이라고 자랑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그것이 모형 헬기라는 사실이 너무나 확연했다.) 를 보며 흥분하던 내 기억을 상기시키며, 갑자기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우리가 같은 세대의 문화적 공기를 호흡했다는, 정서적 유대감이 마구 생기려고 할 정도다.
 
고로, 의도적으로 그라인드하우스 영화의 조악함을 재현한 <데쓰 프루프>는 내겐 끔찍하게 귀여운 영화였다. 중복 편집에 릴 미싱, 비 내리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은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를 소비하고 향유했던 시절의 열정을 복원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지만, 영화 막판의 자동차 추격신에 이르러, CG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리얼 스턴트 방식으로 찍은 그 둔탁한 액션 장면에서 그라인드하우스 영화의 가난한 진정성에 바치는 타란티노의 헌사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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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최고급 시설로 무장한 멀티플렉스의 안락한 좌석에서 매끈하고도 현란하게 빠진 디지털 영상에 중독된 우리에게, 그는 부러 조악한 아날로그적 감수성으로 가득찬 옛것을 그의 방식대로 복원해 놓고 즐겨보자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영화 뿐 아니라 그 시절의 가난한 영화보기가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일탈적 쾌감을 다시 느껴보자 한다. 바텐더 워렌으로 직접 출연한 그의 대사, "워렌이 권하는 것은 닥치고 원샷!" 그렇다.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일단 닥치고 원샷이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감에 상응하는 '물건'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사족, 북미에선 이 영화와 함께 동시상영된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플래닛 테러>를 함께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노릇이다. <플래닛 테러>가 개봉되는 11월에라도 애초의 의도대로 두 영화를 묶어서 상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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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리뷰] 어디서 본 듯한 SHOW

TV 이야기 2007. 9. 8. 12:43 Posted by cinemAgora
광고 영상은 대중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어딜가나 시선을 사로 잡는 CF는 쏟아 붓는 물량의 크기만큼 인구에 회자되며, 영화나 TV 프로그램의 위력을 넘어 하나의 강력한 문화 트렌드를 만들어 나간다. 얼마전 한 TV프로그램에서 '배우자가 말려도 데이트하고 싶은 연예인'을 조사했더니, 그 순위가 대체로 해당 연예인의 CF 활동의 양과 비례했다는 점은 그같은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영화나 TV드라마에 들이댔던 평가의 잣대를 이제는 CF에도 적용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우리의 문화적 공기에 지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상품 광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크레이티브적 품질을 따지고 재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해서 나는 블로그에 틈나는대로 CF 리뷰도 올릴까 계획중이다.)

이동통신이 광고의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요즘엔 SKT의 'T'와 KTF의 "SHOW'가 WCDMA 방식의 영상 통화 서비스 시장에서 격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신선하고도 자극적으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 잡을까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게 광고에서부터 느껴진다. 극장 매표소 앞에서 '생쑈'를 하고 있는 서단비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줄만큼, 특히 SHOW의 광고는 새로운 버전이 선보일 때마다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최근 방영되고 있는 SHOW CF의 새 버전 (아래 동영상)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로 눈길을 사로 잡고 있다.



이것 역시 '생쑈' 시리즈의 하나다. 쇼를 하면 표를 공짜로 준다 하니 사람들이 매표소라면 가리지 않고 너도 나도 생쑈를 하는 것이다(요즘 특히 이동통신 광고에 등장하는 반미치광이 인물 묘사에 대해선 추후에 따로 다뤄보겠다). 목욕탕 앞에서 치어리딩 춤을 추는 아이로부터 시작해, 수영장에서 아크로바틱한 더블 묘기를 선보이는 수영복 청년들, 봉을 타고 올라가는 남자, 덤블링 묘기를 하는 두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시리즈 CF의 스타 서단비가 출연, "죄송합니다. 아직 SHOW는 영화관에서만 공짜입니다"라는 멘트가 따라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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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일까? 이 CF는 지난 2003년 일본 광고 대상을 탔던 산토리의 한 음료 광고 시리즈와 묘하게 비슷하다. 이 광고에도 각종 묘기를 선보이는 기인들이 등장한다. 편마다 설정은 다르지만 교복을 입은 채 제자리 덤블링을 하고 있는 여학생, 국기 봉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는 샐러리맨, 서로 몸을 밀착시킨 채 더블 덤블링으로 등교하고 있는 두 학생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광고는 특별한 유명인을 캐스팅하지 않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는 점에서 당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비슷하다고 해서 SHOW 광고가 이들 광고를 노골적으로 표절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CF가 반드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장르가 아닌 이상, 어느 면에선 창작자가 어디선가 우연히 본 것이 자신의 영감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사실 일본 컨텐츠의 영향력은 특히 한국의 대중 문화에선 거의 보편화된 현상이니 정색하고 표절 어쩌구 하는 것도 이제 우스울 지경이 됐다.)

허나,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우리의 문화 트렌드를 좌우하는 CF영상, 그것도 엄청난 물량으로 브라운관을 잠식하고 있는 대규모 이통사 서비스의 CF가 (물론 맥락은 전혀 다르되) 몇년전 일본에서 방영된 CF의 장면 설정들을 짜깁기한 듯한 인상을 준다면, 그 과정이야 어떻든 수용자의 입장에선 바보가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CF를 보며 느낀 기시감의 근거를 찾아낸 덕에 결과적으로 나만 바보처럼 느껴지는건지, 아예 그딴거 모르고 '헤~재밌다' 하며 보는 게 바보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CF는 이제 당당히 영상 문화의 주류 매체다. 시청자는 이 짧은 영상을 동시대의 감수성을 파고드는 언어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CF 역시 최대한 창의적일 필요가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광고 효과의 극대화에 복무하는 창의력이지만 그것이 때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적지 않은 CF에서 확인하고 있다. 어디서 본 듯한 거 말고, 전혀 새로운 기가 막힌 아이디어는 단순히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 때론 감동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래 세 개의 일본 산토리 음료 광고를 링크해 놓았으니 직접 보고 판단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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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 소녀 편(WMV)

더블 등교 편(RAM)

상승 샐러리맨 편(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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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런 영화를 보면 질투가 난다. <트랜스포머>같은 영화를 봐도 돈 좀 처발랐군, 하며 할리우드의 위력을 돈과 규모의 논리로 일축하고 마는 한떨기 자존심조차 이런 영화를 볼때면 여지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밀려 오는 영화적 쾌감에 완전히 넋을 잃어 버릴 때. 완벽한 시나리오, 기가 막힌 촬영과 짜임새 있는 편집, 배우들의 차가운 열연이 혼연일체가 된 걸작 장르 영화를 봤을 때 말이다.

<본 얼티메이텀>은 장르 영화의 쾌감이란 어떤 것인지를 '지대로' 보여준다. 플러스 알파, 이 시리즈의 전통대로 이번에도 국가 권력의 부도덕성을 파고 드는 제이슨 본(맷 데이먼)의 용맹과 지략에 힘입어 '뒤집어 엎어 버리기'가 주는 짜릿한 오르가즘까지 얻을 수 있으니, 어찌 이런 영화를 보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방금 이 영화 <본 얼티메이텀>의 언론 시사를 끝내고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한 채 대한극장 바로 옆 피씨방에 들어와 짧은 시사 후기를 남긴다. 2편 <본 슈프리머시>에 이어 또 한번 메가폰을 쥔 영국 감독 폴 그린그래스는, 일찌기 <블러디 선데이>와 최근작 <플라이트 93>에서 선보인 재능대로, 이 반영웅의 고독한 사투를 그만의 스타일리시한 연출 감각으로 정신 없이 포착해 낸다.

인물에 밀착하는 핸드 헬드 카메라가 이처럼 효과적으로 사용된 전례가 드물 정도로 그가 창조한 명장면은 영화 곳곳에 포진해 있다. 중경과 원경에 따라 자유자재로 들이대는, 그러나 치밀하게 계산된 포커싱의 미학! 특히 본이 CIA의 추적을 따돌리고 영국 언론 가디언지 기자와 접선하는 장면, 모로코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와 쫓고 쫓기다가 어느 집 욕실에서 한판 붙는 둔탁한 격투신을 볼 때 관객에겐 어느 정도의 호흡 조절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곧 터져 버릴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객석을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는 '본'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맷 데이먼의 무표정한 액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CIA 내 강온파를 대변하는 노아 보슨 역의 데이비드 스트라탄(그는 최근 <굿 나잇 앤 굿럭>에서도 명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과 파멜라 랜디 역의 조앤 알렌의 선굵은 연기를 보는 재미는 또 어떤가.

<본> 시리즈는 냉전 이후의 첩보물이 천착해야 할 테마, 개인의 희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국가주의의 잔인한 이면,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포착해 낼 수 있는 촘촘한 감시 네트워크의 가공할 비정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진정한 걸작이다. 누구라도 제이슨 본에게 제대로 휘둘리고 나면, 강렬한 쾌감이 몸을 휘감고 지적인 여운이 가슴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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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2007.08.31~09.02)

순위       작품명               서울 주말              전국 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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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디스터비아                 75,500                 258,500
2위   사랑의 레시피              67,300                 180,500
3위    화려한 휴가                55,500               7,249,900
4위   내 생애 최악의 남자      53,300                 263,800
5위    스타더스트                 36,400                 769,500
6위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34,900               1,005,600
7위      디 워                       29,700               8,282,100
8위     라파예트                   25,200                  78,600
9위    미스터 브룩스             23,000                  75,600
10위  심슨가족 더 무비         14,900                  218,300
11위  사랑방선수와 어머니     14,700                496,700
12위  만남의 광장                 12,200              1,256,700

#이 박스오피스 스코어는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과 관련이 없으며, 별도의 취재에 의해 3M흥업이 입수한 각 영화의 실제 동원 관객수 근사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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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세대를 위한 <이창>'이라는 <디스터비아>가 잔뜩 움츠러든 반짝 비수기 극장가의 틈새를 파고 들었다. 경쾌한 스릴러로써 젊은 감각의 재미로 중무장한데다, <트랜스포머> 이후 상종가를 기록중인 샤이어 라보프 효과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스터비아>가 모은 7만 7천여 명의 주말 관객수는 1위임을 자랑하기엔 조금 머쓱한 스코어다.

각급학교의 개학과 더불어 극장가가 추석 시즌이 본격화하기전까지 반짝 비수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체 관객수 자체가 크게 줄었다. 지난 주말 서울 관객수는 전주 대비 13%가 줄었고, 전국 관객수는 20%나 감소했다.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니 상영작들의 흥행 경쟁 역시 말그대로 도토리 키재기였다. 탁재훈과 염정아가 호흡을 맞춘 <내 생애 최악의 남자>가 서울보다 지방에서 더 잘들어 전국 관객수 면에선 1위를 차지했으나 역시 2위와의 관객수 차이가 큰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전체적으로 <디스터비아>와 캐서린 제타존스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레시피>, <화려한 휴가>와 <내생애 최악의 남자> 등 4편의 영화가 선두권에서 고만고만한 경쟁을 치렀다고 보는 게 좋겠다.

828만여 명의 전국 누계를 기록한 <디워>는 <친구>를 제치고 역대 흥행 순위 5위에 이름을 올리면서 바야흐로 끝물로 접어 들었다. 850만 명 선에서 최종 관객수를 조율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결국 국내 흥행에선 손익분기점(1천 1백만 명)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얘긴데, <디워> 열풍의 제 2라운드를 예고하고 있는 9월 14일 미국 개봉에서 어느 정도 짭짤한 수익을 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뒷심은 <화려한 휴가>가 끈질기다. <디워>가 개학과 더불어 급락한 것에 비하면 흥행세가 꾸준하다. 지난 주말까지 725만 명까지 전국 누계를 늘렸는데, 곧 새 영화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추석 시즌이니 800만까지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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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 <화려한 휴가>, 두 영화의 동반 흥행으로 잔뜩 달아오른 여름 극장가가 막을 내리고, 이제 바야흐로 추석 시즌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추석 하면 한국영화, 그동안 홈 그라운드의 이점 십분 살려온 한국영화가 이 절호의 대목을 놓칠 리 없겠죠. 올해도 각자의 필살기로 관객 몰이 채비에 한창인 영화들이 앞 다퉈 흥행전에 뛰어들고 있는데요. 일단 세 편의 영화가 먼저 언론 앞에 본색을 드러내고 기선 제압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봉태규 정려원 커플의 앙증맞은 로맨틱 코미디 <두 얼굴의 여친>, 중년 아저씨들의 꿈 찾아 낭만 찾아 <즐거운 인생>, 그리고 코미디 제왕 김상진 감독과 나문희 여사가 만난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까지.


9월 13일 동시에 격돌하는 세 영화의 흥행 3파전이 올 추석 극장가의 명암을 가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세 편의 영화 모두 검증된, 안전빵 흥행 코드로 편안하게 흥행하겠다는, 뭐 좀 새로운 걸 원하는 관객 입장에선 '짜친' 속내를 굳이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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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두 얼굴의 여친>, 시도 때도 없이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한다는, 다중 인격 소유자의 여친을 갖게 된 한 순정남의 좌충우돌 연예 행각이, 기둥 줄거리 되겠습니다. 뭐 굳이 따질 필요 없이 지난 2001년 흥행에 성공했던 <엽기적인 그녀>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영홥니다.


그 파릇파릇했던 차태현과 전지현 커플, 세월이 흘러 흘러 한 사람은 라디오 디줴이 되고, 다른 한 사람 CF 활동 일로 매진, 틈틈이 할리우드 진출 어쩌구 하며 폼 잡고 계실 때,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다름 아닌 봉태규, 정려원입니다. 그리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순정 하나 가지고 여자 친구 엽기 행각 다 받아주니 그대로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 짝퉁이고, 정려원 역시 다중인격 핑계로 툭하면 폭력을 일삼고, 저 지현 언니한테서 물려 받은 오바이트 전략까지 답습합니다.


웃기다 말까요? 아니죠. 울려야지요. 뒤로 갈수록 예상대로 정려원의 슬픈 사연 드러나면서 눈물 콧물 쥐어 짜더니 순정의 멜로 라인 강하게 어필해주십니다. 슬프냐구요? 네, 슬픕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잘 안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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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번에는 <즐거운 인생>입니다. 앞서 보신 <두 얼굴의 여친>은 저 멀리 남의 영화 답습했지만, 자기 영화 자기가 카피하는 건 어쩌면 이준익 감독의 장기인가 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한 해 전에 나온 <라디오 스타>에서 스스로 급영감 받으신 이 감독님, 끈떨어진 루저들과 음악의 하모니면 대충 비벼서 관객들 신나게 만들 수 있다는, 별로 머리 많이 안 굴려도 아는 이치를 실천에 옮깁니다.


<라디오 스타>의 박중훈과 매니저 안성기는 영화 내내 신명을 자아내던 노브레인의 '놀자 스피릿'과 크로스 합체! 바로 3명의 덜떨어진 중년 남자들이 재결합한 그 이름도 찬란한 '활화산'으로 거듭났습니다. 두 명은 실업자, 한 명은 기러기 아빠, 너덜너덜해진 신세 이겨보려 기타 잡고 드럼 치니 아, '지대로' 감동입니다. 중간 중간 악마 같은 와이프가 주연인 구질구질한 일상 인서트 컷으로 집어 넣는 것 잊지 않으시니, 역시 이 감독님! 그래야 감동이 배가 되겠죠?


여기까지라면 계산이 2% 부족합니다. 바로 젊은 꽃미남 장근석의 등장! 네. '밑줄 좌악 돼지 꼬리 꽁야'할만한 포인트죠. 젊은 세대 관객들의 감정이입과 더불어 뭇 여성들의 므흣한 시선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포석. 역시 이준익 감독의 흥행술사적 계산법은 대단합니다. 한가지 흠이라면 속이 다 보인다는 것이겠죠. 기가 막히게 전형적이고, 눈 딱 감고 자기복제적인 영화 <즐거운 인생>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올 추석에서 (어쩌면 가장 많이) 흥행할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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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상진 감독의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입니다. <거침 없이 하이킥>으로 야동 순재와 더불어 반짝 뜨신 나문희 선생을 앞세운데다, <신라의 달밤>이나 <귀신이 산다>로 연타석 홈런을 친 김상진 감독의 만남이라, 잔뜩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 이 영화, 과연 소문대로 소문만 무성한 영화였습니다.


추석용 코미디 영화로선 아주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별로 웃기지 않다는 것.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문희 여사의 슬랩스틱은 야동 순재가 빠져서 그런지 김이 새고, 유해진의 원맨쇼만으로 버텨 나가기에 폭발력 있게 배꼽을 들어내주지 않는 영화가 끝끝내 야속해지고 맙니다.

김상진 감독도 나이가 드는 것일까요? 그 옛날의 재기 발랄함은 사라지고 일본 소설 원작에 대충 묻어서 어떻게 잘 되겠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만 느껴지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상진 감독의 절친한 영화계 선배이자 그에 앞서 먼저 <한반도>로 스타일 제대로 구긴 뒤 <강철중>으로 재기를 노리는 강우석 감독이 이 영화의 시사회를 보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만 피우고 돌아 갔다니, 안타까운 마음은 비단 저만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추석 흥행 3파전을 벌이게 될 세 편의 영화를 이렇게 까칠하게 소개해드렸지만, 분명 이 세 영화 모두 어느 정도 흥행할 것 같아 보입니다. 몇 년전 추석 때 이명세 감독의 <형사 듀얼리스트>가 쪽박을 찬 뒤, 적어도 명절 영화에 한해서만큼 충무로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몸과 영혼에 아로새긴 것이 분명합니다.


흥행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절대, 네버, 결코! 새로움에 도전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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