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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단짝 친구와 나는 봉천 사거리의 초원극장과 관악극장을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어김 없이 찾았다. 거기에 가면 단 돈 천 원을 내고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데다, 필이 제대로 꽂힌 영화의 경우, 그냥 공짜로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 페이스>에 열광했고, <베티 블루>의 잔인한 사랑에 치를 떨었다. <천녀유혼>을 볼 때의 설렘은 또 어땠나. 왕조현이 첫 등장하자마자 저마다 숨겨 온 아버지의 카메라를 일제히 터뜨린 남학생들 사이에서, 침만 꼴깍 삼켰던 그곳, 동네마다 있었던 동시상영관이었다.

70~80년대 동시상영관은 거의 재개봉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로버트 태권 브이가 봉천극장에 왔을 때만 해도 동네 꼬마들은 당시만 해도 극장과는 까마득하게 멀다고만 느껴졌던 우리 집 앞까지 줄을 섰다. 개봉관은 있는 집 애들만 찾는 별세계인줄로만 알았던 우리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 동시상영관 초대권을 얻기 위해 떡볶이를 사먹었고, 열심히 개구멍을 찾아 다닌 끝에 옆 건물 옥상에서 극장 화장실 창문으로 뛰어 넘어들어가는, 아슬아슬한 성룡적 액션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악한 영사시설은 틈만 나면 프린트를 끊어 먹었다. '부르륵'하며 스크린이 흰색으로 변하면, 돈 천 원을 내고 들어왔을지언정 엄연한 손님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우~ 천 원 내놔라~!" 비 내리는 화면, 뚝뚝 끊기는 편집, 지글거리는 음향이 짜증을 불러 일으킬지언정, 그것은 그것 자체로 동시상영관 특유의 문화적 공기를 형성하며 함께 든 관객들간의 묘한 유대감을 만들어내곤 했던 것이다.

동시상영관에 간다는 것은, 뭐랄까, 어른들이 할지 말라고 하는 금기를 몰래 저지르는 것과 같은 묘한 흥분을 안겨줬다. 일종의 하위문화적 쾌감이랄까. 동네 만화방에 가서 심야에 몰래 트는 홍콩산 포르노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 이런 심리를 기가 막히게 알고 있는 극장들은, 이를테면 <죠스>를 틀 때, <뼈와 살이 타는 밤>같은 야시시한 영화도 함께 틀어 리비도가 넘쳐 흐르는 동네 꼬마 녀석들을 불러 모았다. 미성년자 출입금지 영화라지만, 노골적으로 학생들의 출입을 막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학생 주임이 떴을 때를 대비한 퇴로를 미리 확보해 놓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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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골 때리는' 감독 가운데 한 명인 쿠엔틴 타란티노에게도 (물론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종류의 생생한 추억이 있었다는 것을 영화로 확인하는 것은 나로선 새삼스레 신기하다. 그가 미국의 동시상영관인 그라인드하우스를 들락거리며, 싼 제작비로 최대한 자극적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에 열광했다는 사실은, 태국 올로케이션이라는 찬란한 카피를 달고 한국형 B급 영화의 진수를 선보였던 <늪에서 늪으로>(이 영화에는 한국영화 최초의 헬기 신이라고 자랑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그것이 모형 헬기라는 사실이 너무나 확연했다.) 를 보며 흥분하던 내 기억을 상기시키며, 갑자기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우리가 같은 세대의 문화적 공기를 호흡했다는, 정서적 유대감이 마구 생기려고 할 정도다.
 
고로, 의도적으로 그라인드하우스 영화의 조악함을 재현한 <데쓰 프루프>는 내겐 끔찍하게 귀여운 영화였다. 중복 편집에 릴 미싱, 비 내리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은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를 소비하고 향유했던 시절의 열정을 복원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지만, 영화 막판의 자동차 추격신에 이르러, CG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리얼 스턴트 방식으로 찍은 그 둔탁한 액션 장면에서 그라인드하우스 영화의 가난한 진정성에 바치는 타란티노의 헌사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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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최고급 시설로 무장한 멀티플렉스의 안락한 좌석에서 매끈하고도 현란하게 빠진 디지털 영상에 중독된 우리에게, 그는 부러 조악한 아날로그적 감수성으로 가득찬 옛것을 그의 방식대로 복원해 놓고 즐겨보자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영화 뿐 아니라 그 시절의 가난한 영화보기가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일탈적 쾌감을 다시 느껴보자 한다. 바텐더 워렌으로 직접 출연한 그의 대사, "워렌이 권하는 것은 닥치고 원샷!" 그렇다.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일단 닥치고 원샷이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감에 상응하는 '물건'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사족, 북미에선 이 영화와 함께 동시상영된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플래닛 테러>를 함께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노릇이다. <플래닛 테러>가 개봉되는 11월에라도 애초의 의도대로 두 영화를 묶어서 상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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