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기행 1. 모스크바의 첫 인상

별별 이야기 2007. 8. 18. 21:5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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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강에 서 있는 피터 대제 동상

러시아에 가기로 마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학 선배 부부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의 현지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에게 대충 비비면, 그 생경한 땅을 여행하는 게 한결 안락하고 윤택할 것이라는 계산. 노어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데다, 몇년째 세계 물가 1위를 유지하며 호텔 숙박비만도 하룻밤에 70-80만을 호가한다 하니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그 땅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을 터다.

한편으로 지금은 푸틴의 리더십에 힘입어 초고속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는, '전(前)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8시간 반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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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부부가 살고 있는 모스크바의 아파트. 깔끔하고 아늑하다.


300만 원을 웃도는 월세(요건 평균 수준이라고 한다. 선배의 설명에 따르면 요즘 모크스바의 집값은 살인적인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마치 70년대 고속 성장기의 한국을 연상케 하는, 이른바 졸부 현상이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를 내고 살고 있는 선배의 집은, 중산층 동네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유럽형 인테리어가 아늑함을 안겨주는 공간이었다. 어쨌든 여기에 짐을 풀고 나니 여행이 예상대로 한결 술술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왠걸! 밤 10시가 넘었는데 해가 지지 않는다! 선배 말로는 이건 약과란다. 아예 해가 지지 않는 때도 있다니, 보드카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잠들지 못하는 밤같지 않은 밤의 연속이 고역이라고. 그의 증언에 화들짝 놀란 나는, 해가 떠 있는 괴상한 심야에 냉동실에 넣어도 얼지 않는, 도수 40도 짜리 보드카 몇 잔을 연거푸 들이 붓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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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름도 따갑다. 그러나 습도가 낮아 한국처럼 후텁지근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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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시민들. 많이 쪼여 놓아야 겨울을 날 수 있어서 그런가? 이들의 햇볕 사랑은 유난하다.

러시아의 여름은 그리 덥지 않다는 말은, 올해만큼은 거짓말이 됐다. 러시아에 온 다음날부터 섭씨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등을 따갑게 한다. 게다가 뭔 놈의 해는 그리 일찍 뜨고 그다지도 늦게 지는지. 하루 종일 내려 쪼이는 뙤약볕에 짜증이 날만도 한데, 러시아 사람들, 오히려 그 해를 즐긴다. 웃통을 훌러덩 벗어 재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공원이나 해변 뿐 아니라 거리 곳곳에서 목격된다. 겨울에는 길게는 한 달 이상 해를 보지 못하는 나라이다 보니, 한 철의 해가 소중하고 고마운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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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있는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조경의 수준이 놀랍다.

그것도 그렇지만 동네 어귀마다 어김 없이 들어서 있는 수십만 평 부지의 공원들을 거닐다 보면 그 규모와 아기자기한 조경 솜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아직까진 일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여기에 서보면 러시아야 말로 웰빙 선진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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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선 짜증나게 더운, 그들로서는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씨에 거리 곳곳에서는 방금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들이 기념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별도의 예식장이 없는 러시아에선, 결혼 신고소에서 간단하게 식을 올린 뒤, 들러리들을 데리고 여기 저기 다니며 사진을 찍는단다. 그리곤 밤늦도록 에헤라 디여~. 웨딩 사진을 미리 찍는 우리의 풍속과 비교되면서, 간소하지만 제대로 노는 결혼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선남 선녀들의 모습이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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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믈 건너편 건물 옥상에 세워진 '쌤쑹'의 간판이 눈길을 모은다.

모스크바 거리에는 제정 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이끈 전제 군주 표트르 1세(피터 대제)의 늠름한 동상과 짜르 체제를 전복시키고 볼셰비키 혁명을 이끈 레닌의 동상이 공존한다. 푸시킨과 차이코프스키의 예술적 향기와 에이브릴 라빈을 앞세운 아메리칸 팝의 현란한 공세가 교차한다. LG와 삼성 등 국내 대기업의 대형 간판 역시 눈길을 잡아 끈다. 시내 중심지에는 롯데 백화점이 우뚝 솟은 채 개장을 기다리고 있다. 고급 외제차가 즐비한 도로에는 벌써 폐차장으로 갔어야 할 차들도 쌩쌩 달린다. 소련 시절에 세워진 사회주의적 계획의 산물, 잿빛 건물 틈 사이로 자본주의적 욕망의 산물인 고급 맨션이 새로운 마천루를 만들고 있다. 옛것과 새로운 것, 보존과 극복의 에너지가 마구 뒤섞인 이곳은 몇마디 묘사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공기를 풍긴다.

모스크바에서의 이틀째 밤, 해는 끈질기게 하늘 한 자락에 붙어 있다. 우리는 또다시 냉동실에서 잔뜩 '히야시'된 보드카를 꺼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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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하지만 음미할만한 스펙터클

영화 이야기 2007. 8. 16. 19:32 Posted by cinemAgora
<화려한 휴가>와 <디워>를 둘러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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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사회적인 논쟁으로 확산되는 경우를 우리는 적지 않게 봐 왔다. 1천만 명 안팎의 대규모 관객 동원에 성공한, 이른바 대박 영화의 경우가 대개 그랬다. 그래서 충무로에는 5백만 명까지는 영화의 힘에 의한 것이지만, 그 이상의 흥행 스코어는 사회적 분위기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속설이 통용될 정도다. 영화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파장은 처음에는 영화 자체가 가진 미덕과 가치에서 출발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그런 정도의 단계를 훌쩍 뛰어 넘어 버린다. 사실 나처럼 영화와 관련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조차 여기서부터는 별로 말할 일이 없어진다. 논쟁의 주도권이 어느 단계부터 시민 사회로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가 신문 문화면의 주연에서 순식간에 사회면의 조연으로 바뀌는 셈이다. 때론 정치면으로 갈 때도 있다.

골육상쟁의 아픔을 블록버스터급 비주얼로 재확인한 <태극기 휘날리며>나, 국가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에 의해 개인의 존엄이 깡그리 무시됐던 시대의 공공연한 비밀을 신파적이고도 자극적으로 들춰낸 <실미도>, 그리고 약자를 코너로 코너로 몰아붙이는 우리 사회의 온갖 추잡한 모순을 한강 괴수로 형상화한 <괴물>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신드롬의 주인공이 됐던 시대극 <왕의 남자> 역시, 정치 권력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불신을 어느 정도 활용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영화들이 갖는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처를 대중 영화의 화법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들 작품들의 흥행 노림수는 결국 그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데 있다. 상처가 완전히 치유됐다면, 그리고 영화가 소환한 역사적 사실이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을 어떤 것이 됐다면, 1천만 명 이상의 관객이 자발적으로 자기 돈을 내고 관람권을 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과 아픔을 드러내는 방식이 관습적인 오락 영화의 틀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공통 분모다. 극장까지 가서 딱딱한 역사 수업을 기대할 리 없는 대중 관객은, 스크린에 영사된 비극적인 상황이 '오락적 스펙터클'의 범주 안에 있을 때 '영화적 체험'을 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평단 일각에서 이들 영화들이 역사를 소환하되, 결국 휘발시킨다고 비판하는 것도 바로  대중영화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자조의 발로일 것이다.

지금 한창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화려한 휴가> 역시 이런 쟁점의 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영화였다.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당시,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꽃잎>이나 <박하사탕> 등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앞선 영화들과 비교하며, 블록버스터의 외피를 두르고 광주에 대한 죄책감을 소비하거나, 혹은 결국 이렇게 정리하고 청산 또는 망각하자는 게 아니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실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히 광주를 대중 상업 영화로 불러 내다니! 이 영화의 탄생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 댄 (나를 포함한) 많은 영화 글쟁이들의 모습은, 결국 광주에 대한 거대한 죄책감의 방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쟁이 크게 쓸모가 있었던 건 아니다. 관객들은 평론가들의 과민한 우려와 달리,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지는 것 이면의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광주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려 온 많은 이들이 에두른 망각이 아닌 정면으로 응시하는 기억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해 낸 영화의 힘을 칭송했다. 나 역시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난 뒤 흥분에 젖어 이 영화가 역사를 소환하되 휘발시킨 혐의를 얻고 있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론을 채택하긴 했지만, 그 의미는 남다르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80년대 이후 민주화의 거대한 기폭제가 됐던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이 도도하게 현재진행형일 뿐 아니라, 그 치유되지 않은 거대한 상처를 이렇게라도 보여주는 것, 오락적 스펙터클의 범주로라도 대중에게 역사적 추체험의 기회를 안겨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일은 결코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지지해야겠다고 믿으면서 내가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빠뜨렸다는 것을 요즘 뒤늦게 깨달았다. 광주 정신이 현재진행형이니만큼 여전히 광주 정신을 훼손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야겠다고 굳게 믿고 획책하는 세력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말이다.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게도 ‘전두환 전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전사모)’ 회원들이 그걸 퍼뜩 깨닫게 해줬다.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최근 이송희일 감독이 <디워>의 전투적인 광팬들을 향해 조소했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한여름 밤의 공포’였는데, <화려한 휴가> 안보기 캠페인을 펼치는 그들이 들이대는 비논리와 몰역사적 주장들은 그 자체로 한여름 밤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을 두고 ‘기억하려는 자와 그 기억을 방해하려는 자들간의 싸움’이라고 부른다면 어울리지 않게 격조 있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건 그냥 한 편의 썰렁한 말장난 개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대로 영화가 주는 사회적 파장이나 반향은, 그것이 크든 작든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관련해 시민 사회의 인식 또는 무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런 관점에 본다면, <화려한 휴가>를 둘러싼 일련의 해괴한 논쟁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이 사회에 여전히 역사적 기억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려는 후진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과, 스스로가 속해 있는 시민 사회를 영화 한편에 휘둘리는 우민 공동체로 천대하는, 일종의 자발적 노예화의 속성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의 주동자는 전두환이 아닌 김대중’이라느니, 당대 광주 시민들을 ‘총을 든 폭도들’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데다, 영화가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해석들을 보면서, 역사적 기억이라는 게 입장에 따라 이렇게까지 징그럽게 굴절되고 왜곡될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그 분을 ‘각하’로 모시는 그들이 그 각하의 명예 회복을 위해 지금의 굴욕을 인내하자는 처연한 다짐에서 폭력에 길들여진 마조히즘적 배타성의 극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것도 인터넷에서의 자발적 동조자들이 1만 5천 명에 달한다는 것을 뼈아프게 각성하는 것은, <화려한 휴가>가 소환한 비극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역설적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화려한 휴가>를 보지 말자고 부르짖는 그들이 차라리 <디 워>를 보라고 강권하고 있는 상황은, 내게 <디 워>의 일부 열성팬들이 보여주고 있는 과격한 배타성과 묘하게 중첩돼 보인다. 그것은 분명 다른 차원이지만, <디 워>를 핍박 받은 고독한 영웅의 드라마틱한 기사회생과 동일시하며, 그 비판론자들을 싸잡아 적대시하고, 홍위병적 모독과 파시즘적 테러를 서슴지 않는 태도(이송희일 감독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 영화와 열성팬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성정체성까지 들먹이는 조리돌림을 당했다)와 ‘전사모’의 태도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현상적으로 통용되는 명분은 애국심이다. <화려한 휴가>에서는 애국가가 올려 퍼지는 시점에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된다. ‘전사모’의 홈페이지에도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영화 <디 워>를 보는 게 애국이라는 주장이 난무한다. 그러나 그 애국은 다른 관점을 가진 자들을 서슴지 않고 패대기 치는 애국이다. 과거에 대한 뼈아픈 반성은커녕 틈만 나면 전범들의 위패를 찾아 신사 참배하는 일본 총리의 애국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애국이다. 남의 나라 국민이야 살든 죽든, 테러 세력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태평한 원칙만 되뇌는 부시의 애국과 대동소이한 애국이다. 그들만의 애국에는, 제대로 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성찰이 빠져 있다. 동시대의 시민과 그들이 함께 일궈온 소중한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이 빠져 있다. 애초에 성찰에 닿을 수 없으니 왜곡된 기억을 ‘역사적 사실’이라 우겨 대는 일에서 하등의 부끄럼을 느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여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단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이 사회가 얼마나 담론 형성과 의사소통에 미숙한지, 여전히 적지 않은 이들이 역사적 정의에 대한 불감증과 왜곡된 애국주의에 함몰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살풍경을 목격하고 있다. 재론하거니와 어떤 영화보다 더 강력한 그 스펙터클은 씁쓸하지만 음미할 가치가 있다. 쓰디 쓴, 그러나 정신이 번쩍 나는 각성제다.

* 8월 14일자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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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벤트) 네바다에서 생긴 일

별별 이야기 2007. 8. 13. 12:2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선물 이벤트가 너무 오랜만이죠?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지요. 네, 맞습니다. 변명입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이벤트를 진행했어야 하는데, 저도 좀 쉬어야 했기에, 휴가 앞, 뒤로 일에 치여 정신을 못차렸답니다. 어쨋든, 이번 이벤트부터는 한 달에 한 번의 간격은 꼭 지키렵니다.

참, 이 이벤트가 뭔지 모르는 분들도  계실테니,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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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벤트)
이 블로그에 와서 놀고 가시는 분들 중 영화를 좋아 하시는 분께 선물을 드립니다. 제세 공과금+우송료. 그딴거 없고, 그냥 공짜. 그럼, 무엇을, 어떻게, 누구에게 주냐고요?

1. 무엇을?   영화배우들의 친필(!) 싸인북. 송강호를 비롯, 박용우, 한지민, 하정우, 윤진서 등등. 배우별로 하나, 또는 두개씩 십여개쯤 있습니다. 장물은 아니니, 걱정들 마시라.

2. 어떻게?   PC통신시절, 천리안 영퀴방 스타일의 문제가 하나 나갑니다. 그럼, 싸인북이 갖고 싶은 분은 정답과 함께 연락 가능한 메일주소를 댓글로 남기시면 되요.

3. 누가?  가장 먼저 정답을 맞힌 분께 영화배우 싸인북 목록이 메일로 갑니다. 그럼, 그중 하나만(!) 선택하시라. 바로, 택배 아저씨 불러서 날려줄 예정. 택배비? 본인이 부담하니, 걱정마시길.
 
4. 언제?  무조건, 내맘. 이번이 2회차고, 3회차는 언제 할 지, 나도 몰라요. 그냥, 이해들 하시길. 아무튼, 책장에서 먼지 뒤집어 쓰고 있는 싸인북들을 어여삐 여기사, 하나씩 주인을 찾아줄 작정이니, 혹시, 탐나시거든 문제를 맞혀 보시라. 귀찮거든 '뒤로' 버튼을 누질르시덩가.

자, 그럼, 문제 나갑니다. 얼마 전, 미국 네바다주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보면서 이 영화가 떠오르더군요. 아래 7가지 힌트를 보고, 연상되는 영화 제목을 댓글에 올리시면 됩니다. 가장 먼저 정답을 맞힌 분께 선물 나갑니다.

1. 네바다주
2. 전봇대
3. 바위
4. 떨림
5.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6. 폭탄은 한 번만 먹어요.
7. 보스턴 변호사들이 더 무서워.

자, 선물이 탐나시거든 댓글을 남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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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소녀, 마리나가 가르쳐준 진실

영화 이야기 2007. 8. 7. 16: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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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부산에 아프가니스탄 국적의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지금 한국을 ‘부드럽고 달콤한 나라’로 기억한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해운대 어딘가에서 생전 처음 맛 본 아이스크림 때문이란다. 그 소녀의 이름은 마리나 골바하리.

   작년 5월, 나는 일본에서 ‘마리나(MARINA)’ 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일본 NHK의 프로듀서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바로 아이스크림 소녀 마리나 골바하리이다. 그녀는 최초의 아프가니스탄 영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국내에도 개봉됐던 세디그 바흐막 감독의 영화 ‘천상의 소녀’에서 주인공 오사마역을 연기한 주연배우. NHK는 영화제작비 가운데 상당부분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영화 ‘천상의 소녀’의 제작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방송했고, 당시 열세 살에   불과했던 아프간 소녀 마리나의 처절한 삶은 일본인들의 가슴을 울렸다고 한다.
 
    거리의 소녀 마리나는 탈레반의 고문으로 다리를 못 쓰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구걸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이었다. 영화가 뭔지도 몰랐던 소녀는 단지 몇 푼의 돈을 위해 오디션에 참가했고, 바흐막 감독 앞에서 폭격으로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가득 찬 눈망울로 샘물처럼 투명한 눈물을 쏟아낸 덕분에 주연으로 낙점됐다. 애초에 아프간 최초의 영화제작기로 출발한 다큐멘터리는 이 순간부터 아프간 소녀 마리나의 영화제작기로 방향을 급선회한다. 영화 ‘천상의 소녀’는 탈레반 정권의 폭압으로, 부르카의 굴레로 신음하는 소녀의 삶을 오롯이 담아낸 덕분에, 2003년 깐느 영화제 3개 부문을 수상했고, 2004년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까지 받게 됐다. 더구나, 백악관 특별시사회를 마친 부시대통령이 열렬한 칭찬과 함께, 관료들에게 의무 관람을 지시했으며, 메이져 배급사인 MGM이 예외적으로 두 달간이나 상영할 수 있게 했다는 뉴스에 이르면, 그 어떤 제3세계 영화도 누리지 못한 미국인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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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속 오사마의 눈물은 대부분 탈레반 정권 때문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속 마리나는 폭격으로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바흐막 감독은 눈물이 필요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언니 얘기를 꺼내 마리나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 영화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하나같이 ‘폭격으로 죽은 언니’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마리나의 언니를 죽게 한 포탄이 미군의 것이었음을 말하진 않는다. 그렇다. 마리나의 언니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가 보자. 부시대통령은 이 영화를 미국인 모두가 봐주길 원했다. 탈레반 정권에게 핍박받는 영화속 오사마를 통해 자신이 일으킨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것. 만약, 부시대통령이 영화속 오사마의 눈물이 실은 자신의 군대가 떨어뜨린 포탄에 의해 사망한 한 소녀를 위한 눈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아프간 소녀 마리나는 언니를 죽게 한 ‘그’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유력한 후원자가 된 사실을 알았더라면, 무슨 말을 남겼을까?

    이제는 다큐멘터리 ‘마리나’로 돌아가 보자. 영화촬영 내내 두려움에 가득 찬 눈망울로 시종일관 눈물을 쏟아내던 마리나가 돈에 팔려가는 장면을 찍기 위해 생전처음 화장을 하게 됐다. 곱디고운 새 옷에 말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얼굴가득 퍼진 연분홍 화장품. 거리의 소녀 마리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해맑은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가난과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있던 열세 살 소녀의 감성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나 역시 화면속 마리나를 보며 같이 웃었다. 잠시나마 삶의 무게를 내려놓은 그녀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리나의 수줍은 미소가 바흐막 감독의 얼굴을 일그러뜨렸기 때문이다. 영화속 오사마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마리나의 미소가 아니라, 오사마의 눈물이 필요했던 것. 급기야, 감독은 마리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이 과정을 그저 담담하게 지켜볼 뿐이다. 감독의 고함소리가 높아갈수록, 마리나의 미소는 사그라졌다. 봄날의 아침햇살처럼 싱그러웠던 마리나의 미소는 결국, 폭포수 같은 눈물로 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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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마리나’의 프로듀서는 내게, 담당 카메라맨이 영화촬영과정을 지켜보며, 아프간인들을 위해 영화를 만들겠다던 바흐막 감독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었다는 얘기를 털어놨다. 바흐막 감독이 마리나의 눈물을 짜내기 위해 살벌하리만치 가혹하게 다그치는 장면의 편집을 두고 제작진들끼리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어쨌든 그 장면은 전파를 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일본 시청자들은 그 장면을 신인감독의 과도한 열정쯤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다만, NHK 내부에서 이 장면의 사용으로 인해 바흐막 감독에 대한 시청자들의 신뢰가 약해지는 바람에 다큐멘터리의 흡인력이 떨어졌다는 문제제기만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바흐막 감독을 만난 적이 없다. 6개월 동안 그를 밀착 취재한 다큐멘터리 제작진도 확신하지 못한 그의 진정성을 내가 어찌 판단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영화 ‘천상의 소녀’를 두고 벌어진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영화와 현실이 마주했을 때 겪어야 하는 아이러니를 확인할 뿐이다. 마리나의 아버지는 탈레반 정권의 고문으로 불구가 됐고, 언니는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바흐막 감독의 협박에 가까운 호통은 그녀를 눈물짓게 했지만, 그로인해 마리나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귀빈으로 초대되는 영광을 안았다. 영화속 오사마에게 고통을 주는 악마는 명확하건만, 현실속 마리나의 악마는 때때로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대체 아프간 소녀 마리나의 적은 누구이며 동지는 누구인가.
 
   영화속 세상은 단순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영화속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대체로 명확하지만, 현실속에서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그 같은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비록, 영화가 현실의 거울일지라도, 그 거울은 온전히 감독에 의해 ‘가공된 것’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마케팅이라 불리우는 ‘교묘한 속임수’가 결합되면, 의외로 강력한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과거, 영화 ‘한반도’와 ‘괴물’이 그러했고, 요즘엔 ‘화려한 휴가’와 ‘디워’를 둘러싼 논쟁이 그렇다. 나는 이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한국에는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는 관객이 대단히 많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서로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그들 모두 ‘애정’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으되, 실은 ‘망각’이다. 영화를 만든 이들은 물론이고, 특정 영화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에게도 이런 관객들은 훌륭한 먹잇감이 된다. 바흐막과 부시는 대한민국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 주 : 이 글은 작년 이맘때 필름2.0에 기고했던 칼럼을 약간 수정한 글입니다. 과거에 제 칼럼을 읽으셨던 분들께서는 오해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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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에서 얻은 네 가지 교훈

영화 이야기 2007. 8. 7. 15:03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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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의 떡이 커 보일 때가 있다

열정적이고 당찬 성격의 패션 컨설턴트 유나(엄정화)에게 다정다감한데다 유머 감각까지 갖춘 호텔리어 민재(박용우)는 버거울 정도로 좋은 남편이다. 남 부러울 게 없다. 자상한데다 섹스도 잘한다. 우연히 자신의 클라이언트가 된 재수없는 기업인 영준(이동건)은 남편 발톱에 낀 떼만도 못한 녀석인 줄 알았다. 티격태격 하다 보니, 아! 이 자식 묘한 매력이 있는거다. 뭐랄까, 톡 쏘는 맛이 있는 홍탁 같은 놈이다. 유나도 가끔 달콤한 브라우니가 질릴 때가 있는 것이다. 홍탁도 걸쭉한 막걸리랑 합쳐지면 제 맛인데, 유나의 성격이 딱 막걸리다. 사고가 안나면 이상하다. 게다가 둘의 배우자들은 저 멀리 홍콩에 출장 가 있다. 타이밍 굿~! 제 떡이 아무리 맛있어도 가끔 남의 떡이 커보이는 법이다.

2. 멀리 가면 더 치명적이다

영준의 아내이자 조명 디자이너 소여(한채영)는, 남편 영준에겐 언감생심인 자상함의 지존 민재에 순식간에 끌린다. 같은 시각, 두 사람의 남편과 아내가 서울에서 데킬라 취기에 얽혀 들어 실랑이를 빙지한 짝짓기 모드에 돌입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둘은 벌써 홍콩에서 훈훈한 짝짓기에 들어간다. 거칠 게 없다. 보는 사람도 없다. 홍콩 거리의 이국적 풍광과 끈적끈적한 공기가 에로스를 부추긴다. 역시, 멀리 오면 더 치명적이 된다.

3. 유유상종에서 부의 재분배로

겉보기엔 자존심 강한 전문직 종사자들이지만 유나와 민재 부부에겐 컴플렉스가 있다. 소박한 살림 때문이다. 특히 유나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계륵이다. 그런데 영준과 소여는 있을 거 다 있는 애비 에미 잘 만난 귀족들이다. 버려도 버려도 남을 게 있는 복 받은 녀석들이다. 그만 관계를 청산하자는 민재에게 소여는 말한다. "난 다 버릴 준비가 돼 있는데..." 민재의 응수, "난 너무 어렵게 얻은 것들이라 버릴 수가 없어." 유유상종으로 커플이 된 두 부부, 정신 차리고 보니 짝이 바뀌어 있다. 부자 여자와 가난한 남자, 부자 남자와 가난한 여자가 짝이 됐다. 에로스는 가끔, 부의 재분배를 이룬다. 양극화의 극복! 나름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말이다(너무 갖다 붙였나?).

4. 지금 살고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지 못하는 건 불행이고 모순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갑남을녀라면 제도의 힘에 눌려 끙끙거리며 버텨낼 이 불행과 모순을 픽션의 힘으로 개선한다. 그러나 예의 상처를 남긴다. 이렇게 된 이상, 적어도 앞날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 유나도 민재를 사랑했고, 그래서 살았다. 소여는 차갑고 냉정한 영준이 좋았다. 그래서 함께 살았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얻었다. 그렇다고 이 전의 사랑을 완전히 청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살아서 희미해진 사랑도 있지만, 살아서 생긴 사랑(흔히 그걸 의리라고 한다)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딜레마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없다. 다만, 청산할 마음이 없다면, 그리고 결혼 제도 안에서 남은 인생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꿋꿋하게 자문해야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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