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다시보기 2.

영화 이야기 2018.05.20 09:18 Posted by cinemAgora

이 글은 영화 <버닝>에 대한 두번째 리뷰다. 앞서 쓴 글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관람한 이들만 읽기를 권한다.

#2. 메타포

메타포를 한국어로 옮기면 '은유'다. "~처럼" ""~와 같이"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끌어와 'A는 B다' 식으로 비유하는 수사법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처럼 말이다. 이때 호수는 시인의 마음을 드러내는 메타포가 된다. 검색하면 다 나오는 메타포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영화 <버닝>에서 '메타포'라는 말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건,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이 그 단어를 내뱉기도 했거니와, 그가 내뱉는 또 다른 단어 '비닐 하우스'가 메타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벤은 종수에게 말한다. "나는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그리고 그는 종수가 사는 파주 시골 마을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또 다른 비닐 하우스를 태울 작정이라고 말한다.

해미가 사라질 즈음, 종수는 자기가 사는 마을의 버려진 비닐 하우스들을 매일 점검한다. 벤이 말한대로 실제로 집 주변의 비닐 하우스가 타는지를 구경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어떤 비닐 하우스도 타지 않는다. 다만 해미가 사라졌을 뿐이다.

따라서 비닐 하우스는 벤의 메타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종수는 그걸 실체가 있는 비닐 하우스로, 즉 직유법으로 받아들인다.

이 시퀀스의 한 대목에서 종수는 어느 버려진 비닐 하우스의 일부를 실제로 태워 보려고 시도한다. 그 행동은 의미심장하다. 종수는 벤의 이상한 취미를 모방하려는 충동을 갖는 것이다. 계급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종수가 언뜻 벤을 모방해 보려는 심리는,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눠진 이 세상의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자, 영화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메타포다. 빈자는 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따라서 그들의 일탈 심리도 격하된 차원에서 모방의 대상이 된다.

종수가 해미와 함께 벤의 화려한 멘션에 초대 받았을 때 내뱉은 이 말도 일종의 메타포다. "이 나라에는 왜 이렇게 개츠비가 많아?"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처럼, 그때 그는 도무지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여유롭게 사는 이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해미를 둘러싸고 벤에 대한 그의 계급적/성애적 질투가 선언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무튼 은유를 직유로 받아들였던 종수는, 벤이 표상하는 유한 계급의 은유에 기만 당한다. 그들은 알쏭달쏭한 말로 부에 상응하는 스노비즘적(속물적 교양주의) 품격으로 치장한다. 실제로 똑똑할 수도 있다. 교육 자본의 차이는 있는 자가 더 똑똑하고 우아하며 교양 있도록 만들고 있다.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아니다.

종수는 어쩌다 끼게 된 이들의 교양 넘치는 파티에 적응할 수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갖는 위화감의 정체도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파티가 끝나면 그는 북한의 대남 방송이 들리는 허름한 시골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 지점(강남)에서 눈에 보이는 경계 지점(휴전선 마을)으로. 그런데 종수의 살벌한 터전조차 벤에게는 한적한 휴양의 공간이 된다.

종수는 비닐 하우스가 타는 대신 해미가 사라진 상황을 맞게 된다. 그리고 문득, 밴을 둘러싼 다양한 실마리들이 실체와 대응되는 메타포라고 여기게 된다. 화장실에서 발견된 해미가 차고 있던 것과 똑같은 시계, 화장품 세트, 도검 세트, 사라진 고양이 등.

그럼에도, 그는 결과적으로 벤의 '있어 보이는' 메타포에 질질 끌려다닌 셈이니, 이제 벤을 둘러싼 다양한 사물과 현상이 모두 메타포이며, 거기에 대입되는 실체가 있다고 믿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재구성한 진실은 과연 진실일까? 아무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벤을 제거한 뒤 태워버리는 것이다. 벤의 기만적 은유법은 또 한번 종수를 통해 직유적 파괴로 번역되어 모방적으로 실천된다.

그런데 이것조차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닐 수 있다. 앞서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종수가 비쳐진다. 카메라는 해미의 방에서 바깥으로 나와 마치 액자 속에 있는 것처럼 방 안의 종수를 비춘다. 그리고 바로 이어 벤이 종수의 칼을 맞는 장면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건 종수의 글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상황이라고 볼 여지를 남긴다. 종수는 자신을 혼란에 빠트린 벤에 대한 저항 혹은 복수를 글 속의 상상을 통해서야 실천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영화의 인물들과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한국 사회를 은유하는 거대한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풀리는 건 하나도 없는데,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소설가를 꿈꾸지만 뭘 써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청년 실업자 종수가 처한 상황이다. 어쩌면 종수는 이 시대를 무기력하면서도 어리둥절하게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의 메타포이다.




'버닝' 다시보기 1.

영화 이야기 2018.05.18 15:43 Posted by cinemAgora

이 글은 이번주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 대한 리뷰(review)다. 앞서 쓴 관련 글에서 나는 preview와 review의 차이를 설명했다. preview는 관람전 가이드라면 review는 다시(re) 보는 것(view)이다. 즉, review는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정서와 메시지를 해석해봄으로써 그 여운을 곱씹어보려는 시도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를 관람한 분들만 읽기를 권한다. 영화의 디테일과 결말까지도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버닝>에 대해선 몇 가지 키워드를 매개로 해석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례로 키워드 하나씩을 꺼내 영화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오늘은 일단 전종서가 연기한 해미라는 인물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자.


#1. 해미
종수(유아인)가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어릴 적 친구 해미는 꽤나 당돌한 아가씨다. 두 번째 만남만에 종수와 섹스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 돌연 아프리카로 훌쩍 여행을 떠날 정도로 삶에 적극적이다. 그럼에도 그녀에겐 무언가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 시대 청춘이 처한 궁핍한 삶에서 그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 가운데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영화 속의 해미는 그러나 주체처럼 보이는 객체이다. 즉, 종수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인물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해미의 상황이 단독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녀는 종수의 시선과 인식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래서 해미는 불쑥 종수에게 성애의 흔적을 남기고 곁을 떠났다가 벤(스티븐 연)이라는 미스터리한 남성과 함께 나타나며, 또한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다. 이것은 종수의 혼란과 집착, 강박증을 불러 일으킨다.


해미는 자신이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적이 있는데 종수가 구해주었다고 말한다. 종수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수는 그걸 믿어 버린다. 그런데 해미의 실종 이후 우물의 존재에 대한 관계자들의 증언이 엇갈린다. 해미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했다면 왜 그런 것일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 해미라는 인물이 미스터리한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종수가 그녀를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미는 종수가 믿어 버린 대로 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일 수도, 그냥 훌쩍 종수를 떠나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앞서 해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자. "죽는 건 무서워. 하지만 사라지고 싶어. 그냥 없었던 것처럼."


해미는 한국의 사회적 지형 속에서 종수와 같은 계급적 처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수의 얼터 에고(대체 자아)이자 결핍과 혼란, 욕망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종수에 의해 착취되는 젠더적 판타지이기도 하다.


판타지는 투영의 주체만 존중하지 객체에 대한 존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폭력적인 양태로 나타난다. "너 왜 남자들 앞에서 옷을 그렇게 벗어? 그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 해미의 아름다운 젖가슴은 종수의 시선에만 독점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때 불쑥 계급적 적대자이자 잠재적 연적인 벤의 시선이 그녀의 자유 의지가 발현된 장면을 공유하고 있음을 종수는 불쾌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 장면에서도 사실상 해미는 없.다. 해미의 엉뚱한 춤을 존중하듯 비웃는 시선으로 바라본 상류층 젊은이들이 그랬듯, 소유욕에 사로잡힌 종수의 시선에도 존중은 빠져 있다. 시선의 폭력. 그러니 해미는 원래 없었고, 그때 다시 없어진 것이다.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한다. 내가 인식하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있는 것. 내가 인식함으로써 있게 되는 것. 해미의 실체는 종수의 인식 속에서만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없다. 물리적 실체가 사라진 것만 없는 게 아니다. 우리의 많은 관계 안에서 있는 자는 동시에 사라짐을 당한다. 종수가 일자리를 얻으러 간 자리에서 이름이 아닌 "3번"으로 불리듯, 우리는 분명히 있지만, 익명의 부재자 취급을 당한다. 그게 이 사회에서 종수가 처한 입장이고, 동시에 해미가 종수에게 취급되는 방식이다.


판타지는 또한 진실을 미궁에 가둔다. 이 미궁이 종수가 갇혀 있는 감옥이다. 그래서 종수는 또 다른 미스터리의 축인 벤에게 무력하게 털어 놓는 것이다.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버닝' 관람 전 가이드

영화 이야기 2018.05.17 09:03 Posted by cinemAgora

이 글은 오늘 개봉한 영화 <버닝>의 프리뷰다. 프리뷰(Preview)는 말 그대로 미리 보는 것. 일종의 관람 전 가이드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나는 영화가 "볼만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상품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별점 따위를 매기는 건 아예 혐오한다. 다만, 평론가는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에게 유용한 팁을 주고(Preview),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에게는 여운을 곱씹을만한 해석을 제공(Review)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두번째 작업, 즉 리뷰(Review)는 나중에 따로 쓸 것이다.


각설하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일반적이며 전형적인 영화 문법에 익숙한 분들에겐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는 관객들에게 능동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주는 연출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그건 사실 이창동이 관객들을 매우 수준 높은 교양인으로 대우하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요즘 관객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 걸 낯설어 한다는 점이다.


영화 <버닝>도 그렇다. 관객들은 이창동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한국 사회의 상황에 맞춰 재해석한 이 영화에서 그가 촘촘히 배치해 놓은 힌트들을 통해 영화의 주제 의식을 스스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 뭥미?"하고 극장문을 나서게 될 것이다.


두 가지 힌트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영화 속 유아인의 대사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와 스티븐 연의 대사 중에 나오는 "메타포"다. 영화 속의 주인공 종수는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처한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이나 전종서가 연기한 해미도 미스터리한 인물들이다. 영화는 종수를 알쏭달쏭한 인물들이 펼치는 알쏭달쏭한 상황 속으로 이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 자체도 수수께끼이며 거대한 메타포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진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혼란을 느낀다면, 이창동의 덫에 단단히 걸려 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혼란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이다.


거기에 대해선 추후에 다시 쓰겠다. 영화를 보기 전에 당신이 명심할 한가지, 이창동의 영화에 '재미'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오산이다.



청년 마르크스

영화 이야기 2018.05.09 09:43 Posted by cinemAgora

요즘은 영화 리뷰를 쓰는 것도 망설여 진다. 글이란 읽히려고 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영화 리뷰를 찾아 읽지 않는다. 벌써 900만 명이 본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에 대해 쓰면 좀 읽을 것이다. 대개 더 많은 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영화에 대한 글은 경향적으로 조금 더 읽힌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의 볼 일 없는 예술영화에 대해 끄적여 본들 관심을 끌기엔 애시당초 글러 먹은 세상이다.


하물며 공산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레드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 있는 이 나라의 공기에서 이 영화를 수입해 개봉하려고 하는 영화사가 제 정신인지 나도 의아할 지경이다. 그러니 이 글 역시 광범위하게 읽히기에 글러 먹었다. 그러나 쓴다. 기억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해, 이 영화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다. 산업 혁명의 와중에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삶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려 했던 어느 유대인 출신 독일 청년이 어떻게 그같은 사상적 지평에까지 도달했는지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영화이므로 그가 집필한 <자본론>과 같이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아프진 않다. 칼 마르크스의 관계로부터 드라마를 뽑아낸다. 당연히 그의 사상적 동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빠질 수 없다. 자본가의 아들이지만 노동자의 처지에 가슴 아파하고, 될썽부른 나무를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엥겔스가 없었더라면 19세기 노동 운동의 태동도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 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는 칼 마르크스가 청년헤겔학파와 결별하고 가난과 박해와 싸우며 불과 30세에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기까지의 상황을 다룬다.


대학 시절에 <공산당 선언>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자본론>도 읽으려고 '노력'은 했다. 역사적 맥락을 모른 상태에서 읽으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해설서를 구해 읽었다. 영화를 보니, <공산당 선언>의 시대적 맥락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흥미롭게도, 엥겔스의 아내이자 동지 레니가 두 거두의 철학을 아주 쉽게, 동시에 울림이 큰 대사로 풀어 놓는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요. 자유를 위해서는 싸워야 해요. 싸우려면 가난해야 하고요."


공산주의에 대한 평가와 이념적 지향과는 별개로, 칼 마르스크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후대의 철학자와 경제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하는,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유럽의 열린 문화 지형을, 나는 흠모한다. 게다가 밥 딜런의 노래 "Like Rolling Stone"이 칼 마르크스와 이렇게 근사하게 어울릴 수 있다니! 5월 17일 개봉.



리브 어게인

영화 이야기 2018.04.19 16:14 Posted by cinemAgora

좌절은 영화 속 주인공의 필연적 숙명이다. 그러나 극복 역시 숙명이다. 이 두 요소는 99% 이상의 영화가 채택하는 이야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색다르게 변주하느냐가 영화적 성패를 가른다.


<리브 어게인>(4월 26일 개봉)은 그걸 부녀 뮤지션의 이야기를 통해 변주한다. 여주인공 주드(앰버 허드)는 목하 좌절 중인 30대 초반의 막 나가는 펑크록 뮤지션이다. CM송을 부르며 근근히 먹고 살다 집세도 내지 못해 쫓겨난 그녀는 별 수 없이 죽도록 싫은 아버지 폴(크리스토퍼 월큰)의 집을 찾아간다. 한때 ‘로맨스의 황제’라고 불렸지만 이제는 퇴물이 되어 버린 아버지는 결혼과 이혼을 숱하게 되풀이한, 딸보다 더 막나갔던 뮤지션이다. 그런데 성격은 딸과 정반대. 만사 천하태평에 듣든 말든 "왕년에 내가" 타령. 이미 잊혀진 스타가 되어버린 처지를 애써 무시하며 언감생심 컴백을 노린다. 만사가 안풀려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딸이 그런 아버지와 코드가 맞을 리 없다. 게다가 한동안 얹혀 지낼 수밖에 없게 됐으니 다음 이야기는 굳이 말 안해도 알 것이다. 그렇다. 티격태격 좌충우돌의 나날들.


주드의 록음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폴의 컴백이 철들지 못한 노인의 아집이라고 몰아세우는 딸. 아버지는 지나치게 낙천적이라 문제이고 딸은 너무 비관적이라 문제다. 어쨌든 유일한 공통점은 객관적으로 둘 다 좌절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대를 이어 음악을 하는 부녀는 둘다 세상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있다. 아버지는 퇴물이 되었고, 딸은 음악계의 변두리를 맴돌고 있다. 영화는 여기서 은근한 끈을 엮는다. 서로를 조롱하고 무시하지만, 어쩌면 두 사람은 어서 좌절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동지적 관계인 것이다.


영화의 제목 <리브 어게인>은 영화 속 폴의 자작곡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다시 살 수 있다면...” 이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만약 당신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지나온 날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어쩌다 이렇게 됐지? 누가 내 삶을 이렇게 망쳐 놓았지? 누구 탓이지? 회한으로 가득 차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영화는 뻔하긴 해도 정신 건강에는 좋은 팁을 넌지시 던진다.


“다시 살 수야 없지. 한 번 더 해봐. 지금, 바로 지금 말이야.”


이 영화의 원제는 “One More Ti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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