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영화 이야기 2018. 8. 27. 12:42 Posted by cinemAgora

이번에도 일부 독자들에겐 낯선 영화 용어를 설명하면서 글을 시작하도록 하자. 영화 <목격자>를 말하기 위해서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을 흔히 '프로타고니스트'라고 부른다. 그 반대의 인물, 즉 그와 적대적 관계에 놓인 캐릭터는 '안타고니스트'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프로타고니스트만큼이나 안타고니스트를 매력적으로 설정하는 게 관객들을 극 안의 세계, 즉 디제시스 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관건이 된다. 이를테면 <양들의 침묵>(1991)의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나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히스 레저)처럼 잔인무도하며 위력적인 안타고니스트일수록 관객들은 더욱 침을 꼴깍 삼키며 극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영화 <목격자>에서 표면적인 안타고니스트는 새벽에 아파트 단지에서 망치 살인을 저지른 범인(곽시양)이다. 영화의 프로타고니스트이자 갓 아파트를 장만한 소시민적 세대주 상훈(이성민)은, 얼떨결에 살인 현장을 목격하는 바람에 엄청난 불안에 휩싸인다.

이렇게 되면 흔히 예측 가능한 대립 구도는 상훈과 범인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범인을 확증하기 위해 애타게 목격자를 찾는 형사(김상호)와 진실을 알지만 침묵하는 상훈의 줄다리기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상훈은 아파트의 평균적 입주민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괜히 쓸데 없는 일에 끼어들기 싫어하는 그는 경찰에 협조했다가 가정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와중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 즉 또다른 상훈들은 영화 곳곳에서 발언한다. 그들은 사건의 와중에 집값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한다. 따라서 경찰은 물론 언론에 협조하지 말자는 서명까지 돌린다.

이 침묵. 누군가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는 아파트에 대한 외부의 시선이며, 그로 인해 집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의 이기적 담합은 이 영화가 설정한 진짜 안타고니스트이다. 따라서 살인 사건의 범인은 '맥거핀', 즉 정말 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전개시키기 위해 설정된 핑계일 뿐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관객들을 스크린으로 끌어 들여 안타고니스트로 만든다. 너희들이 이렇게 살고 있지 않니? 하면서 말이다. 관객들에겐 불편한 설정이다. 그러나 탁월한 사회 비평이다.

"4억 밑으로 안내놨지? 4억 밑으로 내놓으면 안되는데?"

영화 말미에 부녀회장이 내뱉는 이 말만큼 끔찍하게 공포스러운 대사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우리 현실에서 건져 올렸기에, '슬픈 공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영화 <목격자>는 최근 본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묵직한 주제 의식을 선보였다. 긴장을 만들어내는 촬영과 편집도 아주 찰지다. 모처럼 제대로 몰입하며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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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영화 이야기 2018. 8. 27. 12:41 Posted by cinemAgora

어떤 문학 작품은 영화로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사실 더 많다. 왜 아무도 도스트예프스키나 카프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지 않을까. 원작의 문학성을 도무지 영화 언어로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중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대중영화가 선호하는 원작은 대체로 서사성이 강한 장르 소설인데, 한국처럼 장르 문학의 저변이 약하다면 대략난감인 것이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7년의 밤>도 그 가운데 한 편이었다. 원작을 읽었을 때,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장르 소설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걸 영화로 옮기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건과 순간에 집중하는 영화의 특성상, 이 작품의 연대기적 호흡은 영화적 각색의 재료로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 한 영화 제작자가 영화화 판권을 샀다며 이 작품 얘기를 하길래, 차마 그의 앞에서 "그건 영화로 만드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혹자는 각색의 실패를 패인으로 분석하지만, 소설을 영화화하겠다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미 각색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 <7년의 밤>은 그냥 소설로 놔뒀어야 할 작품이다.


영화는 1년여의 제작 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영화의 시사회 때 기자들이 배우들에게 물었다. "왜 제작 기간이 그렇게 오래 걸렸나요? 배우들은 답했다. "로케이션지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거짓말이다. 제작자가 제작비 횡령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촬영이 중단되었다가 나중에야 재개되었다.


그렇다면 배우들은 왜 미리 짜맞춘 거짓말을 했을까? 그 이유도 간단하다. 기자들은 배우들이 말하는대로 믿고 받아쓴다는 걸,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과연, 그 예상대로 그 어떤 기자도 이 영화의 우여곡절을 취재하지도, 기사로 쓰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자신의 착시에 속고, 누군가는 타자의 명성에 속는다. 어디 두메산골의 순진한 촌부 얘기가 아니다.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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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결혼식

영화 이야기 2018. 8. 27. 12:40 Posted by cinemAgora

영화 <너의 결혼식>은 13년에 걸친 첫사랑의 연대기다. 첫사랑에 목숨 거는 순정남 우연과 현실주의자 승희가 엇갈린 타이밍 때문에 이별과 재회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풀어낸다.

그런데 우연을 화자 삼아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이 영화에서 승희는 획득의 대상이 된다. 이 영화가 뿜어내는 웃음과 비련은 그 서술 구조에서 나온다. 우연이 승희를 획득하고자 할 때 걸림돌은 늘 승희 옆의 남자들이다. 우연은 그들과 싸워야 한다. 허그덕. 너무 뻔하다.

남성들의 소년적 성적 판타지에 대한 승희의 호기심도 딱 남성들이 바라는만큼만 당돌하다. 즉 승희는 '획득'의 대상이 되고픈 퇴행적 여성 판타지와, 남성들의 심리에 대한 여성들의 (남성 관점에서) 섹시한 호기심의 전달자로서만 기능한다.

그녀는 주인공이지만 주체는 아니다. 우연의 방은 디테일하게 나오지만 승희의 방은 묘사되지 않는다. 우연의 일터는 나오지만, 승희의 일터는 나오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벨기에로 페이드아웃, 그리고 웨딩드레스.(아아! 너무나 유치한 웨딩드레스 판타지!) 이렇게 철저하게 객체화되어 있다. 남성의 시선에 의해. 그러나 그 시선은 영화가 전략적으로 계산한 여성들의 것이기도 하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는 남성, 또는 가부장의 시선을 피지배자인 여성들이 내면화하니까.

여하튼 성인이 된 두 사람이 사회와 현실의 관계망 속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영화는 급격하게 지루해진다. 멋모르던 시절의 치기와 판타지라는 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에피소드들이 상투적이기 떄문이기도 하다.

박보영은 인터뷰에서 "이런 종류의 멜로 영화를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현실적인 멜로를 뜻한 것 같다. 불행히도 박보영은 <늑대소년>과 같은 판타지의 여주인공으로 나왔을 때만 성공했다.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와 같은 현실 드라마에선 실패했다. 차이는 딱 하나. 잘생긴 남자가 상대항으로 배치되어 있느냐 없느냐이다. <너의 결혼식>은 김영광이라는 상대항이 존재하지만, 판타지는 아니다.

박보영에게는 유감이지만, 이 시대의 여성 관객들은 박보영의 시선을 통해 잘생긴 남자를 '감상'하고 싶을 뿐이다. 평범한 여성 관객의 페르소나인 박보영을 두고 훈남들이 싸워주기를 바랄 뿐이다. 기획자들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런 뻔한 영화를 기획하는 것이다.

박보영이라는 여배우가 현실로 걸어나왔을 때, 그녀를 어떻게 보여주어야할지, 한국영화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이 시대,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20대 여성의 리얼리티를 한국영화는 찾지 못했다. 이 영화는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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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영화 이야기 2018. 8. 1. 10:04 Posted by cinemAgora

영화평을 쓰면서 웬만하면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윤종빈 감독의 <공작>을 소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단어를 쓰기로 한다. 

디제시스(diegesis). 흔히 '창의적 허구'라는 말로 번역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허구적 세계를 총칭하는 용어다. 관객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이 디제시스의 세상 속으로 기꺼이 빠져들 준비를 하는데, 관건은 영화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디제시스를 제시하느냐에 달렸다. 이를테면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디제시스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다. 

윤종빈 감독의 영화 <공작>을 보면서 나는 흔쾌히 디제시스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1990년대 초중반의 북파 공작원 흑금성(황정민)의 실화를 풀어가는 이 영화는 초반부에 지나치게 설명적이어서 영화적인 후킹이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라디오로 듣는 정치극 드라마나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묘하게도 영화가 중반으로 치달아 가면서, 그러니까 흑금성이 남한 출신의 사업가를 사칭해 북한 고위 관료들과 접촉하는 순간부터 영화의 논리에 서서히 침잠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디제시스가 뒤늦게 발동했지만, 꽤나 눅진하게 빠져 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작>은 작품적으로는 기존의 한국영화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윤종빈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정공법이었고, 따라서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직진한다. 장면 연출에서조차 겉멋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그 흔한 추격신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과연 이런 전략이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괜스레 걱정했다. 그 동시대의 관객들은 윤종빈의 동시대 감독들이 망쳐 놓은 영화 문법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즉,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디제시스를 선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좋은 창작자는 시대에 구속된 인물을 통해 시대를 논평한다. 윤종빈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통해 그걸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다음 작품 <군도>는 실패했다. 아마도 그가 강동원에게 너무 빠져 버렸거나 잔재주의 유혹에 휘둘렸기 때문일 것이다. <공작>은 그가 다시 시대성으로 정직하게 돌아오려는 고민의 산물이다. 그의 고민이 읽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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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

영화 이야기 2018. 7. 30. 15:28 Posted by cinemAgora

영화 토론 모임 사람들과 함께 이 영화를 관람하였다. 영화가 끝나고, 토론 자리에서 나는 "어떻게 보셨어요?"라고 참석자 한 분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와락 눈물을 쏟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내가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슬픈 눈물을 보았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낳았다고 다 엄마가 되는건가요?" 너희가 생각하는 가족이 도대체 무엇이니? 아마 그녀는 그렇게 되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어떤 핏줄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이 가족이 '가족의 이데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늘 가족이라는 테마에 천착해 왔다. <걸어도 걸어도>에선 상실을 겪은 가족의 드러나지 않는 빈자리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선 기억과 가족애의 상관 관계를,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선 배 다른 자매의 평화롭고 선량한 연대를 그렸다. 아마도 그 모든 영화들은 이 작품을 위한 전주곡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가족>은 긴 말이 필요 없는 걸작이다. 고레에다는 혈연의 끈 바깥에 놓인 가족을 설정해 놓고, 거꾸로 서로를 옭아매는 현대 가족의 혈연주의적 상식을 비웃는다. 버려진 자들, 그들이 엮어낸 이 가족은, 비록 훔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해도, 명백한 낙원이다. 그 낙원이 세상의 오염된 상식에 의해 파괴될 때 노부요(안도 사쿠라)가 말 없이 훔치는 눈물은, 영화 역사에 또 하나의 명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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