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모스크바라는 공간은 주인공을 둘러싼 긴장과 위압감의 미장센으로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가 의도했다기 보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영화가 세뇌했던 크렘린의 고압적이면서도 은밀한 이미지의 잔영이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떤 공간이나 대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투사하는 이미지는 확실히 위력이 있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웃지 못할 일화. 모스크바에 출장 간 한 한국 기업체 직원이 경찰의 검문에 지나치게 '쫀' 나머지, 냅다 튀다가 루블화 몇 장을 등 뒤로 던졌다고 한다. '먹고 떨어져'라는 의사 표현이었을 터, 그는 그 덕분에 경찰이 아닌 특공대원들에게 붙잡혀 더 큰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 딱한 사람, 아무래도 냉전기의 <007> 시리즈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또 하나의 일화. 미국에 간 한국인이 호텔 엘리베이터를 흑인 배우와 단 둘이 타게 됐는데, 흑인을 갱으로 오인한 그가 '4층 버튼을 눌러 주세요(Hit Four, Please)'라는 흑인의 말에 자기 머리를 스스로 네 번 벽에 박았다고 한다. 그는 갱스터 영화를 너무 많이 봤을 게 뻔하다. 그냥 피식 웃고 넘길 수 있는 사례들이지만 곱씹어 보면 영상 매체가 얼마나 지독한 편견의 메신저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 진다.
더욱 찬란했던 것은 '좋은' 계절을 맞아 일광욕을 위해 웃통을 벗어 제친 시민들, 결혼식을 올린 뒤 사진 촬영을 위해 거리와 공원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선남선녀들의 풍경이었다. 잘 차려 입은 신랑 신부들의 표정은 눈부셨고, 햇볕을 흠모하는 시민들의 여유 넘치는 모습은 러시아를 눈과 얼음의 나라로만 '단순무식'하게 새겨 왔던 내 인식의 한 언저리를 싹둑 잘라냈다.
한 차원 높은 것은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바디 랭귀지가 됐든, 어설픈 현지어가 됐든, 적어도 비영어권 나라에서 자기 편하자고 아무에게나 영어를 들이대는 몰상식한 짓만 안 한다면, 모든 종류의 소통은 여행의 질을 최고의 단계로 끌어 올리는 지름길이다. 다행히 현지에 사는 지인의 도움으로 의사 소통에 큰 문제가 없었던 나는, 러시아인들의 무뚝뚝함에 처음에는 짜증이 나다가, 여행이 끝날 즈음엔 슬쩍 그들이 가진 의리의 정서와 살가움을 느낄 수 있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그리하여 내 머리 속에서 러시아는 비로소 이미지의 감옥에서 출소할 수 있었다. 밤 10시까지도 해가 지지 않는 한 여름 밤의 보드카 맛이 기가 막히다는 사실은 덤으로 얻어 왔다. 제이슨 본도 그 맛을 알았을까?
여행 주간지 '트래비' 최근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2007/08/18 - [별별 이야기] - 러시아 기행 1. 모스크바의 첫 인상
2007/08/19 - [별별 이야기] - 러시아 기행 2. 붉은 광장과 끄레믈, 노보제비치
2007/08/20 - [별별 이야기] - 러시아 기행 3. 아르바뜨 거리와 전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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