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기행 4. 빼쩨르부르그

별별 이야기 2007. 8. 20. 06:36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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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갔는데,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빼쩨르부르그를 보지 못한다면 단팔이 빠진 찐빵을 먹는 거나 다름 없다. 모스크바에서 밤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8시간. 우리는 침대칸을 예약했다. 낭만적인 침대 열차 여행은 그러나 약 6시간의 수면 후 악몽으로 급변했다. 앞서 달리던 열차가 노보그라드 인근에서 폭탄 테러로 보이는 탈선 사고를 당해 60여 명이 다치는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아연실색! 그 여파로 아침 8시로 예정된 열차 도착 시간은 오후 5시 40분으로 연장되더니, 다시 9시 반쯤에나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그렇다면 열차 안에서 장장 22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얘기. 우리를 안내한 선배는 마치 자신이 죄라도 지은듯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이럴 때 필요한 게 발상의 전환이다. "걱정 마세요. 우리 인생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이것도 여행의 재미죠." 여행객으로서의 낙천성을 한껏 발휘했더니 그제서야 선배의 긴장한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선배의 11살 난 딸은 아랑곳 않고 신나 한다. 나는 긴급 공수한 맥주를 두 캔 들이키고 또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케세라세라~ 잠만이 이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필살기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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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동행하지 못한 또 다른 선배(사진 왼쪽 선배의 남편)가 모스크바에서 뉴스를 통해 상황을 전해 듣고는 핸드폰을 걸어 왔다. 그의 지령, "최대한 신속하게 식당칸으로 이동해 식량과 음료를 확보하라!" 열차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영양 보충부터 해놓으라는 얘기에, 우리는 서둘러 식당칸에 가 사람은 넷인데 6인분의 음식을 시켜 놓고 꾸역 꾸역 먹었다. 배 두드리며 다시 침대칸으로 드는데, 옆 칸에 있던 중국인들이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역시 대륙적 천하태평이다). 러시아어나 중국어로는 안통하고,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아는 중국인이 한 명이 있어 상황을 전해줬다. 그랬더니 배가 고픈데 먹을 걸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고 묻는다. 호혜주의에 입각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선배가 그들과 식당칸까지 동행했는데, 이미 음식은 바닥이 난 상태. 두 시간 뒤 그들에게 겨우 빵 두개 씩이 배급됐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미리 음식을 챙겨둔 우리의 신속 정확한 행동에 새삼 뿌듯해진다. 과연 한민족의 생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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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사고 지역을 우회해 들어오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달려온 장장 21시간의 대장정이 마침내 끝난 시각은 저녁 8시 30분. 당초 이날 아침부터 시내 관광을 하겠다는 우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상 빼쩨르부르그의 살가운 저녁 풍경이 우리를 맞는다. 해군청 앞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이삭 성당이 야간 조명을 받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바티칸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의 규모와 맞먹는 이 성당을 짓는데만 40여년이 걸렸고 투입된 인력은 무려 50만 명이 넘는다 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건물인만큼 기계의 힘을  빌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기둥 하나의 무게만 수십톤에 달한다고 하니, 저거 짓다가 꽤 많은 사람의 목숨이 날아갔을 것 같다. 도대체 종교나 신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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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쩨르부르그의 중심가도인 네브스키 도로에 위치한 카잔 성당 역시 웅장함에 있어서는 이삭 성당에 뒤지지 않는다. 19세기 초 농노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물들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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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태트리스 게임의 배경으로 유명한 피의 사원이다. 19세기 초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주의자들인 나로드니키에게 암살 당한 자리에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세웠다고.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제도를 폐지하는 등 나름대로 개혁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급진 개혁 세력들에겐 그 역시 걸림돌로 보였나 보다. 그는 폭탄 테러에 마부가 다치자 그를 부축하기 위해 나섰다가 재차 던져진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제정 러시아의 짜르 가운데 그나마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서서히 끓어 오르는 혁명의 기운 앞에서 희생양이 된 셈이다. 그로부터 100년 후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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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러시아 황제 뾰뜨르 1세가 스웨덴을 제압하고 발트해의 해상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 빼쩨르부르그는 북유럽의 베니스라고 불릴 정도로 운하가 많은 도시다. 북으로 핀란드만을 바라보고 있는 항구 도시인만큼, 도시 곳곳이 크고 작은 운하들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다만, 건물이 바로 운하와 면해 있는 베니스와 달리 운하 주변에 도로가 있다는 것이 다른 점. 운하를 오가는 관광 유람선에 탄 채 피의 사원을 바라보니, 딱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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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쩨르부르그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자랑하는 유럽풍 건물들에는 여전히 옛 소련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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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 무거운 지붕을 이고 있누. 빼쩨르부르그에는 저런 식의 기둥 장식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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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를 오가는 유람선은 아주 낮은 다리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지난다. 마치 4차원 세계로 진입하는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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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에르미타슈 박물관. 18세기 중엽 예카째리나 2세가 궁정 박물관으로 세웠다. 강대국으로 성장하려는 제정 러시아의 야심에 걸맞게 그 규모가 엄청나다. 건물 앞의 드넓은 광장은 짜르 군대의 연병장으로 쓰였다고. 안에 들어가보면 예카째리나가 의욕적으로 수집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 램브란트와 모네, 마티스, 드가 등 서유럽 대가들의 회화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기차 연착 사건으로 인해 건물 외관만 겨우 보고 발을 돌려야 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만큼은 러시아는 초강국이다. 이곳 뿐 아니라 모스크바에 있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역시 러시아 미술의 역사를 한눈에 정리해 놓았다는 점에서 반드시 들러보야할 곳 가운데 하나다. 러시아 여행 마지막 날 들른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눈에 담아온 일랴 레핀과 미하일 브루벨 등 러시아 대가들의 걸작들이 준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최근 미술평론가 이주현씨가 낸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이라는 책이 많은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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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르의 군대가 도열해 있었을 에르미타슈 앞 광장에서 이제는 젊은이들이 롤러 블레이드를 탄 채 하키를 즐기고 있다. 강력한 전제군주제는 당대에는 민중의 고역이었을 것이다. 황실과 귀족의 권위를 떠받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피를 흘렸을까. 그런데 그 절대주의 체제의 위용이 크면 클수록 후대의 시민들에게 이렇게 꽤 즐길만한 위락 장소를 제공하게 되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그 역사의 아이러니, 다음 이야기에서 더욱 신물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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