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 히어로는 왜 잠못드는가?

영화 이야기 2013/05/22 12:12 Posted by cinemAgora


대부분의 수퍼 히어로들은 정체를 숨기고 산다. 수퍼맨은 평상시에는 신문기자다. 스파이더맨은 그냥 평범한 청년이고, 배트맨은 재벌 회사의 사장이다. 하물며 헐크조차, 화가 나 괴물로 변하기 전에는 문약한 학구파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수퍼 히어로들이 이중 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세계 최강대국의 국민으로서 미국인들이 가진 자의식, 또는 무의식이 은연 중에 스며 들어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막강한 힘에 자부심을 가졌으되,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맞게 될 정체 불명의 가공할 위험도 함께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언맨만큼은 다르다. 세상이 다 안다. 무기 개발업자이자 억만장자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임을. 게다가 그는 초강력 합금 수트를 입고 마음껏 대중 앞에서 잘난 척을 한다. 영웅이 영웅임을 숨겨야 하는 운명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영웅으로서의 삶을 실컷 즐긴다.


9.11 테러 이후, 그러니까 포스트 911 시대의 수퍼 히어로들에겐 묘한 변화가 생겼다. 원작 만화들이 인기를 얻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굳이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근 인기를 끈 <다크나이트> 시리즈나 <아이언맨> 시리즈는 ‘수퍼 영웅’의 고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공통 분모를 추출해 낼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탁월하게 재해석해 낸 <다크나이트> 시리즈에서 배트맨은 자신의 힘을 놓아버리는 대신, 그의 역할을 하비 던트 검사로 상징되는 법과 제도에 위탁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이미 그가 만들어 놓은 영웅의 이미지가 그림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의 수호자에서 결국 순식간에 악마로 변해 버린 투페이스는,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처럼 인간성이 가진 동전의 양면이자, 수퍼 파워가 내포할 수밖에 없는 양면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영웅이 없다면 악당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맞서 싸워야 하는 역설적인 운명에 맞닥뜨린다.


<아이언맨 3>의 토니 스타크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제 수트 강박증에 불면증에까지 시달린다. 그는 말한다. “나는 멋진 애인을 가졌고, 세상을 구했다. 그런 내가 왜 잠을 못자는 것인가?” 명백하게도, 그것은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언맨의 적은 가공할 테러리스트 집단의 리더 만다린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만다린은 그저 꼭두각시였다. 그의 진짜 적은, 그가 아주 오래전 무례를 범했던 한 과학자였던 것이다. 이 배후의 악당은, 토니 스타크가 이미지의 철옹성 속에서 인기를 구가하듯, 거꾸로 사람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 역시 이미지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언맨 3>는 겉으로는 현란한 스펙터클을 보여주지만, 실은 극도로 개인적인 원한의 불씨가 이미지의 탈을 쓰고 세상을 위기에 빠뜨리는 상황을 보여준다. 힘이 강해질수록 적도 강해진다. 다시 말해 힘이 적을 만든다. 그때부터 누가 정의의 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의 미국과, 미국이 적대시했던, 혹은 그리하여 미국을 적대시하게 된 세력과의 관계를 은유하는 것이 아닐까. 허수아비 만다린이 미국의 친구에서 숙적으로 변한 오사마 빈 라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게 괜한 설정은 아닌 것 같다. 오, 불면증에 시달리는 수퍼 히어로여!


2003. 5.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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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게만 보이는 남자'

별별 이야기 2013/05/21 23:43 Posted by cinemAgora

습작으로 써 본 단편 소설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공개합니다. 습작이지만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1.



남자는 여전히 거기 서 있다. 벌써 이틀째다. 꼼짝도 안하고 한 자리에 서 있다. 옷방이 보이는, 그러니까 주방 입구의 냉장고 옆이다. 왜 하필 냉장고 옆에 서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알겠다. 쌔미가 냉장고 옆 자리에 자꾸 앉길래 한 번 일부러 그 자리에 서 본 적이 있었다. 냉장고 옆에선 옷방과 주방과 거실과 침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이 집안의 내 동선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이상한 건, 낯선 남자에게 자기 자리를 빼앗긴 쌔미가 단 한 번도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나타난 뒤로 쌔미는 평소에 거의 올라가지도 않던 베란다 쪽 캣타워 꼭대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남자 쪽을 뚫어지게 쳐다 본다.

남자는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 색 양복 바지를 입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다 채운 걸 보니 단정해 보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는 적당히 짧고, 얼굴엔 늘 미소를 품고 있다. 싫지 않은 인상이다. 아니, 꽤 괜찮은 인물이다. 호남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나이는...서른 쯤 됐을까. 나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기도 하고, 얼핏 보니 더 먹어 보이기도 한다. 조금 말라 보이기도 하는데, 키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편이다. 어쨌든 그 남자는 내가 슬쩍 자신을 볼 때마다 항상 날 보고 있었다는 듯, 그리고 자신을 봐줘서 기쁘다는 듯 더 환하게 웃었다. 이틀이 지나고 나니 그 남자의 존재가 기이하게도 어떤 일상의 부분처럼 느껴진다. 처음 그 남자가 나타났을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나도 모르게 그 남자가 그냥 거기 서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 남자가 우리 집에 들어와 있는 걸 발견한 건 이틀 전, 화요일 아침이었다. 아무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어느 때처럼 남편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류 가방을 챙겼고, 나도 평소처럼 현관으로 나가는 그에게 홍삼액을 따른 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역시나 평소처럼 “오늘은 몇시에 들어와?”하고 물었고, 남편은 숨가쁘게 홍삼액을 들이마신 뒤, “늦어, 미안해.”라고 짧게 말하고 쿵 닫히는 현관 저편으로 사라졌다.

남편과 나는 결혼한 지 3년 됐다. 6년 여 간의 연애 기간을 거쳤으니 9년을 함께 지낸 셈이다. 연애 기간 중에도 사실상 거의 같이 살았으니 말이다. 변화가 있다면, 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뒀다는 것. 그리고 피임을 중단했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병원에도 몇 번 들락거렸지만, 좀처럼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남편은 조급해 하는 나를 달래줄만큼 꽤나 다정한 사람이어서, “인내심을 갖고 더 노력해보자.”라고 말할 때도 있고, 생리 때마다 내가 시무룩해 있으면, “까짓 애 없으면 어때? 요즘 아이 없이 자유롭게 사는 부부들도 얼마나 많은데.”하면서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런 남편에게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 나는 그가 종종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들어와도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지고 싶지만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빼고, 주말에 손 잡고 저녁 산책 길에 나설 때마다 동네 수퍼 아주머니가 늘 말하듯, 꽤나 화목해 보이는 부부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날 아침, 남편을 세상 밖으로 빨아들인 현관이 쿵 닫히는 걸 아주 잠깐 응시하다가 돌아선 순간이었다. 냉장고 옆에 시커먼 물체가 서 있어 내가 헛것을 봤나 했다. 그랬더니 멀쩡한 남자 한 명이 거기 서 있는 게 아닌가. 까무러치게 놀라 뒤로 자빠졌다. 비명을 질렀다. 나는 최대한 정신을 추스르려고 애썼다. 대개 이런 순간에 여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이란 끔찍하게 뻔했다. 순간적으로 그날 바지를 입고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기며 소리쳤다.

“누..누...누구세요. 당장 나가요!”

남자는 말이 없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경찰을 부를 거예요.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당장 나가요.”

나는 본능적으로 현관 쪽으로 뛰었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안전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나 그가 내 뒷덜미라도 낚아채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현관 까지 가는 세 걸음조차 마치 몇 킬로미터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현관을 열고 밖으로 아파트 복도로 뛰어 나왔다. 신발도 채 신지 못한 맨발이었다. 복도는 허둥지둥대는 나의 당황을 비웃기로 하듯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옆 집 벨을 누르고 도움을 청할까? 아니야, 옆 집 부부는 새벽에 일 나가잖아. 그 옆집엔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그 사이에 그 남자가 튀어 나오면 나는 내 집 안으로 질질 끌려 들어가게 될지도 몰라.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을 놓고 나온 걸 깨달았다. 일단 아파트 밖으로 나가자.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지 입구의 수퍼가 막 문을 열고 있는 게 보였다. 늘 우리 부부에게 상냥한 인사를 건네는 그 아주머니가 상점 안의 짐들을 바깥으로 꺼내 놓고 있었다. 나는 뛰어 가며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새댁, 뭔 일이래요?”

“저저저, 저기, 우리 집에요, 수상한 사람이 들어와 있어요. 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아니, 이게 뭔일이래? 언 미친 놈이 새댁 집에 들어와 있다는 거야?”

“일단 신고부터 해주세요.”

경찰이 출동한 건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그 사이 나는 수퍼 안에서 덜덜 떨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나를 안정시키려고 계속 말을 이었다.

“세상이 흉악해서 주인이 버젓이 있는 집을 그냥 막 들어오는구먼. 아니 근데, 아파트 7층을 어떻게 기어 올라갔다냐.”

나는 차마 그 집에 다시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경찰에게 도어락 비밀 번호를 알려주고 수퍼 앞 평상에 앉아 있었다. 20분 정도 지난 뒤 출동한 두 명의 정복 경찰이 돌아왔다.

“집 안에 아무도 없는데요?”

“그 새 내뺀 거 아녀?”

아주머니의 말을 경찰이 받았다.

“일단 CCTV"를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 사이 도망쳤다면, 어차피 아파트 입구일 거고 CCTV에 찍혔을 겁니다.”

아무도 없다는 경찰의 말에 일단 안심한 나는 다시 집으로 올라왔다. 7층을 뛰어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조심스레 현관 도어락 번호를 눌렀다. 현관을 다 열지도 못한 채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리만 슬쩍 문 안으로 넣어 집안을 살폈다. 있다! 그 남자가 아직도 거기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더니 슬쩍 미소를 짓는다. 소름이 돋았다. 다시 비명이 나왔다.

그 뒤로 경찰이 또 왔다 갔다. 이번에는 나와 함께 집 안을 살피러 들어왔다.

“저기 저기, 냉장고 옆에요, 냉장고 옆에 남자가 서 있잖아요.”

경찰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니 누가 서 있다고 그러세요. 대체.”

“있잖아요. 냉장고 옆에. 저 사람!”

경찰은 나를 실성한 여자인 것처럼 바라봤다.

“혹시 요즘 환각 같은 거 자주 보세요?”

경찰은 그대로 가버렸고, 그 남자는 거기 냉장고 옆에 마치 붙박이 장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여전히 나를 보며 미소를 품은 채.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경찰이 왔었냐”고 물었고, 나는 경찰이 아무도 없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분명히 보인다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 남편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장모님 집에 좀 가 있어. 이따 밤에 나랑 같이 들어가자.”

CCTV에 수상한 이의 거동 따위는 찍히지 않았다는 경찰의 전화가 걸려온 건 그로부터 2시간 뒤였다. 여전히, 그 남자는 거기 서 있었다.



2.



나는 남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내가 근처 단지에 사는 엄마 집에 도피하지 않은 이유는, 글쎄, 그 남자로부터 어떤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그는 그냥 냉장고 옆에 서 있을 뿐이고, 그에게서 적의라든가, 어떤 위협적인 행동을 할 낌새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선량해 보였고, 나에게서 그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 것 같은 애틋함마저 느껴졌다. 그의 표정과 눈빛은 어떤 면에서, 나를 조금은 안정시켜줬다. 또 하나, 왜 그가 경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그 불가해한 상황의 실타래를 조금이나마 스스로 풀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일단 그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보기로 했다. 평소처럼 진공청소기를 돌렸고, 쌔미에게 사료를 줬고(쌔미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한번에 사료를 다 먹어 치웠다,), 밑반찬 몇 개를 꺼내 놓고 점심을 먹었다. 저녁 찬거리 준비를 위해 마트에도 다녀왔다. 그러는 사이 그는 미동도 않고 냉장고 옆에 서서, 마치 평소의 쌔미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얌전하게 단지 서 있었다.

그렇다고 나는 그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그에게 말을 건 순간, 그날 아침에 경찰이 내게 의심어린 눈초리로 물었듯, 내가 실제로 환각을 보고 있다는 정황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남편은, 내가 그냥 집에 있다고 보낸 문자에 안심했는지, 그날 밤에도 평소처럼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집에 돌아왔다. 현관에 신발을 벗자마자 그는 집 안을 쭉 한번 살폈다. 침실 문도 열어보고, 심지어 화장실 안과 베란다와 난방실까지 들여다 봤다. 그럼에도 냉장고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한잔 따라 마시면서까지도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 남자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침에 누군가 들어온 건 맞는데, 당신이 너무 놀라서 여전히 그 사람이 집안에 있다고 생각한 거 아냐?”

남편이 물을 마시다 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눈에도 냉장고 옆의 남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저 사람이 안보이냐고, 저기 아직도 그 남자가 서 있지 않냐고 말하는 게 필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그래 봤자, 남편 역시 나를 정신이 나간 사람 취급할 게 뻔하니까.

“아무래도 그런가봐. 내가 너무 놀라서 착시가 생긴 건지도 모르지. 이젠 안보여.”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그 남자를 바라 봤다. 순간, 그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그날 아침에 내 집에 들어온 뒤로 그처럼 환하게 웃은 걸 본 적이 없다. 그 환한 웃음 속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자신을 인정해줘서, 그러니까 자신이 내게만 보인다는 것을 인정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표시일까? 그 환한 미소 속에는 그와 나 사이에 어떤 공유의 지점이 생겼다는 데 대한 기쁨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어떤 유대감 같은 게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쩍 스쳤다. 왠지 모르게, 나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에도 평소와 똑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냉장고 옆의 그 남자가 이틀째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빼고는. 밤새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나는 일부러 새벽에 한번도 거실에 나와보지 않았다. 그가 진짜 환각이라면, 어쩌면 내가 잠든 사이에 저절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깬 채로 자명종을 끄고 침실 밖으로 나온 순간, 그가 여전히 아침해를 받으며 거기 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또 웃었다. 이번에는 한쪽 손을 살짝 들었다. 마치 수줍은 인사를 건네는 소년처럼.

역시나, 나는 그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남편의 아침상을 차렸고, 내가 먹을 토스트를 구웠고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나가는 남편에게 홍삼액을 챙겨 마시게 했다. 그날 아침 현관 앞에서 남편은 모처럼 나를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에궁, 우리 마눌님, 스트레스 좀 풀어요.”

그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 다정함을 잊지 않는 남자였으니 그 행동도 크게 이상할 일은 없었지만 나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냉장고 옆의 남자가 그 장면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쿵 닫히는 현관문 밖으로 남편이 사라진 뒤, 나는 조용히 식탁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 봤다. 그동안은 살짝 살짝 본 게 고작이었는데, 내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남자가 착시가 아니라면 분명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는 미소 띤 얼굴로 그저 나를 그윽하게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민망할 정도로,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그와 내가 눈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결국 내가 먼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쌔미가 탁자 쪽으로 와 내 다리에 몸을 부비며 그르렁 댔기 때문에 시선을 돌릴 핑계도 생겼다. 나는 쌔미의 턱을 한참 동안 쓰다듬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리 안 아파요?”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그저 묵묵하게 서 있는 그 사람에게 뭔가 말을 걸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내가 말을 먼저 말을 건넨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역시 말이 없었다. 한번 더 물었다.

“거기 이틀째 서 있는데 다리 안아프냐구요. 다리 아프면 저기 소파에 앉아도 돼요.”

남자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1분여가 지난 뒤 이윽고 입을 뗐다.

“다리가 아프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내가 여기 서 있는 게 불편하다면 자리를 옮길게요.”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온화하고도 분명한 발음으로 그가 방금 내게 말을 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낯선 남자가 내게 말을 했다는 사실에 반가움이 생기는 내 마음이 이상했다. 어쩌면 그 남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올 때까지 내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말을 했다는 건, 이것 역시 이상하지만, 나로선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그에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 네. 조금...불편하네요. 일단 소파에 가서 앉으세요.”

남자는 조용히 발을 떼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사뿐하게 소파 한 켠에 앉았다. 그가 냉장고 옆에서 소파까지 가는 동안, 나는 그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건 마치, 바람결에 날린 꽃잎 한 장이 살짝 내려 앉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내 옆에서 그르렁 대던 쌔미가 이제서야 제 자리를 찾았다는 듯, 냉장고 옆으로 걸어가 앞발을 모으고 앉았다. 쌔미를 바라보다, 다시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더 말을 걸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쉬운 말은 “누구세요?”였다. 하지만 그 말은 왠지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그건 어제 아침에도 놀라서 했던 말이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나는 어렵사리 그와 대화를 하기 시작한 이 순간을 그의 정체를 탐문하는 데 쓰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왜 내 눈에만 보이는 건지에 대해서는 그가 혹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은 착시인가요?”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을 보고 있죠. 분명한 것은, 당신이 그런 것처럼 내가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내친 김에 나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왜 내 눈에만 당신이 보이는 것이죠?”

“그건 우리가 그렇게 설계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설계돼 있다니요?”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나는 당장 알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그와 내가 대화를 시작했다는 것이고, 나는 그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말을 해서 기.뻤.다.

나는 또 물었다.

“배 안고프세요? 지금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잖아요.”

“나는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왜냐면 당신을 보고 있기 때문이죠.”

그 대화가 오간 이후, 그는 내게만 보이는 남자일 뿐 아니라, 나를 보고 있는 남자가 됐다. 나를 보고 있는 남자.

월, 수, 금 오후에 주 사흘 나가는 구민센터 요가 시간을 빼면 내가 외출을 하는 경우는 마트에 장보러 가는 일 밖에는 없었다. 집에 있는 동안은 쌔미가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이제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집에 한 명 더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주절댔다. 잠잘 때 쌔미를 침실에 안들이면 밤새도록 침실문을 박박 긁어대면서 얼마나 투정을 부려대는지, 요가 시간에 어려운 동작을 소화하느라 어깨가 빠질 뻔 했다든지, 마트에 평소 사고 싶었던 새 물건이 들어왔는데 낱개로는 안팔아서 그냥 포기하고 와서 마음이 아프다든지,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 그는 때론 껄껄껄 호탕하게 웃었고, 때론 온화한 표정으로, 때론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들어줬다. 어느새 남자는 팔짱도 끼고 다리도 꼬며 내 말을 들어줬다. 나와의 대화가, 아니 내 말을 듣는 게 그도 무척이나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그는 내가 말을 시작하면 단 한순간도 내게 시선을 떼지 않고 특유의 부처님 미소 같은 표정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남편은 여전히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와 있을 때조차 나는 마치 혼잣말인 척하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불 없이 자면 안추울까?”

남편이 뜬금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 나는 얼버무렸다.

“아니, 쌔미 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사이에 남자는 그게 자신을 향한 질문이라는 걸 직감하는 듯 했다.

“나는 잠이 들지 않습니다. 온도도 느끼지 못하구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그의 존재가 일상이 되어 버린 뒤, 이를테며 침실로 들어갈 때도 작은 목소리로 “잘게요”하고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먼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남편이 “뭐라고 그런거야?” 하고 물으면 “이 세상이여, 저 잘 게요, 한거라구” 하고는 침실 문을 닫았다. 어쨌든 그 뒤로 잠을 설치는 일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을까. 하루는 남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남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하다니! 이걸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황당했지만, 나한테 그가 어지간히도 편한 사람이 돼 있었나 보다.

“참 좋은 분인 것 같습니다.”

그는 짧게 말했다.

“그래요, 좋은 사람이죠. 나는 다시 태어나도 우리 남편하고 결혼할 거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 그는 즉각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남편을 사랑하시죠?”

“물론이죠.”

대답하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생각해보니 그건 그가 내게 걸어온 첫번째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도 내게 질문을 해온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한마디 더 보탰다.

“사랑하니까 결혼을 했죠.”

그는 갑자기 정색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결혼하지 않는 세상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네?”

“결혼은 인간이 사유재산의 상속을 위해 만들어낸 제도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을 한다면, 그건 제도에 사랑이 굴복하는 셈이죠.”

“설령 그렇다 해도, 결혼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도 필요해요.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생명은 부모가 결혼을 했든 안했든 똑같이 소중한 것이죠. 그건 공동체가 책임질 문제입니다.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의 결혼 여부를 묻는 것은 미개한 짓입니다.”

결혼에 대한 그와 나의 토론은 그리 길게 가지는 않았다. 내가 이미 결혼한 상태인 것도 이유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야기가 슬쩍 아이로 흘러가는 게 나는 불편했다. 아무튼 그래서 먼저 화제를 바꾼 건 나였다.

“당신도 누군가를 사랑하나요?”

뜬금 없지만 궁금했다.

“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놀랍게도 그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당신, 입니다.”

나는 한참 동안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나는 엄연히 결혼한 여자이고, 이 남자가 착시이든 아니든, 그로부터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건 용납될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이 남자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괜스레 부아가 치밀어 물었다.

“언제나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나요?”

“쉽게 하는 게 아니라 마침내 하는 것입니다.”

“그 마침내가 그렇게 쉽나요?”

“간절하면 언젠가 때가 오고, 그 때가 오면 용감하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입니다.”

그 대화가 오간 뒤, 우리는 온종일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아니, 내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절대 먼저 말을 걸어 오지 않았으므로 내 침묵을 지켜만 봤다. 대신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저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지가 날 어떻게 안다고 사랑해? 어느날 갑자기 내 눈 앞에 나타나서 조금 알게 됐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러 꺼내다니, 정말 이상한 남자 아냐? 게다가 버젓이 남편까지 있는 여자한테, 그게 할 소리냐고. 어디서 굴러 들어온 남자인지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건 그렇게 흔하고 흔한가 보군.

그날 저녁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나는 채 신발도 벗지 않은 그에게 뛰어가 힘껏 안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리로 허리를 감쌌다.

“사랑해!”

남편은 조금 놀란 기색이더니, 쓰러질 듯 나를 부둥켜 안았다.

“우와, 오늘 뭐 이벤트 날이야?”

나는 그를 다짜고짜 침대로 밀고 갔다. 남편이 물었다.

“왜 이리 서두르실까? 오늘 배란일이야?”

나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의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남편 위에 올라탔다. 일부러 그랬는지, 내가 진짜로 성적으로 흥분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날 나와 그 남자가 나눈 대화, 그러니까 그가 날 사랑한다고 말한 데 대해 어떤 종류의 행동을 통해 거역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나를 사랑하는 남자, 그 사람은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이 사람 뿐이라고! 나는 그날 밤 목이 쉬도록 교성을 질러 댔다. 분명한 건, 그 소리를 들으면서 거실에 앉아 있을 그 남자를, 내가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4.



부부 관계까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생중계하고 있는 이 상황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어느 정도 일상의 한 부분 처럼 여겨진 것까진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내 눈에만 보인다는 것만 빼고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건 도를 넘어선 짓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건 사생활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다. 그가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순간부터, 그 뜬금 없고도 어이 없는 고백을 들을 뒤부터 그 남자는 내게 다시 내 일상에 침투한 스파이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 교성을 들었을 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에도 그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소파에서 아침해를 받으며 앉아 있었고, 침실을 나오는 나를 보며 씽긋 웃어보였다.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겸연쩍기도 하고, 황망하기도 했다. 보란 듯이 그 앞에서 남편과 사랑을 나눈 뒤, 나는 그가 어떤 심경일까 헤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단지, 그에게 이제 그만 떠나 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남편이 출근한 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한 시간 정도 말 없이 그 남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건네온 것은 그였다. 마치 내가 할 말을 미처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라도 챈 듯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사랑을 나누는 당신의 목소리가 참 예쁘게 들렸어요.”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그는 한술 더 떴다.

“당신이 사랑을 나누는 게 기뻤어요.”

이 순간에 나는 화를 내야 하는 게 지당한 것일까. 하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저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 그날 밤 나의 부부 관계를, 거실의 어둠 속에 홀로 앉아 그 상황을 소리로 전해 들었을 남자에게서 나올 얘기가 아니지 않은가. 화가 난다기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남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쁘다구요?”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물었다.

“네, 기뻤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면서요. 근데 내가 남편하고 그러는 게 기뻤다구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하는 것도 내겐 기쁨입니다.”

순간, 나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배가 아파올 정도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대개 사람은 지나치게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마주치게 되면 웃음이 나온다. 바로 그 순간이 내겐 그랬다. 한참을 깔깔 웃고 난 뒤, 나는 겨우 웃음을 추스리고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뭐 예수님인가요? 신인가요? 아, 나를 사랑한다는 게 인류로서 사랑한다는 뜻이었군요. 이제 오해가 좀 풀리는 것 같네요. 실례지만 종교가 기독교?”

내가 웃는 동안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던 남자는 말했다.

“아니요, 내가 있는 곳에서는 종교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 투영물에 불과하지요. 자연에 대한 두려움,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교를 만들어낸 것이죠. 말하자면 종교란 인간이 위안을 얻기 위한 인공물에 불과해요. 그리고 그 종교의 외피를 두른 수많은 폭력들이 자행됐죠.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신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어요.”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지금 종교론 따위를 듣자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당신은 나를 도대체 뭘로 사랑하는 건데요?”

“나는 당신을 연인으로서 사랑합니다.”

“연인이라고 그랬어요?”

“네. 연인.”

“버젓이 남편이 있는 여자를 연인이라고 부르고, 그 여자가 남편하고 성관계를 갖는 게 기쁘다구요? 그런 사랑을 당신이 있었던 곳에서는, 도대체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속한 세상에서는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나 보죠?”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지금 존재하고 있고, 그 존재로서의 희열, 그러니까 사랑을 함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게 기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남편을 존중하고, 당신에게 잘 대해주는 그 분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과 진심으로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이 정말 어여쁩니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이 남자의 사랑론에 수긍하기도 어렵거니와, 머리 속의 혼란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끝내 그에게 그만 떠나 달라는 말 역시 할 수 없었다. 기나 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대로 얘기를 종결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보는 환각임에 분명해요.”

“미리 말씀드린대로, 나는 환각이 아니라, 지금 당신 앞에 실재합니다. 나는 당신을 보고 있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놈의 사랑 타령 좀 그만 하실래요? 나는 당신이 도무지 왜 나를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느날 난데 없이 내 앞에 나타나서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당신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와, 좋다. 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내 눈에만 보이는구나, 너무 좋다, 그렇게 생각하시겠어요? 나는 지금 머리 속이 실타래처럼 엉켜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구요. 아시겠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건,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건 자유인데, 나는 그런 감정이 없다는 거예요. 당신은 그냥 유령 같은 사람일 뿐이라구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혼란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해 달라고 요청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다만, 당신이 나를 보고 있고, 내가 당신을 보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무한의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당신이 이 상황에 조금만 더 익숙해지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밖에 다른 기대 따위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남자는 말꼬리를 흐렸다.

“때가 되면?”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듯, 이 상황도 끝이 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나는 당신 앞에서 사라질 겁니다. 길지 않을 겁니다. 그 때까지만 내가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가 내 눈앞에서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 그만 떠나달라고 말하려고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이상한 일이다. 없었던 존재가 나타나 내 일상 안에 침투해 들어와 있는데, 그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만약, 지금의 상황이 끝이 난다면, 그러니까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저 남자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에 대해서도. 우스운 비교이지만, 나는 쌔미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 상황을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이 남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느새. 어느새 말이다.

그리고 또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베란다 바깥의 나무 그림자가 거실 안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날 오후에 요가 수업이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 즈음이었다.

“요가를...못가셨네요.”

그 남자가 알려줬다.



5.


나는 왠지 모르게 그와 나 사이의 공기를 눌러대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먹은 토스트 한 조각을 빼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마트에서 찬거리도 살 겸 가볍게 저녁을 먹을 요량으로 식탁 의자에서 일어 났다. 문득, 내가 집을 비울 때 저 남자는 뭘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쌔미야 혼자서도 잘 놀지만, 저 남자는 고양이가 아니지 않은가. 심심하거나 외롭거나, 그러지는 않을까.

“같이 가실래요?”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아, 마트에요?”

남자는 내가 어딜 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이 시간이면 어김 없이 마트에 갔기 때문이다. 남편은 거의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나도 마트가 저녁을 해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네, 집 바깥에도 나갈 수 있어요? 집 바깥으로 나가면 휘리릭 증발되거나 그러는 거 아니에요?”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럴리가요. 같이 가는 게 괜찮으시다면야, 나로선 행복한 일이죠.”

그날 저녁 처음으로 남자와 집 밖으로 나왔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한 블록 떨어진 마트에 들어서자, 남자는 세상에서 이런 걸 처음 본 것처럼 눈빛을 반짝하며 주위를 둘러 봤다. 내가 카트를 밀며 앞으로 나아가면 그는 카트 옆에 바짝 붙어 나와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이 큰 수레 안에 가득 물건을 실으실 건가요?”

그러고 보니 요즘 남자는 먼저 질문을 자주 한다.

“아, 아니에요. 그냥 카트가 편하잖아요.”

“아까 보니까 여기에 물건을 가득 실은 분들도 계시던데요.”

“살림이 큰 분들인가 보죠.”

“그렇게 사가면 얼마나 먹나요?”

“한 일주일치를 한꺼번에 사가는 분들도 많아요. 나야, 매일 오니까 내일 먹을 거 정도 사지만.”

“오늘은 뭘 살 생각이신가요?”

“글쎄요, 우유가 떨어져서 사야 하구요. 그리고 키친 타월.”

“그게 다인가요?”

“네, 오늘은 그거만 사면 돼요.”

“아항.”

남자는 뒷머리를 긁었다.

“왜요? 문제 있어요?”

“아뇨, 내가 알기로 그 정도는 동네 상점에서도 팔지 않을까 해서, 굳이 이 큰 마트까지 와서 그걸 사야하는건가, 궁금해서요.”

“그냥...마트가 편해요. 이 넓직한 분위기도 좋고.”

“남편과는 자주 마트에 오시나요?”

“남편은 마트에 오는 거 싫어해요. 카트 밀고 있는 남자들 궁상 맞아 보인다나.”

그 말을 하자마자, 나는 이 남자에게 내 남편 흉을 본 게 아닌가 속으로 뜨끔했다.

“그렇죠. 누구나 취향이란 게 있으니까요.”

남자가 그렇게 말해 나는 안심했다. 아까부터 나를 이상한 듯 힐끔 힐끔 보던 여자가 내 옆으로 스쳐갔다.

마트 한 켠의 푸드 코트에서 카레 돈까스를 시켰다. 남자는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으니, 나만 혼자 먹었다. 돈까스 한 조각을 오물거리며 나는 물었다.

“어째서 밥을 안 먹고도 버틸 수 있죠?”

“말했잖아요. 당신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네요. 하긴 당신이란 존재가 이해 불가능이죠.”

남자는 웃었다.

“이해 불가능이란 어감이 좋네요.”

“별 게 다 어감이 좋아요.”

남자는 장난스럽게 내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내뱉었다.

“이.해.불.가.능.”

남자가 귀엽다는 생각을 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갑자기 야근이 걸렸어. 많이 늦을 것 같으니까 먼저 자.”

어차피 일주일에 이삼일은 자정이 넘은 뒤 돌아오는 남편이니 그러려니 했다.

“고생해, 저녁 잘 챙겨 먹고.”

잠시 서서 답 문자를 보낸 뒤, 나는 남자와 함께 마트에서 집까지 200미터 정도의 거리를 함께 걸었다. 남자는 내 옆에서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내 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생각해보니 지금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그가 우리 집에 나타난 뒤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하긴 마트에서부터 죽 그랬다. 바람에 실려온 냄새인지, 그의 냄새인지 분간이 안됐지만, 그의 주변에서 페퍼민트 향 같은 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에 나는 처음으로 그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내가 왜 그동안 소파에 앉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나타난 이후로 식탁 의자에 앉는 게 편했다. 우선 식탁 의자는 그와 나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주었고, 무엇보다 그를 바라보기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소파에 몸을 부리고 싶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먼저 소파에 앉았고, 그가 조용히 내 곁에 와서 앉았던 것이다.

나는 소파 손걸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는 수줍은 듯 나를 봤다가 허공을 봤다가를 반복했다.

“실재라...환각이 아니라 실재라...”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자는 내 쪽을 힐끔 봤다. 그리고 또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실재라면 그러니까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실제로 형체를 지니고 있다는 얘기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온도를 느끼지 않는다고 했는데, 체온 같은 거는 없나요?”

“당신이 느끼면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형체도, 체온도, 당신이 느끼고 싶으면 존재합니다.”

“어디!”

장난끼의 소산이었는지 정말 호기심이 일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에게 바짝 붙어 앉으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금 쓰다 듬어 보았다. 약간 짧은 그의 머리결이 쌔미의 털처럼 부드러웠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목덜미 쪽으로 손을 옮겼다.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피부였다. 체온이 느껴졌다. 각진 그의 턱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만 들여다 보니 입술이 남자 치고는 얇은 편이었다. 내가 그의 옆 얼굴을 훓고 있는 사이, 남자는 마네킹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사람이네요.”

남자는 내 눈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 집에 온 다음날 내게 건넸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나는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을 보고 있죠. 분명한 것은, 당신이 그런 것처럼 내가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 나는 그와 함께 침대에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단지 그를 등 뒤에서 안았을 뿐이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포근했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모처럼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눈을 뜬 것 같은데 다음날 아침이 돼 있었다. 침실에 스며든 침침한 빛을 보아 하니 아직 자명종이 울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등 뒤에 체온이 느껴졌다. 남편이 아침에 입고 나간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자고 있었다. 그에게서 술 냄새가 났고, 살풋 코를 골고 있다. 나는 남자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다. 남자는 내 오른쪽 손을 꼭 쥐고 있었다.



6.


남자가 우리 집에 나타난 지 한달이 다 됐다. 그동안 나는 남자와 함께 매일 쇼핑을 같이 했다. 그날 그날 살 것을 미리 메모지에 써서 마트에 가던 게 버릇이지만, 그와 함께 하면서 어느새 나는 즉흥 쇼핑을 즐기게 됐다. 그가 “이게 뭐에요?” 하고 상품을 가르치면, 그게 어떤 용도인지 설명해주고는 냉큼 집어 카트에 집어 넣는 일이 빈번해졌다. 사실 필요 없는 물건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호기심을 드러내는 물건들이 괜히 좋았다. 그리고 그걸 집안에 차곡 차곡 쌓아두는 일도.

하루는 요가 시간에도 따라왔다. 물론 내가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요가를 하는 동안 남자는 미소를 품은 채 나의 동작 하나 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나는 그의 시선이 좋았다. 요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바짝 따라붙은 남자가 말했다. “고양이를 키우셔서 그런가, 고양이 자세는 참 잘하시네요.” 나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툭 쳤다.

그 즈음에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낮이 조금씩 짧아졌는데, 거실로 스며드는 빛은 더 영롱해졌다. 남자는 그 찬란한 햇빛이 무척 사랑스러운 듯, 베란다 바깥을 한 없이 바라볼 때가 많았다. 물론, 내가 말을 걸면 즉각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언제나 그렇듯, 미소를 지으며 내 얘기를 들었다. 요가 수업이 없는 날 오후, 나는 그에게 제안을 했다.

“호수에 갈래요?”

“호수요?”

“네, 여기서 가까워요.”

“전엔 남편하고 자주 호수 산책을 갔었어요. 요즘 들어 도통 못가지만 말이에요. 당신도 보셨다시피, 남편은 평일에는 일찍 들어와 봤자 밤 10시이고, 주말에는 골프를 치러 가잖아요. 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까요. 갑자기 그 호수에 가보고 싶네요.”

그는 기분이 아주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은 없지만 활짝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나는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그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그저께 마트에서 샀던 스파클링 와인을 가지고 나가요. 이 날씨에 호수변에서 마시면 정말 맛있을 거예요.”

호수변의 나무들은 여전히 울창했다. 매미 소리는 가라 앉았지만, 여름 내 한껏 자란 잎사귀들은 여전히 힘차게 매달려 있었다. 호수는 미세한 여울이 이는 걸 빼고는 나무며, 흰구름이며, 파란 하늘을 그대로 수면 위로 담고 있었다.

호수변을 반 바퀴쯤 돌았을 무렵, 그가 말했다.

“저 나무 아래 자리를 잡는 게 좋겠군요.”

하필 바로 옆에 송전탑이 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나무가 지난 번 이곳에 왔을 때 남편과 함께 앉았던 바로 그 자리라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누가 봐도 그 자리가 명당인지 몰라도, 남자는 단번에 그 나무 밑을 가르켰던 것이다.

자리를 깔고 준비해 온 스파클링 와인을 내놓았다. 역시 가방 안에 준비해 온 길고 주둥이가 좁은 샴페인 잔 두 개도 꺼냈다.

그와 나는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을 거의 단숨에 마셔 버렸다. 특히 대화도 나눌 이유가 없었다. 그냥 건배를 하고, 들이키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늦여름의 바람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모처럼 더 없는 충만감을 느꼈다. 그게 지금 이 계절에 이 장소에 와서인지, 아니면 내 일상의 일부가 돼 버린 이 남자와 함께여서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 시각만큼은 내게 완벽했다. 더 빼고 가미할 그 무엇도 필요 없는,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이 내 인생에서 몇 번이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무 옆에는 작고 낮은 언덕이 있었다. 호수를 조성하면서 인공적으로 만든 언덕이다. 갈풀이 제법 자라 있었다. 느릿 느릿 불어오는 바람에 갈풀이 흔들렸다. 나는 약간의 취기를 안고 갈풀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대자로 누워 버렸다. 구름들이 서쪽으로 마구 달려가고 있었고, 하늘 가장 자리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체취가, 그러니까 페퍼민트 향 같은 그 냄새가 내 겨드랑이 쪽으로 훅 들어왔다. 고개를 돌렸더니 남자가 내 옆에 나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다. 그리고 우린 자연스레 손을 잡았다.

10분 정도 하늘을 올려다 보다 나는 말했다.

“당신이 속해 있던 세상에도 이런 풍경이 보이나요?”

“아마도요?”

나는 남자 쪽으로 몸을 돌려 팔로 고개를 받친 채 말했다.

“무슨 그런 대답이 있어요?”

“풍경이란 건,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란 건, 누구와 함께 보느냐에 따라 아주 다르거든요. 아마도 어느 시절에는 나도 이런 비슷한 풍경에 지금처럼 감탄했을 때가 있었던 것 같아요.”

“말해봐요.”

“네?”

“여기에는 있지만 당신의 세상에 없는 거.”

“음...많지요. 일단 내가 속한 세상에는 결혼이 없어요. 그리고 종교도 없어요. 그리고 내겐...”

그는 말끝을 흐렸다.

“당신에겐?”

“당신이 없지요.”

그 말을 하는 그의 눈망울에 살짝 빛이 반사되는 듯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눈을 감았고, 나는 입을 맞추면서도 그의 눈을 보았다. 그의 숨결이 내 코 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페퍼민트 향이 진해졌다.

다시 대자로 누우며 나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아!”

그리고 또박 또박 다섯 음절을 하늘을 향해 내뱉었다.

“이.해.불.가.능.”



7.


남편이 주말 골프 약속을 취소했다. 그리고 아침 나절부터 소파 위에 드러누워 한참 TV를 봤다. 남편이 소파 팔걸이를 배게 삼았기 때문에 남자는 식탁 의자로 옮겨와 앉아 있었다. 남편 때문에 나는 남자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점심 찬거리를 다듬으면서 마음이 답답해 졌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남자의 존재를 남편에게 말할까? 어쨌든 내 일상의 중요한 한 부분인데, 내가 진지하게 말을 하면 남편은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아냐, 그럴 수 없어. 나는 이 사람과 감정적 교류를 하고 있는 거잖아. 말하자면 불륜. 물론 같이 잔 적은 없지만 이것도 이를테면 정신적 간음이라면 할 말이 없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에 언뜻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네?”하고 남자 쪽을 돌아봤다. 나를 부른 건 남편이었다.

“갑자기 왠 존댓말?”

“으..응. 불렀어?”

“정신이 빠진 사람 같아.”

남편이 식탁 쪽으로 걸어왔고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얘기 좀 하자고.”

남자는 엉거주춤 일어나 이번에는 소파 쪽으로 가 앉았다.

“무슨 얘기?”

나는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아내며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당신 요즘 좀 이상해.”

“내가? 내가 뭐가 이상해.”

“아니 예전의 당신이 아닌 것 같아. 그냥...뭐랄까, 어디엔가 혼이 좀 빠져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무슨 소리야. 난 지극히 정상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남자 쪽을 힐끔 봤다.

남자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해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다고...”

“당신 가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거 있잖아. 그거 우울증 증세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내 직장 동료가 그러더라고. 자기 와이프도 그런 거 있다고.”

“내가 무슨 우울증?”

“지난 주말에 당신하고 내가 아기 만들기 할 때 말야. 당신 왜 그랬어?”

“응? 내가 뭘?”

“당신 손 말이야. 당신 손이 침대 바깥으로 뻗어서 뭔가를 꽉 쥐고 있더라고.”

“아, 그거, 뭘 그런 걸 알려고 그래?”

“평소에 당신이 하던 행동이 아니라서 좀 놀랐어.”

“내가 그날 너무 흥분했나 보지.”

“그뿐이라면 말을 안하지.”

“무슨?”

“얼마전에 친구 부부가 당신을 마트에서 우연히 봤대. 근데 당신이 혼자서 막 웃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래.”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티가 날 수밖에 없었던 건가. 남자 쪽을 봤다. 남자가 등을 돌린 채 베란다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 왜 그에게 미안한지는 몰라도, 나는 소파 쪽으로 뛰어가서 그의 등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말을 했다.

“요즘 내 혼자 놀기 방식이야. 그냥 상상 속의 친구를 만들어서 대화를 나눠.”

남편이 말했다.

“당신, 직장에 다시 다녀보는 건 어때.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결혼한 뒤로 쭉 그랬잖아. 나도 솔직히 당신이 늘 집에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리고.”

그가 직장 얘기를 꺼내자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 내가 직장 생활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 알잖아. 계약직 사원으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2년에 한번씩 실직자 되는 거, 그거 쉬운 일 아니야. 당신 실업 연금 받으러 가봤어? 지금 내가 밖에 나가봤자, 당신처럼 정규직으로 취직할 수 있을 거 같아? 그 더러운 꼴 또 겪고 사느니 그냥 혼자 있는 게 나아. 왜, 내가 돈 안벌어와서 힘들어? 나도 돈 벌어오는 게 좋겠어? 마트에라도 취직할까?”

남편도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남편은 한동안 거실을 서성이다가 결국 담배를 챙겨 현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식탁 의자에 미동도 않고 앉은 채, 나는 이런 꼴을 남자에게 보인 게 민망하고 거북스러워 침묵을 지켰다. 그 사이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뻐요.”

나는 무릎 사이로 숙였던 고개를 들며 찬찬히 남자를 바라봤다. 역시나 웃고 있었다.

“뭐라구요?”

“당신을 걱정해주시는 남편분, 예뻐요.”

“미안해요. 이런 꼴 보여서. 하지만 이건 내 문제니까 당신은 괜한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않아요. 나는 다만, 당신과 그의 이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울 뿐이에요.”

남자가 천천히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갰다.

“나는 결혼으로 도망쳐 왔어요. 그게 맞아요. 직장 생활이란 게 너무 힘들고, 툭하면 급여가 밀렸죠. 안정이 필요했어요. 때마침 좋은 남자를 만났죠. 그래서 사랑하게 됐구요. 하지만 중간에 낀 기분이 간혹 들었어요.”

“중간에 끼다니요?”

“사람들 속의 외로움과 혼자 있는 외로움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버렸죠. 남편은 좋은 사람이고 많은 위안이 되지만, 또 남편이 내게 다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고맙지만, 어쩔 땐, 정말 이런 생각이 못된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가 원래 그런 게 아니라 노력하고 있는 거라는 게 간혹 미울 때가 있어요. 뭔가 연출을 하고 있다는 느낌,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남편은 집에 와서도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나도 거기에 어느 정도 맞춰주고 있는 평생 계약직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구요.”

“그건 서로에게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대요?”

“남녀가 결혼을 통해 함께 생활을 꾸리다 보면 기대라는 걸 품게 된다고 들었어요. 온전히 대상 그대로의 존재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주어진 역할,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 혹은 아빠나 엄마로서의 역할에 관습적으로 주어진 기대로 사랑이 변모하게 된다는 거죠. 그 기대가 엇갈리게 되면 사랑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는 거라고요. 하지만 분명한 건, 당신과 남편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나는 그걸 분명히 알 수 있어요.”

나는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당신도 내게 기대가 있나요?”

“당신이 내가 바라보는 것을 받아들였으니 내겐 그 이상의 기대 따위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 없이 행복합니다.”

남자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말했다.



8.


사는 동안 늘 불행한 시기란 것도 없고, 늘 행복한 시기란 것도 없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해 우리는 행과 불행의 숱한 굴곡을 오르 내리며 살아간다. 다만 어떤 순간에, 극도의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삶이란, 어쩌면 그 희열의 순간들을 더 자주, 또는 더 길게 느껴보고자 하는 욕망의 점철일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진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남자가 내 눈 앞에 나타난 뒤, 나는 그런 순간들을 통과해 왔다. 남편이 나를 의심하는 듯했을 때는 간혹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남자와 함께 있는 그 모든 순간들이 행복했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극도의 희열에 빠져든 뒤면 어김 없이 즉각적인 불안이 엄습했다. 이 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곧 끝나 버리는 건 아닐까. 끝났을 때의 상실감이 크다면 차라리 이 순간을 겪지 않은 게 차라리 좋았던 게 아닐까.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마침내 그 순간이 끝나는 시점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초겨울로 접어들 무렵의 그 날 아침, 나와 남자는 불청객을 맞이했다. 나 말고도 남자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남자가 내 거실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남자라기보다는 노인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그 노인은 남자를 화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고, 남자가 나타났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은, 남편이 현관문을 닫고 나간 즉시 내게 그 상황이 인지됐다는 것이다.

노인은 내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듯, 남자에게 윽박 질렀다.

“자네는 귀환 시그널을 세 번이나 거역했어.”

“어쩔 수 없었네.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 먹은 순간마다, 내게 더 없이 소중한 일들이 벌어졌다네.”

나이차가 족히 50년 이상은 날 법한 두 남자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풍경이 기이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오는 수고를 해야 했지.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때가 됐어. 지금 돌아가지 않는다면, 자네의 기대 수명을 넘어서는 기간동안 여기 머물게 되는 셈이고, 그러면 그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거야.”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이 대화에 끼어 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 잠깐만요. 누구시죠? 이 분은?”

노인이 나를 돌아봤다. 그는 나를 보며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그건 남자를 향해 한 말이었다.

“정인 씨의 모습은 그대로이군.”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거죠?”

돌이켜보니, 남자도 내 이름을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고, 나도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남자의 이름을 몰랐다. 우린 서로 “당신”이라고 부르는 게 익숙했으니까. 남자가 노인을 향해 말했다.

“알겠네. 하지만 내게 조금만 시간을 주게.”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여기 시간으로 십분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시간으로는 일주일이란 말일세. 자네가 약속된 시간보다 여기 너무 오래 머무는 바람에 생체 상황이 악화됐고, 노화까지 겹치면서 위독한 지경이 됐어. 만일 자네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그건 고스란히 내 책임이 된다는 얘기일세.”

나는 또 끼어 들었다.

“여기 시간은 뭐고 우리 시간은 뭐예요?”

소파에 앉아 서 있는 노인과 나를 번갈아 올려 보던 남자는 내게 손짓을 해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남자를 바라봤다.

“전에 내가 말했었죠. 영원한 것은 없다고. 이제 내가 사라질 시간이 온 것 같아요.”

나는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고개를 저으며 남자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내 전생의 남자인가요?”

“일종의 그런 겁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어서 더 이상 여기 머물 수 없게 됐어요.”

노인이 끼어 들었다.

“정인씨, 저 친구는 당신의 전생의 남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다음 생애의 연인입니다. 저 친구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아 그러니까 여기 시간으로 6개월 전 당신을 잃었어요. 당신이 죽은거죠. 당신이 죽은 걸 끝내 인정하지 않길래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얼마전 저희 회사가 개발한 전생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활용하자구요.”

“전생 시뮬레이션? 아, 그딴 거 복잡해서 잘 모르겠구요. 그러니까 미래에서 왔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일종의 시간 여행인가요?”

“시간 여행은 이미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우리가 개발한 것은 사람의 유전자 속에 담겨진 전생 데이터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서 전생 시뮬레이션을 만들죠. 지금 저 친구는 정인씨의 전생 시뮬에이션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죠.”

나는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나는 이 남자와 헤어져야 하는 순간을 맞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노인이 다시 남자를 재촉했다.

“꿈만 꾸다가 늙어 죽을 생각인가? 지금 돌아가도 자네 나이가 벌써 아흔이라고!”

남자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워 꼭 안았다.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나는 눈물이 났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남자는 나를 더 힘껏 안았다. 그리고 처음 우리 집에 나타났을 때의 그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 줬다.

이별의 순간에는 말을 아끼는 게 좋다고 누가 가르쳐 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그 어떤 이별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너무 잔인했다. 대신 나는 물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나요?

남자는 말했다.

“네,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가 언제인가요?”

“아주 먼 미래입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먼 미래.”

“지금의 나는 당신이 꾸는 꿈인가요?”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빛이 두 사람을 삼켜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남자는 없었다. 그가 내 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나는 거실에서 한참 동안을 서 있어야 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찬 바람이 스며 들었다. 정적 속에서 나는 그와 함께 했던 그 순간들을 하나 하나씩 곱씹어 기억해 냈다. 멀리 깜빡이는 빛이 보였다. 빛은 점점 더 우리 집 창쪽으로 가까이 다가섰고, 가까워질수록 눈이 부실만큼 찬란했다. 그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본 가장 아름다운 빛이었다. 나는 빛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마치 그 빛이 내 품 안에 안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미 사라져 버린 남자를 향해 말했다.

“꿈에서 깨고 나면, 부디 행복해져요.”






에필로그.


꿈에서 깨어난 뒤 나는 아흔 살이 돼 있었던데다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돼 한달이나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새 60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보낸 6개월 동안의 꿈만큼은 60년의 세월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정인에 대한 기억을 그렇게 내 회한의 늪으로부터 탈출시켰다.

내게 전생 복원 시뮬레이션을 제안했던 친구로부터 어제 연락이 왔다. 그는 말했다.

“참 희한한 일이 벌어졌네.”

“무슨 일인가?”

“정인씨의 유전자 전생 데이터에서 새로운 기록이 발견됐다네.”

세상은 여전히 과학으로 증명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특히나 그게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랑은 인간이 풀지 못한 유일한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내가 설계한 나의 꿈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데, 그 경험이 정인의 전생 데이터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나는 그 기록을 받아 안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이.해.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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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나잇' 세월은 흐르고

영화 이야기 2013/05/17 06:59 Posted by cinemAgora



<비포 미드나잇>을 언론 시사로 봤습니다. 여전히 이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주인공입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달뜨고 설렌 사랑에 무작정 비엔나에 내렸던 그 때가 이십대 초반이었으니까 이제 그들은 마흔이 넘었습니다. 

<비포 선셋>에서의 우연하고도 강렬한 재회를 거쳐 <비포 미드나잇>에서 두 사람은 같이 사는 사이가 됐습니다. 게다가 둘 사이에 쌍둥이 딸도 생겼습니다. 이단 호크는 미국에 사는 전처와 이혼하고 줄리 델피와 프랑스에 새 살림을 꾸렸고, 7년 정도 같이 산 것으로 설정돼 있더군요. 

<비포 선라이즈>에선 살떨리는 로맨스를 나누던 그들은 <비포 선셋>에서 온갖 철학과 예술을 논하더니, <비포 미드나잇>에선 그리스로 휴가 여행을 와 고작 아이들의 양육 문제와 이단 호크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문제를 놓고 영화 내내 다툽니다. 나이가 들고, 로맨스는 증발되고, 이제 그들에게도 "생활"이 남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종종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줄리 델피가 묻죠. "지금의 내 모습이라면, 당신이 기차 안에서 우연히 나를 보고 그때처럼 무작정 함께 내리자고 하겠어?" 이단 호크는 슬쩍 비껴갑니다. "질문을 이렇게 해보지, 만약 내 모습의 남자가 당신한테 무작정 같이 내리자고 하면 내리겠어?" 줄리 델피는 흔쾌히 말합니다. "누가 당신 같은 늙은 남자한테 반해서 내리겠어?" 

세월은 흐르고, 그 아름다웠던 청춘 남녀도 변했습니다. 이단 호크는 아랫배가 쳐진 아저씨가 됐고, 줄리 델피는 뚱뚱한 아줌마가 돼 버렸죠. 영화의 배경이 그리스라는 건 의미심장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를 거닐며 그들은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 속에서 인간의 감정 또한 흔적으로만 남는다는 것을 새삼 깨우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끝끝내 로맨스의 흔적을 상기하는 것, 그것도 어쩌면 사랑의 한 측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면서 했습니다. 

어쨌든 아저씨 아줌마가 돼 버린 두 사람은 여전히 어여쁘고, 여전히 사랑스럽습니다.

트위터에는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이렇게 썼습니다. "영화 사상 가장 멋진 부부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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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부산 MBC

연출: 원혜영

구성/진행: 최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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