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영화 이야기 2018. 8. 1. 10:04 Posted by cinemAgora

영화평을 쓰면서 웬만하면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윤종빈 감독의 <공작>을 소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단어를 쓰기로 한다. 

디제시스(diegesis). 흔히 '창의적 허구'라는 말로 번역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허구적 세계를 총칭하는 용어다. 관객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이 디제시스의 세상 속으로 기꺼이 빠져들 준비를 하는데, 관건은 영화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디제시스를 제시하느냐에 달렸다. 이를테면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디제시스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다. 

윤종빈 감독의 영화 <공작>을 보면서 나는 흔쾌히 디제시스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1990년대 초중반의 북파 공작원 흑금성(황정민)의 실화를 풀어가는 이 영화는 초반부에 지나치게 설명적이어서 영화적인 후킹이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라디오로 듣는 정치극 드라마나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묘하게도 영화가 중반으로 치달아 가면서, 그러니까 흑금성이 남한 출신의 사업가를 사칭해 북한 고위 관료들과 접촉하는 순간부터 영화의 논리에 서서히 침잠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디제시스가 뒤늦게 발동했지만, 꽤나 눅진하게 빠져 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작>은 작품적으로는 기존의 한국영화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윤종빈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정공법이었고, 따라서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직진한다. 장면 연출에서조차 겉멋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그 흔한 추격신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과연 이런 전략이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괜스레 걱정했다. 그 동시대의 관객들은 윤종빈의 동시대 감독들이 망쳐 놓은 영화 문법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즉,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디제시스를 선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좋은 창작자는 시대에 구속된 인물을 통해 시대를 논평한다. 윤종빈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통해 그걸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다음 작품 <군도>는 실패했다. 아마도 그가 강동원에게 너무 빠져 버렸거나 잔재주의 유혹에 휘둘렸기 때문일 것이다. <공작>은 그가 다시 시대성으로 정직하게 돌아오려는 고민의 산물이다. 그의 고민이 읽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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