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침체를 부른 거품들 ①

영화 이야기 2008. 3. 2. 11:16 Posted by cinemAgora

한국영화계는 요즘 양치기 소년 신세가 됐다. '위기'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기만 하면 관객들이 콧방귀부터 뀌기 일쑤다. 한 두 작품의 성패에 따라 한국영화의 부활과 위기론을 되풀이해온 언론 덕분에, 관객들은 뭐가 진실인지 헛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번에는 진짜 늑대가 찾아왔다. 그것도 아주 사납고 잔인한 녀석이다. 양들은 물론 양치기 소년까지 잡아 먹힐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소를 잃는 것을 떠나 지금은 외양간이 무너질 판이라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위기론 앞에 저마다의 진단과 해법이 잇따르고 있다. 전가의 보도처럼 자주 등장하는 진단명은 '창의력의 위기'이다. 독창성과 상상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다. 한국영화계의 창작자들이 다들 배가 불렀을까, 아니면 머리들이 죄다 굳어 버린 걸까.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창의력의 고갈'은 한국영화가 앓고 있는 병의 증후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근본적인 발병 원인이 아니다. 그러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우선 창의력을 되찾는 길밖에는 없다는 말은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담배만 끊으면 된다는 말만 듣는 것처럼 공허하다. 제대로 된 의사라면 병의 원인을 찾아내 당장 그것부터 제거하기 위한 처방을 내릴 것이다. 당장 산업이 궤멸 직전에 놓였는데, 창의력 운운하며 세월 좋은 소리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국적별 시장 점유율 50%를 상회하고 있는 지표만 본다면, 한국영화 산업의 규모는 작지 않아 보인다. 지난해 국내 영화산업의 규모는 1조 3천억 원 정도. 여기에서 실질 매출액을 기준으로 한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만 뽑아보면 7천 억 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액수만으로는 산업 규모가 쉽게 가늠이 안 되는 분들을 위해 다른 업종과 비교를 해본다면, 카지노 업소인 '강원랜드'의 연간 매출액과 비슷한 규모이며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연간 매출액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하나의 산업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한국영화는 여전히 구멍가게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작은 구멍 가게 수준의 한국영화계가 마치 엄청난 산업 규모를 이룬 것처럼 보이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거대한 착시 현상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가진 특수성과 영화를 해외에 진출한 스포츠 스타들과 동일시하며 애국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언론에 의해 한국영화의 산업규모가 잔뜩 부풀려지는 데서 한 요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자생력을 갖지 못할 정도로 구조적으로 취약한 한국영화 산업이 IMF 이후 한국 경제를 왜곡시켜온 제반 거품 현상에 의해 견인돼 왔으며, 따라서 구조적으로 더욱 취약한 상태로 내몰렸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나는, 세 차례로 나뉘어 연재될 이 글에서 한국영화 전성기의 착시 현상이 크게 네 가지 거품에 의해 연출돼 왔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자.
 
버블 #1: 부동산 투기 붐
 
흔히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끈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로 '멀티플렉스의 팽창'을 꼽는 경우가 많다. 최근 몇 년 새 CJ CGV와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을 필두로 한 멀티플렉스 체인이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나 1997년에 497개였던 전국 스크린 수는 2007년 말 기준 2058개(영화진흥위원회 집계)로 10년 동안 무려 네 배 이상 급증했다. 2007년 한해 동안만 해도 178개의 스크린이 추가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멀티플렉스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수도권보다 상권 개발과 더불어 단관 극장의 멀티플렉스화가 진행중인 지방 쪽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멀티플렉스의 팽창은 10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을 대규모 개봉 스크린의 확보가 수월해졌음을 의미한다. 와이드 릴리스 배급 방식은 이제 흥행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가 됐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불러 일으킬 만큼 한 두 편의 영화가 전국 스크린의 절반 가까이를 한꺼번에 독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졌다. 투자자 입장에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단기간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게 된 셈이니 멀티플렉스 팽창이 가져다 준 영화 유통 환경의 변화는 잠재적 투자자들에겐 새로운 기회를 의미한다. 와이드 릴리스 배급 방식이 주는 이점이 다른 리스크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순진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말이다.

어쨌든, 여기서 따져 봐야 할 것은 거꾸로 멀티플렉스가 이처럼 크게 늘어난 원인이다. 혹자는 거주지 중심의 관람 패턴 일반화와 더불어 영화 콘텐츠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향상된 데서 원인을 찾지만,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도 지금의 영화 콘텐츠가 양적으로 다양해진 것도 아닌데다, 질적으로 훨씬 우수해졌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거주지 중심의 관람 패턴이라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멀티플렉스가 팽창한 데 따른 영향으로 봐야지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조금 더 치밀하게 들여다 보면, 특히 2000년 이후 뚜렷해지기 시작한 멀티플렉스의 폭증 현상은 부동산 투기 열풍이 최근의 거품 현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과정과 거의 맞물리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2000년을 전후해 서울 강남에서 촉발된 아파트 재건축 붐은 IMF로 철퇴를 맞고 주춤한 바 있는 한국 경제의 고질병, 즉 부동산 투기를 다시 촉발시켰다. 너나 할 것 없는 재개발 붐은 서울 강북 지역과 수도권뿐 아니라 최근엔 거의 전국적인 현상으로 퍼져 나갔다. 지역마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거기엔 어김 없이 대규모 상권이 형성됐다.

투자한 상권의 가치를 올려야 하는 투자자들은 유동인구의 확보를 위해 가장 먼저 멀티플렉스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극장이 생기면 관객들이 드나 들 것이고, 이들이 자연스럽게 다른 상점으로 유입되는 고객이 된다. 이른바 '샤워 효과'를 노리는 데 멀티플렉스만한 게 없는 것이다. 건물주들은 직접 극장 설비 투자를 함으로써 극장 운영의 노하우를 가진 기존 멀티플렉스 체인업체를 비교적 손쉽게 끌어들여 위탁 운영을 맡긴다. 멀티플렉스 업체로선 특별한 신규 투자 없이 사이트 하나를 더 늘릴 수 있는 셈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체인이 늘어날수록 모기업인 투자 배급사의 배급력도 커지는데다, 사이트 오픈 때 들어가는 극장 부지 매입료나 임대료, 설비 투자금을 쓸 필요가 없으니 특별히 손해 볼 장사도 아닌 셈이다. 설령 관객이 좀 안 든다 하더라도 상영관 내 광고료와 식음료 판매로만 직원들의 인건비는 충분히 뽑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지난 몇 년 사이의 멀티플렉스 폭증은 지역 부동산 업주들과 멀티플렉스 체인업체 사이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그 작품이 영화 산업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오히려 영화 콘텐츠의 가격 시스템을 교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상권의 부동산 가치를 높여주기 위해 멀티플렉스가 우후죽순격으로 '동원'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포화 상태를 넘어섰고, 이미 부작용들이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 급속도로 멀티플렉스화가 진행된 광주 지역의 경우 인구는 부산의 3분의 1을 약간 웃돌지만 스크린수는 부산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자연히 스크린당 인구수는 전국 최하위다. 치밀한 수요 분석 없이 당장 상권의 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계산 때문에 무분별하게 멀티플렉스가 생겨 났다는 반증이다.

수요를 넘어선 공급은 자연스럽게 멀티플렉스 간 과열 경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가격 덤핑이다. 오래된 전통의 지방 단관 극장들이 운영난으로 멀티플렉스에 투항하는 사례가 빈번해진 한편, 대규모 멀티플렉스 업체들은 멤버십 할인 경쟁으로 영화 유통의 가격 시스템을 교란하기 시작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단돈 2천 원이면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다. 이런 마당에 비싼 돈 들여 DVD를 구입하는건 관객 입장에서도 결코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다. 만약 보고 싶은 영화를 놓쳤을 경우, 불법 다운로드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극장 요금의 가격 덤핑이 부가 판권 시장의 궤멸과 맞물려 있는 셈이다.

결국 이렇게 영화 관람료를 할인해줌으로써 생긴 손실과 파장은 고스란히 투자 배급사와 제작사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던가. 지역 부동산업주들과 멀티플렉스의 이해를 위해 영화 산업이 곪아 터지고 있는 것이다. 새우등을 짓뭉갠 고래 싸움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영화계를 곪게 만든 두 번째 거품을 살펴보자.

(다음에 계속)

#영화주간지 '무비위크'의 '한국영화의 재발명'이라는 특집 기사에 기고한 글의 원문입니다. 분량이 길어 일주일 동안 순차적으로 세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연재순서
1. 버블#1 부동산 투기 붐
2. 버블#2 이동통신과 신용카드의 고객쟁탈전 / 버블 #3 벤처캐피털과 공적자금
3. 버블#4 우회상장 붐 / 거품, 어떻게 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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