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전성기가 IMF 이후 한국 경제를 왜곡시켜온 거품 현상에 의해 견인돼 왔다고 주장하는 '거품 시리즈' 두번째 글. 영화 상품의 가격 시스템을 교란한 주범으로 꼽히고 있는 이동통신과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관람료 할인 경쟁의 부작용을 짚어보고, 영상투자조합으로 대표되는 '실패를 감수한 시드머니' 정책의 그늘을 톺아본다.

버블 #2: 이동통신과 신용카드의 고객 쟁탈전
 
지난 2006년 극장업계와 이동통신 서비스업체들 간에 한판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이통사들이 자사의 멤버십 카드를 지닌 고객들의 영화 관람료를 많게는 2천 원씩 대신 내주는 식으로 할인 혜택을 주다가, 이 액수가 무려 1천억 원에 달하게 되자 할인 적용 극장을 선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할인금의 절반을 극장 쪽에 떠 넘기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극장 쪽은 이 부담을 다시 배급사로, 배급사는 제작사로 떠넘기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면서 논란은 영화 산업 전체로 확산됐다. 당초 이통사 마케팅과 극장의 관객 유입책이라는 윈윈 전략으로 시작된 이통사 할인은 결국 극장업계의 손실이 가시화되자 폐지되기에 이른다.

사실 이통사들의 관람료 할인 서비스는, SKT, KTF, LGT 등 이통사 3사간에 벌어진 치열한 가입자 유치전의 결과물이었다. 이미 이들 3개사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공짜폰 남발로 가입자수 폭증의 단 맛을 보았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신규 고객을 싹쓸이하기 위해 혹은 기존 가입자의 이탈을 막기 위한 당근으로 멤버십 할인 서비스를 활용해 왔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대로 부동산 거품이 야기한 멀티플렉스간 고객 쟁탈전과 자연스럽게 맞물리게 된 셈이다. 그러나 국내 이동통신 가입자수는 이미 2005년 3천 8백만 명을 웃돌며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겉으로는 극장 업계의 반발에 의해 철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통사 멤버십 할인 서비스가 중단 된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통사의 멤버십 할인 서비스는, 그러나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가장 치명적으로, 관객들의 체감 가격을 지나치게 낮게 책정해 버림으로써 이후 관람료를 정상화하는 데 큰 걸림돌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 유통 시장의 가격 덤핑을 주도한 거품 세력은 이통사 뿐만이 아니었다. 극장들의 자체멤버십 할인과 더불어 이통사 철수의 충격파를 최소화하면서 언제 꺼질 줄 모르는 거품을 간신히 유지시켜주고 있는 세력이 있으니, 다름 아닌 신용카드사들이다. 이통사와 달리 타사와의 중복 가입자를 확보할 수 있는 신용카드의 경우, 영화 관람료 할인 혜택을 중단할 이유가 크지 않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2006년 기준으로 전체 할인 서비스 가운데 신용카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장 많은 55%에 달한다. 그리고 이들 신용 카드사들은 고객 한 명당 평균 2,128원의 관람료를 대신 부담해주고 있다. 이를 전체 관객수로 환산하면 신용카드에 의한 총 할인 금액은 연간 747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만약 신용카드 할인이 중단될 경우 체감 관람료의 인상 효과로 인한 관객 이탈 현상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걸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만큼의 돈을 영화계가 지불해야 된다는 얘기다. 당장 지난해 말 영화계 단체들이 '영화 관람료 현실화' 주장을 펼쳤을 때 상당수의 네티즌들이 한국영화 수익성 악화의 책임을 관객들에게 전가하려 든다며 거부감을 드러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격 덤핑의 부메랑은 이미 영화계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극장업계도 관람료를 현실화하거나 할인 제도를 폐지하면 당장의 수익 저하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생각은 추호도 없다. 투자 배급사와 제작사들의 입장에선 할인 제도를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얘기다. 이것은 거꾸로 지난 몇 년간의 관람객수 증가가 영화계의 제살 깎아 먹기에 의해 다분히 '조장'된 현상에 불과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통사와 신용카드사는 잃은 게 없다. 가격 덤핑의 여파로 부가 판권 시장은 황무지로 전락했고, 그나마 극장에서조차 제 값을 받을 수 없게 된 영화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리게 됐다. 그 사이 가격 시스템을 보호하려는 정책적 개입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 극장가의 가격 덤핑 상황은 산업간 먹이사슬의 하부에 놓여 있는 영화 산업이 더욱 큰 규모의 산업인 이통사와 신용카드사들의 이익을 위해 잡아 먹힌 과정이나 다름 없다는 얘기다. 거품이 만들어 놓은 착시 현상은 그래서 무섭다. 이 끔찍한 과정을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버블 #3: 벤처 캐피털과 공적 자금
 
90년대 중반 영화계에 진출한 삼성과 대우 등 대기업은 98년 IMF의 철퇴를 맞고 대부분 철수했다. 돈줄이 바짝 마른 충무로에 두 가지 서광이 비쳤으니, 하나는 코스닥 붐에 따른 벤처 캐피털의 도약이었고, 또 하나는 정부가 지원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관리하는 1천 7백억 원의 영화진흥금고. 코스닥 시장에서 여유 자금을 확보하게 된 벤처 캐피털은 철수한 대기업을 대신해 영화 산업에 투자할 여력을 갖게 됐다. 벤처 캐피털들은 당시 벤처 육성을 핵심 정책으로 삼은 정부 지원에 힘입어, 중소기업진흥공단을 통한 공적 자금과 영화진흥금고의 출자금을 종자돈으로 삼은 영상전문투자조합의 결성에 앞다퉈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충무로의 제작비 조달처로 급부상하게 됐다.

이에 따라 99년 115억 원 규모의 '무한영상벤처1호'가 결성된 것을 신호탄으로 모두 50여 개의 영상전문투자조합이 결성돼 운영됐다. 전체 투자 조합의 규모만 무려 5천 억 원이 넘는다. 영상전문투자조합은 벤처캐피탈의 사적 자금과 영화진흥위원회, 중소기업진흥공사의 출자 금액, 그러니까 공적 자금이 거의 반반씩 합쳐진 일종의 민관 합작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목표는 물론 한국영화 산업의 육성이었으며, 이 같은 목표에 따라 수 백 편의 한국영화가 조합의 돈을 종자돈 삼아 제작될 수 있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원천식 씨의 학위 논문 '영상투자조합이 한국영화 제작활성화에 끼친 영향'에 따르면, 지난 2004년 개봉한 총 74편의 한국영화 가운데, 74.3%에 달하는 55편의 작품에 투자 조합의 돈이 흘러 들어갔으며, 이들 영화들이 순제작비의 30% 이상을 투자조합으로부터 조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CJ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 시네마서비스 등 이른바 '빅3' 투자 배급사의 경우, 전체 배급작의 88%에 해당하는 작품이 영상전문투자조합의 투자를 받았다. 이점을 고려하면, 영상투자조합이 한국영화 제작 붐을 이어가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역할에 과연 순기능만 있었던 걸까?

앞서 인용한 논문 내의 통계 자료는 2004년 영화진흥위원회가 출자한 영상투자조합의 투자 성공율(투자된 전체 프로젝트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프로젝트의 비율)은 37.5%에 그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것을 거꾸로 이야기 하면, 지난 10년 동안의 한국영화 전성기는 정부 주도의 '실패를 감수한 시드머니' 정책이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거칠게 말하면 국민의 세금이 한국영화의 전성기(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성기로 보이게 하는 착시 현상)를 부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관건은, 실패를 감수한 거액의 공적 자금이 영화 산업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느냐일 것이다. 남은 것은, 모두 알다시피 마이너스 43%의 투자 수익률(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이라는 처참한 결과일 뿐이다.


#영화주간지 '무비위크'의 '한국영화의 재발명'이라는 특집 기사에 기고한 글의 원문입니다.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싣습니다.

연재순서
1. 버블#1 부동산 투기 붐
2. 버블#2 이동통신과 신용카드의 고객쟁탈전 / 버블 #3 벤처캐피털과 공적자금
3. 버블#4 우회상장 붐 / 거품, 어떻게 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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