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축! 우리사랑' 기주봉과의 수다

사람 이야기 2008. 4. 7. 10:32 Posted by cinemAgora
           "아슬아슬한 길, 직관으로 간다"


<어둠의 자식들>(1982)로 스크린 데뷔한 배우 기주봉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세기에도 벅찬 편수의 많은 영화에 출연해 왔다. 그러나 대개 단역 아니면 조역이었고, 마초 형사는 그의 단골 역할이었다. 흔히들 '감초'라고 부르는 그 역할들을 소화해 낸 이면에는 생계와 생활이라는 절박함이 숨어 있었다.

일이 없을 땐 정수기 판매원으로 나서기까지 하면서 끝내 배우의 삶을 놓칠 수 없었던 그. 오점균 감독의 <경축! 우리 사랑>으로 마침내 배우 기주봉의 굵은 인장을 찍었다. 쉰 한살 바람난 아줌마의 바람난 남편을 연기한 그는, 여배우 김해숙과 함께 한 이 독특한 영화에 기주봉이 아니면 힘들었을, 구체적 삶에서 퍼올린 직관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일가를 이룬 많은 예술가들처럼, 그로부터도 연극을 포함한 40년 연기 생활을 한 공력에서 우러나오는 거침 없음을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기주봉은 꽤 신중하고, 때론 어눌했다. 그는 뭔가 주저거리고 자주 곱씹어 생각하며 말했다. 살짝 엇나가는 듯 핀트를 맞추며 진행된 약간 아슬아슬한 대화를 통해 기주봉이 걸어온 배우적 삶의 언저리에 쌓인 어떤 고단함과, 여전히 미지의 감정과 역할을 탐문하는 배우로서의 두려움 같은 게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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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희(이하 '최') 머리 스타일에 힘이 들어갔다. 숍에서 만지셨나?

기주봉(이하 '기') 미장원에서 좀 만졌지.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숍에 가는 것 같다.(웃음)

매니저가 있는지 몰랐다. (매니저에게) 기주봉이라는 배우가 매니저까지 둘만큼 상품성이 있나?

앞에다 앉혀 놓고 상품성? 발굴하면 있지, 왜. 발굴해야지.

<경축! 우리 사랑> 때문에 뵙자고 했다. 비중으로 봐선 사실상 주연이다.

물론 주인공이긴 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확실하게 내세워야 하는데 김해숙 씨를 내세우는 게 낫겠다는 얘기를 제작진들과 했다. 어중간하게 가는 것보다 그게 낫다.

물론 김해숙 씨가 연기한 봉순의 이야기이긴 하다. 그런데 나는 왠지 당신이 맡은 무기력한 가부장으로서의 모습에 더 감정이입이 됐다. 같은 남자라서 그런 건지, 남의 아이를 가진 아내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씨의 처지가 딱해 보이기도 하고.

하씨는 바람을 피워도 가정을 깨고 싶지 않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스스로 바람을 피우니까 하나의 인격체인 부인한테 남자로서의 우월적인 논리를 내세울 수도 없고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가정을 깨고 싶지도 않으니, 그냥 "우리 이러지 맙시다" 해보는 건데, 그것마저도 여자의 힘, 생명의 힘에 눌리고 만다. 결국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 여자를 위대하게 만들지 않나 싶다.

봉순에 비하면 하씨는 약간 풍자적으로 묘사되는 것 같기도 하다. 윤리적으로 내세울 게 없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그걸 빌미로 하씨를 대상화된 남편과 가부장으로 희화화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하씨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건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하씨가 취할 수밖에 없는 본연의 자세다. 내 주위에도 서로 좋아서 살다가 서류상의 문제에 대한 부담 때문에 관계가 더 엉켜지는 상황이 적지 않다. 그냥 그런 문제를 다 떠나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작품 역시 제도나 윤리 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든지 욕망이라든지 그런 문제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중에 똥파리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대본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서 그 장면을 보니까 인간 덩어리들이 뭉쳐 사는 것이 그런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개똥벌레 같은 느낌? 살아가는 존재로 몸부림치고 있는 거지. 파리와도 같은 인간 군상이랄까? 지지고 볶는 느낌.

영화에 대한 평가가 좋다.

김해숙 씨가 워낙 잘했다. 대본 상에서는 그냥 이슈로 접근했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시각과 세계관이 확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내용이 비로소 충분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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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점균 감독은 어떤 스타일인가?

70-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의 느낌을 가진 감독이다. 클래식하면서 차분하다. 마음도 여리고. 현실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영악하지 않은 건데, 그런 면에서 세대 의식이나 동료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못 쫓아가지만 왠지 편안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베드신도 했다. 생애 첫 베드신 아닌가?

(웃음)사실은 어렸을 때 연극하면서 찍은 16밀리 작품에서 한 번 해본 적은 있다. 한 20년 전 이야기다.

그래도 쉰 넘은 배우에게 베드신은 언감생심이다.

방은희가 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서 만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좀 그렇잖아. 그래서 붕대 감고 했지. 그걸 작업 한다고 하던가?

굳이 작업까지?

하는 게 낫지, 잡히는 것 보다는. (웃음)

예전 인터뷰 때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면서 언젠가 그런 배역이 오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이 작품이 바로 그런 영화가 아닐까?

앞으로도 해야 할 영화가 많지만 어느 선에는 온 것 같다. 그동안 주로 남성적인 역할만 맡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뭔가 좀 평범함 쪽으로 빠져 나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하면서 노력을 좀 한 것 같다. 하지만 생각만큼 마음에 차지는 않는다. 배우로서 끊임 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건 어느 작품을 하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뭔가?

미용실 여자와의 연애 감정이라든가 가정을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의 표현이 생각만큼은 잘 안된 것 같다. 대사가 살려주긴 했지. 방은희 다리 붙잡고 "너 없이 못살 것 같아"라고 말하는 대목.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야릇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연애 감정을 더 좀 다르게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씨 역시 서민이다. 자신의 빈곤한 삶 속에서도 수컷으로서의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연애 감정이 세련되고 아름다울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추레한 풍경이 왠지 더 공감이 갔다. 대문 앞에서 쭈그려 앉아 핸드폰 문자 메시지 보내고 하는 대목. 그런 측면에서는 훌륭한 연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래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연애는 좀더 세련된 부분이 있겠지.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연애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투박하고 굉장히 소시민적이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나?

흥행이 아주 잘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다. 우선 약간의 윤리적 거부감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부분을 상쇄하는 것이 김해숙, 기주봉이 가진 연기자적 아우라가 아닐까. 내러티브 상에서 감독의 논리에 설득 당하는 지점도 있고.

윤리적인 부분에 집중할 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부분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나 역시 이 영화 하면서 감독과 그런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누구라도 갈구하는 부분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있었다. 

어려운 문제다. 조금 더 나아가면, 배타적인 섹스를 전제로 한 결혼 제도의 모순이 갈등을 내포하는 풍경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수 있겠지. 그렇다고 일부일처제를 타파하고 다부다처제로 가자는 주장을 펼 수도 없지 않겠나. 이 영화처럼 제도 안에서 상대방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급진적인 해법이 될 수 있겠지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이런 상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회 현상의 단면을 보여주자는 것이지 결혼 제도 등에 대해 뭘 어떻게 하자고 주장하는 작품은 아닌 것 같다. 관객들도 그렇게 봐 준다면 좋겠다. 관념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에 물꼬가 트이는 느낌이랄까. 이럴 수 있다, 이 정도로 받아들여준다면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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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있다면, 후반부에 코믹 판타지로 돌변하면서 가족의 위선성에 대한 현실적 풍자가 슬쩍 희석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스스로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살면 어떨까, 하는 게 감독의 의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감독이랑 이런 얘기도 했다. 우리도 섬 하나 얻어서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씨가 구상의 아이라는 걸 꿈에도 생각 못하면서 동네 사람들 보기 부끄러우니까 아이를 떼자는 장면에선 너무 웃겼다. 그 장면을 연기하면서 웃음을 자아내려는 계산이 깔린 것인가?

계산하고 연기한 것 결코 아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그런 거지. 촬영할 때 모든 스탭들이 그 대목에서 재미있어 하더라.

딸까지 구상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할 때 하씨가 옆으로 풀썩 고꾸라지는 장면이 있다. 단순히 고꾸라지는 장면인데 왠지 내공이 느껴지더라.

(한참 말 없이 웃음) 그 절실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뭘까 생각하다가 그렇게 연기한 거지 관객을 웃겨야 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사실 날벼락 같은 상황 아닌가. 아내에 이어 딸까지 같은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를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그걸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길길이 날뛸 수도 없는 거다. 그냥 쓰러지는 수밖에 없는 거지.

하씨는 배우 기주봉과 얼마나 닮았나?

영화 속의 하씨는 상당히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그려지는데, 사실 나에게도 우유부단한 성격이 있다. 생각해보니까 평생 남의 얘기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내 것이 뭐가 있나 싶다. 그게 바로 배우의 모순인 것 같다. 어쩌면 우유부단한 게 당연한 것 같다. 그건 나뿐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이라면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상황에서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 세상 사는 게 이거라고 결정해도 그 반대의 경우도 틀림 없이 있더라니까. 나 역시 배우로서의 한 길을 가고는 있지만 이 길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둘러보면 잘 사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자신의 길을 정해서 가는 경우가 많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배우로서의 길 뿐 아니라 다른 삶에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나?

내가 하는 일 안에서 다른 삶을 풀어 내야겠다는 생각이지, 따로 다른 길로 나설 생각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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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경력이 40년 가까이 됐는데, 그 정도 한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팠다면 자신감에 넘쳐 있는 게 맞지 않나?

하긴 그렇다. 이제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든다. 기회가 되면 그런 일도 참여하고 싶고.

배우가 연기를 할 때 끄집어내는 에너지 가운데 직접 경험한 삶에서 얻는 감정이 있을 테고, 간접적인 추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직관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경우 전자 쪽의 에너지가 더 많이 동원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겪은 삶의 곡절만큼 표현이 됐겠지. 하지만 이제는 직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든 캐릭터를 논리적으로 계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논리적인 계산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결국 그런 노하우가 직관으로 통하는 거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다는 자부심은 생겼다.

대본을 고쳐 읽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면서?

작가의 입장에서는 대사의 토씨 하나라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대사 안의 의미라든가 뉘앙스를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살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게 지나치면 배우로서 캐릭터를 재해석하거나 재창조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지 않나?

작품을 자기화한다기보다 작가가 원하는 인물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쓴 대사 그대로 하는 것이 캐릭터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자기화하면 내 스타일이 나오게 된다. 가끔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나를 들어내고 캐릭터에 가까이 다가 서는 게 좀더 작품의 의도에 맞는 거라고 생각한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해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다. 그 동안 겪어온 우여곡절이 개인적인 캐릭터를 바꾼 건가?

나서기 좋아해서 배우가 됐지만 굉장히 어렵게 부딪힌 작품을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좀 꺾였다고나 할까? 쉽게 접근했다가 까불면 안되겠다 싶었던 과정이 있었다. 풀이 꺾인 순간들이 많았다. 비극 연기를 많이 해서 그런 것도 같고. 어쨌든 배우로서 살아오면서 이제는 좀 가볍게 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진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깊이 파고 들어서 최악의 구렁텅이까지 가보자 하는 생각도 하지만.

아직까지 76극단 대표는 하고 있나?

후배에게 대표 자리를 내놓긴 했는데…여전히 주인 의식은 가지고 있다.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

제안은 들어오는데 내 리듬이 아직 무대에 설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올해나 내년에는 서게 될 것 같다. 간간히 출연은 했지만 내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출연한 걸로 따지면 벌써 5년 이상의 공백이 있었으니까.

영화에서 연극으로 전환하는 게 어려운 일인가?

경제성과 관련이 있다. 연극을 하면 5~6개월은 생활 리듬이 깨진다. 그걸 감당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돈을 모아놓은 것도 아니고 다른 출연 다 잡고 연극만 할 만큼 생활의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서 개인적인 스폰서나 후원인도 좀 생기고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아직 그런 배우는 못됐나 보다. 하다 못해 연습실이나 사무실을 차릴 수 있는 상황도 안 된다. 지금 출연하면서 버는 걸로 충당하긴 어렵다.

재산 많은 걸로 구설수에 오른 유인촌 장관한테 위화감이 좀 느껴지겠다. 같은 연극인인데.

얼마 전 대학로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 했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그 얘기들 많이 하더라.

살림은 좀 나아지셨나?

지금까지 집 한 채 없다. 한 편에 몇 억씩 받는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 하지만 내가 그 정도 벌려면 몇 십 편을 해야 하니까. 남들은 그래서 CF가 오길 기다려는 경우도 있는데, 배우로서 그 정도로 돈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다.

<어둠의 자식들> 이후로 영화만 27년 했다. 그 정도 했으면 하다 못해 집 한 칸은 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웃음) 난 유인촌 장관과 정 반대네.

요즘 충무로가 어렵다. 배우로서 체감하나?

예전과 달라졌다. 일단 출연 제안이 많이 줄었다. 어렵구나, 하는 실감이 온다. 그렇다고 한국영화가 무턱대고 저예산으로만 출구를 찾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거품을 빼는 건 당연하겠지만 스케일을 축소시키는 상황을 보는 건 영화를 하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다들 저예산 영화만 만든다면, 영화가 왜소해져 보일 위험이 있다. 스케일이 큰 영화도 할 건 해야지.

최근 <포도나무를 베어라>나 <밤과 낮> 같은 저예산 영화에 유독 많이 출연했다.

영화의 다양성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겠지. 헌데 아직 거기까지만 제안이 오는 것 같다.

배우 생활 하면서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글쎄…조명이 켜지고 그 불빛 아래서 많은 이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쳐다 볼 때, 배우로서의 꿈틀거림이 생긴다. 뭔가를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우문에 현답이시다.

사실 그런 순간은 꼭 현장에서 카메라 앞에서 서 있을 때라기 보다 살아가는 과정 안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내 안에서의 기운이 배우적인 태도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걸 일상적으로 느낄 때가 있다. 현장에서도 조명이 들어온다고 해서 바로 행복한 건 아니다. 뭔가 기운이 안 돌아갈 때가 있다. 오히려 일상에서 그런 기운을 느낄 때가 많다. 지금도 얘기를 하면서 그런 기운이 조금씩 느껴진다. 사실 누구나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운들이 다 있다.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고 펼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좋은 말들은 다 나와 있다. 그 말들을 내가 어떻게 쓰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멋이 나고 안 나는 것 같다.

지금, 행복하신가?

어느 정도. 한 50% 정도? 나머지 반은 여전히 찾아야 할 것 같다. 얼마 전에 '꼬마 성자'라는 책을 읽었는데, 큰 스승이 한 아이만 편애를 하니까 제자들이 질투를 한다. 그걸 무마하기 위해 스승이 새를 한 마리씩 잡은 뒤 아무도 안보는 데서 죽여서 해질녘에 가져오라고 했다. 다들 시킨 대로 새를 죽여서 가져왔는데 편애 받는 꼬마는 죽이지 않고 새장에 가둬서 가져왔다. 왜 그랬냐 하니까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못 죽였다고 그러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더라. 누군가 안 본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사진 김진희(세븐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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