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자식들>(1982)로 스크린 데뷔한 배우 기주봉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세기에도 벅찬 편수의 많은 영화에 출연해 왔다. 그러나 대개 단역 아니면 조역이었고, 마초 형사는 그의 단골 역할이었다. 흔히들 '감초'라고 부르는 그 역할들을 소화해 낸 이면에는 생계와 생활이라는 절박함이 숨어 있었다.
일이 없을 땐 정수기 판매원으로 나서기까지 하면서 끝내 배우의 삶을 놓칠 수 없었던 그. 오점균 감독의 <경축! 우리 사랑>으로 마침내 배우 기주봉의 굵은 인장을 찍었다. 쉰 한살 바람난 아줌마의 바람난 남편을 연기한 그는, 여배우 김해숙과 함께 한 이 독특한 영화에 기주봉이 아니면 힘들었을, 구체적 삶에서 퍼올린 직관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일가를 이룬 많은 예술가들처럼, 그로부터도 연극을 포함한 40년 연기 생활을 한 공력에서 우러나오는 거침 없음을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기주봉은 꽤 신중하고, 때론 어눌했다. 그는 뭔가 주저거리고 자주 곱씹어 생각하며 말했다. 살짝 엇나가는 듯 핀트를 맞추며 진행된 약간 아슬아슬한 대화를 통해 기주봉이 걸어온 배우적 삶의 언저리에 쌓인 어떤 고단함과, 여전히 미지의 감정과 역할을 탐문하는 배우로서의 두려움 같은 게 읽혔다.
최광희(이하 '최') 머리 스타일에 힘이 들어갔다. 숍에서 만지셨나?
기주봉(이하 '기') 미장원에서 좀 만졌지.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숍에 가는 것 같다.(웃음)
최 매니저가 있는지 몰랐다. (매니저에게) 기주봉이라는 배우가 매니저까지 둘만큼 상품성이 있나?
기 앞에다 앉혀 놓고 상품성? 발굴하면 있지, 왜. 발굴해야지.
최 <경축! 우리 사랑> 때문에 뵙자고 했다. 비중으로 봐선 사실상 주연이다.
기 물론 주인공이긴 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확실하게 내세워야 하는데 김해숙 씨를 내세우는 게 낫겠다는 얘기를 제작진들과 했다. 어중간하게 가는 것보다 그게 낫다.
최 물론 김해숙 씨가 연기한 봉순의 이야기이긴 하다. 그런데 나는 왠지 당신이 맡은 무기력한 가부장으로서의 모습에 더 감정이입이 됐다. 같은 남자라서 그런 건지, 남의 아이를 가진 아내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씨의 처지가 딱해 보이기도 하고.
기 하씨는 바람을 피워도 가정을 깨고 싶지 않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스스로 바람을 피우니까 하나의 인격체인 부인한테 남자로서의 우월적인 논리를 내세울 수도 없고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가정을 깨고 싶지도 않으니, 그냥 "우리 이러지 맙시다" 해보는 건데, 그것마저도 여자의 힘, 생명의 힘에 눌리고 만다. 결국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 여자를 위대하게 만들지 않나 싶다.
최 봉순에 비하면 하씨는 약간 풍자적으로 묘사되는 것 같기도 하다. 윤리적으로 내세울 게 없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그걸 빌미로 하씨를 대상화된 남편과 가부장으로 희화화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하씨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기 그건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하씨가 취할 수밖에 없는 본연의 자세다. 내 주위에도 서로 좋아서 살다가 서류상의 문제에 대한 부담 때문에 관계가 더 엉켜지는 상황이 적지 않다. 그냥 그런 문제를 다 떠나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작품 역시 제도나 윤리 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든지 욕망이라든지 그런 문제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중에 똥파리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대본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서 그 장면을 보니까 인간 덩어리들이 뭉쳐 사는 것이 그런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개똥벌레 같은 느낌? 살아가는 존재로 몸부림치고 있는 거지. 파리와도 같은 인간 군상이랄까? 지지고 볶는 느낌.
최 영화에 대한 평가가 좋다.
기 김해숙 씨가 워낙 잘했다. 대본 상에서는 그냥 이슈로 접근했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시각과 세계관이 확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내용이 비로소 충분히 이해가 된다.
최 오점균 감독은 어떤 스타일인가?
기 70-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의 느낌을 가진 감독이다. 클래식하면서 차분하다. 마음도 여리고. 현실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영악하지 않은 건데, 그런 면에서 세대 의식이나 동료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못 쫓아가지만 왠지 편안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최 베드신도 했다. 생애 첫 베드신 아닌가?
기 (웃음)사실은 어렸을 때 연극하면서 찍은 16밀리 작품에서 한 번 해본 적은 있다. 한 20년 전 이야기다.
최 그래도 쉰 넘은 배우에게 베드신은 언감생심이다.
기 방은희가 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서 만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좀 그렇잖아. 그래서 붕대 감고 했지. 그걸 작업 한다고 하던가?
최 굳이 작업까지?
기 하는 게 낫지, 잡히는 것 보다는. (웃음)
최 예전 인터뷰 때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면서 언젠가 그런 배역이 오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이 작품이 바로 그런 영화가 아닐까?
기 앞으로도 해야 할 영화가 많지만 어느 선에는 온 것 같다. 그동안 주로 남성적인 역할만 맡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뭔가 좀 평범함 쪽으로 빠져 나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하면서 노력을 좀 한 것 같다. 하지만 생각만큼 마음에 차지는 않는다. 배우로서 끊임 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건 어느 작품을 하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최 구체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뭔가?
기 미용실 여자와의 연애 감정이라든가 가정을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의 표현이 생각만큼은 잘 안된 것 같다. 대사가 살려주긴 했지. 방은희 다리 붙잡고 "너 없이 못살 것 같아"라고 말하는 대목.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야릇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연애 감정을 더 좀 다르게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 하씨 역시 서민이다. 자신의 빈곤한 삶 속에서도 수컷으로서의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연애 감정이 세련되고 아름다울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추레한 풍경이 왠지 더 공감이 갔다. 대문 앞에서 쭈그려 앉아 핸드폰 문자 메시지 보내고 하는 대목. 그런 측면에서는 훌륭한 연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기 아무래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연애는 좀더 세련된 부분이 있겠지.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연애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투박하고 굉장히 소시민적이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나?
최 흥행이 아주 잘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다. 우선 약간의 윤리적 거부감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부분을 상쇄하는 것이 김해숙, 기주봉이 가진 연기자적 아우라가 아닐까. 내러티브 상에서 감독의 논리에 설득 당하는 지점도 있고.
기 윤리적인 부분에 집중할 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부분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나 역시 이 영화 하면서 감독과 그런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누구라도 갈구하는 부분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있었다.
최 어려운 문제다. 조금 더 나아가면, 배타적인 섹스를 전제로 한 결혼 제도의 모순이 갈등을 내포하는 풍경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수 있겠지. 그렇다고 일부일처제를 타파하고 다부다처제로 가자는 주장을 펼 수도 없지 않겠나. 이 영화처럼 제도 안에서 상대방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급진적인 해법이 될 수 있겠지
기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이런 상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회 현상의 단면을 보여주자는 것이지 결혼 제도 등에 대해 뭘 어떻게 하자고 주장하는 작품은 아닌 것 같다. 관객들도 그렇게 봐 준다면 좋겠다. 관념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에 물꼬가 트이는 느낌이랄까. 이럴 수 있다, 이 정도로 받아들여준다면 되는 게 아닐까.
최 아쉬움이 있다면, 후반부에 코믹 판타지로 돌변하면서 가족의 위선성에 대한 현실적 풍자가 슬쩍 희석되는 느낌을 받았다.
기 그냥 스스로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살면 어떨까, 하는 게 감독의 의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감독이랑 이런 얘기도 했다. 우리도 섬 하나 얻어서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최 하씨가 구상의 아이라는 걸 꿈에도 생각 못하면서 동네 사람들 보기 부끄러우니까 아이를 떼자는 장면에선 너무 웃겼다. 그 장면을 연기하면서 웃음을 자아내려는 계산이 깔린 것인가?
기 계산하고 연기한 것 결코 아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그런 거지. 촬영할 때 모든 스탭들이 그 대목에서 재미있어 하더라.
최 딸까지 구상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할 때 하씨가 옆으로 풀썩 고꾸라지는 장면이 있다. 단순히 고꾸라지는 장면인데 왠지 내공이 느껴지더라.
기 (한참 말 없이 웃음) 그 절실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뭘까 생각하다가 그렇게 연기한 거지 관객을 웃겨야 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사실 날벼락 같은 상황 아닌가. 아내에 이어 딸까지 같은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를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그걸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길길이 날뛸 수도 없는 거다. 그냥 쓰러지는 수밖에 없는 거지.
최 하씨는 배우 기주봉과 얼마나 닮았나?
기 영화 속의 하씨는 상당히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그려지는데, 사실 나에게도 우유부단한 성격이 있다. 생각해보니까 평생 남의 얘기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내 것이 뭐가 있나 싶다. 그게 바로 배우의 모순인 것 같다. 어쩌면 우유부단한 게 당연한 것 같다. 그건 나뿐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이라면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상황에서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 세상 사는 게 이거라고 결정해도 그 반대의 경우도 틀림 없이 있더라니까. 나 역시 배우로서의 한 길을 가고는 있지만 이 길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둘러보면 잘 사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자신의 길을 정해서 가는 경우가 많기도 하지만.
최 그렇다면 배우로서의 길 뿐 아니라 다른 삶에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나?
기 내가 하는 일 안에서 다른 삶을 풀어 내야겠다는 생각이지, 따로 다른 길로 나설 생각은 별로 없다.
최 연기 경력이 40년 가까이 됐는데, 그 정도 한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팠다면 자신감에 넘쳐 있는 게 맞지 않나?
기 하긴 그렇다. 이제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든다. 기회가 되면 그런 일도 참여하고 싶고.
최 배우가 연기를 할 때 끄집어내는 에너지 가운데 직접 경험한 삶에서 얻는 감정이 있을 테고, 간접적인 추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직관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경우 전자 쪽의 에너지가 더 많이 동원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 내가 겪은 삶의 곡절만큼 표현이 됐겠지. 하지만 이제는 직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든 캐릭터를 논리적으로 계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논리적인 계산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결국 그런 노하우가 직관으로 통하는 거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다는 자부심은 생겼다.
최 대본을 고쳐 읽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면서?
기 작가의 입장에서는 대사의 토씨 하나라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대사 안의 의미라든가 뉘앙스를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살려야 한다고 믿는다.
최 그게 지나치면 배우로서 캐릭터를 재해석하거나 재창조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지 않나?
기 작품을 자기화한다기보다 작가가 원하는 인물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쓴 대사 그대로 하는 것이 캐릭터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자기화하면 내 스타일이 나오게 된다. 가끔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나를 들어내고 캐릭터에 가까이 다가 서는 게 좀더 작품의 의도에 맞는 거라고 생각한다.
최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해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다. 그 동안 겪어온 우여곡절이 개인적인 캐릭터를 바꾼 건가?
기 나서기 좋아해서 배우가 됐지만 굉장히 어렵게 부딪힌 작품을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좀 꺾였다고나 할까? 쉽게 접근했다가 까불면 안되겠다 싶었던 과정이 있었다. 풀이 꺾인 순간들이 많았다. 비극 연기를 많이 해서 그런 것도 같고. 어쨌든 배우로서 살아오면서 이제는 좀 가볍게 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진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깊이 파고 들어서 최악의 구렁텅이까지 가보자 하는 생각도 하지만.
최 아직까지 76극단 대표는 하고 있나?
기 후배에게 대표 자리를 내놓긴 했는데…여전히 주인 의식은 가지고 있다.
최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
기 제안은 들어오는데 내 리듬이 아직 무대에 설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올해나 내년에는 서게 될 것 같다. 간간히 출연은 했지만 내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출연한 걸로 따지면 벌써 5년 이상의 공백이 있었으니까.
최 영화에서 연극으로 전환하는 게 어려운 일인가?
기 경제성과 관련이 있다. 연극을 하면 5~6개월은 생활 리듬이 깨진다. 그걸 감당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돈을 모아놓은 것도 아니고 다른 출연 다 잡고 연극만 할 만큼 생활의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서 개인적인 스폰서나 후원인도 좀 생기고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아직 그런 배우는 못됐나 보다. 하다 못해 연습실이나 사무실을 차릴 수 있는 상황도 안 된다. 지금 출연하면서 버는 걸로 충당하긴 어렵다.
최 재산 많은 걸로 구설수에 오른 유인촌 장관한테 위화감이 좀 느껴지겠다. 같은 연극인인데.
기 얼마 전 대학로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 했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그 얘기들 많이 하더라.
최 살림은 좀 나아지셨나?
기 지금까지 집 한 채 없다. 한 편에 몇 억씩 받는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 하지만 내가 그 정도 벌려면 몇 십 편을 해야 하니까. 남들은 그래서 CF가 오길 기다려는 경우도 있는데, 배우로서 그 정도로 돈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다.
최 <어둠의 자식들> 이후로 영화만 27년 했다. 그 정도 했으면 하다 못해 집 한 칸은 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기 (웃음) 난 유인촌 장관과 정 반대네.
최 요즘 충무로가 어렵다. 배우로서 체감하나?
기 예전과 달라졌다. 일단 출연 제안이 많이 줄었다. 어렵구나, 하는 실감이 온다. 그렇다고 한국영화가 무턱대고 저예산으로만 출구를 찾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거품을 빼는 건 당연하겠지만 스케일을 축소시키는 상황을 보는 건 영화를 하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다들 저예산 영화만 만든다면, 영화가 왜소해져 보일 위험이 있다. 스케일이 큰 영화도 할 건 해야지.
최 최근 <포도나무를 베어라>나 <밤과 낮> 같은 저예산 영화에 유독 많이 출연했다.
기 영화의 다양성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겠지. 헌데 아직 거기까지만 제안이 오는 것 같다.
최 배우 생활 하면서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기 글쎄…조명이 켜지고 그 불빛 아래서 많은 이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쳐다 볼 때, 배우로서의 꿈틀거림이 생긴다. 뭔가를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최 우문에 현답이시다.
기 사실 그런 순간은 꼭 현장에서 카메라 앞에서 서 있을 때라기 보다 살아가는 과정 안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내 안에서의 기운이 배우적인 태도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걸 일상적으로 느낄 때가 있다. 현장에서도 조명이 들어온다고 해서 바로 행복한 건 아니다. 뭔가 기운이 안 돌아갈 때가 있다. 오히려 일상에서 그런 기운을 느낄 때가 많다. 지금도 얘기를 하면서 그런 기운이 조금씩 느껴진다. 사실 누구나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운들이 다 있다.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고 펼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좋은 말들은 다 나와 있다. 그 말들을 내가 어떻게 쓰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멋이 나고 안 나는 것 같다.
최 지금, 행복하신가?
기 어느 정도. 한 50% 정도? 나머지 반은 여전히 찾아야 할 것 같다. 얼마 전에 '꼬마 성자'라는 책을 읽었는데, 큰 스승이 한 아이만 편애를 하니까 제자들이 질투를 한다. 그걸 무마하기 위해 스승이 새를 한 마리씩 잡은 뒤 아무도 안보는 데서 죽여서 해질녘에 가져오라고 했다. 다들 시킨 대로 새를 죽여서 가져왔는데 편애 받는 꼬마는 죽이지 않고 새장에 가둬서 가져왔다. 왜 그랬냐 하니까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못 죽였다고 그러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더라. 누군가 안 본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사진 김진희(세븐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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