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숙은 의심의 여지 없이 뛰어난 배우다. 그냥 뛰어난 게 아니라 매우 뛰어나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 상'이라는 방송 매체들의 상투적 상찬을 동원하지 않고서라도, 나는 그녀가 미필적 고의로 만들어낸 그 얼굴만으로도 이 배우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들어감에 저항한 흔적이 그의 얼굴엔 보이지 않는다. 김해숙은 중력의 법칙에 스스럼 없이 투항해 버린 전형적인 혹은 한국적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인 아줌마의 몸과 얼굴을 하고 있다. 그냥 아줌마의 얼굴이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 아줌마의 시대성을 받아 안은 얼굴인 셈이다. 중년 여성의 삶의 피로가 켜켜이 쌓인, 가정 내의 소수자로서의 아내와 엄마가 갖게 되는 그 얼굴은, 그러므로 그 나이의 여성 캐릭터와 만났을 때 가장 핍진(逼眞)함과 동시에 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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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작에 그치고 만 범죄 누아르 영화 <무방비 도시>를 그나마 빛나게 했던 것은, 많은 이들의 동의하듯 김해숙 때문이었다. '변신'에 목마른 손예진의 캐릭터에 묻은 가공성을 노회한 소매치기 '강만옥'을 연기한 김해숙의 리얼리티가 상쇄한 것이다. 김해숙이라는 배우가 TV에서 구축해 온 '어머니성'만을 뽑아내 지나친 신파로 흘러 버린 게 아쉬움으로 남지만, 면도날을 씹어대는 객기에 찬 눈빛으로 삶의 극단에 몰린 절박함을 역설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김해숙이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그런 김해숙이 처음으로 영화의 주연을 맡았으니 주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오점균 감독의 <경축! 우리 사랑>이다. 설정만 전해 들으면 너무 선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냐며 '세상 말세'라고 흥분하실 분도 나올 법 하다. 서민 동네의 50대 하숙집 주인 아줌마가 스무살 연하의 남자와, 그것도 딸의 애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그것도 모자라 그 남자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는, 일면 자극적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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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주인공이 김해숙이기에 이 바람난 중년 아줌마의 러브스토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감성을 지닌 인간이 아닌 역할만을 지닌 엄마이자 아내로 철저히 타자화돼 있는데다 그 상태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에게 슬며시 에로스가 스며 든다. 여린 듯 준수하고 사려 깊은 하숙집 총각의 입술을 탐하고 싶은 그녀의 욕망을 보며 관객들은 킥킥 대고 웃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대한 실소로 시작됐다가 단죄할 수 없는 한 여자의 감성에 대한 암묵적 동의의 표현으로 슬쩍 뒤바뀌게 될 것이다.

'나 그냥 네가 좋아'라고 수줍게 고백하는 그녀는 '다른 여자 생기면 그냥 훌쩍 떠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감성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 마음에 아로 새겨진 설렘이야말로 그녀의 삶에 진짜 소중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그 덕분에 모처럼 도덕과 고정 관념의 틀을 이탈하게 된 관객 역시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 소외되는 한이 있더라도 모름지기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엄숙주의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되겠지만 말이다.

무리하게 인장을 남기려는 감독의 욕심이 충분히 설득당하고도 남을 이야기를 코믹 판타지로 돌변시켜 김새게 만들어 버린 결말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배우 김해숙과, 그가 힘있게 체현하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중년 여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경축! 우리 사랑>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영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종류의 억압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덤이다. 4월 10일 개봉.

남편으로 등장한 기주봉은 바람난 가부장들이 처한 아이러니를 코믹하지만 처절하게 대변한다. 가정 내의 무기력한 억압자가 돼 버린 그는 과연 자신의 욕망처럼 아내의 욕망조차 인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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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6 - '경축! 우리사랑' 기주봉과의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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