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연쇄살인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한 MBC의 행태를 비판한 포스트를 발행했습니다. 다른 언론도 있는데 굳이 MBC만 거론했던 건 서둘러 용의자의 얼굴을 공개한 보수 신문과 다른, 그 언론사의 양식에 나름의 기대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꽤나 격렬한 반론 댓글들이 이어지더군요. 그 가운데 이웃나라 일본에서 범죄 용의자의 얼굴이 공개되는 사례를 반론의 근거로 제시하는 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걔들이 드럽게 미개한 것"이라는 다소 격앙된 재반론 댓글을 달기도 했습니다만, 일본이 우리보다 선진국이라는 이유로 언론의 책임성보다 선정주의에 경도된 보도 행태를 배우거나 따라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만약 제가 영화기자가 아니라 외화 수입업자라면 당장 수입해 틀고 싶은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지난 달 24일 일본에서 개봉한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감독 기미즈카 료이치, 출연 사토 고이치, 시다 미라이, 마츠다 류헤이)라는 작품입니다. 영화는 비록 일본의 상황을 담고 있지만,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아주 적절한 대답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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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


영화는 한 범죄 용의자의 신상이 공개된 뒤, 그의 가족들이 겪게 된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가츠우라 형사는 이들 가족을 미디어와 세상의 눈으로부터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심드렁한 심정으로 임무 수행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가 용의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매스컴의 추격은 시작된 뒤였습니다. 가츠후라 형사와 함께 도피행에 나선 소녀. 매스컴과 인터넷은 그들을 부라퀴처럼 따라 다닙니다.

영화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는 언론의 선정주의를 고발하고 있는, 이른바 사회파 영화입니다. 일본에서도 용의자 신상 공개의 반인권성에 대한 문제 의식이 존재하고, 이렇게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일본의 유명 TV 시리즈 <춤추는 대수사선>의 제작진이라고 합니다. 드라마를 위한 취재 과정에서 알게된 문제점을 따로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끝을 모르는 언론의 상업성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자신들의 사회가 갖는 병리 현상에 대해 진중한 문제 제기를 던질 줄 아는 양식만큼은 배울만한 구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강호순의 경우에 대입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 둑이 무너지면 우리에게도 언제 저런 상황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죄없는 이들의 인권을, 그야말로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상황 말이죠.

적지 않은 분들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상처에 비하면 용의자 얼굴 공개의 부작용은 새발의 피도 안된다고 믿고 계신 듯 합니다. 일견 지당한 말씀입니다. 허나, 용의자의 가족도 사람입니다. 피해자 가족들의 상처가 크다는 이유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 게 과연 얼마나 정당한 논리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언론이 공개하지 않는다면 피해자 가족들이 용의자의 얼굴을 결코 볼 수 없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의 얼굴이 공개됨으로써 해소되는 건 단지 복수심과,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궁금한 호기심일 뿐입니다.

그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여론 재판의 재판관 역할을 자처한 일부 언론의 투철한 서비스 정신을 통해, 우리는 용의자가 우리 사회의 통념적 기준으로 봤을 때 꽤 준수하게 생겼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더군요. 앞으로 얼굴 반반한 사람은 더욱 믿지 말아야겠다고. 그렇게 당장 외모에 대한 거대한 편견이 생겼습니다. 강호순의 얼굴 공개가 생긴 걸로 사람을 판단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풍토에 일말의 기여를 했다면, 그거야말로 우리 모두의 인권이 침해된 셈 아닐까요.

여론 조사 결과 흉악범 얼굴 공개에 찬성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제 주장은 여전히 소수의견일 뿐입니다. 하지만 욕먹을 거 각오하고 한번 더 발언해야겠습니다. 괴물 죽이자고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진 말자고요. 일어날 수 있는 누군가의 상처를 고려하는 건, 지켜야할 미덕이지 불합리함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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