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얼굴 보니 속이 시원하십니까?

TV 이야기 2009.02.01 23:41 Posted by cinemAgora
오늘 MBC 9시 뉴스를 보다가 짬짝 놀랐습니다. 요 며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범의 얼굴이 떡 하니 공개돼 나오지 뭡니까? 안그래도 "인면수심의 흉악범에게 무슨 인권이냐"는 몇몇 시민들의 분개한 목소리를 전하는 꼭지에서 슬쩍 불길해졌는데, 마치 이 사회의 지배적 여론에 마지못해 수긍했다는 듯 자기 정당화를 서둘러 끝내더니 보란듯이 그의 얼굴을 공개한 MBC 뉴스를 보며 탄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언론은 몰라도, MBC 당신들은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요? 묻고 싶었습니다.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 용의자는 무죄가 추정된다는 따위의 법리를 들이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권을 말할 때, 그것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라는 걸 상기하자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인권은, 백 번을 양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면 물러서서는 안될 원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나와 제 3자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그 피해자들이 불쌍하듯 내 시야에 포착되지 않을지언정 인간으로 태어난 누군가도 불쌍할 수 있다는 측은지심의 발로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측은지심을 부여잡을 때 우리가 온전히 인간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 인권이라고 배워 알고 있습니다.

용의자의 얼굴이 드러남으로써 그가 받을 인권 침해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그의 가족과 친지들의 인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의 얼굴이 공개됨으로써 앞으로 그의 가족들이 받을 유무형의 피해는 누가 책임질건가요? 그들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의 가족이며 친지라는 이유로 평생 짊어져야할 사회적 편견의 굴레는 대관절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요? 하여, MBC는 향후 뉴스에서 연좌제의 반인권성을 논할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MBC는, 왜 지금 그의 얼굴이 공개되는 게 부적절한 건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도 부족했습니다. 범죄심리학자가 아닌 이상, 흉악범의 얼굴이 공개되는 게 비슷한 종류의 범죄를 예방하는 데 어떤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그 당사자에게 망신살을 주고야 말겠다는, 대중의 복수심에 적당히 편승한 이면에는, 흉악범죄를 양산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가 쉽게 휘발될 더 큰 위험이 상존합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떠오릅니다. 많은 이들이 백주대낮의 광장에서 반동으로 몰려 돌에 맞거나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만행이, 그 집단 폭력이 중국의 민주화에 한치라도 기여를 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나는 접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장 내일 아침 택시나 지하철 안에서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누"라는 탄식보다 "그 자식 얼굴은 반반한 놈이 그 따위 짓을 저지르나"라는, 말하자면 화형대에 올릴 마녀를 포획한 군중의 편리한 안도감을 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 안도감으로는 세상이 한 웅큼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돌을 던질 대상의 이목구비가 확인되는 순간, 과연 그것이 우리 사회의 잔인성에 대한 어떤 전향적 해답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전 오히려 그 사이 누군가 미소지을까 두렵습니다. 당장 용산참사가 슬쩍 뒤로 가려졌습니다. 그날 타 죽은 인권은 오늘의 복수심에 밀렸습니다.

이런 종류의 연쇄살인범을 무슨 호러영화 찍듯 하나같이 사이코패스로 몰아가는 것에도 불만이 많습니다. 사이코패스? 맞겠지요. 미친 놈이 아닌 이상, 인면수심의 이중 인격이 아닌 이상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버젓이 저지르고 다니겠습니까. 헌데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다면, 그러니까 유전자의 저주라면, 그런 인간이 내 주위에 없기만을 바라는 것 말고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거 아닙니까. 대체 어느 놈이 미치광이인지 모르니 불안만 증폭될 뿐 답은 없는 거지요. 길 가다 그런 미치광이를 만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사회가 잠재적 사이코패스에게 살인 말고도 좋은 게 많다고 일러줄 방법이 없다면, 우린 늘 이렇게 끔찍한 사건을 혀 끌끌차며 바라보거나 내 자신 혹은 나의 친인척들이 그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수밖에 없는 건가요?

현 정권의 여론 장악 시도에는 쌍심지를 켜며 반대투쟁했던 MBC가, 유감스럽게도 그 답까지는 고민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분노의 배설 욕망을 참지 못한 네티즌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개똥녀를 멸살했듯, 말만 세련됐지 대동소이한 방식으로 또 한명의 마녀를 화형대에 올리더군요. 언론의 정도(正道)가 아닌 시청률의 유혹에 화답한 당신들이 앞으로 공정방송을 논한다 해도 나는 쉽게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MBC와 일부 언론의 결단에 힘입어 우리 모두 그 자의 얼굴을 봤습니다. 이제, 속이 시원해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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