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스포일러 약간 있음)
13주 만인가? 한국영화의 독주를 마감시키며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른 할리우드 영화 있으니, <어거스트 러쉬>라고 했다. 그래서 보러갔다. 얼마나 죽이는 영화인지. 포장은 가족 영화이자 음악 영화로 돼 있었다. 가족 영화야 싱글인 관계로 흥미가 대단히 없지만, 음악 영화는 팝 칼럼니스트라는 존재 규정 때문에 일종의 숙제거리인 셈이니 혼자서 봐야 한다는 열악한(!) 상황을 애써 극복하며 쪽팔림 무릅쓰고 봤다.
그런데 음악 영화라 명명(도대체 언 놈이 이걸 음악 영화라고 했는가?)된 <어거스트 러쉬>는 한 마디로 '불쉿'이었다. 천재를 뛰어 넘어 소리에 신끼를 가진 초능력자 소년의 엄마 찾아 삼만리의 황당한 구성이야 드라마의 요소이니 팝 칼럼니스트가 시비걸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영화 어디에 음악이 있어서 음악영화란 말인가?
신내림 받은 어거스트 러쉬가 '세상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고, 단지 귀만 귀울이면 된다'라고 부르짖지만, 영화 속 어디에서도 그럴듯 한 음악 한 곡 온전히 들려오지 않는다. 존 레전드, 크리스 보티, 폴라 콜 등등의 쟁쟁한 아티스트가 사운드트랙에 참가 했지만, 도대체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지는 팝 칼럼니스트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존재감 무척 미비해주셨다. 물론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엔딩 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존 레넌드의 <Someday>는 다행히도 '음, 존 레전드군.'이라는 감상을 내 놓을 수 있었지만, 이것만 가지고 음악영화라고 우긴다면, 모비의 <Extreme ways>가 엔딩에 깔렸던 <본 얼티메이텀>도 음악영화라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이다.
바하의 음악을 변주로 등장시키는 것이나 아일랜드의 천재 뮤지션 밴 모리슨의 <Moondance>의 편곡 버전을 영화의 초입에 사용한 것으로 음악영화라고 주장한데도 역시 불 쉿이다. 좋다. 일단은 인정해 주겠다. 영화에서 음악이 빈번히 사용되고, 명곡들을 재구성한 노력이 있었고, 음악에 대한 웃기지도 않는 감상 가득한 소녀취향의 재정의가 등장하고, 주인공 소년이 삶의 모든 것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인물이니, 음악영화라고 우긴다는 점은.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음악들 중 한 곡이라도 좋으니 제대로 충분히 들려주거나 극 속 드라마와 맞물려 고막에 쏙 들어와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음악은 좀 들을만하면 사라져 버리고, 들려질 때도 말 그대로 스코어(Score)의 한계를 넘지 못한채 배경에서 징징거리며 맴돌다 그쳐버리고... 이 쯤 되면 사운드트랙이 있는 영화는 몽땅 다 음악영화라고 홍보를 해도 고개를 끄덕여야 할 상황이다.
음악을 등장시키는 장면도 웃긴다. 여자 주인공 라일라(어거스트 러쉬의 엄마)가 첼로를 연주하고, 남자 주인공 루이스(어거스트 러쉬의 아빠)가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름의 편곡을 거쳐 오버랩 되는 장면은 한 번으로 족했다. 두 번, 세 번이 등장하자 이미 첼로가 연주되면 '아, 또 기타로 넘어가겠군.'이라는 무릎팍 도사의 예언이 들려오니 감동은 물건너간 지 오래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그 음악을 사용하는 장면의 장치도 그리 영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원칙적인 시비를 걸 수밖에 없는 문제는 역시 음악 한 곡도 온전히 보존되어 들려지지 않는다는, 음악영화라는 간판을 단 영화의 불성실함이다. 멋진 하모니카 연주를 선보일 줄만 알았던 로빈 윌리암스의 하모니카 씬은 몇 번 불지도 않은 채 끝나버리고, 라일라의 첼로 연주나 루이스의 기타 연주도 변죽만 울리다 사라져 버리니 관객이 음악과 몰일체가 되어 감동을 느낄 순간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셈이다. 더구나 어거스트 러쉬의 기타 연주 장면이나 파이프 오르간 연주 부분은 그 음악의 아름다움보다는 '아, 어찌 신은 나를 낳고 모짜르트를 또 낳으셨단 말인가'라는 살리에르의 존재론적 고민을 객석에 던져 주었을 뿐, 별다른 감흥을 느끼게 할 만큼 장면의 집중력이나 음악적 뛰어남도 없었다.
물론 마지막 장면의 뉴욕 필 연주 장면 하나가 음악영화라는 영화 전체의 간판을 아주 힘겹게 짊어지고 있긴 하다. 그래서 본업이 팝 칼럼니스트인 본인은 급하게 음악적 한계를 느끼고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거스트 러쉬>를 봤다는 클래식 전문가인 친구에게 물어봤다. "이봐 그 마지막 장면에서 어거스트 러쉬가 지휘하고 뉴욕 필이 연주하는 곡, 그거 괜찮은 곡인거야?"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뉴욕 필 아저씨 아줌마들, 아마도 돈이 좀 궁하셨던 것 같다. 그 곡 작법도 엉망에 독창성 제로에, 다시 듣고 싶은 곡이 아니던데." 그랬던 것이다. 본업이 아니었음에도 팝 칼럼니스트의 느낌이 정확했던 것이다. 마지막 뉴욕 필이 연주한 곡도 별로였다는 느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 보고 감동 받았다는 사람들 꽤 많다. 그 분들에게 시비 걸 생각 전혀 없다. 영화의 주관적 감상이란 존중 받아야 하니까. 안그러면 악플에 블로그 작살나니까.(경험으로 충분히 깨닫고 있습니다. --;;) 그러나 제발 부탁은 음악영화라는 황당한 슬로건으로 몇몇 음악 애호가들 주머니의 쌈짓돈 훔쳐가지 마시라는 것이다. 고작 7,000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봐야 될 다른 영화도 많고, 사야 될 CD도 허벌나게 많으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랜만에 음악영화 보러간다는 기대감 팍 작살 난 것은 어디가서 손해배상 청구하냔 말이다.
글을 쓰는 지금 이런 생각만 든다. '젠장, <색, 계>나 한 번 더 볼 걸. 탕 웨이의 겨드랑이 털이 <어거스트 러쉬>의 음악 보단 더 정겨웠을 텐데...'
2007/12/03 - [비하인드 박스오피스] - <어거스트 러쉬> 음악이 구원한 가족 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