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올훼스의 창]을 보았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청와대에는 전 모씨가 살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80년대를 보내고 있었다. [올훼스의 창]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금서 목록에 오르고, 출판이 중단되었던 시절이다. 사상의 문제로 불온서적 목록에 올랐기 때문일까. 어쩐지 만화방에서도 [올훼스의 창]은 은밀하게 취급되었던 기억이 있다. 책장에 꽂혀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대여도 해주지 않았으며, 주인에게 따로 이야기를 하면 가져다주는 등. 제법 금서 다운 취급을 받았다. 유리우스와 이자크의 결합 = 윤희 크라우스 = 걸오 다비트 = 여림 유스포프 = 가랑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평생을 남자로 위장하며 살아온 한 여자아이가(유리우스) 남자들만 다니는 음악학교에 진학하며 벌어지는 로맨스는, 금지된 사랑과 위태로운 사건과 뒤엉키며 사춘기의 연약한 감성을 자극했다. 유리우스는 입학 첫날부터 출입이 금지된 탑에 올라가 올훼스의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의 상대를 마주치게 된다. 이처럼 파괴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내뿜는 금기를 제시하며, [올훼스의 창]은 시작한다.
지난 주 방영이 시작된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은 보면 볼수록 [올훼스의 창]을 떠올리게 한다. 남장을 한 채 남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 여자라는 포맷은 워낙 많은 작품에서 사용하는 소재이므로 굳이 그것을 예로 들진 않겠다. 그보다는 인물의 설정이 [올훼스의 창]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아 25년 전에 본 만화가 갑자기 떠오르지 뭔가.
일단 주인공인 윤희(박민영). 가난한 어머니와 아픈 남동생을 위해 남장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대리시험을 치르다 성균관이 들어오게 된 윤희라는 인물은 [올훼스의 창]의 유리우스와 이자크가 결합된 캐릭터다.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에도 아픈 여동생을 돌보느라 밤에 술집에서 피아노를 쳐야 했던 이자크처럼, 윤희는 남장 여자라는 점에서는 유리우스지만 오히려 이자크를 더 떠올리게 한다.
걸오(유아인)는 여러 면으로 보아 크라우스와 비슷하다. 러시아 귀족이면서 신분을 숨긴 채 독일로 망명 온 크라우스는 바이올린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포기하면서까지 러시아로 돌아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러시아 혁명에 가담한다.
능글거리는 선배 여림(송중기)은 아무리 봐도 다비트가 딱이지 싶다. 조숙함에서 오는 여유가 지나쳐 능글맞기까지 한 선배역할이 어찌나 유사한지.
마지막으로 가랑(박유천). 가랑에 해당하는 인물은 [올훼스의 창] 중반부에 등장하는 러시아 귀족 유스포프가 적합할 듯. 귀족 출신으로, 뛰어난 군인이기도 한 그는 강직함이 지나쳐 자신의 편으로부터 공격 받기도 한다. 그러나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강하여, 이미 질 것이 뻔한 전쟁터에서 앞장 서 싸울 수밖에 없는 장수의 비장함이 유스포프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권력 유지를 위해 온갖 악덕 위에 쌓아올린 노론의 권력을 이어받게 될 가랑이, 이러한 고뇌를 잘 표현해줄 지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각 인물을 연결하고 보니, [성균관 스캔들]이 [올훼스의 창]이 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올훼스의 창]에서 주인공 유리우스는 마지막까지 주체성을 찾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을 찾아 러시아를 향했고, 그곳에서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 후 독일로 돌아온다. 그녀는 시대의 목격자는 될 수 있었지만, 시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하였었다. 러시아로 떠나며 평생 입어온 남성의 옷을 버린 그녀였으나, 러시아에서 크라우스의 죽음과 유산을 겪으며, 그녀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형의 존재가 되어 독일로 돌아온다. 물론 이 만화가 등장하였던 시대의 특성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은 사회에서 어떠한 지위에 오르느냐보다 사회에 참여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했다.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거나, 출산 후에도 일을 계속 할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었으니, 만화 속 여주인공이 주체성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만화가 나오고 30년이 지난 지금. 2010의 드라마는 어떠한 여성상을 제시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소녀들은 단지 사회에 참여하거나, 시대를 목격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의 10대들은 지위와 권력을 원한다.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가꾸기보단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치장하고 소비하는 것이 지금의 소녀들이다. 그러한 능동성과 권력에 대한 욕구를 [성균관 스캔들]이 얼마나 반영할 수 있을지. 윤희가 가난한 자신의 환경을 부유한 귀족 자제와의 사랑으로 해결해버린다거나, 주체적 시선으로 시대를 보지 못한 채 사랑하는 남성을 쫒아 시대를 살아낼 뿐이라면 30년 전에 등장한 만화의 아류작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이돌 출신 가수가 연기를 한다고 해서, 어린 배우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청춘 로맨스 사극이라고 해서 높은 성취를 추구하지 말란 법은 없다. 10대 소녀들이 단지 학원 로맨스물만 보고 싶어할 뿐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선 곤란하다. 우리는 30년 전에도 학원 로맨스 물에서 러시아 혁명을 보았으며, 첫사랑의 설렘과 혁명의 뜨거움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하물며 지금의 10대들은 오죽할까. [성균관 스캔들]이 때 아닌 정치사극이 되어 진정으로 민중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토론하는 청춘들로 한 시간을 보낸 들, 그들을 사랑하는 10대들이 이 드라마를 외면할 일은 없을 터.
내 비록 한미한 가문 출신이나, 가문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리다.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해보시라. 그에 상응하는 뜨거운 반응이 돌아올 터이니.
posted by 늙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