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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에 관해서만큼 나는 쥐뿔도 모르는 무식쟁이다. 모짜르트니 바하니 헨델이니 베토벤이니 주워 들은 건 적지 않지만, 들어도 어느 음악이 누구의 것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한때는 클래식에 필이 살짝 꽂혀 라디오 채널을 종일 고전 음악 프로그램에 맞춰 놓은 적도 있긴 했다. 그래도 "아, 음악 좋다"하고 말았다. 저게 누구의 어떤 곡인지, 어떤 배경과 역사성을 지닌 곡인지 알아보고 싶은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으니 스스로 딱한 지경이었다.

허나 운명이니 월광이니 비창, 전원과 같은 소나타나 교향곡 제목을 들으면 적어도 공통분모가 베토벤이라는 것 정도는 알 깜냥이니 10월 11일 개봉하는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에 슬쩍 눈길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눈이 깊은 배우 에드 해리스가 <폴락>에 이어 또 얼마나 괴팍한 예술가의 영혼을 제대로 연기했나 보고 싶기도 했고. 언론 시사회를 대한극장에서 한다니 음향이 제대로겠구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드림걸즈> 이후 변변한 음악영화 만난 기억이 까마득한데 생경한 클래식이라도 오랜만에 귀 좀 즐거워 보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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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라면 젠체하는 꼰대들의 우아뻥 취향을 만족시키는 부르조아의 갇힌 예술이라는, 록 지상주의의 도그마에서 여전히 완전히 발을 빼지 못하고 있는, 실은 지지리도 무딘 감성의 낼 모레 마흔 아저씨, 오늘 이 영화 보다 졸도할 뻔했다. 영화 중간의 9번 교향곡 '합창'의 초연 장면 때문이었다.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의 카피스트로 일하며 천재성을 인정 받은 여성 음악가 안나 홀츠가 주인공이다. 베토벤은 이제 그녀가 펼치는 대리 지휘에 의존해 그 자신은 듣지 못하지만 그의 손놀림에 의해 완성될 걸작을 펼쳐 보일 찰나다. 이 순간, 카메라는 귀먹은 베토벤의 안내자를 자처하다 그 자신 완전히 곡에 몰입한 무아지경의 안나와 연주자들 사이에 숨은 그녀를 지휘대에서 슬쩍 슬쩍 바라보는 베토벤의 손놀림을 번갈아 보여준다. 춤을 추듯, 서로를 애무하듯, 아니면 서로가 공감한 천상의 음악에 만취해 흐느적대듯. 안나는 베토벤의 악보를 카피했지만, 이제 베토벤이 순수 열정의 화신 안나의 매혹을 카피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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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매개로 교감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장 영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황홀한 장면에서, 나는 숨이 가빴다. 절정에 이르러, 대규모 합창단의 '환희의 송가'가 힘찬 하모니로 공연장을 압도한다. 마치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올라가는 듯한 힘, 그것은 신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발악적 기상처럼 들린다. 이 즈음에 이르자 굵고 짜릿한 에너지가 꾸역꾸역 내 가슴 위로 치받아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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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카핑 베토벤>은 내게 감동적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뒤에도 9번 교향곡을 완성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베토벤의 말년은 신의 선물처럼 그에게 다가와 또 다른 영감을 안겨준 것으로 설정된 안나 홀츠라는 가상의 여인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재연된다.

듣는 이의 가슴을 쾅쾅 울리고 마는, 땅을 너무나 사랑해 신과의 합일을 앙망한 베토벤의 열정이 당대의 연주회장에 앉아 있듯, 고스란히 내 가슴에도 카피됐다. 한편으로, 추잡한 욕망에 의해 예술이 강간당하고 있는 계절에 예술의 본원을 상기시키는 이 영화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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