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의 아우라 훼손한 '이끼'의 반전

영화 이야기 2010. 7. 23. 12:34 Posted by cinemAgora
(주의: 스포일러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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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원작을 각색한 영화의 경우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내포할 수밖에 없다. 장점은, 원작의 유명세에 힘입어 주목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작을 접한 이들이 많을 수록 이미 형성된 인지도를 자연스레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점은, 어쩔 수 없이 원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이다. 대체로 원작에 대한 호평이 높은 작품일 수록,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비껴가기 힘들다.

윤태호 작가의 유명 웹툰을 영화로 옮긴 <이끼>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부터 일찌감치 관심을 끌었고, 역시나 개봉 뒤에는 원작파들의 불만이 쇄도하고 있다. 반면,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들 사이에선 대체로 "재밌다"는 반응이 많은 걸로 봐선, 어쩔 수 없는 생략과 압축의 각색 과정을 거쳤다 할지라도 원작 자체의 무게감 있는 설정과 탄탄한 스릴러 구조가 꽤나 위력적이었음을 실감케 된다.

어쨌든 이글에서 나는, 영화 속 캐릭터와 원작 캐릭터의 싱크로율 따위를 따지기 보다 영화 <이끼>가 보여준 이야기 구조에 좀더 집중해 보고 싶다. 장르 영화라면, 무엇보다 장르적 완결성이 전제될 때에야 메시지가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의미 있는 문제제기라 할지라도 이야기가 헐거우면 영화의 함의도 평가절하되기 마련이다.

영화 <이끼>는 원작에서 드러났던 약간의 호러적 설정(이를테면 덕천이 할머니 귀신을 본다든가, 하는 장면)을 과감히 들어내고, 미스터리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니까 주인공 해국의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경위와 기도원 집단살해 사건의 비밀을 미스터리의 출발점으로 삼고, 해국이 그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을 비교적 흥미진진하게 펼쳐 놓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행위 동기, 즉 그가 왜 아버지의 죽음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끼>는 처음부터 허점을 드러낸다. 물론 원작은 그의 동기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으나 영화는 그걸 과감히 생략했다. 아마도 그것까지 다 드러내보이자니 러닝타임의 압박이 심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효과적인 동기 부여 방식을 고민해 보았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초반에 제시된 미스터리가 끝내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과연 살해된 것인가, 라는 해국의 의문은 막판 영지의 단 한마디로 간단하게 설명돼 버린다. 그 간단한 정보를 왜 영지는 끝내 함구하고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기도원 살해 사건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공모한 것이 사실상 드러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이 사건의 진실이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시늉을 하다가 극 후반에 슬쩍 이장의 짓이었던 것 같은 뉘앙스만 풍기고 끝내 베일 속에 가둬 놓고 얼버 무리고 만다.  

대부분 몽타주로 처리된 인물들의 과거사가 지나치게 함축적이어서 그런지, 영화로만 봤을 때 이들이 해국을 경계하는 이유도 시원치 않다. 이들이 이장 천용덕과 공모해 해국의 아버지 류목형을 살해한 게 아니라면, 이들이 해국에게 내보이는 적대감과 살기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지도 충분히 묘사돼 있지 않다. 류목형과 전석만의 집을 연결해 놓은 지하 터널의 용도와 그것을 판 주체 역시 드러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넘어간다.

앞서 말했듯, 미스터리에 중심을 둔 영화 <이끼>의 전략은, 원작과 달리 류목형과 이장의 과거사를 먼저 치고 나가되, 파국으로 치닫는 후반부를 위해 최대한 정보를 아껴두자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동네 경찰이 실은 이장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원작에선 일찌감치 드러나는 사실)이 뒤늦게 폭로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해국과 박검사, 이장과 영지가 조우하는 막판 장면에서 그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한마디로 빠져 있던 이야기의 톱니바퀴가 다시 맞춰지면서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게 아니라 그냥 빠져 있는 채로 끝나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의 초점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하면 될 일이다. 욕망과 이상이 뒤엉킨 지옥도를 보여주고자 했으므로, 미스터리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장르 영화이며 따라서 장르적 완결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게 빠져 버리면 원작의 섬뜩한 여운을 제대로 실어 나른 게 못된다는 얘기다.

이처럼 미스터리의 정합성이라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허점을 드러내는 <이끼>는, 원작에 없던 새로운 반전을 배치함으로써 일종의 충격효과를 주는 쪽을 택했다. 마치 영지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음모했던 것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끝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반전이야말로 원작 <이끼>가 가졌던 아우라를 제대로 훼손한 것이라고 본다.

복수를 심판으로 포장하며 필요할 때 현실적 폭력과 화간한 류목형의 종교적 이상과, 그것을 악용하고 착취했던 이장의 개발독재적 위선이 한국현대사의 추한 이면이며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원작은 소름 끼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영지를 반전의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앞선 모든 이야기를 피해자와 가해자의 악순환, 혹은 인간의 양면성이라는 뻔한 성찰로 치환해 버린다. 그 사이에 한국 현대사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적시적인 은유의 힘은 증발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영화는 화제성을 얻었다. '극장문을 나서며 더 많은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말하게 하자'는 다분히 상업적 계산에 의해 배치된 듯 보이는 반전은, 영화가 기껏 보여줬던 그 끔찍한 계략과 폭력의 최대 피해자인 영지로 하여금 "여자가 더 무서워"라는 뜬금없고도 편리한 결론을 이끌게 만든 셈이다. 이건 마치 천용덕의 행태를 고스란이 닮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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