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그리고 두 편의 축구 영화

영화 이야기 2010. 7. 5. 18:48 Posted by cinemAgora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일 때, 나는 유네스코의 영화인 교류 프로젝트에 참가해 동남아시아를 여행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한국팀의 기적적인 선전에 흥분한 영화인 대표단 일행은, 8강전을 사수하기 위해 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가는 비행기 일정까지 바꿨다. 그리고 겨우 중계 시간에 맞춰 도착한 자카르타의 한국인 식당에서 4강 진출이라는 감격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우리는 흥분이 지나친 나머지 인도에까지 나와 "대~한민국"을 외쳤는데, 이내 머쓱해졌다. 뿌연 흙먼지 위로 달구지를 타고 가던 현지 시민들의 고단한 표정과 흥분한 우리의 모습이 불일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극심한 경제난을 겨우 겨우 통과하고 있던 그들에게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은 먼나라 일뿐일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서 자아도취에 빠져 "대~한민국"을 외치는 게 염치없고도 어쩌면 무례하기까지 한 짓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영화 <꿈은 이루어진다>에서 북한군 축구광으로 등장한 이성재는 "축구공에는 사상도 이념도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월드컵은 장벽이 높다. 본선에 진출한 32개 나라만의 축제일 뿐이다. 그 안에 들어간 나라들은 자국 선수들의 활약을 응원하며 축제의 신명을 끄집어내겠지만, 평생 월드컵 언저리에도 못들어갈 나라라면 월드컵은 "그들만의 잔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마당에 축구를 소재로 삼은 두 편의 영화 <맨발의 꿈>과 <킥 오프>는 아이러니한 구석이 많다. 두 영화 모두 '월드컵 특수'를 노리고 개봉했거나 개봉하지만, 어쩌면 월드컵이라는 단어가 생뚱맞게 들릴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 놓인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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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꿈>은 알려져있다시피, 동티모르의 히딩크라 불리는 김신환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제작진이 직접 동티모르로 날아가 현지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을 배우로 기용해 제작했다. 영화의 제목이 시사하듯, 이 영화는 척박한 현실에서 맨발로 공을 차는 와중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과 그들의 꿈을 지원한 한 한국인의 헌신적인 노력을 휴먼 드라마적 호흡으로 담아내고 있다.

역시나 한국인 감독에게 동일시할 관객들을 위해 전형적인 감동 멘트를 남발하는 것은, 기획영화가 갖는 한계이긴 하다. '동티모르의 히딩크'에 주목한 기획부터, 이를테면 <일밤>의 '단비' 프로젝트처럼 못 사는 나라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을 만들어놓고,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놓였음을 은근히 자족하기 위한 장치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월드컵의 현란함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한 와중에 축구 그 자체에 소박한 꿈을 싣는 풍경을 담아낸 것만으로도 <맨발의 꿈>의 함의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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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현실 안에서의 축구라는 설정에서는 비슷하지만, 쿠르드족 출신 감독 샤우캇 아민 코르키의 <킥 오프>(7월 8일 개봉)는, 어쩌면 '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을 법한 시공간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이 영화는 이라크 정부의 탄압에 밀려 거대한 축구 경기장에 삶의 터전을 꾸린 쿠르드족 난민들의 이야기이다.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거나 폭탄 테러에 죽임을 당할 일상적 위험 속에서 그들도 이란과 이라크의 축구 경기에 열광하고, 소수 민족들끼리 축구 시합을 열고 싶어한다. 축구를 사랑하는 젊은이 아수는, 자신들의 터전을 원래의 목적대로 축구 경기장으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 한다. 그러나 잔혹한 현실은 그의 소박한 꿈마저 가로 막는다.

누군가에게 월드컵 16강이 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작 동네 축구 시합을 여는 게 꿈일 수 있다. 이념도 사상도 없는 축구공에 실리는 꿈의 무게는, 그렇게 삶의 조건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다. 축구 경기장이 난민들의 터전이 됐다는 설정에서부터 영화 <킥 오프>는 그렇게 이 세상엔 규모의 과시욕과 가난한 희망이 비극적으로 공존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현란한 카메라워크로 가상 전쟁의 흥분을 전하는 월드컵의 이면에 여전히 실제 전쟁과 폭력이 어떤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당연하게도,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꽤나 불편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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